My Funny Valentine

 

 허비 행콕의 연주는 아주 드라이하다. 퍼즐을 맞추듯이 한 음 한 음 건반으로 짚어낸다. 많은 감정을 담아내지 않고, 피아노 소리에 집중한다. 쳇 베이커는 단선율을 트럼펫으로 멜로디를 표현하고 노래를 불렀다. 허비 행콕은 그 단순하고 아련한 멜로디를 검은 건반과 흰건반으로 이야기를 한다. 쳇 베이커가 독백을 하듯이 마이 훠니 발렌타인을 읊조렸다면, 허비 행콕은 길게 정돈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음악도 지적이라는 표현이 있다면 허비 행콕의 곡이 그렇다. 그 사람과 대화를 처음 하게 된 노래가 이것이다. 이 음반을 틀고나서 이 곡이 들리자 그 사람이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 허비 행콕의 음반을. 그렇지만,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단답으로 서고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 지금 나 혼자 이 곡을 듣고 있다. 여전히 나는 그 사람이 내게 한 질문과 목소리와 얼굴을 잊지 않고 있다.

 

 영화를 보고 있다.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쳐서 마지막 결혼, 사랑에 들어서는 이야기이다. 사실 영화 내용을 보면 이 여자에게 이 남자가 마지막이 될 지 알 수 없다. 위태로운 그녀의 인생을 통해 관객인 나는 그저 그녀가 또 다시 모험을 하는구나 생각한다. 그녀는 누군가가 그녀를 완전한 행복에 젖어들게 해주기를 바란다. 누구나 그렇겠지. 그녀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한다. 그녀가 사는 삶의 방식이 그런 것이다. 나는 요가를 하고, 커피를 만들고, 사랑하고, 쌍둥이를 낳았다. 나의 삶은 수행인 것 같다. 나의 행복은 요가를 하고, 커피를 갈아서 한 잔의 음료를 만들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가진 것.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그 남자의 이마 위 상처이다. 나는 그 상처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물었는데, 알려주지 않았다. 그 남자가 모자를 쓰고 내 카페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나는 그닥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수만가지 이유가 다 다를 것이고, 난 그것이 이유였다. 그 모자 아래 그 남자의 얼굴. 그리고 그 상처.

 

 두 쌍둥이에게는 상처가 없다. 매끈하고 우윳빛의 피부를 지닌 은과 호를 보며, 심해어를 다시 떠올린다. 심해어를 꿈 속에서 보았을 때, 나는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단순한 행복과는 달랐다. 동시에 고통이었고, 동시에 열망이었다. 은과 호는 잠이 들어서 방 안에 있다. 나는 거실에서 지낸다. 내 방은 작다. 나는 그닥 여유있는 삶은 아니다. 그것에 불만이 있지는 않다. 나는 오히려 점점 소박하고 내가 스스로 꾸려갈 수 있는 삶을 원한다. 그 방식 속에 은과 호가 등장한 것은 내게 선물일까? 알 수 없다. 내가 그 사람에게 끌렸듯이 내 아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면 흘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 마음에 품었다고 해서 미칠듯이 보고 싶다는 것과는 다르다. 뭐랄까. 삶이 더없이 지루하고 삶이 더없이 복잡해질 때 문득 신기루라도 만나듯이 나는 그 사람을 내 기억 속에서 꺼내보는 것이다. 그건 달콤한 한 방울의 음료처럼 내 타는 갈증을 풀어준다.

 

 거실 벽에 얼마전에 찍은 사진이 제법 큰 사이즈로 걸려있다. 아가들 중심에 서 있는 나는 나무가 되어있다. 검은 실루엣의 나무. 나는 그 사람을 통해 아이를 갖고 나무가 되었다. 나무 자세를 하는 내 모습은 자못 늠름하다. 나는 그 사진에 그 사람이 함께 있으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의외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 두 아이 사이에 나는 균형잡혀 있었고, 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군더더기 같다. 그 사람은 그런 존재인가 보다. 슬며시 내 삶에 찾아와서 나를 나무로 만들고 간 사람. 그렇다면 나는 이 자리에 꼿꼿히 서서 가지를 뻗고 잎을 달고 열매를 맺고 낙엽을 떨구고, 다시 봄이 오면 새로 태어날 것이다. 그 나무 아래에서 은과 호가 잘 자라겠지. 사진 아래에 나는 스티커를 하나 붙인다. 그 스티커가 그 사람의 존재인 것처럼. 스티커는 언젠가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러면 나는 다시 그 존재를 새롭게 생각해 볼 것이다.

 

 초코 초코 브루드 라떼를 만들었던 나였다. 이제는 내 커피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뜨거운 그리고 베어지는 듯한 맛을 낸다. 베어지는 듯한 이라는 말을 어느 손님이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 속으로 감탄을 했다. 내가 원하는 맛이었다. 커피는 모든 맛의 정점에 그 맛이 있다. 그것을 어떤 이는 쓴 맛, 탄 맛, 고소한 맛, 마일드, 다크 등등 온갖 표현을 붙이지만 내게는 베어지는 듯한 맛이다. 커피는 기호 식품이 아니다. 커피는 뜨거운 용액이고, 그것을 마시며 사람들은 망각을 한다.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람들은 커피를 통해 하루를 시작하고 커피를 통해 하루를 끝낸다. 커피는 마치 피와 같아서 수혈을 받는 이들이 이 곳에 찾아온다. 나, 요기니 바리스타, 은과 호의 나무는 그렇게 커피를 내린다. 하! 언젠가 커피를 악마의 액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통해 나는 사랑을 맛보았고, 지금은 사랑 너머 삶을 선택했다.

 

 마이 훠니 발렌타인이 흐른다. 오늘 밤 나는 아무래도 이 노래를 들으며 혼자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는 홀로 독백을 한다. 가만히 이 거실에 앉아서 말이다.

 

 이불을 돌돌 말았다. 무슨 동작을 할까 멈칫하고 있을 때, 창 밖으로 빠람빠람 빠람바하고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산자세. 내가 제일 잘하는 자세이다. 두 다리가 땅에 이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산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내 몸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린다. 호흡을 아래로 배꼽 아래로 보내는 기분으로 무겁고 길게 한다. 두 발에 느껴졌던 몸무게가 배 근처로 오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하체와 상체의 중심에서 호흡으로 지탱하는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 머리. 몸의 끝에 위치한 부분들이 처음에는 의식이 되다가 그것이 사라진다. 그러면 호흡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해진 내 몸. 호흡은 소리도 없이 깔린다. 귀. 열린 귓구멍으로 째깍째깍 소리가 들리면 그마저도 버린다. 집중. 그리고 호흡. 그리고 산.

 

 눈을 떴을 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 모르겠다. 나는 오랜만에 긴 잠을 자고 난 듯 몸이 가볍고 머릿 속이 환해졌다. 쌕쌕거리는 은과 호의 숨소리가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작은 집에는 방 하나와 거실이 있고, 거실 끝에 부엌이 있다. 나는 산자세로 잠을 잤다. 내 어깨가 산등성이가 된 듯이 견고한 기분이 든다. 그림으로 그리면 둥근 붓터치로 내 어깨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림이 떠오른다. 어두운 피부 톤의 모델 여자는 정말 몸이 그렇게 비대한지 우람하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녀가 여자라는 것이 느껴지는 부분은 칠흑같은 머리카락과 꽃장식이었다. 그 여자의 모습을 보고 왜 이 미술가는 모델로 이 여자를 택했을까 생각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근데 지금 나의 몸이 마치 그림 속 그 여자같이 느껴진다. 내 몸이 산이 된 듯한. 그 미술가는 그녀의 몸에서 산을 느낀걸까? 두꺼운 입술, 두꺼운 손가락, 어두운 피부 톤.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던 그 여자를 정성껏 그려놓은 그림. 그 그림 속에서 나는 나른한 평안을 맛보았다. 머릿속은 매력없네 했지만, 마음은 놓여지는 기분이랄까. 내가 이제 그녀가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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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과 호

 

 

 

 처음 몇 달 동안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포기 했을 것이다. 내 뱃속의 심해어를. 노랑과 보라빛으로 물들은 그 진주를 그냥 한방에 끝냈을 것이다. 심해어를 만난 꿈을 꾸고 나서 나는 임신 테스터에 줄이 2줄 그어진 것을 알게되었다. 친구는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나는 아이를 원했고, 이마에 문장이 있는 남자는 뒷전으로 물러났다. 친구는 조용히 숨을 고르더니, 준비할 것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친구는 자신이 카페에서 아침과 저녁 근무를 할 터이니, 나는 오후에만 나와있으라고 했다. 오후 2시부터 6까지. 나는 충분히 해 낼 수 있으리라. 친구에게 고맙다. 호언장담을 했지만, 내 몸은 헛구역질과 호르몬의 변화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친구는 1주일에 6일 여는 카페에서 내게 4일 동안만 일을 할 것을 권했다. 친구는 나 대신 연장 근무에, 2일을 하루 종일 일했다. 나는 헛구역질로 줄어든 몸과 피곤한 정신력으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3개월이 넘어서야 병원에 갔다. 의사는 내 배를 보더니, 아이가 둘은 되어보인다고 했다. 나는 농담인 줄 알았다. 헌데... 정말인지 나는 쌍둥이를 가졌다. 아이가 두 명이라고 했다. 둘 다 건강하고, 함께 잘 놀고 있다고 했다. 3개월이면 아직 아이 모습이 안 나타나지 않냐고 물었지만, 의사는 충분히 자기에게는 보인다며 아주 아주 축하한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두가게에 들어가서 고기만두와 김치만두를 시키고는 꼭꼭 씹어 먹으며 뱃속 아기 에게 말했다. 자. 둘이서 싸우지 말고 내가 먹는 이 만두를 나눠먹으렴. 나는 만두 두 접시를 깨끗히 해치웠다. 3개월하고도 7일만에 제대로 먹은 음식이었다. 친구는 내 소식을 듣고 더욱 더 숨을 고르게 쉬더니 쉽지 않군이라고 한마디만 했다. 친구는 스팀 우유를 한 잔 내게 권했다. 나는 마시며 아무 말도 못했다. 나 혼자 갖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진주는 결국 2가지 색깔을 지닌 것처럼 두 아가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갸우뚱하다가도 뱃속에 아기들이 섭섭해 할까봐 아랫배를 스윽 만져보았다. 친구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카페 책임은 자신이 질테니, 너는 뱃속 아가에게 집중하라고 말했다. 친구는 내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사람에게 알릴거니? 

 

  그 날 밤, 혼자서 뒤척이며 그 남자에게 말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아닌지 내게 물어보았다. �그래 그 남자는 내게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고, 나 또한 그 남자 이름도 몰라. 그럼 볼장 다 본 거 아냐?� �아니야, 그렇게 나쁜 남자같지 않았어. 내게 아기가 생겼다는 것을 한 번쯤은 알려줄 만 하잖아...� �그렇게 했다가 무슨 험한 말만 들을라고.� �그래도 아기 아빠잖아. 솔직히 쌍둥이 낳아서 기르려면 보통 힘으로는 부족할거야, 알려야 해.� �그럴만한 인간이면 벌써 내 카페에 찾아왔겠지.� �친구말로는 한 번도 모자 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어.� �아... 벌써 그 사람은 날 잊은거야. 그렇지...� 

 

 

  나는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 아가들에게 태명을 지었다. 바로 금붕어들 이름으로, 은과 호. 은은 딸이고, 호는 아들이면 하고 조그맣게 기도도 드렸다. 하지만, 아직 그건 모른다. 의사 선생님도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쌍둥이들은 더 그렇다고 했다. 둘이 스위치를  한다나. 의사 선생님은 적당히 나이가 드시고 수염이 넉넉히 있는 분이셨다. 나는 중요한 임신 테스트를 할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요가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웃었다. 제가 요기니에요. 의사 선생님은 안경 너머로 나를 보시며 허허 웃으시더니 그럼 문제 없다고 했다. 감사했다. 의사 선생님에게 아가가 궁금하면 또 오겠다고 했다. 궁금해하지 마세요. 산모가 행복하면 아가도 무럭무럭입니다. 마치 산파 도사라도 만난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만두가 먹고 싶었나보다. 

 

 

  7개월까지는 넉넉하게 일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이 되자, 배가 너무 커져서 힘들었다. 친구는 집에서 쉬면서 요가를 하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아침이 되면 어항 속 은과 호에게 붕어밥을 주면서 배 속 아가들에게 인사를 했다. 아가들은 정말 스위치를 하는지 싸르락 거렸다. 배가 불러오자 요가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얼마전 까지는 엎드린 요가 자세도 너끈히 했지만, 배가 너무 커지자 그것은 무리였다. 나는 서서 두 팔과 두 다리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간단한 동작을 주로 했고, 나비자세로 골반을 충분히 이완시키고, 소머리 자세로 골반을 다시 좁히는 동작을 해주었다. 라마즈 호흡법도 책을 통해 해보았다. 숨쉬는 시간이 자세히 나와 있었지만, 똑같이 따라하지 못했다. 나는 내 식대로 호흡시간을 조절해서, 들숨과 날숨을 소리내어 했다. 들숨에서는 아가들이 살짝 긴장하는 것처럼 아랫배가 당겨졌고, 날숨에서는 아가들이 휴우하고 긴장을 푼 것처럼 아래가 묵직하게 쏠렸다. 발레에서 플리에 동작이 좋다고 해서, 나는 의자를 한쪽에 놓고, 그 동작도 반복했다. 아랫배가 쏠려서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으려면 상당히 허리와 골반을 긴장하고 있어야했고, 두 무릎과 종아리 근육이 아주 유연하게 구부러 져야했다. 다행히 내가 했던 요가 동작과 상통하는 면이 있어서 동작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플리에를 하며 한 손은 의자를 잡고, 한 손은 균형을 잡게 길게 뻗어 주었다. 조용한 피아노 소나타 2악장을 틀어놓고 그 악장이 끝날 때까지 플리에 동작을 했다.  

 

 

  먹는 것은 정말 점점 더 많아져서, 나는 하루에 다섯끼를 먹었다. 내게는 돈이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다섯끼 중에 2끼를 계란과 우유로 먹었다. 세 끼는 밥을 지어 먹는데, 유독 새콤달콤한 미역초무침, 미역냉국, 미역줄기볶음, 그리고 1주일에 2번은 쫄면을 먹었고, 1주일 2번은 골뱅이무침을 만들어야 했으며, 계란과 우유는 친구의 권유로 유정란과 산양 우유를 먹었다. 유정란을 구으면 정말 쫄깃하고 맛있었다. 한 번은 구은 계란을 한 번은 우유와 계란을 섞어서 스크램블 에그를 했다. 계란을 하도 먹어서 아가들이 병아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될 정도였다. 다행히 나는 계란을 무척 잘 먹었다.  

 

 

  몸이 불러오자 옷도 신경을 써야했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저렴하게 산모 옷을 골랐다. 좀 추레하고 단추는 느슨하거나 색이 바래있었지만, 그런 걸 탓할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내 몸을 보호하고 돈은 적게 들어야했고, 나는 의외로 그런 외모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아가 둘이 나를 보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다. 예를 들어 몸이 무거워서 걷기가 힘들면, 버스를 탔고, 그러면 모두가 다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내 옷차림이 안되어 보였는지, 배가 유난히 불러서였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모습에는 미혼모라는 현실이 티가 났던 것도 같다. 나는 잘 챙겨먹었고, 꾸준히 요가와 발레 플리에를 했으며, 하루에 5끼를 챙겨 먹었지만, 얼굴빛은 조금 피곤해보인 것이 사실이다. 친구는 영양제가 필요하다고 챙겨주었는데,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열심히 계란을 먹었고, 쫄면 속에 다양한 야채와, 골뱅이 무침과 미역을 꾸준히 먹었다. 내 입맛에 맞는 것을 만들어 먹으며 나는 입맛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다는 것이 뱃속 아가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내가 라마즈 호흡법을 하자, 조산사를 불러서 집에서 아기를 낳을까라며 놀렸는데 그 말대로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느껴졌다.  

 

 

  일은 바로 그 때 쯤 터졌다. 9월하고도 16일이 지나서 곧 아기를 출산할 즈음이었다. 나는 좀 걷고 싶었고, 서점이었다. 2층을 올라갈 여력이 없어서 1층 코너를 슬금슬금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가를 위한 동화책도 재밌었고, 아기 용품이 끝없이 나와있는 잡지도 재밌었다. 맛있는 한그릇 요리가 담긴 책자도 눈요기가 되었다. 뒤뚱거리기가 싫어서 앉아있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조금 지친 눈으로 그곳을 향했다. 그 사람이었다. 이마에 문장이 있는 남자. 모자를 쓰지 않았고, 놀랍게도 이마에 문장이 없어졌다. 나는 잘못 본 걸 거야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눈길을 돌렸는데, 그 사람이 내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이마에 문장은 깨끗하게 지워졌고, 그 남자는 나를 아니 내 볼록한 배를 쳐다보았다. 나는 까마득한 광년의 빛을 바라보는 심정이었다. 일어설 힘조차 없어서 꼼짝 못하고 앉아있고 그 남자는 할 말을 잃고 내가 먼저 말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은과 호에요. 

-은과 호. 

-통성명이나 하죠.  

 

그 사람과 나는 악수를 했고, 이름을 서로 얘기해 주었다. 그 사람은 악수한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너무 놀라서 아가들이 뻥 걷어차고 나오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바쁘지 않으면 저 좀 부축해주세요. 

그 사람은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순순히 따라갔다. 그 사람 차는 폴크스바겐이었다.  나를 계속 곁눈질하며 묻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챘다. 당연하지. 이 아이들은 나와 당신의 작품인 걸. 차창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그의 집이었다. 아니 그의 집이 아니라 큰 저택이었다. 그는 미안하다며 이 곳에 자기도 모르게 왔다고 했다. 나에게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한다. 나는 대답없이 차에서 내렸다. 

 

 

-향이 없군요. 

-그 때 그 차가 맞아요.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따뜻한 김을 코로 흡입했다.  

-당신이 아기 아빠에요. 

-그렇군요. 

-연락을 할 수 없었어요. 당신이 올 줄 알았는데, 안 오더군요. 

-미안해요. 

그 말을 듣자 뱃속 아가들이 발길질을 했다. 나는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곧 출산일이 다가와요. 

-함께 있고 싶어요. 가도 되겠죠? 

-집에서 조산사를 두고 아기를 낳을거에요. 여유가 없어서요. 

-미안해요. 

-... 

그 사람과 나는 마주 보았고, 푸훗하고 웃더니 마구 마구 웃기 시작했다. 

 

-이마는 어떻게 된 거에요? 

-어때 보이나요? 

나는 말대신 손을 그의 이마로 가져갔다. 그 질감이 없어졌다. 너무 매끄러워서 손가락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제는 모자를 안 쓰겠군요. 

-제게 모자는 단 하나 뿐이에요. 

 

 

  은이 먼저 나오고, 호가 나중에 나왔다. 은과 호를 그대로 이름에 박았다. 그 사람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인가보다. 친구와 나와 조산사는 아무 말 안했다. 아가들이 와앙하고 울어대자 우리 모두 정신이 없었다. 나는 북받쳐 오르며 눈물을 흘릴 줄 알았다. 아니었다. 라마즈 호흡을 하느라, 나는 매우 집중했고, 은과 호를 낳고 곯아떨어졌다. 아가들 목욕시키고, 뒷감당을 한 것은 친구 몫이었다. 친구는 깊은 숨을 쉬며 말했다.  

-산모도 아가들도 건강하니 그걸로 된 거지. 

 

  반나절을 자고 일어났다. 내 몸은 놀랍도록 빠르게 호전되었다. 자궁과 골반이 자리를 잡는 것이 거의 아기를 낳음과 동시에 시작된 듯 하다. 요가와 발레 플리에와 라마즈 호흡을 무시할 수 없는 법. 나는 이은과 이호를 보고 속삭였다. - 안녕. 나는 요기니 바리스타야. 반갑다 얘들아. 세상에 태어난 걸 축하해. 네 이름은 은과 호야. 나는 너희를 안내하기는 하겠지만, 책임지지는 않아. 인생은 그렇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 인생은... 나는 인생은 다음에 할 말을 삼켰다.  

 

  아가들 젖을 주는 일이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두 아가 줄 젖이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초유를 먹인 지 2주 후부터는 분유를 사먹였다. 은과 호는 나를 위해 차례 차례 울 줄 알았다. 은이 울어서 젖을 먹일 때, 호는 깨지도 않고 잘 잤고, 호가 깨면 은은 배가 불러서 잠이 들었다. 친구는 나를 위해 가물치를 약으로 다려왔다. 내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고 많이 빠지기 시작했다. 가물치 즙은 정말 고약했다. 무슨 물고기냐고 하자, 친구는 나를 3초간 쳐다보더니 물고기가 너를 잡아먹을 정도로 크다고 했다. 나는 앞날을 위해 다 먹었다. 친구에게 고마웠다. 친구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한 번도 안 했지만, 깊이 숨을 쉴 때 나를 위해 애썼다. 

 

  은과 호가 말을 잘 들어도 내가 카페에 갈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요가는 했다. 은과 호가 다 잠든 시간에 나는 빨래와 설거지를 하고, 간단히 식사할 수 있게 배추국이나 시금치국이나 감자국을 끓였고, 그 모든 것을 마치고 송장 자세로 내 복부를 풀어주었다. 깊은 들숨에서 허리와 아랫배와 전신이 골고루 뻗어나가는 기분이었고, 날숨에서 짜릿짜릿하게 몸 전체가 순환되는 기분이었다. 송장 자세로 피로를 싹 가시고나면 수리야나마스까라를 시작했다. 하다보니, 빈야사를 하게 되었다. 의외로 몸이 굳어있지 않았다. 나의 몸은 탱탱하면서 동시에 유연했다. 오히려 임신 전에 뻣뻣했던 자세, 즉 골반 자세 동작들에서 완숙한 동작을 구사할 수 있었다.  

 

  두 아기 예방 접종이 만만치 않았다. 보건소를 찾아가지 않고서는 경제적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간 적이 있다. 의사 선생님은 나와 친구를 번갈아 보고 참 복이 많으시네요...했다. 나와 친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웃었다. 예방 접종을 다 마치고 무사히 집까지 돌아오는 길에 나는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울었다. 친구는 집을 가는 길목에서 차를 돌려서 시내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나는 차 안에서 우느라 어디로 가는 지도 몰랐다. 친구는 깊은 숨을 쉬더니 차창을 내려주었다. 바람이 눈물 젖은 양 볼을 때렸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도록, 코가 빨갛게 되도록 우는 시간이 계속 되었다. 울음이 멈추었을 때는 눈 앞에 바닷물이 일렁이는 수평선이 보였다.  

 

  친구는 오늘 하루 카페는 쉬어야겠다며 바다 구경이나 하자고 했다. 은과 호는 나를 따라 울다가 잠이 들었다. 친구가 나보고 차 밖으로 나가서 바다를 보라고 했다. 친구는 은과 호 챙긴다며 혼자 나가라고 했다. 바다로 가는 길은 모래사장이었다. 몸의 균형이 이쪽 저쪽으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푹푹 빠지는 발을 무겁게 끌고 파도 가까이 다가갔다. 파도 거품이 밀려오고 철썩대는 소리를 가만히 서서 느꼈다. 그 날이 추웠던가. 코 끝으로 짠내가 느껴졌고 바다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겨울이었구나. 모자를 썼다. 나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며 수평선을 따라 걸었다. 나는 호흡을 했다. 라마즈 호흡과 요가 호흡을 하며 추위를 물리쳤다. 점퍼 소매 안으로 두 손을 넣고 양팔을 엑스자로 모은 후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호흡소리와 발걸음과 파도 소리에만 집중했다. 답이 안나왔다. 그것이 그 날 얻은 것이었다. 다만 내 몸은 공이 빠르게 회전한 것처럼 뜨겁고 단단해졌다.  

 

  다음 날부터 나는 아가 둘을 등에 업고 카페에 나갔다. 요기니 바리스타는 쌍둥이를 업은 바리스타가 되었다. 엄마...라고 하기에는 아빠가 없다. 나는 손님들이 은과 호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을 즐겼다. 다행히 나를 보기보다 귀여운 아가들에게 집중했다. 힘이 들면 은과 호를 눕히고 나무자세를 했다. 상하체가 위와 아래로 길게 뻗어나가는 중심에는 내 호흡과 정신이 머문다. 나는 나무가 되어야했다. 그러자 그렇게 되었다. 한 번은 손님이 내 요가 자세를 유심히 바라보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너무 고요히 그 자세를 유지하자 손님이 방해를 할 엄두를 못냈다. 나는 꽤 유명해졌다. 요기니 바리스타이자 쌍둥이를 낳은 바리스타. 무언가가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았다. 가까이 내 친구를 비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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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 모자 

 

카페로 돌아온 나는 카페 구석에 요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커피 향과 잘 어울리는 코코넛 버터 향초를 항상 켜두고 손님이 뜸한 시간에 요가를 한다. 10일 동안 받은 발리 요가 수업 동안 내 몸은 단단해졌다. 머리카락은 이제 귀 아래에 찰랑거린다. 초록색 안경테는 내 눈동자 너머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없다. 머리 위 모자를 쓰고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한다. 내게 그것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그 사람은 내 안경이라도 쓰고 다닐까? 바보같은 질문이다. 아마 그 사람은 그 안경을 서랍에 넣었거나 쓰레기통에 처박았을지 모른다. 나의 커피 맛이 비꼈다. 넛티가 약해지고 비터니스와 산미가 좀 더 강해졌다. 내 커피 취향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크레마는 여전히 풍성하게 나오도록 하지만, 크레마 역시 겉모습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깔끔한 아메리카노를 뽑게 되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우선 요가를 한다. 양치질이 우선이긴 하다. 꼼꼼히 입 안을 헹구고 요가 매트 위에 선다. 나를 위한 시간이다. 마음은 그 사람을 떠났다고 하지만, 내 몸은 여전히 누군가를 원한다. 그것이 몸이다. 요가 자세는 그런 몸의 균형을 잡아준다. 오늘은 누워서 송장 자세부터 시작을 한다. 두 발과 두 팔을 적당히 벌리고 숨을 쉬고 내쉬며 긴장을 푼다. 서서히 눈을 뜨고 골반과 허리를 풀어준다. 두 팔을 어깨 높이로 벌리고 두 무릎을 세우고 좌우로 흔들거린다. 이번에는 무릎을 가슴 가까이 갖고 와서 두 무릎으로 원을 그린다. 원이 동그랗게 될수록 허리가 강화된다. 오른 다리를 펴고, 왼발을 오른 무릎 위에 놓는다. 두 팔을 어깨 높이로 펴고 왼 무릎을 오른쪽으로 기울여 바닥에 닿는다. 두 눈은 어깨 높이로 편 두 팔 중에 왼손 끝을 바라봄으로써 상체와 하체가 반대로 작용한다. 상하체가 서로 반대로 작용하면서 몸 안에 나쁜 기운과 노폐물이 빠져나간다. 호흡을 2-3차례 한다. 반대로도 한다. 마지막 다리 자세이다. 양 무릎을 어깨 너비로 세우고 엉덩이를 끌어올리고 척추 하나하나를 들어서 뒷이 바닥에 닿는 지점까지 올려준다. 호흡을 하며 세운 무릎 사이를 좁히려고 힘을 준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허리와 꼬리뼈를 바닥에 대고 다리 자세를 끝낸다.  

 

요가 동작을 끝내고 뒷목을 도리질 하며 긴장을 풀었다. 일어나서 옷을 벗고 샤워를 하러 갔다. 마음에 드는 향이 무엇일까? , , . 갖고 있는 샤워젤을 보고 골라본다. 하나를 더 사다둬야겠다. 짙은 꽃향기 뭐 없을까. 물로 머리카락을 적시고 샴푸 질을 한다. 머리카락이 제법 길어져서 손안에 감기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 넘는다. 나는 샴푸 질을 좋아한다.  문질러서 두피 마사지를 해준다. 손가락 끝으로 꼭꼭 눌러서 머리에 자극을 준다. 헹군다. 이번에는  고른 샤워젤로 거품을 내서 몸을 문지른다.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남들이 없다면 자신의 몸을 이렇게 정성스레 닦지 않을 것이다. 옷도 그냥 마구잡이로 입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몸과 외모를 가꾸는 것은 그/그녀에게 본능이다. 이대로 나의 아름다움이 사라져가는 것을 붙들 수 없다니. 

 

물방울이 머리카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몸을 닦고 티셔츠와 팬티 차림으로 앉아서 생각한다. 내가 만약 그 사람을 잊지 못했다면 이러고 앉아있을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 더 지혜롭지 않을까? 자존심. 구차함. 이 단어들이 정말 내 마음보다 중요할까? 거울 속에서 흐릿한 내 얼굴이 비치고 단발머리가 찰랑인다. 나는 티셔츠 위에 가벼운 점퍼를 걸치고 청바지를 입고 도톰한 양말을 신고 머리카락을  물기를 없앤다. 그리고 안경을 쓰고 티코를 탄다. 그 사람이 집에 있든 없든 가본다.  

 

 앞이다. 이사 가지 않은 듯하다. 3달 남짓이 지났다. 문을 두드린다. 그 때 웃음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고 그 남자가 맥주를 손에 들고는 나를 쳐다본다. 웃음소리는 그의 친구가 낸 소리였다. 그는 나를 쳐다보고 입가를 닦았다. 나는 손에 든 모자를 건넨다. 그의 친구는 나와 그를 번갈아 보고는 바쁘다며 먼저 나간다. 그 사람은 여전히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뭔가 설렘이 차오르는 것을 알아챈다. 그 사람이 고갯짓을 하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나는 스니커즈를 신고 안으로 들어선다. 방 안에 수족관 그 너머에 그의 침대 그대로이다. 내가 돌아서는 순간 그가 맥주병을 놓더니 나를 안았다. 나는 그대로 있었다. 뻣뻣하게. 그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더듬었다. 나는 저항했다. 그러자 그가 잠시 멈췄다. 나는 설렘이 있었지만 동시에 상처를 받았다. 

 

내가 주뼛대고 서 있자 나를 번쩍 안아서 침대로 데려갔다. 나는 순간 짜릿했다. 그 불가항력의 느낌이 손바닥으로 전해지더니, 그 사람 얼굴을 향해 손바닥이 찰싹하고 날아갔다. 그는 맞은 뺨에 손을 대고는 나를 넋 놓고 쳐다보았다. 나는 스니커즈를 신은 채로 저벅저벅 문을 향해 갔다. 그 사람은 다시 나를 잡았고 그 순간에 나는 쓰러져서 울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내가 다 울 때까지 쓰다듬는다. 그 사람은 침대 위로 나를 다시 데려갔다. 우리는 꼭 붙들고 누웠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오히려 머리카락이 짧아져 있었고, 나는 길어져있었다. 나는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천천히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서 부엌 소리에 깼다. 그가 스프를 끓였다. 야채스프였다. 따뜻한 스프가 넘어가자 몸도 마음도 편해졌다. 우리는 두 번째로 마주보고 웃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 위이다.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는 다시 올 줄 알았다고 말한다. 흥. 나는 콧방귀를 꼈다. 그 사람은 나를 찾아가보니 친구가 카페에 있었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사람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공백기가 생겼다며 차분하게 말한다. 나는 모로 눕는다. 그 사람은 여전히 차분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입술을 한 번 한 번 또 한 번 갖다 댄다. 그 신호에 나는 눈을 감고 그 사람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수족관 너머에서 한 호흡, 두 호흡, 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길고 가파른 고개였다. 우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두 눈을 고정시킨다. 우리의 입김이 서로의 입술에 포개진다.  

 

탁자 위에 안경이 있다. 그 사람의 모자도 그 옆에 있다. 나는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쓴다. 그 사람이 뒤에서 웃는다. 나는 그 상태에서 학 자세를 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손짓을 하고 그 사람이 내 곁에 온다. 모자와 안경을 쓴 학. 그 사람이 두 손을 나의 손바닥을 잡는다. 아! 내가 요가를 배울 때 이 자세에서 그 사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발끝으로 서 본다. 그 사람이 내 허리를 감싼다. 나는 팔을 뒤로 가져가서 뒤에 선 그 사람을 안는다. 모자가 떨어지고 내 몸이 거미자세가 되어버린다. 그 사람은 내 아치형 척추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만져본다. 얼마나 버틸 수 있냐고 묻는 그 사람에게 내려달라고 한다. 그가 아치형으로 정점에 솟은 내 배꼽에 얼굴을 댄다. 나는 천천히 팔과 다리를 푼다. 단단한 나의 몸은 그를 충분히 받쳐줄 수 있었다. 우리는 학-거미-아치형에서 사랑을 나눈다.  

 

-이마에 이건 왜 생겼어? 

-몰라도 돼. 

-몰라도 돼. 몰라도 돼. 

-모르는 게 약이야. 

-약? 

-... 

-모자는 그동안 안 쓰고 다녔겠네. 

-... 

-여기를 만지고 있으면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단말야. 

-... 

 

그 사람은 내 손을 잡고 못 만지게 했다. 손을 스윽 뺐다. 그 사람은 다시 내 손을 잡고는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 사람 손과 내 손이 가슴 사이에 껴서 우리는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닥에 찰싹 붙어서 우리는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낀다. 왜? 나는 그 사람 이름을 궁금해 하지만 물어보지 않을까? 왜 그 사람도 내게 이름을 말하지 않을까? 왜. 왜. 왜. 

 

우리는 찰싹 바닥에서 다시 한 번 휘몰아친다. 아무런 자세도 없이 배배 꼬였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이 그와 나 사이의 손이 느끼는 심장 박동이 점점 거세진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내게 눈을 뜨라고 한다. 어디를 봐야할 지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은 내 눈동자를 보고 싶어 한다. 내 눈은 그 사람의 표식에 가 있다. 우리의 몸이 바닥에서 요동칠 때 내  입에서 짧은 탄성이 나온다. 탄성은 점점 노래처럼 음정이 올라갔다. 그가 내 안에 들어왔다. 

 

그가 내 안에 있을 때, 물속이 떠올랐다. 몸에 느껴지는 압력 때문인가. 깊은 물속에 헛발질을 했을 때 느끼는 공포심 못지않은 뱃멀미가 난다. 아마 그래서 눈을 뜨기 힘든가보다. 그가 손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내 눈동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그에게 맞춰주려고 하지만, 내 눈동자는 고정되기에는 몸의 감각이 역부족이다. 그를 안에서 맞아들이고, 그의 몸무게를 받쳐주고, 나의 허벅지를 고정시키고, 그의 움직임에 다다르기 위해 나는 숨이 점점 가빠진다. 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깊은 물속으로 잠수하고 있다. 오직 심장 박동 소리에 의지한 채.  

 

심해어에게는 눈동자가 필요 없다지. 오히려 불빛을 밝히는 촉이 있다고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싶다. 더욱 깊이 들어가기 위해 푹 꺼지기 위해 눈을 감는다. 그 대신 촉을 세운다. 그것은 음성이다. 나의 목소리가 숨소리에서 외마디 소리로 바뀐다. 입술 모양이 동그랗게 만들어진 것도 아닌데, 아! 하고 소리가 터진다. 그가 더 가까이 그의 하복부를 내 위로 바싹 붙인다. 나는 그의 출렁임에 의해 점점 길고 굵은 관을 통과하는 듯이 목소리가 커졌다. 그의 움직임과 나의 탄성이 미스터리하게도 4/4 사이즈의 바이올린 활이 된 듯하다. 그에 의해 나는 악기가 되었다.  

 

나에 비해 그는 너무나도 침묵을 한다. 숨소리도 죽인 듯이 그에게는 움직임만 있다. 그는 나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의 격정은 나를 완벽히 연주하기 위해 호흡을 고르는 연주자를 닮았다. 호흡에 시작과 끝이 없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몸을 나에게 밀착시키고 그의 활로 나를 연주한다. 그의 손, 그의 눈, 그의 입술이 나를 물 속 깊이 데려간다. 나는 심해어가 된다. 눈을 감고, 불을 밝히고, 소리의 파장이 된다. 마지막에 다다르자 심해어는 눈을 뜬다. 그의 눈을 쳐다보고 나는 말한다.  

 

그의 욕실 속에서 나는 씻고 있다. 남자 욕실이 어떻게 되어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그는 샤워젤이 다양하다. 샤워젤 중에는 새 것이 있다. 로즈 블라썸. 나는 그것을 뜯는다. 반짝이는 핑크색이다. 향이 몸을 에워싸자 황홀하다. 나는 거품이 몸을 다 타고 내려가는 내내 가만히 있었다. 그가 밖에서 문을 조금 열고 티셔츠를 안으로 넣어주었다. 향이 다 날아가기 전에 몸을 헹구고 물기를 닦았다. 머리카락은 대충 묶어서 꽁지머리를 한다. 그가 준 티셔츠는 길고 넉넉했다. 나는 그걸 걸치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가 나에게 다가와서 킁킁 향을 맡는다. 그가 웃는다. 

 

우리는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온다. 나는 티코를 몰고 내 방에 간다. 그는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했다. 안경 모자를 챙겼다. 그가 모자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는다. 내 몸은 하얗고 미끄덩거리는 듯하다. 나는 매트를 깔고 태양 예배 자세를 2세트 한다. 몸을 풀어준다. 머리를 감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시트러스 향이 나는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헹구고 두피를 꼭꼭 눌러주고 수건으로 말린다. 내 검정색 단발머리는 향긋해졌다. 비발디 음악을 튼다. 세상에 참 평화는 없어라. 나는 그 노래를 반복으로 하고 침대에 눕는다. 

 

나는 어딘가에 갇혀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눈이 부시다. 밖에서 긁는 소리가 들린다. 마찰되는 소리가 점점 높이 올라가면서 귀가 아프다. 두 귀를 양 손으로 막자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두근두근 될 때 나는 입을 뻐끔거린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눈물이 흐른다. 뭔가가 콱 막힌 듯이 가슴이 답답해진다. 눈을 서서히 뜨자 입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람 같이 어딘가로 흘러간다. 긁는 소리와 함께 나의 목소리가 위로 올라가며 내 몸도 함께 올라간다. 가슴에 막힌 것이 풀리는 것 같다. 그래 좀 더 힘을. 그러자 내 입 안에서 말갛게 빛나는 진주가 나온다. 가슴이 뚫리고  긁는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두 손을 저어서 어둠을 헤쳐내자 장막이 걷힌다. 그리고 그 앞에 거대한 심해어가 촉을 밝히고 있었다. 번쩍! 

 

침대에서 떨어졌다. 꿈이었다. 나는 심해어를 정말 보았다.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었고, 빛깔이 선홍색으로 푸르스름한 실핏줄이 보였고, 물고기 같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만져보려고 했는데, 촉이 움찔하더니 빛을 꺼버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여러 가지가 섞인 소리였다. 길거리를 걸을 때 들리는 잡음 같기도 했고, 아가가 칭얼대는 소리 같기도 했고, 제트기가 날아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심해어가 말을 했다. 그 말을 알아들은 나는 진주를 주었다. 진주는 더 이상 말갛지 않고 보랏빛과 레몬 빛이 섞여 있었다. 심해어는 다시 그 촉으로 불을 밝히고 휘익 사라졌다. 

 

여전히 세상에 참 평화는 없어라가 흐른다. 아주 잠깐 잠이 들었나보다. 머리를 기댄 곳이 축축했다. 나는 두 손을 내 배꼽 근처에 가져갔다. 보드랍고 둥근 내 아랫배. 마치 심해어가 그 곳에 있다는 듯이 나는 어루만진다. 나는 생각한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그 사람이 내 몸을 원했듯이 나는 심해어를 원한다고나 할까. 분명 심해어는 내게 다가왔고 말했다. 그 불빛 너머에 숨어 있었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것을 나 혼자서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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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간의 마음 치유 

 

1일 째  

호흡 명상. 산 자세, 송장 자세, 가부좌 자세. 이 3가지 중에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각자 호흡 명상에 들어간다. 산 자세를 한 사람은 허리가 아프다고 하고, 송장 자세를 한 사람은 지루해서 자고, 가부좌 자세를 한 사람은 다리가 저리다고 했다. 나는 산 자세를 선택한다. 내가 서 있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양 발을 어깨 너비로 벌리고 발바닥에서 종아리 무릎 허벅지를 타고 적당히 긴장을 하면 아랫배가 수축되고 허리가 부드럽게 펴진다. 어깨는 편하게 내리고 턱을 살짝 당긴 후에 양 손바닥을 이완, 허벅지 옆에 두고 눈을 감는다. 이등변 삼각형이 내 몸을 에워싼 산 자세이다. 나는 호흡을 한다. 인헤일, 엑스헤일... 구령을 붙혀주는 요기 선생님이 한동안 우리 요가생들을 돌아보며 자세를 교정해준다. 요기 선생님은 내 옆으로 오더니 코 끝에 손가락을 대어보더니 말한다. 브리드 모어 딮플리. 캄 앤 롱. 나는 호흡 명상을 통해 내 이마가 열리는 것을 느낀다. 열어야 해. 그 사람을 잊어야 해. 그러자 내 몸이 흔들린다. 마음을 비우지 않자 내 몸은 서 있는 것이 위태롭다. 다시 마시고, 내쉬고를 하며 무너진 몸 균형을 잡는다. 어느 덧 아침 시간이 지나간다.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을 때 내가 하고 싶어하는 자세가 생각났다. 거미 자세. 

 

2일 째 

호흡에만 하루를 투자했다. 요가생들 모두 오늘 있을 태양 예배 자세에 긴장을 하고 있다. 태양 예배 자세를 하루 종일 한다고 했다. 보통 체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내가 선택한 요가 종목은 어드밴스 코스였다. 이 코스를 들어오기 전에 간단한 테스트가 있었다.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요가 자세를 5분 동안 시연하는 것이었다. 나는 태양 예배 A타입과 반달 변형, 학 자세, 삼각 자세를 했다. 요기 선생님은 어드밴스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요기니 선생님이 들어온다. 건장한 어깨를 지녔다. 요기니 선생님은 태양 예배 5가지 타입을 물 흐르듯이 하는 빈야사를 한다고 했다. 빈야사. 나는 마음이 부푼다. 어제의 내가 아니다. 나를 벗어버리자. 흐르는 땀방울이 나에게 더 하라고 재촉한다. 여기 저기서 쿵 쿵하고 쓰러지는 요가생들이 있었다. 각자 빈야사를 행하는 박자와 속도가 달랐다. 요기니 선생님은 자신의 박자를 찾으라고 했다. 나는 첫 시작 자세에서 상하체를 위아래로 길게 늘어뜨릴 때 호흡을 하며 점검을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플로우. 흘러간다. 쉬는 지점을 만드는 것이 빈야사의 핵심이다. 들이마시고 내쉬며 호흡을 정리하고 흩어진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은 후 그 에너지로 플로우한다. FLOW;흐르다. 아! 어쩔 수 없이 그 사람과 키스를 한 나. 어쩔 수 없이 몸을 섞은 나. 그 모든 것을 벗어버리자. 플랭크 자세에서 인헤일, 엑스헤일을 반복하며 똑똑 떨어지는 땀방울을 바라보았다. 좋다. 나는 나 자신이 좋다. 나는 그 사람과 하나가 되었고, 충분히 만족했다. 그러면 된 것이다. 빈야사는 마지막에 송장자세로 마무리했다. 

 

3일 째 

자신이 좋아하는 요가 자세를 공부하는 날이다. 나는 반달 자세, 학 자세, 거미 자세를 선택했다. 반달 자세를 시작하자 요기 선생님은 내 어깨에 힘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것을 풀어내려면 호흡이 전부라고 했다. 호흡으로 뭉친 어깨 근육을 이완시키고, 그러면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 진다고 한다. 반달 자세를 계속 하고 있자 합장한 양 손 사이에 내 머리와 목이 꼿꼿하고 길어진다. 인헤일에 정면, 엑스헤일에 좌로 기울어지며 우 겨드랑이를 열어주었다. 다시 인헤일에 정면, 엑스헤일에 우로 기울어지며 좌 겨드랑이를 열어준다. 또 다시 그 사람이 떠오른다. 내 어깨를 풀어주었던 그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며 그 사람 이미지를 날려버린다. 이것이 사랑일까? 만약 그렇다면. 좋은 거잖아! 그래 하룻밤에 사랑을 할 수 있지. 나는 성인이고, 그 사람도 그렇고. 그럼 됐지 뭐. 학 자세에서 양 손바닥을 밀어주는 느낌을 잊을 수 없다. 한 다리는 90도 접어서 올리고 한 다리는 곧게 펴고 중심을 잡는다. 손바닥을 밀어줄 때, 손 바닥에는 허공이 잡힌다. 상상을 한다. 손바닥에 벽이 있다고. 그러자 다시 그 사람이 옆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나를 중심 잡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들숨과 날숨을 한다. 마지막 거미 자세에서 내 몸은 공중부양을 하는 듯이 허허롭다. 내 몸 안에 그 사람이 들어왔을 때 그 시원함 못지 않다. 수족관 너머에서 사랑을 나눈 우리는 이제 남남이다. 거미 자세는 허리 힘이 아니다. 전신 운동이다. 그것도 후굴이다. 겁을 내면 허리에 무리를 준다. 두 팔과 두 다리에 똑같이 무게를 싣고, 가슴을 열어주면서 척추와 골반을 탄력있게 아치형으로 만든다. 기둥 사이에 아치형 골조를 생각하면 아주 튼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체의 신비는 끝이 없다. 게다가 그 사람과의 관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4일 째 

오늘은 간단한 호흡에 대한 이론 공부를 했다. 영어로 간단하게 통역이 되어서 계속 딴 생각을 했다. 그 모자. 그 사람이 남긴 흔적. 내 안경. 그 사람 식탁 위에 놓여있을 안경. 왜 서로가 흔적을 남긴걸까? 실수로? 고의로? 난 그 모자를 이곳 발리까지 갖고 왔다. 그 모자를 쓰고 공항에 들어섰을 때, 잠시 생각했다. 그 사람이 공항에 마중나와 있을 거라고. 그것도 내 안경을 쓰고. 그러나 그건 망상이었다. 모자에서 시트러스 향이 슬쩍 난다. 모자는 페도라이다. 그/그녀가 공용으로 쓸 수 있는 디자인이다. 내 망상에 빠진 눈동자를 요기니 선생님이 알아본다. 나는 슬며시 웃는다. 요기니 선생님은 말한다. 유어 마인드 컨트롤 유어 쏘트, 유어 브레싱 컨트롤 유어 마인드. 나는 합장을 한다.  

 

5일 째 

 

모두 다 함께 해변으로 갔다. 수영도 하고 일광욕도 하고 요가도 한다. 나는 태양 예배 자세를 한다. 호흡을 마시며 두 팔을 벌리고 시선을 위를 향하며 상하체를 길게 뽑는다. 내쉬며 몸통을 반으로 접고, 들이마쉬며 허리를 90도 각도로 만든다. 내쉬며 한 발 한 발 뒤로 프랭크 자세를 갖추고 사선으로 일직선이 되게 내 뒷목과 척추와 하체를 길게 늘인다. 호흡을 한다. 누군가가 내 몸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전히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구나. 숨을 들이마시며 오른 다리를 양 손 사이에 갖고 오고 허벅지와 고관절을 풀어준다. 내쉬며 나머지 다리를 갖고 오고, 마시며 다시 허리를 90도 각도로 만들고, 내쉬며 몸통을 반으로 접어 뒷다리를 스트레칭한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양 팔을 머리 위로 갖고 오고 시선은 위를 본다. 숨을 내쉬며 양손 가슴 앞에 합장을 한다. 다시 그 사람 생각이 날 때 마다 한 쪽 다리씩 교차하며 태양예배 자세를 했다. 젠장. 아직도 그 사람이 생각이 난다. 숨을 고르고 바다를 바라보자. 그제서야 파도 소리가 들린다. 파도는 접혀져서 부딪혀 앞으로 밀려오고, 다시 접혀진 파도가 앞으로 밀려온다. 나는 그 사람을 잊을 수 없는 건가?  

 

6일 째 

오늘과 내일은 쉬는 날이다. 그리고 묵언 수행을 신청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묵언 수행을 신청한다. 내 목에 Silence라는 메모가 걸린다. 몇 명의 수행자가 그런 목걸이를 들고 걷기도 하고, 식사를 하기도 하고, 외출을 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렇다. 외출할 때, 그 모자를 썼다. 여전히 미미하게 시트러스 향이 난다. 나는 그냥 느낀다. 잊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있자. 내가 침묵을 하자, 소리와 시선과 감각이 더 또렷해지는 것을 알겠다. 과일을 먹으며 과육이 씹히는 소리를 느끼고, 물을 마시며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고, 사람들이 어떤 표정으로 말하는지 더 세밀히 관찰하고, 나는 그 세가지 사이에서 인헤일, 엑스헤일한다. 태양이 뜨겁다. 그 사람이 남긴 모자 아래 내 머리 만이 그늘이다. 여전히 그 사람 손 안에 있는 나. 그냥 인정한다.  

 

7일 째 

알렉스. 나를 부른다. 뒤를 돌아보니, 미치가 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요기 지망생이다. 나보고 데이트하잖다. OK! 나는 모자를 쓰고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 미치는 나보고 일본인인 줄 알았다며 내가 한국인인 것을 놀라워했다. 그래? 내가 일본여자 같아 보여? 미치는 나보고 지적이란다. 별 소리! 나는 별 내색을 안 했다. 미치와 나는 발리 비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은 발리 여행겸 요가를 배운다고 한다. 이미 여행을 많이 해 본 미치는 자신이 다녀온 세계 곳곳을 설명해줬다. 미치의 팔은 억센 털로 가득하다. 내가 그걸 쳐다보자 미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나는 안경을 고쳐쓰고 물어봤다. 넌 가슴에도 그렇게 털이 많니? 역시 영어로 말하면 거침없다. 그렇지 않아도 질문을 잘하는 나는 순간적으로 그런 질문을 한다. 미치가 크게 웃으며 보여줄까한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미치는 나보고 너는 다른 동양 여자들과 좀 다르다고 한다. 그러 건 말건 나는 내 모자에 집중해 있다. 미치가 갑자기 모자를 벗기고 자신이 써 본다. 미치 머리에는 작은 모자이다. -미치, 나 그만 들어갈래. 미치는 김이 빠졌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인다. 미치는 매력있지만, 나는 여전히 모자에 신경을 쓴다. 

 

8일째 

미치는 여전히 내게 관심을 보인다. 오늘은 구리빛 피부를 내세워서 상체를 온통 벗었다. 매력있다. 분명 남자다운 어깨에 복슬 복슬한 털이 잘 어울렸다. 그치만 뭐 외국 남자는 그래서 좀 지나치다 싶지. 나는 용케 다 쳐다보고는 점수를 매긴다. 45점. 아냐. 65점. 나는 80점 이상이어야 해. 속으로 나를 생각하며 웃는다. 미치는 힘은 있지만, 유연성이 적어서 동작이 뻣뻣했다. 나는 여자 치고는 힘이 많고, 유연성이 좀 떨어진다. 미치가 과감하게 xxx자세를 보여준다. 그 모습에 나는 미치가 힘을 과시하는 남자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의 몸동작을 보면, 그는 자신이 매우 멋지다고 생각하고 우월감을 갖고 있다. 적당한 우월감은 용기가 될 테고, 주도적으로 관계를 끌지 모른다. 그 몸동작에서 헌데 호흡이 빠져있다. 호흡은 아주 중요하다. 호흡을 잘 하는 사람은 목소리가 좋다. 악기도 연주를 잘 해낼 수 있고, 요가에서는 당연히 생명이다. 미치는 자신이 요가 동작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요가 동작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미치는 금방 나에게 흥미를 잃을 것이다. 내 주파수에 미치는 다다르기 힘들다. 아니, 내가 미치에게 질렸다. 

 

9일째 

 

내일을 위한 리허설 시간이다. 각자 30분 분량으로 요가 수업을 진행해야한다. 리허설 시간 30분을 flow해야 하는데 그것이 만만치 않다. 아사나와 함께 간단한 설명이 있어야 하니, 동작과 멘트를 동시에 해내야 한다. 다행히 요기 선생님은 점수를 주는 방식이 융통성이 있다. 멘트가 빠지면 최고 점수가 70점. 65점 이상이 자격증이 나온다. 85점 이상이면 메달을 준다. 메달을 받은 지도자는 요가 강사 되기가 훨씬 유리하다고 한다. 나는 멘트를 최대한 쉽고 간단히 해서 80점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멘트가 잘 들릴 수 있도록 영어 발음도 좋아야한다. 30분을 위한 마지막 리허설은 발리 비치에서 한다. 해가 질 무렵에. 파도 소리에 내 멘트가 묻혀서 오히려 떨리지 않다.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사나 중에 구령처럼 작용한다.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들숨과 날숨이 곡선을 타며 반복된다. 숨을 들이마시자, 혀 끝이 말아지면서 입천장에 닿는다. 숨을 내쉬자 아사나를 하는 내 몸이 확장된다. 아사나 정점에는 삼매가 있다. 아사나와 호흡이 파도를 타고 반복이 되고 지는 햇빛이 내 전신을 물들이며 마지막 동작에서 나는 그림자가 된다. 해가 졌고 아사나는 끝났으며 어둠 속에서 삼매에 들어간다. 귓전에 아무것도 부딪혀 오지 않는다. 나는 삼매 속으로 들어가서 잠이 든다.  

 

10일째 

 

시험이 시작되고 나서 나는 지각을 했다. 해변에서 깼을 때 내 몸은 반쯤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몸을 씻고 좋은 아로마로 몸을 단장하고, 요가복을 입고 시험장에 도착하니, 요기 선생님이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맨 마지막으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나는 배가 고팠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요기 선생님이 나를 부른다. 알렉스. 나는 산자세로 섰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텅 빈 배를 호흡으로 가득 채우고, 힘이 생기자 학자세를 시작한다. 십자형으로 서 있는 내 몸의 중앙은 텅 비어있다. 비어있는 곳으로 숨이 들어오고 나가며 팔과 다리, 골반을 중심으로 척추와 목, 손가락과 발가락이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나의 몸 구석 구석으로 숨이 들어오고 나간다. 나는 흘러간다. 다음 동작을 뭘 해야하는 지 생각이 없다. 몸이 움직이는 대로 나는 아사나를 한다. 마치 그 사람과 내가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나는 아사나가 곧 내 몸이 된 듯 했다. 오직 텅 빈 곳에 들숨과 날숨만이 있다. 나는 종소리를 듣고 나서야 눈을 떴다. 나는 35분 동안 시험을 치렀다. 요기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함께 요가를 하지 않겠냐고. 나는 멘트를 쏙 빼놓고 아사나와 호흡으로 시험을 치렀다. 헌데 내가 멘트를 안 한 시험생 중에 최고 점수 70점을 맞았다. 시험장을 나서는데, 미치가 부른다. 페펙트. 나도 엄지를 들었다.  

 

발리를 떠나며 내 몸은 요기니가 되었다. 카페를 그만두고 요기니가 되어서 세상을 휘젓고 다닐까 싶었다. 아마 꽤 멋질 것이다. 나는 모자 창을 만지고 있다. 이 모자가 나를 안내해주고 있다는 듯이. 잊으려고 발리로 떠나왔는데, 그 사람에 대해 더 깊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내 몸이 설명해주고 있다. 몸, 마음,생각이 한 곳으로 흘러간다. 이 모자가 그의 머리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는 모습이 떠오르고, 내가 그걸 떠올리고 있는 이 순간을 행복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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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초코 브루드 라떼 

 

그 사람은 모자를 항상 비스듬히 썼고, 앞 머리카락을 답답하게 내렸다. 머리카락 때문에 모자가 거추장스러웠다. 머리카락을 올린 모습을 내 기억에는 본 적이 없다. 머리카락 아래 그 이마 위에 마치 표식이라도 있는 듯이. 계속 가리고 다닌다. 언젠가 바람이 몰아쳐서 그 답답한 모자와 앞 머리카락을 휙 날려버려서 그 멋진 문장(紋章)이 내 눈에 들어왔으면 했다. 헌데 아무래도 그 답답한 모자를 벗을 기미가 전혀 없고, 마치 앞 머리카락은 한번도 씻지 않은 것처럼 아교가 묻어 있다는 듯이 반질반질하고 무거워 보인다. 

 

나는 오늘 커피를 5잔이나 버렸다. 분쇄된 원두를 부드러운 융을 대고 커피를 내렸는데, 마지막에 계속 딴 생각을 하다가 융이 마를 때까지 커피 물을 다 뽑아내는 실수를 연거푸 5번이나 했다. 그렇게 되면 융은 너무나 부드러워서 분쇄된 원두의 마지막 쓴 물까지 내려내게 되고,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마실 수가 없다. 융을 5장이난 새것으로 갈아 대더니, 결국 커피물을 다 버리고 달콤한 믹스 커피를 입에 대고 있다. 달콤하고 뜨거운 커피가 입 안으로 들어오자 기분이 나아졌다. 달콤함은 숨어있는 마력이다. 이것을 맛에서 빼낼 수 없다. 커피는 쌉싸름한 맛과 이 달콤함이 더해져서 어두운 매력을 뿜어낸다. 검은 커피 물이 밀크와 섞여서 이상야릇한 빛깔의 음료로 바뀌고, 그 사이에 달콤한 시럽이 첨가되어서 이 빛깔의 음료가 목구멍을 넘어가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원두 커피는 그러나 달콤함보다 고소함이 더 먼저이기에, 오늘은 5잔을 개수대에 버렸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커피를 입 안에 넣고 음미할 때, 그 사람이 들어왔다. 역시나 그 모자에 그 앞머리는 정말 보기만 해도 답답했다. 그 모자에 그 머리카락. 그리고 항상 긴 바지를 입는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지 않았다면 아마 그 모자를 벗지 않았을까 싶지만, 다른 손님들 때문에 도저히 에어컨을 끌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 사람은 항상 아메리카노에 반 샷을 더 추가해서 먹는다. 그 반 샷이 주는 맛의 미묘한 차이를 알지 못하면 주문할 수 없는 그런 미각을 지녔나 보다. 그리고 항상 뜨거운 아메리카노이다. 참으로 격정이 흐르는 순간이다. 그 모자, 그 앞 머리카락, 반 샷 추가된 아메리카노. 그는 뜨거운 액체를 호호 불지도 않고, 탕약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들이킨다. 그 이미지가 내게는 격정이다. 다른 손님들이 더운 여름 시원한 음료로 여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 아이스 xxx를 시킬 때, 그는 유별나게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뜨거울 때 다 마시고 나가버린다.  

 

그렇게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몇 번 주문하고, 마시고, 나가버리는 행동을 통해 나는 그 사람이 분명 나에게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커피 맛에 관심이 물론 먼저 생겼으리라. 그리고 내 매의 눈에 덜컥 잡혀버린 것이다. 오늘은 그래서 그 사람 옆에 슬며시 갔다. 손에 든 작은 볼에는 로키로드쿠키가 담겨 있다. 나는 그 사람 뒤에서 왼쪽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그 사람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사람은 뒤를 돌아보며, 나와 그 쿠키를 번갈아 보더니 ‘네’하고 목소리를 올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드세요.’ 나는 가까이에서 그 모자 아래, 그 앞 머리카락 아래 어떤 이마와 표식이 있을 지 매의 눈으로 관찰했지만, 알 수 없었다. 대신 그 사람의 치아가 살짝 벌어진 것을 알았다. 윗니 두 개가 여리여리하고 틈이 보임. 

 

나는 매의 눈으로 매장 안에 있는 손님들을 샅샅이 관찰한다. 매의 눈은 그러나 절대 상대가 알아채지 못한다. 매장 손님들이 바리스타가 마치 스토커 같다고 한다면 좋아하겠는가. 손님이 와서 주문하는 과정을 마치 리듬이 섞인 문장을 듣는 것처럼 기분을 파악하고, 손님에게 가끔 커피 배리에이션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원두는 싱글일 수도 있고, 블렌딩한 것일 수도 있다. 원두를 시키는 손님은 의외로 없다. 그 원두 맛을 알기에는 손님들 혀는 달콤함과 차가움에 길들여져 있다. 내가 추천하는 배리에이션은 ‘초코초코 브루드 라떼’이다. 많은 여성 손님들이 이 달콤함과 그 속 깊숙한 다크함에 호들갑을 떨고는 한다. 브류이기에 커피를 내렸고, 라떼와 섞여서 부드러운 느끼함이 함께하며, 초코를 두 차례 불러들이는 이름에서 여성 손님들 뇌는 이미 자극이 충분히 된다. 그리고 입 안에 그 시원하고 달콤 다크한 커피가 들어가면 뇌 속 전류가 120% 충전된다. 나도 안다, 그 기분. 내가 만든 것이니까. 내가 바리스타인 것이 내게는 커피와 시럽 궁합처럼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떨까? 내 로키로드쿠키를 그 앞니로 똑 똑 부러뜨리는 것을 본다.  

 

매장을 닫는 시간은 11시 11분이다. 물론 간발의 차이로 1~2분 늦어질 수 있지만, 절대 늦지 않게 나는 손님들에게 30분 전에 굿바이 로키로드쿠키를 준다. 그걸 받아 든 손님들은 어색하지 않은 웃음으로 미안해 하며 카페 닫는 시간을 지킨다. 그 사이에 나는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나의 애마 Tico를 타러 간다. 마지막 남은 티코일 지도 모른다. 이 지구 상에… 이 티코는 나만이 몰 수 있다. 그래서 티코는 내가 시동을 걸면, ‘우우웅’하고 반겨준다. 아쉽게도 핸들이 슈퍼 핸들이라서 이 티코를 몰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주며 핸들 조작을 하려면 깍두기에 참기름을 발라서 코너를 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아주 아슬아슬하다. 미묘한 핸들링으로 나는 깍두기 모양의 티코를 완숙하게 몰아간다. 티코는 내게 아주 소중하다. 이 애가 없으면, 나는 아마 뚜벅이 바리스타로 모양새가 빠질 것이다. 오늘 마감에 나타난 그 사람은 내 로키로드쿠키를 받고는 맛있게 먹고, 천천히 자리를 떴다. 모자에 살짝 손을 올리고는 인사를 하며 나갔다. 항상 아무말 없이 나갔던 그 사람이. 

 

나의 작은 방은 한낮의 열기에 푹푹 쪄서 찜찔방이 따로 없었다. 양치질을 하고, 브래지어를 끌어내고 가벼운 차림으로 매트 앞에 선다. 바리스타인 내가 하루종일 매장에서 손님 장단을 맞춰주는 예리한 감각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요가를 하기 때문이다. 무너진 호흡을 바로잡는 나의 복근과 허리 근육은 이 밤에 다시 단련된다. 대나무 피리 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로 나는 양손을 합장한다. 가슴 가까이에. 피리 소리가 저 멀리에서 바람을 따라 들려오면, 나는 숨을 한 번 길게 마시고 내쉰다. 그리고 수리야나마스까라를 시작한다. 양 손을 머리 위로, 숨 들이마시며. 상체와 하체가 위,아래로 반대 작용하는 힘을 느끼며 호흡을 몇 차례한다. 대나무 피리 소리가 그 굵고 긴 관을 통과하는 것처럼 내 숨이 나의 두 발을 거쳐서 하체를 지나 복부와 허리를 휘감고 척추를 하나 하나 타고 올라와 뒷목을 풀어주고 나서 합장한 손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동시에 다시 호흡을 그러모아서 또다시 반복하며 몸을 이완시킨다.  

 

대나무 피리와 피아노 반주는 절묘하게 서로의 소리를 주고 받는다. 아무도 먼저 뽐내려고 하지 않는다. 둘은 화합을 보여준다. 내가 호흡과 몸동작을 통(通)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요기니에게, 그러니까 나는 호흡과 몸동작 그리고 소리까지 함께 한다. 몸동작이 유(有)이면, 호흡과 소리는 무(無)이다. 존재자인 내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호흡과 소리.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나의 몸. 오늘 로키로드쿠키를 깨무는 그 사람 몸동작을 유심히 보며, 그 사람이 무척 소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바르게 행동하는 통에 그 소심함이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내 눈은 피해갈 수 없지. 그 모자에 그 앞 머리카락은 소심함의 분출구이다. 개자세를 하며 나는 숨을 깊게 쉰다. 내 두 다리 사이로 반대편 벽이 보이고, 내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진다. 한 발을 갖고 와서, 허벅지와 고관절을 이완시키는 동작을 하며 숨을 내쉰다. 수리야나마스까라를 3세트 해주고 나서 반달 자세, 학 자세, 삼각 자세로 동작을 마무리한다. 

 

샤워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켠다. 그 날 그 날 매장 매출을 기록하고 일기를 쓴다. 그 사람에게 처음으로 로키로드쿠키를 준 날이니까.  

 

어김없이 밤 10시 33분이 되면 그 사람이 들어온다. 오늘도 그랬다. 그러고보니, 그 사람은 올 해 여름이 막 시작될 때부터 내 카페 고객이 되었다. 1주일에 4-5번 혼자 온다. 항상 같은 모자를 썼고, 같은 헤어스타일이다. 바지는 면바지만 입는다. 오늘은 내가 그 사람이 가기 전에 미리 굿바이 로키로드쿠키를 주었다. 그 사람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마시고는 금방 자리를 비웠는데, 오늘은 문 닫기 직전까지 앉아있다가 내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내일 올까? 

 

분침과 시침이 한 곳에 머무를 때, 나는 카페 문을 연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매장 안으로 슬쩍 들어오자 그라인딩한 커피향이 더 무겁게 깔린다. 숨쉬기가 조금 힘들 정도로 꽉꽉 채워진 커피향에 익숙해 지려면 집중이 필요하다. 나는 소리로 집중한다. 분쇄기 소리는 멈추었고, 대신 클래식 음악을 카페 안에 울리게 한다. 메르쿠리우스의 날인 오늘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이다. 다양한 연주자가 있지만, 내가 선호하는 연주는 마냥 아름답고 섬세한 소리를 들려주는 연주자가 아니다. 마치 아이스링크 위에서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호(弧)를 그리는 것처럼 날렵하고 힘있는 활 연주를 하는 연주자를 선택한다. 이 점이 참 미스터리한 것이, 같은 4/4 사이즈의 바이올린 활이 현 위에서 긋는 장력의 힘이 연주자마다 다르고, 활과 현이 닫는 각도와 마찰력이 내는 울림의 매력이 다르다는 것이다. 악기 소리는 그 사람 목소리를 닮았다는 말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 연주자에게 내재된 노래가 악기를 통해 나오는 것이고, 결국 악기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바이올린 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면 밀도 높은 커피향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귀와 코가 함께 작용을 하는 이 시간 나는 어느 순간보다 명료해진다. 

 

수요일은 초코초코브루드라떼에 들어가는 다크 초콜렛을 만드는 날이다. 딱딱한 다크 초콜렛을 볼에 넣고 녹인다. 다크 초콜렛은 말 그대로 아주 쓰다. 그 안에 나는 설탕과 레드 와인을 넣는다. 레드 와인을 넣는 이유는 살짝 식초를 넣어서 입맛을 당기게 하는 효과처럼 달콤 다크한 초콜렛에 풍미를 더한다. 식빵에 건포도가 살짝 들어간 듯한 맛이랄까. 씁쓸하고 달콤한 다크 초콜렛 맛에 살짝 산미가 느껴지면 커피의 맛과 상충하면서 동시에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 상충하기 때문에 그 균형이 필요하다. 균형을 맞추자 초코초코 브루드 라떼는 아주 독특한 음료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 맛은 넛티와 비터니스, 그리고 마일드이다. 그래서 내가 만든 다크 초콜렛과 내가 그라인딩한 커피 원두는 서로 부딪히면서 동시에 조화를 이룬다. 어렵지 않다. 각각을 향기 맡고, 미각으로 느끼며 맛을 보고, 좋아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둘을 조합할 수 있다. 맛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자신의 맛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남들 입맛을 따라한다. 자신의 혀가 느끼는 그 묘한 느낌을 찾지 못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맛 또한 찾을 수 없다.  

 

메르쿠리우스의 날에 초콜렛을 만드는 이유는 수요일이 바로 일주일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 신은 신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존재였다. 박쥐같다고나 할까. 박쥐를 귀가 얇다고 하는데 이해를 하면 그렇지 않다. 박쥐는 두 세력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고 이쪽 저쪽 말을 다 듣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한다. 둘 다 인정하면서 동시에 둘 다 버린다. 헤르메스 신은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뱀이 교차하는 창을 들고, 동분서주하며 신들의 소식을 접하고 전해주고 그리고 판단한다. 헤르메스는 미술 작품에서 기둥으로 변신해서 작품에 비밀을 가져다 준다. 미술가들은 헤르메스 신이 지닌 그 능력을 미술 작품 속에 교묘히 넣어서 작품이 주는 표면적인 이미지 이상을 부여할 수 있었다. 기둥, 날개, 혹은 연금술사들이 사랑하는 노을 빛깔로. 나의 초코 초코 브루드 라떼는 수요일에 1주일의 균형을 맞춰주는 비법의 배리에이션이다. 

 

나의 초콜렛이 다 완성이 되어가자, 손님이 들어온다. 운이 좋은 손님은 따끈한 초콜렛을 넣은 초코초코 브루드 라떼를 마실 수 있었다. 손님은 쉬폰 소재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발목을 살짝 덮는 스니커즈를 신고서. 원피스 무늬는 바나나와 고릴라가 방사형으로 뒤덮혀 있고, 흰색 바탕에 노랑과 네이비 색깔이 섞여서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원피스는 아주 시원해 보인다. 그리고 그 스니커즈가 주는 액센트에 나는 아주 흐뭇해졌다. 깜찍함과 보이쉬함을 그 여성 손님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니 아이쉐도우 그라데이션이 남다르다. 이 여름에 눈두덩이에 그라데이션이라니. 게다가 그 색상이 연두와 노랑이 베이스이고 포인트는 네이비였다. 눈매가 네이비 색 때문에 다소 답답해 보일 수 있는데, 아이라이너를 깔끔하게 그려서 눈매가 살아났다. 두꺼운 아이라이너가 아니라 한 획으로 뽑아낸 아이라이너였다. 너무 튀는 눈매 표현 때문에 전체적으로 떠 보일 수 있는데 치크와 입술 색깔이 은은한 팥죽색 버건디이다. 손님은 초코초코 브루드 라떼를 수요일 마다 마시러 와야겠다고 좋아한다. 나는 로키로드쿠키를 하나 끼워준다. 환한 웃음을 보이며 돌아서는 손님. 오! 더 놀라운 것은 원피스 뒤에 빨간색 리본이 묶여있다.  

 

아까 본 두 가지 액센트. 스니커즈와 빨간 리본 덕분에 나는 아주 정력이 넘친다. 정력이라고 하니 에로틱한 장면이 연출될 듯 한데, 바로 그거다. 바리스타의 커피 뽑는 기술은 에로틱하다. 뜨거운 김이 쉭쉭 거리는 커피 머신기에서 악마의 액체라고 일컫는 커피는 크레마를 뽑아내는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적당한 시간과 적당한 압력에 의해 바리스타가 원하는 크레마를 추출해 내고 그것으로 그날의 커피 맛이 결정된다. 남녀가 만나서 서로 끌리고 긴장과 이완이 적당히 마모되는 순간까지 걸리는 시간과 육체적 접촉을 말하자면 커피 크레마를 뽑는 원리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시원하든, 뜨겁든 마시는 자의 미각에 의지해서 기호가 갈린다. 남녀의 육체적 사랑이든 정신적 사랑이든 둘 사이의 문제 아니겠는가? 휘파람이 나온다. 나는 손님이 나간 후에 커피 머신을 부드러운 천으로 한 번 닦아준다. 나의 애마 티코 못지 않은 나의 애장머신이다.  

 

나도 차가운 카페라떼에 로키로드쿠키를 입에 물었다. 시원 쌉싸름함과 달콤 톡톡이 어울린다. 쿠키는 앞니에서 톡하고 부러지는 맛이 있다. 로키로드쿠키는 들어있는 마시멜로 덕분에 쫄깃하기까지 하다. 친구와 카톡을 하며 오후 한낮에 쉬고 있는데, 정수리가 간지럽다. 눈을 들어보니 그 사람이 모자를 벗고 서있다. 앞머리가 곱게 빗겨져있고, 분명 머리카락이 보송보송해 보인다. 나는 주문대로 간다. 그 사람은 어떤 배리에이션이 좋냐고 묻는다. 나는 오늘은 다크초콜렛을 넣은 초코초코브루드 라떼가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 사람 옆에 한 여자가 서 있다. 성숙한 몸매와 풍성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여자이다. 그 사람은 아메리카노 핫과 아이스 초코초코를 시키고는 둘이 함께 자리에 앉는다. 함께 온 여자는 그 사람과 잘 어울렸다. 그 여자는 어느 남자에게나 잘 어울릴 여자 같아 보인다. 두 가지 음료를 가져다주고는 내 매의 눈은 관찰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오래된 인연이었다. 둘 다 말이 많지 않고, 적당히 얘기하고, 적당히 각자의 시간을 갖는다. 이런 그 사람에게 애인이 있을 줄이야. 내 매의 눈이 참새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뜨거운 에스프레소로 마음을 달래자.  

 

한참을 주문을 받고 한참을 계산대 옆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훤칠한 남자가 한 명 들어온다. 그러고는 그 성숙한 여인이 손을 들며 그 훤칠남에게 인사를 하고는 둘이 팔짱을 낀다. 그렇담. 그 사람 애인이 아닌가보다. 나는 다시 매의 눈을 상공 높히 뜨게 날개짓을 해본다. 훤칠남은 카라멜 마끼아또를 시킨다. 세 사람은 신나게 떠든다. 나는 갑자기 벽 한 구석에 있는 거울을 바라본다. 나의 짧은 커트머리와 갈색으로 물든 머리카락. 앞 머리카락은 한 쪽 방향으로 비슴듬히 이마 위에 있다. 이런 모습으로는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듯 하다. 한숨을 쉰다. 역시 나의 애마와 나의 커피 머신기만한 애장남이 없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앉아서 속으로 구시렁거린다. 이걸 끝내려면 역시 소리를 바꿔줘야 한다. 나는 매장에 흐르던 음악을 재즈로 바꾼다. 피아노 곡이다. 매끄럽고 알찬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멜로디가 들리자 그 사람이 나를 넌지시 쳐다본다. 나는 살짝 일어나 혹시 모를 주문을 기다린다. 

 

- 허비 행콕이죠? 

- 네.  

- 앨범 표지가 검정과 빨강으로 대비되는 디자인으로 기억되는데. 

- 맞아요. 저는 그 중에 이 곡을 가장 좋아해요.  

- 지난 번에 준 쿠키는 뭐에요? 

- 아. 굿바이 로키로드쿠키에요. 어땠어요? 

- 입 안에서 뭔가가 녹더라구요. 

- 마시멜로에요. 저는 마시멜로를 좀 많이 넣어요. 제가 좋아하거든요. 그 쿠키에서만요. 

  함께 오신 분들은 먼저 가셨네요. 친구 분과 오신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그 사람 대답을 들어야 할 순간이었는데, 손님이 왔다. 그는 주문을 받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재즈 음반을 들으며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 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다시 들어왔다. 손에 검정색 비닐이 들려있었고, 그것을 계산대 위에 살그머니 올려놓더니, - 쿠키에 대한 답례입니다. 나는 한심하게 고마워요라고 밖에 말 못했다. 그 사람은 다시 나갔다. 나는 비닐 안을 보았다. 금붕어 2마리가 들어있었다. 하나는 주황색, 하나는 까망색. 금붕어 눈알이 돌출되어 있다. 금붕어 두 마리는 내 방 침대 곁에서 잘 살고 있다. 이름을 지어줬다. 은과 호라고. 그냥 동시에 은호!하고 부른다. 그래서 어떤 금붕어가 은이고 호인지 잊어버렸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심한 냉방병에 걸리고 말았다. 카페를 이틀동안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 땀이 났고, 몸에 기운이 없었다. 누워만 있자니, 몸이 더 쳐졌다. 요기니인 내가 꾸물거리고만 있을 수 없지. 나는 정좌를 하고 숨을 고르게 한다. 교호 호흡을 시작했다. 왼손 검지로 왼쪽 콧구멍을 막고 나머지 콧구멍으로 3초간 숨을 들이마신다. 숨을 멈추고 하나,들,셋 세고 막았던 콧구멍을 열고, 반대편 콧구멍을 새끼손가락으로 막고 3초간 숨을 내쉰다. 다시 내쉬었던 콧구멍으로 3초간 들이마신다. 이 호흡을 무념무상이 될 때까지 한다. 콧구멍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깊은 호흡에 빠지고나면 머리가 환하게 밝아지고 몸이 정화된다. 

 

 호흡과 명상을 마치고 먹을 것을 챙겨본다. 스크램블 에그를 해야겠다. 계란 2개를 깨서 기름을 살짝 두른 후라이팬에서 몽글몽글하게 볶는다. 소금과 설탕 간을 해서 입에서 살살 녹아버리는 식감을 낸다. 우유 한 잔과 스크램블 에그로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친다. 이틀째 노는 날이다. 시간이 얼마없다. 오늘 오랜만에 평일 나들이를 간다. 화장품 매장, 문구 매장, 옷 매장, 구두 매장, 그리고 서점에서 가장 오래 시간을 보낸다. 평일 낮인데, 날씨가 아직 더워서 에어컨이 세게 틀어져 있었다. 내가 가장 오래 시간을 들여서 구경하는 책 코너는 요리책 코너이다. 한 장 한 장 세세하게 봐야만 레시피와 요리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요리책은 너무 크고 빳빳한 종이에 되어 있으면 싫다. 쉽게 접히고, 편하게 넘길 수 있고, 적당한 책 사이즈가 부엌 싱크대 위에서 용이하다. 페이지 위로 콧물이 똑 떨어졌다. 냉방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나는 휴지로 닦고는 코를 훔쳤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여전히 그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는 문학 코너 책장을 천천히 보고 있었다. 한 발 앞으로 갔다. 그 사람이 손가락으로 책 제목을 훑으며 읽어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한 발 더 앞으로 가자 그 사람이 책 한 권을 꺼냈다. 더 앞으로 다가갈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콧물이 자꾸 나오고 재채기까지 나올려고 해서 가까이 가기가 민망했다. 무슨 책을 좋아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저돌적으로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내 목소리에 내가 더 놀랐다. 그 사람은 내게 책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지 두 팔을 살며시 그 사람 어깨 위로 올리고 책을 받치고 있었다. 나는 책을 좀 더 알고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은 난감해했다. 그리고 나는 재채기를 정면에서 해버렸다. 다행히 그 사람 가슴팍에 해댔다. 나는 고개를 빼고는 휙 돌아서 나와버렸다. 기분이 상해버렸다. 내 행동에 내가 실망했고, 그 사람이 책을 보여주지 않는 것에 삐쳤다. 오돌오돌 몸이 떨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따뜻한 스프가 먹고 싶었다. 아니면 죽. 그러고보니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딱 달라붙어있었고, 옷은 요가를 할 때 입은 옷에 가디건만 걸친 채였다. 대실망이다. 나는 역시 뭔가 부족해도 많이 부족하다. 어서 빨리 장소를 옮겨야했다. 발을 구르며 걸었다. 이 꼴에 인사를 하다니.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냥 걸었다. 어딘가로 나도 모르게 걷고 있었다. 끌리는 남자가 얼마만인데,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단말인가. 아니다. 실수가 아니지, 이게 원래 나인걸. 내가 어디가나! 나는 코를 팽 풀고는 따뜻한 죽을 먹으러 갔다. 볶은 김치죽이다. 붉그죽죽한 죽이 한 그릇이다. 숟가락으로 퍼서 종지에 넣고 식혔다. 한숨이 나왔다. 그 사람이 내 앞에 앉아있다면 좋겠다고 어리석은 상상을 한다. 어쩌면 내가 같이 오자고 했다면 오지 않았을까? 좀 더 적극적일 걸 그랬나! 간간하게 볶아진 김치죽은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갔다. 구시렁거리는 나는 먹기에 집중이 더 잘 되었다. 아까 집에서는 평상심이었는데, 왜 지금은 구시렁거리는 걸까? 숟가락을 소리나게 놓았다. 그 사람 이름도 모르지않는가. 금붕어를 준 걸 보면 관심이 있다는 건데. 왜, 서점에서는 그토록 서먹하게 대했을까? 생각할수록 궁금해졌다. 죽을 먹고 나는 다시 서점으로 갔다. 

 

그 사람이 뽑았을 법한 지점에서 책을 찾아보았다.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래서 그랬나? 그 사람이 꺼려하는 태도였던 이유가. 난 로맨스 소설은 중고교 시절 이후로는 안 읽는다. 닭살이다. 내용이 항상 뻔하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데, 남들 연애사에 관심 두기가 억울했다.  

 

그 사람을 만났다. 만남이긴한데, 내가 망쳤다. 첫째, 내 모습이 엉망이었다. 둘째, 그 사람이 불편해했다. 셋째, 내가 팽 돌아서서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금붕어 이름을 얘기해주었더라면 분명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 수 있었을텐데, 난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는지 알고 싶었다. 나도 문학은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왔기에. 이제 생각이 났는데 마구 재채기까지 했다. 나 아직 그 사람 이름도 모르잖아. 매의 눈이 이럴 때는 맹점이다. 눈은 관찰을 하지만, 입은 조용하다. 중요한 정보를 알기 전에 그 사람을 내 머릿속 포트폴리오에 이미지화 해놓는 것에 특별나지, 정작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른다. 작업을 하려면 매의 눈보다 참새의 입방아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특히 여자라면. 매의 눈은 바리스타로 충분하다. 제길.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밤새 뜬 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냉방병과 불면증이 겹쳐서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내 목소리가 허스키가 되어버렸다. 카페 문을 열고 기운없이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고, 멍하게 앉아서 그 사람이 올까 안 올까 신경을 곧두세웠다. 꼭 금붕어 이름을 얘기해줘야지. 꼭. 그 날 쉰 목소리로 하루를 마감했다. 그 사람은 안 왔다. 11시 11분에 정리를 할 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마감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모자를 벗고 가슴에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그 쿠키가 생각이 났어요. 

-...  

바보. 나는 쿠키를 싸서 주고는 금붕어 이름 얘기하는 것을 쏙 빼 놓았다. 그 사람은 쿠키를 받고는 잠시 서성이다가 모자를 쓰고는 나갔다. 잠깐 멍하니 서있다가, 나는 앞으로 고꾸라지듯이 뛰어서 나갔다. 그 사람은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없었다. 돌아서는데, 문가에 그 사람이 쿠키를 물고 서 있다.  

-저기 제가 집까지 태워드리죠.  

그 사람은 모자를 살짝 들었다가 놓는다. 카페 문을 닫고 나오며 그 사람과 나는 나란히 걸어서 티코가 주차된 곳까지 걸었다.  

 

집은 근처가 아니라서 드라이브하는 기분이 들었다.  

-금붕어 이름을 지었어요. 은과 호라고요. 금붕어들은 제 방에서 잘 살고 있어요.  

-금붕어가 간혹 혼잣말을 들어주는 친구같죠. 제 방에는 수족관이 있어요. 괜찮으면 들어와서 보세요.  

그 사람 표정을 보고 싶었는데, 시야를 앞에 두어야해서 불가능했다. 내 목소리가 그렁그렁해서 말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숨소리에 가래가 섞여서 참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사람 집에 들어가서 수족관을 볼 용기가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냉방병이 시작되더니 독감까지 걸려버렸어요. 

-제가 감기에 특효인 차를 끓여 드리죠. 

그래. 들어가자. 나는 티코를 어느 골목 모퉁이에 세우고 그 사람이 산다는 투룸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이 먼저 계단으로 올라간다. 나는 조용히 뒤따랐다. 현관문을 열자 방 안에서 시트러스 향이 났다. 아니 난향 같기도 했다. 방 안은 적당히 깨끗했다. 창문이 넓어서 커튼이 반쯤 창을 덮고 있었고 그 앞에 바로 침대와 수족관이 있었다. 그 사람은 모자를 여전히 벗지 않았다. 나는 어떻할까. 앉아야하나, 서있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그 사람은 주전자에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모자를 벗지 않고 있는 그. 서 있는 나. 둘 다 아주 아주 서먹했다. 수족관. 맞어 수족관을 물어보면 되겠다. 은은한 불빛이 도는 수족관에는 물고기가 안 보였다. 한참을 보고 있자.  

-이 물고기들은 밤에 잠을 자는 물고기에요.  

그 사람은 수족관 귀퉁이에 손가락을 톡하고 쳐본다. 그러자 보라빛과 레몬빛이 그라데이션이 된 물고기가 빼꼼히 주둥이를 내민다. 수족관은 내가 기르는 금붕어 어항에 비하면 원룸에서 아파트로 비견된다. 수족관 안에 조약돌이 하얗고 반짝인다. 

 

그 사람은 여전히 모자를 벗지 않았고, 차를 한 잔 나에게 건넨다. 나는 안경을 고쳐쓰고는 물어본다.  

-모자가 트레이드 마크인가봐요. 

-... 

괜히 물어봤나 싶었다. 그러자 그가 스윽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한 번 뒤로 젖힌다. 그러자 그 표식이 드러난다. 왼쪽 이마 구석에 검붉은 자국은 데인 자국같다. 피부가 그 부분만 다른 질감으로 느껴진다. 그 사람은 모자를 다시 쓰려고 했다. 나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집 안에서 모자는 답답하죠.  

-... 

그 사람은 내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나는 차를 마시며 끓어오르는 가래를 참았다. 목구멍이 너무 간지러워서 기침이 나올려는 찰나. 그가 휴지를 몇 장 꺼내서 준다. 입에 휴지를 대고 기침을 했다. 가래가 나왔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차를 마시자 정말 폐에 박혀있던 가래 덩어리가 빠져나오는 기분이다. 

-이거 무슨 차에요. 향도 맛도 없어요.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했다. 나도 그냥 있었다. 아까는 시트러스 향 내지 난향이 은은했는데, 지금은 조용한 가운데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가위,바위,보라도 해야하나. 우물쭈물 하고 있자니 이상했다. 차를 다 마시자 가슴이 시원했다. 박하차인가? 박하처럼 시원하다. 

 

그 사람은 찻잔을 들고 개수대에 놓고는 옆에 삐딱하게 섰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있다. 우리는 둘 다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항상 내가 커피를 만들어주었는데, 이제 그 사람이 나에게 차를 끓여주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 그 사람 미간을 향해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는 내 앞에 왔고 안경을 벗겼다. 안경을 벗은 나는 가까이에서 그 사람 표식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키스를 하며 우리는 한참 있다. 내 입 안에서 그 사람 혀가 움직이며 어금니를 따라 앞니까지 움직였다. 나는 마치 물을 마시는 것처럼 시원했다. 우리는 길게 입술을 맞대고 서로의 물을 마셨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물은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다. 우리 몸이 느껴졌는지 싶을 정도로 키스는 길었고, 그것이 끝났을 때는 이미 침대 위였다. 침대 위에서 시트러스 향이 났다. 이곳은 정말 수족관이구나. 시원한 이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의 이마와 살짝 기른 머리카락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모자 아래에 있던 그 사람의 머리 모양이 눈을 감은 내게 느껴지고, 그 사람은 내 어깨와 가슴과 겨드랑이를 천천히 만져주었다. 수족관 너머에서 보면 우리 모습은 스크린에서 보는 모습 같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나는 눈이 떠졌다. 그 사람 눈이 나와 마주쳤고, 그것으로 우리는 부드러움 속을 뚫고 맹렬하게 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숨이 멎었다 쉬었다 그 박자에 따라 둘의 몸은 흔들렸고, 역시 수족관 너머에서 보면 마치 한 쌍의 해마 같을 것이었다. 나는 느끼고, 숨 쉬고, 그리고 수족관 너머의 그와 나의 모습까지 상상하며 한 편으로 그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는 걸 알았다. 아무렴 어때.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었는 걸. 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에 눈을 뜨자 내 방 안이다. 기침도 멎었고, 가래도 없었다. 어젯밤에 내가 어디에 있었더라. 나는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그 모자를 보았다. 내 방 안에 그의 모자. 나는 이마에 손을 짚고 어젯밤을 떠올렸다. 나는 깔깔깔깔 웃었다. 새벽이 다 되어서 그 사람이 내 방에 나를 데려다 주었고, 그 사람이 나갈 때 내가 모자를 그의 머리에서 내 머리로 옮겼다. 그 사람이 처음으로 웃었다.  

- 왓츠 유어 네임? 

마치 술을 한 잔 한 것처럼 나는 꼬부랑 영어로 물었다. 그 사람은 다시 한 번 내 입술에 키스를 하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침대에 쓰러져 자고 일어난 것이다. 

 

양치질을 했다. 아직도 어금니에서 앞니까지 그 사람 혀가 힘을 주며 지나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양치질을 하며 내 얼굴 왼쪽에 보조개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보조개. 나는 보조개가 없는데. 시트러스 향에 가까운 샴푸로 머리카락을 오래오래 문지르고, 샤워를 하고, 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그 사람과 몸을 섞었구나. 꿈같기도 했지만, 내 몸이 뭔가 바뀐것이 느껴지자 분명 현실임을 인정했다. 보조개가 옴폭 들어간 부분을 손가락을 눌렀다. 그 사람 이마에 그 표식이 느껴졌다. 어젯밤에 내가 그의 머리를 만지며 손가락 끝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은?  

 

우리는 통성명도 아직 못함... 나는 바리스타, 그 사람은 손님. 우리는 서로 쿠키와 금붕어를 주고 받았고, 서로의 집을 방문했고, 서로의 침대를 보았고, 그리고. 그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일지, 잠시 고민을 해본다. 게다가 보조개라니. 왜 보조개가 생겼지? 바리스타 요기니는 물을 한 잔 마시고 요가 자세를 생각해본다. 거꾸로 서기를 한다. 뒤집힌 내 머리 속으로 어젯밤이 떠오른다. 거꾸로 된 나의 몸은 여전히 느껴진다. 한참을 거꾸로 있었다. 어젯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다시 재생되고, 재생된다.  

 

여름이 다 가고 있다. 비가 며칠 내리자 뜨거운 바람이 선선하게 바꼈고, 밤마다 창문으로 가을을 알려주는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어본다. 그 사람이 카페에 오지 않은 지 하루, 이틀, 셋, 넷, 다섯, 여섯, 칠, 팔 , 구 , 십... 뭐야 십일이 넘어가잖아. 나는 모로 누워서 구시렁거리기 시작한다. 음... 분명 그 기분은 잊을 수 없고, 나는 그 사람과 잘 지낼 자신이 있는데, 그 사람은 원 나잇 스탠드였나! 흥... 그러라지 누가 기다린대. 사실 기다린다. 그저께는 티코로 그 사람 투 룸에 갔다가 불 꺼진 창을 보고는 돌아섰다. 쳐들어갈까했지만, 그러기에 내 모습이 초라하고 자존심이 없어 보였다. 그 사람은 내 안경을 갖고 있다. 나는 그 사람 모자를 갖고 있다. 서로 원한 것이 물물 교환이었다 이거지. 칫. 별로 좋아보이지도 않는 모자를 나는 밤마다 쓰고는 거울 앞에서 서서 표정 관리를 한다.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듯이 다양한 얼굴 표정으로 모자를 썼다 벗었다가 하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을. 늦여름. 그 둘 경계선 사이에서 내 마음은 설레임과 배신감 사이에서 널뛰기를 했다. 그네를 타기도 하고, 시소를 타기도 하고, 그러다가 과녁에 꽂아버린다. 완전히 잊어야지. 그래서 미용실에 갔다. 갈색 머리카락을 까맣게 염색하고 앞머리는 뱅 스타일로 고쳤다. 안경은 새로 맞췄다. 반짝이는 초록색으로. 까맣고, 하얗고-내 희망사항이지만,- 초록빛으로 얼굴을 연출한다. 요새 내 크레마는 조금씩 더 진해졌다. 배신감에 휩싸이면 비터니스가 강해졌고, 넛티는 물러갔으며, 그라인더가 분노의 분쇄기가 되었다. 습도가 사라지는 가을에 내 커피는 점점 쓴 맛이 강해져서 카페 손님들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얼굴을 구겼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내 얼굴빛이 정말 창백해져 있었다. 가을이 다 가고 있었다. 나는 요가를 꾸준히 했고, 그 가을 결단을 내렸다. 카페를 친구에게 맡기고 요가 공부를 하러 발리로 떠나기로. 바로 준비를 마치고 10월 마지막 날에 비행기를 탔다. 발리에서 10일 코스로 요가 자격증을 따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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