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 오는 밤

 -

 - 전 걸어갈래요.

 - 날도 추운데, 타랄 때 타지? 한참 가야하잖아.

 - 선배가 내리던지요.

 지영은 휙 돌아서서 걷던 길로 간다. 손에 든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지훈이는 시동을 끄고 그녀가 시야에서 벗어나기 전에 재빨리 쫓아간다. 그녀를 마주볼 수 있게 뒷걸음질 중이다.

 - . 걷지말고 차에 타 봐. 얼마나 좋냐? 따뜻하지, 편안하지.

 지영은 휙 고개를 들더니, - 선배 딴 맘 있는 거 아니에요? 한다.

 지훈은 순간 당황하지만, 여전히 꿈쩍없다는 듯이 자신이 얼마나 베스트 드라이버인지 과장되게 설명한다. 지영은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소리에 지훈이 말하는 것을 간간히 듣는다. 지훈은 말을 끝내자 지영이 팔을 붙잡고 말한다. -.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라.

 지영은 눈을 정면으로 뜨고 지훈을 바라본다. 지훈은 그 표정에 주눅이 들지만, 순간 그녀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말한다. - 너 그렇게 쳐다보면 키스하고 싶잖아. 지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걷는다. 할 수 없다는 듯이 지훈은 지영이 보폭에 맞춰서 걷는다. 지영은 걷다가 하품을 하고, 걸으며 가로수를 한참 쳐다보기도 한다. 완전 딴 세상에 있는 지영. 지훈은 점차 노기를 띤다. -. 너는 같이 걷는 나는 안중에도 없냐? 그럴거면 나보고 내리라고 하지 말던가. 지영은 풀린 눈으로 하품을 하더니, - 선배가 내린거잖아요. 선배가 선택한거에요. 그 말만 하더니 또 걷는다. 지훈은 찬바람에 얼은 두 귀를 손으로 감싸더니 속으로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어한다. 지훈은 자신이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이러는 건지, 정말 쌀쌀맞은 건지 잘 모른다. 횡단보도 앞에서 둘은 어색하게 서 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자 지영이 휙 돌아서더니 말한다. -이쯤에서 찢어져요. 이제 조금만 가면 돼요. 지훈은 황당하다. 황당해서 눈이 커진 지훈은 지영이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걷는 것을 멀뚱히 보다가 다시 쫓아간다. 지영은 다시 돌아선다.

 -선배 지금 제 방까지 따라오겠다는 거에요?

 - . 그야...

 - ...

 - 아니. 걱정되어서 그러지. 밤길에 여자 혼자는 그렇잖아.

 - 저 항상 이렇게 걸어다녀요.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마시고요.

 

 지훈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지영을 사로잡을 수 있나, 솔직히 모른다. 지영은 같은 과 후배인데 도도하고 공부도 잘하는데, 얼굴도 반반하다. 지성과 미모를 갖춘 여자가 지영만은 아닐텐데, 지훈은 지영이 쳐다보는 것이 이상하게도 두근거린다. 이런 자신의 마음은 알 턱이 없겠지. 지훈은 한숨을 쉰다. 지영이 저만치 간다. 정말 혼자서 걸어다녔다는 말이 맞는지,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씩씩하게 걸어들어간다. 어떻할까? 지훈은 잠시 서성인다. 지영이 자신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건가 아닌가. 도대체 지영은 틈을 주지 않는다. 아차... 지훈은 지영을 놓친다. 그녀가 갔을 법한 길에 도달하자 갈래길이 두군데가 나온다. 이런. 지훈은 갈팡질팡하다가 아무 길로나 뛰어간다. 아니면 돌아가면 돼지 뭐. 지훈은 지영을 완전히 놓쳤다. 다른 길로 접어들어서 찾아보아도 지영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지훈은 쭈구려 앉는다.

 -지영아.

 -선배?

 -. 너 어디사냐?

 - ...

 -. 나 두고 어떻게 혼자가냐?

 - ...

 띠리릭. 핸드폰이 끊긴다. 지훈은 다시 전화를 걸어보지만, 핸드폰은 꺼져있다. 제길...

 지훈은 담배를 한 대 피운다. 다시 전화를 건다. - 너 그러는거 아니다. 나 여기서 버틸거야. 나와서 얼굴 보고 들어가든가. 아니면 나 밤샌다. 지훈은 지영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다. 기온이 점점 내려간다. 지훈은 신발 속 발이 단단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낀다. 아까 담배는 다 피워버렸고, 할 일 없이 별이나 새고 있다. 지영에게는 여전히 연락이 없다.

 지영은 방 안에서 잠 자지 않고 생각한다. 핸드폰을 다시 켰더니, 음성 메시지가 와 있다. 듣고 보니 선배는 갈 것 같지가 않다. 나가서 만나려니 뭔가 찜찜하다. 선배가 자신이 사는 곳을 알고 싶어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인데, 지영은 지훈 선배에 대해 깊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가끔 농담을 하고, 밥도 사주고 했지만, 지영은 이 선배가 왜 이러지 싶었다. 게다가 선배는 이쁜 후배들에게는 잘도 그랬다. 지영은 좀 걱정이 된다. 한겨울인데. 정말 버티고 있는건가 싶다.

 -선배

 -. 왔구나.

 눈이 반쯤은 감긴 지훈은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지영을 본다. 지영은 지훈 선배가 한심해 보인다. 대체 왜 밤 중에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건가. 지영은  팔짱을 끼고 쭈구려 앉아있는 선배를 일으킨다. 자칫 잘못하면 동사라도 될 뻔했다. 지훈은 비틀거린다. 동시에 지영 어깨에 손을 올린다. 지영은 눈치채고는 선배를 밀어버린다. 앉았다가 일어난 터라 지훈은 균형을 못 잡는다. 벌러덩 넘어진 지훈은 움직임이 없다.

 -선배!

 지영이 놀라서 지훈 가까이로 간다. 이때다 싶은 지훈은 지영을 와락 끌어안는다. 지영은 버둥대지만 지훈 완력에 어쩌지를 못한다.

 -. 좀 가만 좀 있어라.

 지영은 바닥이 차갑기도 했고, 선배가 벌러덩 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하니 꼼짝 못하고 붙잡힌 형편이다.

 -. 저기 저 별 좀 봐라.

 - ...

 - 좋지 않냐? 잠깐만 이러고 있자.

 지영은 넌지시 하늘을 쳐다본다. 정말 겨울밤 하늘에는 총총히 별빛이 반짝인다. 지영이 잠시 감탄을 하는 사이에 지훈은 얼굴을 바싹 갖다대더니 말한다.

 - 이제 보니, 완전 아기 피부잖아.

 - 선배 이제 좀 일어나죠?

 - . 선배 선배라고 하지 말고, 오빠라고 해라.

 지영은 괘씸해서 지훈의 코를 잡고 꼬집는다.

 - ! 아아아아!!!!

 지영은 벌떡 일어나서 집 방향으로 간다. 지훈은 놓칠새라 잽싸게 쫓아간다. 지영은 뛰다시피 걷는다. 지훈은 그런 지영이 귀엽기만 하다. -. 누가 너 잡아먹는대. 같이 좀 가자. 지영은 딱 멈춘다.

 - . 이 자식아. 너 내가 나이 어리다고 쉽게 보이나본데 ...

 지훈은 지영이 자신을 바라보고 말하는 찰나에 다시 끌어안더니, 번쩍 들어올리기까지 한다.

 -자자.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얼이 빠진 지영은 잠시 그 상태 그대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지훈 선배를 쳐다본다.

지훈은 넉살 좋게 웃는다. 지영은 그런 모습을 보고, 내려달라 자기가 걷겠다 선배는 너무 자기 식대로 한다라고 말하며 애원조로 말한다. 지훈은 방긋 미소지으며 지영을 가볍게 내려놓는다. 지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이 귀찮은 선배가 자신을 들어올리는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면서 떨리기까지 했다.

 지훈과 지영은 결국 그녀 집 앞까지 간다. 원룸에 사는 지영은 불 켜진 방 안으로 이 선배가 들어온다면 어쩌지하고 걱정을 한다. 이제는 어찌해야할지 잘 판단이 안 서는 사람이 지영이다. 그에 비해 지훈은 지영이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훈은 지영이 방에 들어가고 싶다. 꼭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느냐 그건 둘째치고 지영이와 좀 더 있고 싶다.

 - 정말 집 앞이니까 이젠 혼자 들어가도 되죠?

 아까 반말로 화를 낸 기개는 어디로 가고 지영, 그녀는 지훈에게 묻는다. 지훈은 흐뭇하게 웃더니, 방 안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싫냐고 한다. 지영은 그 말을 하는 지훈을 빤히 쳐다본다. 지훈은 기다린다. 지영은 아무말 없이 휙 돌아서고, 지훈은 그대로 따라간다. 원룸 문이 열리고 둘은 함께 들어간다. 들어간 둘은 잠시 서 있다가 꼭 끌어안는다. 옷자락에 한기가 가득하다. 겨울 바람 냄새가 옷에서 풍긴다. 지훈은 지영이 입술을 찾아서 키스를 한다. 둘은 원래 끌린걸까? 지훈이 넉살이 좋아서 일까? 아니면 이 추운 겨울에 찾아 온 낭만일까? 한참 입술을 더듬던 그 둘은 옷가지를 하나씩 벗기 시작한다. 이제 바들바들 떠는 건 지영이다. 지영은 자신이 이러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안 난다. 결코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지영이가 싫다라고 하면, 분명 지훈은 그대로 돌아설 것이었다. 지영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반은 어의가 없지만, 반은 그냥 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지영 자신의 생각과 몸은 애석하게도 따론 논다. 그녀가 좀 더 주도적으로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 이미 둘은 서로의 몸을 알아가고 있었다. 지훈은 그렇다면 선수인가? 지영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훈은 지영이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것을 알고 꼭 안아준다. 지영은 방 안인데, 오돌 오돌 떤다. 깜짝 놀란 지영이다. 이럴 줄 몰랐지 않나? 지훈은 그런 지영이 사랑스럽다. 꼭 안아주고, 손으로 그녀의 몸 이곳 저곳을 만져준다. 지영은 그것이 싫지 않다는 것에 놀란다. 선배의 손이 자신의 어깨와 가슴과 배와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자 그녀는 자신의 몸이 반응을 하는 것을 느낀다. 지영의 얼굴에 홍조가 생기자 지훈은 그녀 위로 올란간다. 그녀의 다리는 그를 받쳐주느라 이미 벌어져 있다. 둘은 눈이 마주치자 깊게 키스를 한다. 지영은 키스를 오랫동안 하는 동안 그녀가 첫경험이라는 것을 선배에게 알려야 할 것 같다. 키스가 멈췄을 때, 지영이 부끄러운 얼굴빛을 하고 말한다. -선배 콘돔 있어?

 지훈은 씩 웃더니, 뒤로 돌아서 자신의 몸에 콘돔을 착용한다. 지영은 선배의 뒷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둘은 찰싹 달라붙는다. 지영은 이제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경험을 이렇게 할 줄은 몰랐지만, 그냥 한다. 몸이 따라가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둘은 그곳을 찾는 중이다. 지훈도 사실은 첫 경험이다. 지영과 지훈은 서로를 그렇게 알아간다. 지영이 지훈의 손을 들어서 그녀의 그곳 부근에 가져간다. -찾아봐. 지훈은 손으로 더듬어본다. 아무래도 미끌거리는 그곳에서 어디로 들어가야할 지 난감하다. 지훈이 그 곳을 애무아닌 애무를 하자. 지영은 몸이 달아오른다. 둘은 위, 아래가 뒤바뀐다. 지훈이 아래, 지영이 위로 올라간다. 지영은 망설였지만 손으로 지훈의 그곳을 쥔다. 지훈이 가벼운 탄식을 한다. 지영이 그 위로 올라탄다. 입구는 어디인지 아직 모르지만 둘은 서로에게 자극을 준다. 지영은 솔직히 겁이 난다. 그의 몸 위에 살짝 걸쳐서 입구 부근을 밀어붙히기가 망설여진다. - 못 하겠어. 지훈은 다시 그녀를 눕히고 자신이 직접 한다. 아무래도 시간이 별로 없다. 자신이 지치면 이 일은 안 될 것이다. 그녀의 무릎을 두 손으로 밀고, 그녀의 구멍 속에 꽂는다. 지영이 고개를 들썩이고 지훈의 팔을 강하게 잡는다.

 둘은 서서히 움직임을 탄다. 제대로 들어가자 움직임이 그냥 된다. 둘은 어리고 젊다. 서로가 몸을 허락하자 움직이는 몸의 반동이 유연하게 이루어진다. 턱을 살짝 치켜올린 지영이의 목을 지훈은 쓰다듬는다. 그녀의 몸이 따스하다. 하나. . ... 서로가 그 숫자를 세고 있는 것처럼 몸에 율동이 있다. 둘은 궁합이 잘 맞는 걸까? 점점 가까이 가까이 서로에게 밀착한다. 지영이 지훈의 등에 손을 갖고 가서 어루만진다. 애석하지만, 콘돔을 처음 사용하는 지훈은 언제 사정을 해야 할지 잘 몰라서 밖으로 줄줄 세고 말았다. 지훈은 당황한다. 의외로 지영은 아무 말이 없다.

 

 둘 다 첫경험치고는 잘 해낸 듯 하다. 이불을 꼭 끌어안은 지영은 옆에 누워있는 선배를 쳐다본다. 처음인데 지영이 힘들어하지 않은 걸 보면 역시 둘은 속궁합이 잘 맞나보다. 지훈이 집 밖에서 지영을 번쩍 안아 올릴 때 그 느낌을 지영은 잊지 못한다. 아마 그 때 부터 지영은 선배에게 끌린 것 같다. 남녀의 끌림은 대화도 중요하지만 이런 순간적인 제스처와 몸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지영이 지훈의 손을 꼭 잡는다. 둘은 서로를 다시 쳐다보고 가벼운 키스를 한다. 밖에는 어느새 흰눈송이가 날린다.

 -선배 창문 좀 열어봐.

 벌떡 일어선 지훈은 창문을 열어제낀다. 눈이 내리고 있는 터라 바람이 그닥 차지 않다.

 -이리와

 누가 부른 걸까 싶었지만, 둘이 동시에 말한 것이다. 둘은 웃는다. 지영이 이불을 돌돌 말아서 옆에간다.

 -눈이 내리네.

 -아까 나 밖에 있었으면 눈사람 됐겠다.

 지영이 웃는다. 지훈도 웃는다. 땅바닥에 천천히 눈이 쌓여가고, 지영과 지훈은 다시 몸을 합친다. 길고 긴 밤에 둘은 하나가 된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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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이란 없다고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말하고 있다. 이 영화를 두 번째 보고 있다. 대사가 참 좋다. 여주인공의 눈빛이 나를 이끈다. 오크룸에서 만나자고 말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주인공과 남겨진 또 하나의 주인공. 둘은 말을 별로 안 했지만, 둘의 눈빛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둘은 여성이고, 동성으로 만나서 세상에 또 이런 사랑이 있을까하며 서로가 헤어져 있는 시간을 되짚어본다.

 

  서랍을 연다. 그 속에 꽃분홍색 사진첩이 있다. 이제 20년 전 그 때 그 일을 떠올려본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필연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 사건. 이 서랍을 열었으니,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지. 우리의 꽃분홍 시절. 그러나 세밀한 조각칼로 우리를 계속 금 가게 했던 그 사람. 그 사람은 이 서랍 속에서 20년 동안 봉인 되어 있다고 보아야한다. 그동안 한 번도 입 밖에 내뱉지 않았으니. 지수는 여전히 아름다울까? 나는 이제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데. 꽃분홍 벚꽃이 점점이 날리는 봄날을 기억해본다.

 

돌아봐.

눈이 부셔서 못 돌겠어.

정말 잘 어울리는데, 지금 이 원피스 색깔이 소라이지?

소라? 일본어잖아.

그러니까 하늘색이란 말이야.

 

  지수는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 전체적으로 마르고 긴 몸매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항상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지수는 물 오른 꽃망울처럼 향기로운 아름다움이 있다. 수수해 보이는 옷차림인데 볼수록 그녀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지수와 나 그리고 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이 딱 한 장 있다. 사실 그 사람은 지나가는 행인이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정말 항상 지나가는 행인처럼 지수와 나 사이를 맴맴 돌았다. 그 사람이 존재함을 알았을 때부터 지수와 나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수의 하늘색 원피스에 돈까스 소스가 튈까봐 조마조마하는 사람은 나이다. 지수는 먹기에 다소 크게 썰어 놓은 돈까스를 한 입 한 입 먹고 있다. 나는 지수가 다 먹을 때까지 불편한 속을 참으며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아놓기만 한다. 지수는 기분이 좋은지 내가 먹는 모습이 눈에 띠지 않나보다. 아까부터 점심 먹고 보게 될 영화 이야기에 빠져있다.

 

  나는 기분이 좀 가라앉는다. 지수는 여전히 그 사람 얘기는 쏙 빼 놓고 있다. 분명히 그 사람 때문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을 텐데 말이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지수의 눈을 보면 내가 넘겨짚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저 눈빛과 목소리에 오히려 내 양심이 가책을 받는다. 그렇지만, 한 손이 이상하다 지수의 왼손 말이다. 그 손에 붕대가 감겨져 있다. 이제야 알아챈 이유는 붕대 겉에 손수건으로 감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왼손이 왜 그래?

그냥.

그냥? 붕대에 감겨 있잖아.

지수가 한숨을 쉰다.

나는 더 물어보지 못했다.

 

서랍에는 지수와 내가 주고받은 편지들도 있다.

 

나야. 지수. 놀랐지. 첫 편지를 쓰니까 기분이 말랑말랑하다. 우리는 고교 동창인데, 어째 대학 와서 이렇게 친해졌을까? 참 신기해 그치? 이건 편지라기 보다는 쪽지다. 쪽지. 자 그럼, ! Jisoo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을 치는 지수의 모습이 생각난다. B 플랫 메이저 곡이라서 시를 검은 건반을 쳐야하는데, 지수는 일부러 시를 제자리로 쳐서 이상야릇한 곡으로 만들고는 했다. 지수는 느린 악장을 잘 쳤다. 느린 악장의 4분 음표를 다다다다 입술로 16분 음표 리듬을 집어넣어서 느리게 쳐주었다. 느리지만 흐름이 자연스러워서 집중해서 듣게 되곤 했다. 지수는 지금 먼 이국땅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다.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나에게 함께 가자고 했는데, 나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클라리넷을 공부하고 있었다. 지금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이다. 나는 이제 글을 쓴다. 리뷰를 쓰기 시작해서, 혼자 소설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지수와 나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쓰고 있다. 이것은 나의 추측이 바탕이 된다. 왜냐하면 결국 지수와 나 그리고 그 사람을 한 번도 함께 만나게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수의 소라색 원피스는 내 방 상자 안에 있다. 사실 그 원피스를 내가 훔쳤다. 나는 한 번도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원피스를 벗은 그 때, 지수와 나는 한 여름 야외 수영장에 갔다. 톡 쏘는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야외 수영장에 풍덩 들어가서 우리는 한참을 놀았다. 나는 먼저 올라왔고, 지수의 하늘색 원피스를 내가 슬쩍 훔쳤다. 지수는 검정색 수영복에 내 가디건만 걸치고 집으로 돌아 와야 했다. 지수는 울었다. 나는 지수의 원피스를 내놓지 않았다. 그것을 검정 비닐 안에 꼭꼭 숨겨 내 가방에 넣어놓고 나는 모른 체 했다.

 

  그 날 나는 지수가 울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수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지수는 그 남자를 알고 있는데 내게 계속 돌려서 얘기했다. 이것은 내 추측이다. 우리는 한 번도 그 사람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삼자대면을 해본 적이 없다. 만약 했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더 나아졌을까? 그러니까 지수와 내가 단짝으로 지내지 않고 각자 남자 친구를 한 명이 데리고 다니는 성인 대학생이 되어서 지금과는 다른 인생 방향을 모색했을까. 우린 대학생이지만 여고생 단짝처럼 지냈기 때문이다. 지수가 나의 클라리넷 반주자였고, 내가 지수의 대학 내내 짝꿍이었으며, 그녀의 운전수였다.

 

여기서 내릴게. 땡큐.

어디 가는 지 끝까지 얘기 안 해 줄거야?

궁금하면 너도 같이 가자니까.

나는 레슨 있다고 했잖아. 너 일부러 나 떼어놓고 가려고 지금 가는 거구나.

지수는 한 쪽 눈을 찡긋하더니, 헤프게 웃었다.

다녀와서 얘기해줄게. 걱정 마.

  지수를 그 곳에 데려다주고 나서 나는 그녀가 입은 소라색 원피스를 찢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야외 수영장에서 나는 보드랍고 시원한 소재로 만들어진 그 원피스를 검정 비닐봉지에 꼭꼭 싸매서 가방 안에 숨겼다. 나는 지수가 내게 숨기는 것만큼 그녀를 혼내줄 생각이었다. 여전히 이것은 추측이지만,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는다.

 

안녕. . 지수. 오늘 그 사람을 만났어. 말이 없고, 침착하고, 말을 꺼내면, 아주 점잖았어. 나중에 너도 함께 만나자. 그럼 또. 쪽지 보낼게. Jisoo

 

 

  내가 과거를 추측하고 그 당시를 정의 내리는 이유는 그녀가 내게 쪽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에게 명백한 증거물을 남겼다. 여기 이 쪽지에 그 사람은 분명 그 남자이다. 그 소라색 원피스를 입고 나는 빼놓고 만나러 간 사람이 바로 그 남자이다. 아무리 내게 숨기려고 해도 나는 내 직감으로 알 수 있다

 

  지수는 썰어 놓은 돈까스를 남김 없이 다 먹었다. 나는 스파게티 면을 이리저리 헤쳐 놓기만 했을 뿐 반도 못 먹고 있었다. 지수는 붕대가 감긴 왼손으로 포크를 들더니 내 스파게티를 함께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2인분을 해치울 것처럼 먹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쿵 찧고 싶었다. 왜 그녀는 내게 아무 말도 안 해줄까. 나는 그녀와 그 사람이 무언가가 있어서 지금 이런 상태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했다. 나는 그녀가 스파게티 마지막 면을 후루룩 입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을 보고 화가 머리 끝 까지 났다. 나는 지수의 뒷통수를 때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 컵을 들고 뿌리는 상상을 했다. 그렇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그런다 해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을 지수일 것이다. 그녀가 무섭다. 나는 왜 그녀의 친구일까?

 

  점심을 먹고 들어간 영화관에서는 칼을 들고 목숨을 부지하는 검투사들이 나오는 영화였다. 현란한 검투사 복장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수는 화면에 빨려들어갈 듯이 의자 위에서 상체를 앞으로 보내고 있었다. 지수는 칼싸움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액션영화를 좋아했다. 나는 별로이다. 나는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나는 천천히 생각을 했다. 그 남자는 지수를 좋아한다. 그런데 지수는 헤프다. 마음이 헤픈 지수는 그 남자가 어떤 상태인지 그냥 넌지시 쳐다본다. 그 때 그 남자 손에 쥐어진 지수의 왼손은 너무 연약해서 그 남자의 완력에 의해 시퍼렇게 멍이 든다. 그렇다 바로 그거야. 그 남자는 지수에게 어떠한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거지. 왜냐하면 나 때문에. 내가 그 남자 얘기를 내가 먼저 꺼냈거든. 지수는 나보고 그 남자를 가지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소나기가. 우산을 들고 첨벙 첨벙 비가 고인 물을 찾아서 발을 굴렸어. 너랑 함께 하고 싶었는데... 너가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 사람 관심없어. 너가 가져. 그 사람은 너도 알고 있던 걸. Jisoo

 

  지수는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한 것 같이 내게 쪽지를 보냈지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을 한 번 보고 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인상을 가졌기 때문이고 그 사람이 지수와 한 동네에 살았다는 과거 때문에 계속 지수와 연관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그냥 그 남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껌처럼 여겼다. 나는 그녀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태도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장벽이 있음을 알았다. 지수, 그녀는 태도와 말에서 주변인으로부터 주목된다. 주목된 자신에 대해 그녀는 싱겁게 대처한다. 그냥 무심함으로 말이다. 우쭐해하거나, 우월감을 갖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는 그냥 큰소리로 웃어재끼거나, 조용히 앉아 있는 것으로 주변인들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그 점은 나도 그녀, 지수에게 끌리는 매력 중에 하나이긴 하다. 그녀와 있으면 시간을 잊는다. 그녀가 집중하는 것에 대해 나 역시 동조하게 된다. 마치 그 날 영화관에서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액션 영화를 함께 본 것처럼 말이다.

 

정말 죽이지 않니? 그 검투 장면은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렇지? 나는 오늘 밤에 그 검투사를 내 꿈에 초대하겠어. 나도 검술을 배워보고 싶어.

...

호랑이와 싸우는 장면에서 어쩜 그렇게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을까? 그게 물론 영화라고는 하지만 정말 리얼하잖아.

...

봐봐. 너는 어떻게 봤어?

. 그냥 그냥 보았어.

사람을 죽이는 걸 밥 먹듯이 하는 것이 어떤 기분일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잖아.

...

. 영화보고 나니 벌써 점심 먹은 게 다 꺼진 것 같아. 우리 파르페 먹으러 가자.

그래 그러자.

 

  그 카페에서 지수의 소라색 원피스는 더욱 밝아보였다. 모든 것이 무채색인데, 그녀만 칼라인 듯이 도드라졌다. 나는 초코 파르페를 그녀는 딸기 파르페를 시켰다. 우리는 과자를 하나씩 입에 물고 앞니로 똑똑 부러뜨려 먹기 시작했다. 소라색 원피스에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헤픈 웃음을 지으며 손수건을 그녀의 가슴께로 가져갔다. 나는 그녀가 내게 말하기를 바랐다. 그 때라도 솔직하게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수는 생글 생글 웃으며 파르페에 푹 빠져있었다.

 

인상파 남자를 한 명 봤어.

인상파? 마네, 모네, 드가...?

농담 하지마. 어떤 남자가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가다가 물건을 떨어뜨리길래 주워서 불렀지. 그 남자가 인상적이라고.

지수는 여전히 인상파 화가들 이름으로 농담 따먹기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별 물건은 아니고, 그냥 어떤 물건의 꼭지 같았는데, 떨어졌다고 했지. 그래서 주워주고는 살짝 인사를 하며 얼굴을 봤는데, 그런 무뚝뚝한 인상은 처음이었어. 그런데 잘 잊혀지지 않아.

너가 좋아하는 인상이 무뚝뚝한 거였어? 몰랐다. 나는.

나 지금 진지해. 벌써 한 달도 더 전에 그랬는데, 왜 그 남자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모르겠어.

그제야 지수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는 서랍 속에 있는 지수가 보낸 쪽지들과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 몇 장만이 남아있는 지금, 왜 나는 여전히 그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녀 지수에게도, 또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 둘을 똑같이 좋아했는데, 나는 그 두 사람에게 똑같이 버림받은 기분이다. 나도 한 때는 그 둘을 버리고 싶었다. 나의 존재감이 없는 듯한 기분에 시달리기 시작하자 모든 것에 나태해졌다. 지수는 결국 전공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갔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의 클라리넷은 20대가 분다고 할 수 없는 바람 빠진 듯이 축 쳐진 음색으로 점점 변해갔다. 레슨 선생님은 내가 부는 클라리넷을 듣고 있으면, 삶을 다 산 사람 같다며 좀 더 명쾌하고 또렷한 음색을 들려달라고 주문을 했다. 나는 리드에 집중하고, 클라리넷 몸통에 미세하게 움직이는 나의 숨결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언제나 소리는 쉰 소리였다. 나의 클라리넷이 바로 나의 마음이었다. 나는 슬픔과 무심함이라는 큰 벽 속에 갇혀서 나의 목소리를 계속 먹어대는 그 공간에서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관악기를 부는 데에 침이 모자라는 현상이 생겼다. 다른 이들은 침이 생겨서 불편해하는 것을 나는 침이 말라서 목구멍이 아프고 입 안이 얼얼했다. 나는 클라리넷에 메마른 내 혀를 자꾸 찔러 넣는 기분이 들었다.

 

  그 날, 2학년 모든 동기들이 연강홀에 앉아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정기 연주회에 지원한 동기들이 모두 자리에 엄숙히 앉아서 가뜩이나 무거운 공기를 더 텁텁하게 했다. 나의 클라리넷은 사막의 뜨거운 공기라도 받은 듯이 바싹 말라있었다. 내 입 안에 침이 고이지가 않아서 리드도 악기도 건조함 그 자체였다. 지수가 나의 반주를 맡았다. 지수는 나보고 눈짓으로 응원을 했다. 협주곡을 피아노 반주로 쳐내는 첫 도입부에서 지수는 긴장감 없이 휘몰아쳤다. 나는 박자와 마디를 느끼며 천천히 리드를 입 가까이 갖다 대었다. 나의 클라리넷이 치고 올라올 부근에 다다랐을 때, 호흡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리드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첫 소리는 괜찮았다. 둥글고 따뜻한 음색이 나왔다. 16분 음표가 빠른 페시지로 진행되고 있는 부분에서 나와 지수의 콤비가 완벽해야만 했다. 그 때, 나의 클라리넷이 서서히 수면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침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건조한 바람이 들어서는 클라리넷은 건강한 피아노 소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소리가 잦아드는 내 악기는 그 페시지가 다 끝나기 전에 쉭쉭 바람이 빠진 듯이 목이 쉬어버렸다. 지수가 당황하며 다시 그 페시지의 첫 소절을 반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바람을 넣을 수 없었다. 나의 입 속은 바닥이 갈라진 땅처럼 메말랐다.

 

  정기 연주회에 나와 지수가 나란히 연주를 할 줄 알은 동기들은 내 리허설을 모두 안타까워했다. 지수는 리스트 타란텔라2학년으로서는 쉽지 않은 곡이었는데,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연주를 해냈다. 그녀는 쉼표 부분에서 교수에게 지적을 많이 당했다. 너무 여유가 많다는 것이었다. 음악이 끊기는 기분이라며 단점을 들었지만, 그녀에게 그 쉼표가 에너지를 모으는 부분이었다. 지수는 박자를 자기 느낌으로 고집하고 쳐냈다. 그래서 늘어지는 부분들이 간혹 있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이 곡을 매력 있게 어필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매우 빠르고 테크니컬한 곡이었는데, 지수는 노래 부르기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박자에 맞게 쳐낸 것이다. 그녀는 이 곡을 쳐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서 조깅을 했다고 나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지수는 자신이 타란텔라빠르기에 익숙해지려면 온몸이 함께 해주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완벽한 연주를 바란 사람에게는 단점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동기들에게는 지수가 앞날이 창창한 피아니스트로 보였다. 그녀가 선택한 곡이 그 해 정기연주회에서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로 꼽혔다. 지수는 그 때부터 유학을 꿈꾸었을까.

 

너는 유학을 갈 것 같아. 나는 아닌 것 같고.

지수는 딸기 파르페를 떠 먹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기 연주회가 인생에서 뭐라고. 평소에 너 연주 좋았어. 빠른 페시지는 그 곡에서 일부분이잖아. 너 반주하며 너의 전체 연주를 들어보면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고.

지수는 나를 치켜 세워주었다. 나는 지수의 소라색 원피스에 눈을 고정하고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못하나봐. 그래서 침이 자꾸 마르는 것 같아.

나도 긴장을 하지. 그렇지만 그 긴장감이 에너지가 되는 순간을 찾아내야해.

지수의 눈빛이 진지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어쩌면 그녀는 내게 그 남자 얘기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고 느껴졌다.

리허설에서 내 연주는 완전히 드러났어. 교수들이 결국 나를 선택하지 않았잖아.

지수는 파르페에 꽂힌 스푼을 헛손질하며 말했다.

교수들이 너의 음악을 얼마나 알겠니? 너 음악은 너가 아는 거야.

지수의 말이 옳다. 나는 그 점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 지수는 자신에 대해 분명한 부분이 있었다.

 

  지수는 파르페를 싹싹 비웠다. 나는 지수에게 내 초코 파르페를 밀어주었다. 지수는 웃으며 난 초코 별로야. 그녀의 표정이 해맑아서 나도 웃었다. 우리는 친구, 콤비, 짝꿍이지. 나는 속으로 다시 한 번 그녀와 나를 정의 내렸다. 그녀와 나 사이에 그 사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틈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찰나, 지수가 말을 꺼냈다.

우리가 세 명이 되면 어떨까?

세 명...

. , , 그리고 한 명 더.

  지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카페에서 나오며 파르페는 지수가 지불했다. 나는 머리에서 미열이 나기 시작했다. 지수를 태우고 운전을 하며, 나는 속이 불편했고, 머리가 지끈거렸고, 눈 앞이 흐려졌다. 지수가 내 손을 잡으며, ‘너 왜 그래?’하는 순간에 나는 브레이크를 잡는다는 것이 액설러레이터에 헛발질을 했다. 순간 앞 차와 살짝 부딪혔다. 지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자동차 앞과 뒤가 경미한 접촉 사고가 났지만, 부딪히는 소음은 컸다. 지수는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누군가를 불러야했다. 지수가 부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병원에 누워있다가 눈을 떴을 때, 지수가 옆에 앉아 있었다.

 

괜찮아?

병원의 찬 공기가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주위 둘러보고 여기가 병원이구나 싶었을 때, 의사가 왔다. 의사는 별 이상이 없으니 퇴원해도 좋다고 말하고 바쁘게 사라졌다. 지수가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손을 잡아주었다.

차는 어떻게 되었어?

보험사도 왔고, 앞 차 주인이 우리가 대학생이라고 너그럽게 봐주시더라고. 보험 회사에서 잘 처리해준대.

지수는 자꾸 응급실 한 귀퉁이에 눈길을 주었다.

너는 이상 없는 거야? 나만 정신을 잃었나봐.

나는 괜찮아. 있지 곧 네 부모님이 오신대. 나 이만 가볼게.

지수는 좀 바쁘게 재촉했다.

나는 지수 손을 꼭 잡았다.

지수는 좀 어색해하며 내 손을 당겨서 내 무릎에 올렸다.

부모님이랑 잘 들어가.

 

  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서글퍼졌다. 지수가 가버리는구나. 나만 홀로 두고. 부모님이 오셨을 때, 나는 울고 말았다. 부모님은 깜짝 놀랐냐며 어떤 남자 분이 내 차를 사고 처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어떤 남자?’하며 생각에 휩싸였다. 지수는 그럼, 그 남자를 부른 것인가. 나를 두고 가버린 이유는 그 남자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인가. 잠시 멈춘 눈물이 더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가서 그 해, 여름 내내 나는 아팠다. 속이 불편하고, 식은 땀이 자주 났고, 설사를 해댔다.

 

  나는 점점 더 지수에게 배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기를 바란 그녀. 나는 지수에 대한 분노만큼 내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며칠 후에 나는 지수와 야외 수영장에 갔다. 여전히 소라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지수가 어린아이처럼 야외 수영장에서 헤엄을 쳤다. 나는 물보라를 일으키는 지수를 뒤에 두고 수영장을 나와서 탈의실로 갔다. 야외 수영장 탈의실은 바구니들로 가득했다. 주황색 바구니 틈바구니에서 소라색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준비한 검은 비닐 안에 원피스를 집어넣고 내 가방에 넣었다.

 

  지수는 검정색 수영복을 입고 내가 빌려준 가디건을 걸치고 버스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말이 없었다. 내가 그녀보다 더 피곤했다. 지수는 울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해 보였다. 나는 그러나 마음 속이 더 복잡해졌다. 지수와 나 사이에 금이 가고 있었다. 지수는 내가 원피스를 가졌다는 것을 알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남자 때문이라는 것도 알까. 지수는 그 날 헤어지고 나서 연락이 없었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어 학교로 간 나는 동기들 틈에서 웃고 있는 지수를 보았다. 지수는 나를 보더니 달려왔다. 나는 내 앞에 그녀가 있는 것이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지수는 나에게 여름 방학 내내 해외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다녀오느라 너와 만날 수 없었다고 흥분해서 말했다. 동기들이 한 차례씩 지수에게 마스터 클래스는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그 대화 틈바구니 속에서 숨이 막혔다. 지수는 이미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었다. 그녀는 탄탄대로로 뚫린 길을 향해 가고 있었고, 나는 사막을 향한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여름내내 아파서 피부가 푸석했고, 머리카락은 거칠었다. 나는 10년은 더 늙었다. 지수는 내가 뒤쳐져있자, 내 팔짱을 끼고 강의실로 향했다. 내 팔에는 어떠한 완력도 없었다. 누군가가 지수를 불렀고, 나는 홀로 강의실 문을 넘어섰다. 홀로 앉아서, 나는 혼자가 된 나 자신을 되짚어보았다. , 지수, 그 남자. 나는 강의 내내 창밖만 쳐다보았다. 가을학기 내내 나는 지수를 피했다. 지수는 마스터 클래스를 다녀와서 한층 더 성장해있었다. 교수들이 그녀를 칭찬했고, 동기들이 모두 선망했다. 나는 홀로였다.

  서랍을 열어 사진과 쪽지를 꺼내고, 소라색 원피스를 문에 건다. 사진 속에 지수는 이 원피스 차림이다. 그녀의 얼굴은 카메라 렌즈에 있지 않고,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셋이 되면 좋겠다고 한 그 말은 그 때 이후로 다시는 들어볼 수 없었다. 지수는 빠르게 피아노 전공 공부에 몰입해 갔고, 나와 그 사람만이 지수 곁에서 겉돌았다. 가을학기가 끝나갈 무렵 예술 대학 근처를 서성이던 그 남자를 발견했다.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봐도 인상이 깊은 얼굴이었다. 말이 없고 침착하다고 했지. 나는 천천히 그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지수 얘기를 꺼냈다.

 

지수 불러줄까요?

...

지수는 언제 만났나요? 제게는 말이 없었거든요.

그는 담뱃불을 붙이더니, 머리를 긁적이고 돌아섰다.

나는 바보같이 따라갔다. 그 사람은 내가 뒤따라오는 걸 알면서 계속 걸어갔다. 대학교 후문에 다다라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흘끗 보는 눈빛이 뭔가를 부탁할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게 자신이 지수와 자주 가던 카페가 있다며 함께 가겠냐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카페는 모퉁이 2층에 있었다. 좌식 카페였고, 칸막이가 되어있어서 개인 공간이 확보되는 곳이었다. 그와 나는 한 공간에 함께 마주보고 앉았다. 나는 그가 여전히 무뚝뚝한지 관찰했다. 그러나 무뚝뚝하기 보다는 침착하다는 지수 말이 옳았다. 반듯한 이마가 보기 좋은 남자였다. 그는 차를 시키고, 나는 코코아를 시켰다. 그는 말이 없이 차를 마셨다. 지수와 있으면 말이 많아질까. 지수가 말을 많이 했을까. 나는 여전히 속이 좋지 않았다. 따뜻하고 달콤한 코코아가 속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양 미간이 찡그려졌다.

 

지수와 사귀고 있는 건가요?

그는 나를 그제야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다소 절망적이었다. 찻잔을 들은 손이 한참 공중에 있다가 그가 입을 뗐다.

지수라는 이름을 오늘 처음 알았어요.

나는 머그잔을 놓칠 뻔 했다.

그는 지수를 사귀는 것보다 바라만 보는 것이 더 행복하다며 나에게 오늘 일은 지수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카페에서 나와서 그는 목례를 가볍게 하고는 돌아섰다. 나는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외쳤다. 저기요! 지수는 그냥 잊으세요. 그가 멈칫 섰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못 들었을까봐 다시 외쳤다. 지수는 잊으세요! 오후 한낮에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나도 잊고, 그 사람도 지수를 잊고.

 

  나, 지수, 그 사람 중에 누가 가장 이기적일까. 나는 금방 답을 알았다. 지수였다. 사랑은 이기적인 사람이 이기게 되어있다. 사랑은 이기적으로 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행복을 찾는 지름길이다. 특히 이렇게 얽혀있을 때는 말이다. 아픔을 감당하는 자는 이기적이지 않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자유롭다. 지수는 자유를 만끽하며 피아노에 몰두했다. 나에게는 여전히 쾌활했지만, 지수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공기는 냉랭했다. 지수는 어림없었다. 그 냉랭한 공기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에너지는 더욱 넘쳐났다. 그 사람은 그 후에도 간혹 예술 대학을 지나가고는 했다. 난 항상 그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지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비쳐지는가 보다.

 

  그 날, 경미한 접촉사고가 일어난 날 밤에 나는 밤새 지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밤새도록 전화를 받지 않은 지수. 나를 살며시 밀어내는 지수의 마음이 감지되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지수는 1순위였지만, 그녀는 이제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내가 연강홀에서 지수의 피아노 소리를 넘어서지 못한 내 클라리넷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가 더 이상 짝꿍이 아니라는 것을 묵언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소중한 것을 내가 빼앗아오고 싶었다. 내 분노는 밤새 뒤척이고, 지수에게 전화 걸고 하며 점점 더해졌다. 나는 많이 아팠지만, 지수에게 수영장에 함께 가자고 문자를 남겼다. 그 시간은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지수는 그 문자 답에 이렇게 응했다. ‘밤새도록 전화하고 결국 하고 싶은 말이 수영장 가자는 거야? 눈 좀 붙혀.’

 

  한 여름 햇살은 아침부터 톡톡 살갖을 건드리며 파고드는 강렬함이 있었다. 나는 눈을 잔뜩 찡그리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내 차는 아직 카센터에 맡겨두었고, 지수와 함께 버스로 야외 수영장을 가기로 했다. 그녀는 그 날 펄럭거리는 치마 너머로 길고 늘씬한 다리라인을 비추며 내게로 걸어왔다. 그 소라색 원피스를 입고, 레몬 빛깔 비닐 가방을 들고, 성큼 성큼 걷는 지수가 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너는 내 친구잖아. 내 짝꿍이잖아. 이런 내가 안 보여!’

 

  나는 그 큰 외침을 참느라 그녀에게 눈인사만 했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수는 그런 나를 무시하는 걸까. 내 표정은 관심 없이 한 여름 날씨 얘기만 이러쿵 저러쿵 하고 있다. 지수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람 같다. 나는 그녀와 있으면 그 에너지에 빨려서 내가 할 행동과 말을 망각한다. 버스는 한참을 기다려서 탈 수 있었다. 버스는 낡았고, 에어컨이 부실해서 창문을 열어야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지수는 내 맞은 편 차창을 쳐다보며 바람을 맞고 앉아서 저 멀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빈틈이 없다. 무엇이든지 깊이 빠져있는 듯 한 표정. 나는 그 표정을 훔쳐보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수영장은 이미 아이들과 가족들로 북적였다. 지수는 검정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나는 반팔 티로 내 몸을 가렸다. 우리는 물장구를 치고 튜브를 타며 더위를 물 속에서 식혔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첨벙거리는 물소리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의 몸은 그동안 아파서 힘이 없었다. 나는 튜브에 그냥 몸을 내던지고, 지수가 자맥질을 하는 모습을 넌지시 쳐다보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려고 여기를 온 것인지 잊고 있었다. 지수가 잠수를 하고 어푸 숨을 내쉬며 물 밖으로 나와서 큰 소리로 웃으며 나보고 누가 더 오래 잠수하는지 겨루자고 했다. 우리는 공기를 최대한 많이 입 속으로 빨아들이고 물 속에 잠겼다. 지수는 둥글게 몸을 말아서 아기 같아 보였다. 나는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숨이 막혀오는 것에 겁을 내고 있었다. 지수는 마치 물 속에서 사는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나는 숨이 막혀서 물 밖으로 나왔다. 멍했던 귀가 뻥 뚫리자, 멀리 탈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탈의실에서 옷을 벗던 지수가 떠올랐고, 소라색 원피스를 차곡차곡 개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소중한 것. 소라색 원피스였다.

 

  지수가 부드럽게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나를 툭 쳤다. 얼마나 오랫동안 탈의실을 쳐다보았는지 몰랐다.

. 너 무슨 생각을 그리 해?

. 나 배가 좀 아프다.

화장실 갈 배? 얼른 다녀와.

  나는 물 밖으로 나왔다. 몸이 휘청였다. 귀 속이 왕왕거렸다. 이마가 지끈거렸다. 숨이 가쁘기까지 했다. 아니 눈물이 찔끔찔끔 났다. 그렇지만 나는 그 소라색 원피스를 떠올렸다. 내 갑방 속에서 검정 비닐을 꺼냈다. 원피스는 흐느적거리는 원단으로 만든 거라 둥글게 뭉쳤다. 비닐에 원피스를 넣으며, 나를 다그쳤다. ‘이건 당연한거야. 당연하거라고.’ 빽빽이 들어찬 주황색 바구니에 지수의 하얀 속옷이 남겨졌다. 나는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지수는 여전히 물 속에서 유연한 몸놀림으로 유영하고 있었다. 나는 음료를 들고 지수에게 갔다. 우리는 시원하게 마시며 잠시 숨을 돌렸다. 지수는 오늘 정말 재밌다며 좋아했다. 나도 함께 웃었다. 내 마음이 편했다.

 

  해가 다 떨어지고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변해서야 수영장에서 나왔다. 샤워를 하고 탈의실에 들어가서 지수가 소리를 질렀다. 지수는 아무 곳에서도 소라색을 찾을 수 없었다. 주황색 바구니는 이미 다들 텅텅 비어있었다. 나한테 물어볼 여유도 없는 지수였다. 내게 이렇게만 얘기했다. ‘원피스가 없어졌어지수는 쪼그려 앉아서 한참을 있었다. 지수의 뒷모습이 수영장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지쳐있는 등을 내비치고 바닥에 쪼그린 둥근 지수의 몸은 딱딱한 석고상 같았다. 나는 살며시 손을 얹고 나직하게 말했다. ‘내 가디건 빌려줄게지수는 전혀 찾아 볼 의향이 없었다. 아주 간단했다. 내게 보았냐고 묻지도 않았고, 관리실에 항의를 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우리는 둘 다 서서 왔다. 그녀는 젖은 수영복에 가디건을 걸쳤고 앉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가는 빨갰다. 얼굴은 그러나 확연했다. 그 표정이 나는 싫어졌다. 나는 점점 불편해졌다. 그녀의 침묵과 표정이 나에게 항의를 하는 것 같았다. 나를 의심하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손잡이를 잡은 내 손에서 땀이 배었다. 나는 말도 없이 시내에 다다라서 내렸다. 지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가 떠나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지수와 나 사이에 갈 수 없는 거리가 내게 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멍하니 서서 버스를 몇 대 보냈다. 가방이 무거웠다. 걷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수였다. 문자가 왔고, 내리는 걸 못 봤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집으로 가고 있었다. 수영장에서 잠수를 하는 기분이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물 속에서 걷는 것 같았다. 지수와 나는 이제 멀리 와 버린 것 같았다. 지나가는 거리에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형편 없었다. 나는 지수에게 졌다. 나는 지수에게 이제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릴 것이다. 지수는 연락이 없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름 내내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흘렸다.

 

  가을학기가 끝나고 겨울에 이르러서 지수는 조기 유학을 결정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떠나는 것은 모험이었지만, 지수는 그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지수 머리카락은 길어져 있었다. 오늘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이다. 나는 가방 안에 소라색 원피스를 넣었다. 그러고 싶었다. 지수는 내가 카페에 들어서자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내가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지수가 저렇게 터프했던가. 지수는 한 껍질 벗고 나온 것 같았다. 허물을 벗은 뱀이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는 것처럼.

 

미국 남가주대학에 가기로 했어. 그 곳 교수님과 콘탁을 했는데, 좋은 분 같아. 미국은 물가가 비싸서 내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장학금을 놓치지 말아야지.

지수는 매우 침착했다. 내가 그녀의 짝꿍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처럼 들떠 있거나, 웃고 있지 않았다. 서른은 된 여성 같았다. 나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지수는 잠시 조용히 앉아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시선을 마주치기가 싫었다.

진희야. 너도 함께 가자. 거기 가서 다시 시험을 쳐서 대학에 들어가는 거야. 내가 너 반주자잖아. 너랑 함께 가고 싶어. 정말로.

지수의 목소리는 깊은 악기 소리처럼 나를 움직이게 했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울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내 속에서 할 수 없었다. 지수는 내가 다 울고 눈물을 거둘 때까지 조용했다. 눈을 들어 지수를 바라봤다. 지수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수는 정말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함께 가자고. 나는 힘을 내서 말했다.

싫어, 나는 더는... 너랑은 싫어.’

지수는 놀라지도 않았다.

손을 모으고, 턱을 위로 쳐든 지수는 떨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 그게 너 결정이라면.’

 

  아침 9시 오크룸에서 만나자고 한 금발 머리 여성과 백화점 단발 머리 직원은 다시 만난다. 그 장면을 보고 있다. 마지막 씬이다. 둘은 말이 없지만, 서로 눈빛을 보며 연결된다. 아름답다. 둘은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나는 그 금발 여성을 보며, 지수가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을 떠올린다.

 

  너한테 그 남자를 소개해주고 싶었어. 내가 보낸 쪽지를 너가 이해했다면, 너와 그 사람,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만날 생각이었어. 그 소라색 원피스는 그 사람이 내게 준 선물이었고, 그 원피스를 입고 나가야 그 사람이 나를 사귀겠다고 했거든. 그런데 그 원피스를 잃어버렸고, 나는 그 때 결정했어. 내 결정을 두려움에 두지 않겠다고. 내게 분명한 것은 피아노였어. 그 피아노에서 너는 항상 내 곁에 있어줬지. 너랑 함께 나가고 싶었어. 우리는 콤비잖아. 우리가 셋이었으면 어땠을까? 아마 내 인생에 마지막까지 의문일 것 같다.

 

  검정색 옷을 입은 지수를 남겨두고, 나는 카페 밖으로 먼저 나왔다. 겨울이 다가오는 잿빛 하늘에서 가느다랗게 눈이 내려온다. 옷깃을 여미고, 나는 소라색 원피스를 만졌다. 나는 지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수는 알 것이다. 우리는 친구였고, 콤비였고,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사이에 금이 가게 했다는 것을. 소라색 원피스는 우리에게 영원히 수수께끼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서랍을 닫는다. 서랍 속에 있던 사진과 소라색 원피스를 들고서는 마당으로 나왔다. 나는 성냥을 그어서 그것들을 불 속에 넣는다. 지수도 나도 너무 오랫동안 그 남자에게 신경을 써왔다. 며칠 후면 지수는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한다. 그녀는 홀로이고, 나도 아직 홀로이다. 우리가 얼마나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지 솔직히 실감이 안 난다. 그녀를 만나면 이제는 똑바로 눈을 쳐다보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오길 기다렸다고.’ 우리는 아마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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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 귀퉁이에 사선으로, 하늘거리는 먼지. 그 먼지가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모양새를 보면 꼭 그 여자의 춤사위 같다. 메마른 몸에 폭이 넓은 옷가지를 걸치고 휘적휘적 걸으며 손짓, 발짓으로 허공에 그려대는 호()를 보는 것은 내 일상 속에 작은 구멍을 내어 나를 그 속에서 조용히 쉬게 해준다. 그 여자는 꼭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서, 은 머리까지 손발과 함께

()를 그린다. 마치 치타의 꼬리처럼, 그 머리카락은 빳빳하게 서서 몸 전체에서 마지막으로 균형을 잡아주는 기능을 하는 것 같다. 그 여자는 나이가 좀 들었다. 다른 무용수들이 빠르게 발을 구르고, 회전하고, 공중으로 뛰는 반면, 그 여자는 걸으며 손발과 땋은 머리로 곡선을 그려낸다. 그 춤을 보고나면 거미줄처럼 걸려있는 먼지가 떠오른다. 아무런 득도, 해도 없는 먼지. 그 여자는 그런 존재감으로 춤을 춘다.

 

  오늘은 그런데, 그 여자의 머리 위에 족두리로 보이는 화관이 얹어져 있다. 그 머리 위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여러 꽃 장식들이 수근대는 모습은 그 여자가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작은 속삭임처럼 내 귀를 간지럽힌다. 그 여자의 시선은 항상 손 끝이나, 발 끝, 혹은 등 뒤로 지나가는 바람에 머물러있다. 오늘은 그런데, 눈을 감고 화관의 속삭임을 듣는 지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그 여자는 또한 무용수 화장을 하지 않아서 나이가 가늠이 안 되기도 한다. 화관이 오들오들 떨고, 눈꺼풀에 있는 미세한 속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인다. 그 여자는 오늘 따라 팔을 가만히 두고 발걸음에 집중한다. 발걸음은 지그시, 땅을 누르는 힘이 나에게 전달되는 그런 모양새로 내 마음이 함께 한다. 수수한 옷가지에 팔은 얌전히, 발걸음은 다소 무겁게, 화관만이 덜덜덜 떨며 움직임을 표현하는 춤사위가 그 여자의 눈꺼풀처럼 평안하다. 나는 그 여자가 만든 공간 안에서 안온해진다.

 

  나는 그 여자의 춤사위를 사진대신 글로 쓴다. 사진이 순간을 담아내지만, 글은 그 순간을 영원한 인상으로 풀어낸다. 그 여자는 춤사위가 끝나자, 여전히 눈꺼풀을 덮은 채로 천천히 배꼽인사를 했다. 화관이 파르르 떨고 있고, 그 외에는 무거웠다. 소리도 공간도 그 모습 속에 봉인되는 순간이었다. 음악이 있었던가? 그 여자의 춤에는 오직 북소리만 있다. 그것도 단 하나의 북소리가 긴 호흡으로 드문드문 울린다. 그 여자는 첫 북소리가 울리면 고개부터 든다. 시선은 항상 저 너머에 있고, 고개가 들리는 순간 공간이 열린다. 공간에 그려지는 곡선들은 어지럽지 않고 오히려 규칙적이다. 그것은 색이 없는 만다라와도 같다. 그 여자의 춤은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움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임도 아니다. 그 여자의 춤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다. 해서 나는 내 일상에서 그 여자를 통해 쉼을 얻는다.

 

  오늘은 그런데, 그 여자를 인터뷰하게 되었다. 내가 쓴 글이 그 여자 마음에 들어서 그 여자는 내 인터뷰 요청을 받아주었다. 나는 그 여자를 만나러 공원으로 간다. 그 장소는 그 여자가 정한 곳이다. 15분 먼저 도착했다. 공원은 아담했고, 공원수가 제법 울창했다. 나무 벤치대신 돌계단에 앉았다. 나는 기자가 아니다. 나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나는 그 여자를 바라보고, 이야기 나누고, 머릿속에 담았다가 글로 써 내려갈 것이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고, 어디선가 탁탁거리는 소리가 퍼진다. 나는 그 소리를 따라 눈길을 주었다. 그 여자는 쪽빛 색깔 치마에 청자켓을 입고, 썬글라스를 꼈다. 그리고 왼손에 우산이 들렸다. 아니 들지 않고 땅에 한번 씩 북소리마냥 콕콕 찧고 있었다. 걸음은 힘찼지만 바쁘지 않았고, 시선은 썬글라스에 가려져있다. 나는 엉덩이를 돌계단에서 떼고 그 여자를 마주본다. 적당한 거리에서 그 여자가 멈추었고, 살짝 고개를 바람결 따라 움직이더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 여자는 꼿꼿히 섰다. 바람이 내 등 뒤에서 그녀를 향해 천천히 나부낀다. 북소리가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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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라봐.

-송곳, , 도끼, 혁대, 망치.

-송곳.

-?

-가장 뾰죡하잖아.

나는 상상한다. 그의 가슴에 두 손으로 송곳을 깊숙이 찌르는 것을. 그의 피가 그에게 날개가 되어준다. 피가 점점이 방울져 떨어지고 상처는 아주 가느다랗게 깊이 파인다. 다만 바로 심장에 꽂아야 하리라. 그래야 그가 편안히 잠들 수 있겠지.

 

달린다. 비틀거리며 달린다. 그 애는 지금 큰 적을 피하고 있다. 술에 취한 적은 그를 찾아 이곳저곳을 쑤시고 있다. 그 애는 흐르는 코피를 닦지도 못하고 뛰어간다. 그 적이 그 애의 얼굴에 주먹질을 했다. 술을 마시면 그 적은 그 애가 샌드백이라도 된 줄 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시니, 그 애는 하루도 샌드백이 되지 않은 날이 없다. 그 애는 울지 않는다. 가슴이 무겁다. 울음을 꾹꾹 누르고 뛰어가는 그 애는 다리가 땅에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하늘 위로, 위로 올라가길 바란다. 누군가 그 애를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그 애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어느 지하 노래방이었다.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음정과 박자가 맞지 않는 듣기 괴로운 노래였다. 고함과 같은 그 노래 때문에 옆방에서 놀고 있던 나와 친구들은 짜증을 냈다. 노래방 사장에게 방을 바꿔달라고 하려고 나가자, 노래가 끝나 있었다. 그 애를 본 순간 나는 시간이 멈춰진 것 같았다. 그 애는 너무 깊은 눈빛을 하고 있어서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정도였다. 나는 그 눈빛에 공간을 잊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애에게 말을 붙여 보고 싶었다. 친구들이 조잘대며 나를 방 안으로 끌고 갔다. 그 애를 만나기 위해 다시 그 노래방에 혼자서 갔다. 사장에게 물어보니, 그 애는 귀가 잘 안 들리는 애라고 했다. 노래방 손님들이 그 애 때문에 불평이 많다고 했다. 다행인건 그 애가 매주 한 번씩만 이 노래방에 오고, 딱 한 곡만 부르고 간다고 했다. 나는 사장에게 그 애가 언제 오는 지 물어보고 노래방에서 나왔다. 그 애를 만나고 싶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생각에 빠져서 걷다가 무심히 그 노래방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 때, 그 목소리가 들렸다. 괴로운 소리지만 마음을 훔쳐가는 소리. 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 이상한 소리가 어느 방에서 흘러나왔다. 문을 열었다. 모자를 쓰고 빗물이 축축이 젖은 점퍼를 입은 그 애였다. 내가 들어온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노래방 기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미묘하게 뒤틀린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우산에서 흐르는 물이 내 다리를 적시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소리가 내는 거센 파도에 묻혀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 애 기척을 못 느끼고 부동자세로 있다. 그 애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그 애의 눈을 두 번째로 본다. 그 애는 눈이 어둡지만 깊고, 매섭지만 외롭고, 풀린 듯 한 눈동자로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나는 그 애가 내 곁을 바람을 가르며 지나치는 것을 세우지 못했다. 그 애는 다시는 이 노래방에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부동자세로 서 있다. 내 눈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내린다. 그것은 뜨겁다. 나는 피가 나오는 것 같아 무서웠다. 나는 내 눈을 마구 만졌다. 다시 듣고 싶은 그 애의 목소리였다. 그 후, 그 애를 그 노래방에서 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가을이 가고, 눈이 내린 추운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이 되었다.

 

-. 잤어?

-무슨 소리야?

-기집애. 너 얼굴 빨개지는 거 보니 맞네.

-웃기지마. 딴 생각했어.

내 친구는 나를 자꾸 닦달했다. 잤냐는 것이다. 그 애 얘기를 계속 하는 내가 좀 이상하긴 하다. 그런데 한시라도 그 눈빛을 잊을 수 없고, 그 목소리, 그 뒤틀린 음정을 싫어할 수 없다. 내가 이상하긴 한가봐... 그 애는 나보다 서너살은 어려보였다. 그 날 마지막으로 보고나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 노래방은 없어졌다. 다시 찾아갔을 때, 중국집이 개업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그 애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는 대학 도서관에 간다. 그 곳에서 화집을 구경하며 논다. 카라바지오의 섬세하고 둥그스름한 인물들의 몸이 보인다. 루오의 두꺼운 붓 터치가 그려진 인물들도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해괴한 그림도 있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수록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그냥 대충 봐줘야 하는 그림이다. 공포영화를 많이들 본다. 하나 밖에 없는 오빠가 공포영화의 매니아였다. 오빠의 눈에는 그 영화의 색감이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너무 생생했다. 공포 영화에서 나온 캐릭터의 분장 기술은 당시 한국에서는 따라갈 수 없는 능력들이라서 나는 그 새로운 캐릭터들에게 끌려 다녀야 했다. 그 캐릭터들은 붉은 피를 쿨럭 쿨럭 거리며 분출해댔다. 나는 어렸고, 그 비현실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영화 속 효과음은 나를 전율시켰다. 얼어붙게 했다. 꼭 그 캐릭터들이 등장할 때는 신호음이 있다. 날카로운 금속음, 이상한 전자 음악소리, 샤아악 거리는 숨소리. 나는 TV밖에 있었지만, 내 몸은 영화 속에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부딪혀야했다. 화집을 구경하고 나서 패션 잡지를 본다. 모든 모델들이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특히 한 명의 모델이 등장할 때 그렇다. 나는 미용실 유리 창문에 DP된 사진을 한참 바라볼 때가 있다. 눈동자를 나에게 고정시킨 모델들은 날렵한 턱을 갖고 있고, 세련되고 풍성한 머릿결을 보여준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한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한 때, 나는 그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 모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친구에게 말했더니 나보고 농담하지 말라고 했다. 난 분명 보았다. 긴 머리의 남자 모델의 눈동자가 나에게 말하는 것을.

 

 

비가 내린다. 봄비이다. 봄비는 물비린내를 맡을 수 있다. 우산으로 촉촉이 비가 내려오고 그 우산 아래에서 물비린내를 한껏 들이마신다. 이대로 계속 걷는다. 우산이 마를 때까지 걸어봐야겠다. 땅에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걸으며 봄비를 밟는 소리이다. 신발 앞코가 푹 젖는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횡단보도 앞에 섰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얼굴을 왼쪽으로 향하고 있는 한 남자가 서 있다. 그 사람이 어디를 보고 있나 시선을 따라가자, 내 뒤편으로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남자는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다. 다리가 땅에 닫자 동시에 무릎과 허벅지가 반동으로 오징어 다리처럼 휘어지며 절뚝된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본다. 횡단보도를 건넌다. 나는 아주 천천히 걸으며, 다리를 저는 남자가 앞으로 가는 모습을 훔쳐본다. 넓적하고 폭이 넓은 바지 안의 그 다리는 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저렇게 절고 있는 걸까? 세상은 참 뒤엉킨 것들이 많다. 그 뒤엉킴 속에서 아름답게 보이려면 추함을 뚫고 넘어설 수 있는 어떠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것이 나는 궁금하다. 그것은 절대로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음악이 있다. 매우 새로운 사운드를 지향한다. 분명 거친 음색들이 가득한데, 그 소리들이 어떠한 구조 속에서 매우 강렬하면서 멋진 느낌을 준다. 물론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몫도 있다. 그 사운드에서 박자를 느끼고, 음정을 맞추고, 소리의 흐름에 몸을 던지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에너지가 큰 몫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세상에도 적용시킨다면! 아까 봤던 그 아저씨의 출렁이는 다리를 받쳐주는 튼튼한 신발이 멋지게 신겨져 있어서, 그 사람이 다리를 저는 모습이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마 그런 세상이 온다면 그 아저씨는 좋아할까? 장애인은 절대로 불편하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히려 그 장애인을 안타깝게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주는 감옥이 괴롭다는 것이다. 우산이 빳빳하게 마르자 내 신발 앞코도 뽀송해졌다. 우산을 가지런히 접어서 돌돌 말아서 백팩에 넣는다. 무심히 하늘을 스윽 쳐다보고, 빗물에 씻어진 건물들을 본다. 건물들이 하나같이 비슷하다. 직사각형 3,4층 건물. 벽돌이든지 시멘트이든지 외관이 닮아있다. 간판들은 색색으로 제각각 이지만 역시 직사각형이다. 그리고 그 속에 간판 활자는 2곳에서 3곳을 규칙적으로 비슷하게 닮아있다. 어떻게 다들 비슷한 것을 추구할까? , 이곳에는 눈에 띠는 멋진 간판 하나, 멋진 건축물 하나 없을까? 삶이 비루해지는 순간이다. 건물들 너머에 엷은 파란 빛깔의 하늘이 없다면 나는 거리를 걷지 않을 것이다. 간판을 보는 것, 건물을 보는 것은 표정이 없는 인간 군상을 보는 것처럼 지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어폰을 끼고 걷는 이유는 시선의 자유를 더욱 느끼기 위해서이다. 소리에 반응하며, 나의 눈동자는 스타카토처럼 길거리를 응시한다. 한 번에 다 보는 것 같지만, 동시에 작은 스티커를 찾아내는 것처럼 길거리 속의 액센트를 짚어내고야 만다. 음악은 그 행위를 위해 도와준다. 나는 계속 걷는다. 그러다가 지루해지면 카페에 들어가야지. 대학교 후문에서 직선으로 곧장 걸어서 오거리 교차로 이르러서 다시 직선으로 걷는다. 사거리 교차로에 이르러서는 우회전을 해서 명동에 다다른다. 걸을 때는 최대한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명동에서 좌회전해서 다시 직선으로 걷다보면 호수가 있다. 그곳까지 와서 나는 벤치에 앉아 쉰다. 비는 이미 그쳐 있었고, 봄날을 맞은 사람들이 우산을 하나씩 들고 호수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 그 애 나 봤다.

-? 그 노래 부르는 남자 애 말야?

-. 맞아 그 애가 명동에서 마이크도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앞에 동전 바구니를 두고. 노래가 하도 뒤틀려서 사람들이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가고 있었어.

-언제 본거야? 명동에 가면 매일 있는 거야?

-그건 모르겠고, 지난 토요일 명동에서 점심 먹고 걷다가 본 걸. 네가 말한 그 애 맞지?

 

새 학기가 시작하고, 곧 여름이 다 되어가는 동안 나는 그 애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친구가 내게 그 애 얘기를 먼저 꺼냈다. 나는 벌써부터 내 배가 싸르락하며 반응을 한다. 왜인지 모르게 그 애 생각만 하면 나는 몸에 이상한 전조 증상처럼 느낌이 왔다. 이번 수업 시간에는 중국의 고대 왕조에 대한 역사를 공부한다. 강사 선생님은 수업 시간 내내 영화를 한 편 감상할 것이라고 했다. 원형으로 생긴 강의실에 스크린이 내걸리고, 조명이 꺼진다. 영화는 중국인의 음악적인 성조가 없다면 지루하기 그지없을 영상을 계속 내뿜는다. 고대 중국의 왕조라고 해서 특별한 것을 발견하기에는 내가 아는 역사 배경이 없다. 영화 막바지에는 한 신하가 왕의 어명으로 눈을 잃는다. 뜨거운 쇳덩이를 눈 앞에 갖다 대는 무서운 형벌을 받고 실명을 한다. 그 장면에 가서야 나는 정신이 든다. 영화가 끝나고 강사 선생님은 말한다. 중국 고대 왕조에 대해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점이 무엇일까요? 누군가가 손을 든다. 한 남학생이 말한다. 고대 왕조에도 살벌한 형벌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학생들이 모두 웃는다. 강사 선생님은 그 말을 나름 깊이 있게 받아들이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 말에도 뭔가 고대 왕조의 특징이 있지요. 또 다른 것은 없나요? 내가 손을 든다. 그 상형문자요. 그 상형 문자를 거북이 등껍질에 새기는 장면이 인상적인대요. 좋아요. 강사 선생님이 말한다. 그 점도 간과할 수 없지요. 또 없나요? 나는 그 대답을 끝으로 살그머니 강의실을 나간다. 그 애를 보려고 명동으로.

 

걸으며 계속 되뇌인다. 안녕! 나는 김지영이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안녕! 나는 너를 예전에 본 적이 있어. 너 그 때 노래방에서 나 본 거 기억하니? 안녕! 나는 대학생 누나야.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지 않을래? 안녕! 나는 김지영이야. 너를 만나고 싶어서 지금 학교에서 여기까지 왔어. 시간 좀 내줄래? 나는 계속 내 말을 되짚어본다. 그 애를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인사가 무엇일지 고민한다. 그 애를 단숨에 사로잡지 못하면 어물쩡거리다가 나는 그냥 바구니에 돈만 넣고 지나칠 것만 같다. 해내야 해. 나는 계속 우물우물 말을 걸어본다. 그 애가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명동 거리를 걸으며 나는 그 애 목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쫑긋 세운다. 눈동자를 길거리에 고정시키고 샅샅이 뒤져본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 애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세 번을 명동거리를 왕복한다. 나는 지친다. 그 애를 보기가 이리도 힘들다니.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중앙시장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냄새나는 순대를 판다. 나는 순대와 떡볶이를 시켜놓고 먹는다. 꾸역꾸역. 왜 그렇게 먹는지 나 자신은 모른다. 그냥 먹어야 힘이 날 것 같다. 순대는 모락모락 김이 난다. 시뻘건 떡볶이는 국물이 걸쭉하다. 순대를 국물에 한껏 묻혀서 입안에 들이민다. 혼자 먹기에 많은 양을 시켰다. 나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그 애를 못 본 대신 이 짓이라도 해야 분이 풀릴 것 같다. ? 나도 모른다. 나는 모른다는 생각으로 또 떡볶이를 입안에 들이민다. 다 먹어치우자 가게에 들어온 지 10분이 지나있다. 그렇게 빨리 해치우고 나는 밖으로 나선다. 다시 그 애를 찾자는 것은 아니지만, 미련이 남은 눈빛으로 길거리를 구석구석 뒤져본다. 그 애는 어디에도 없다.

 

집에 돌아온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워버린다. 침대 맞은 편 벽에는 브로마이드가 붙어있다. 영화배우가 공중 부양하고 있는데, 십자형으로 포즈를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이다. 얼마 전에 나온 영화에서 뱀파이어로 나왔다. 나는 그 사진을 바라보며, 그 애의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그 애의 노래는 형편없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가 호소하는 바를 나는 느꼈다. 그것은 부르짖음이었고, 울음이었고, 비명과 같았다. 내가 보았던 공포영화들을 모두 섞어 놓아도, 그 애의 목소리만큼 강력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그래서 그 애를 찾고 싶은 것이다. 내가 겪은 간접 경험이 그 애에게는 아마 직접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예감이 든다. 나는 자꾸만 허밍을 부른다. 허밍은 빈 내 방을 채우고 있다. 나는 그 허밍이 조금이라도 그 애의 노랫소리를 닮아있기를 바라며. 계속 웅웅 소리를 낸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보다. 밖은 어두웠고 내 베개는 침으로 푹 젖어 있었다. 낮에 먹은 떡볶이와 순대가 소화가 덜 되었는지, 신물이 올라온다. 나는 일어나서 천천히 옷을 벗는다. 샤워를 하러 목욕탕으로 들어간다. 샤워기를 틀고 입 안으로 갖다댄다. -하고 소리를 낸다. 부글부글 샤워기 물이 입안에서 헛돈다. 나는 왜 그 애의 목소리에 이다지도 집착을 할까? 나는 그 애를 붙잡고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고 싶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내 안에 있는 내가 바뀔 것 같다. 그 애를 본 순간 느꼈던 몸의 반응은 계속 그 애의 목소리를 따라 반응을 한다. 나를 깨뜨리고 싶다. 그 애를 통해.

 

9시가 넘어서 나는 다시 명동으로 간다. 네온싸인이 켜진 골목길을 지나서, 닭갈비 냄새가 진동하는 골목을 지나서, 명동 큰 거리에 도착한다. 어디선가 그 애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바구니 앞에서 고함을 지르는 그 애를 발견할 것만 같다. 나는 울고 싶다. 그 애의 노래가 나를 울게 해 줄 것 같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명동 한복판에서 나는 무릎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다. 귀를 막는다. 나는 소리없이 가슴으로 고함을 지른다. 꼭 막은 두 귀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소리없는 고함을 지른다. 입을 크게 벌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주파수로 소리를 지른다. 이 소리를 듣고 그 애가 반응하지 않을까. 나는 주저앉아서, 입을 벌리고 뿅뿅뿅 에너지를 뿜어댄다.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본다. 오직 그 애만이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계속 뿅뿅뿅 해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물 밀리듯이 밀려온다. 나는 지친다. 발을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누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그 애였다.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그 애였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10시가 다 되어서 우리는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다. 내가 그 애 손을 잡고 데리고 들어왔다. 그 애은 먹을 것을 잘 못 골랐다. 나는 세트 2개를 시키고 그 애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펜으로 종이에 쓴다. ‘나는 너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어. 너도 알지?’ 그 애는 그 아래에 적는다. ‘누나가 저를 부른 거에요? 아까부터 누군가가 계속 이상한 소리로 저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나는 방긋 웃는다. 그 애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준다. 그 애는 눈을 제대로 뜨고 나를 바라본다. 저번에는 게슴츠레해 보였는데, 이제 보니 까만 눈동자가 반짝인다. ‘나는 네 노래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어. 너의 노래를 들으려고 너를 찾아 다녔어. 너는 어디에서 온 거니?’ 그 애는 더 이상 적지 않았다. 다만 그 까만 눈동자로 나를 천천히 관찰했다. 그리고 수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 애는 수화를 끝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1층으로 달아났다. 밖으로 나가버리는 그 애를 나는 붙잡지 못했다. 나는 2층 창문 너머로 그 애의 뒷모습이 인파속에 파묻히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바라만 보았다. 내가 잘못했나봐...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울었다.

 

어두운 내 방에 앉아 나는 생각해본다. 스물이 된 나.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무작정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 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냥 숨쉬는 중. 나는 그냥 먹고 마시는 중. 나는 그냥 대학생.

아까 봤던 그 애는 어쩌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않을까? 나는 노트와 펜을 꺼낸다. 책상 위의 스탠드 불빛이 들어온다. 펜으로 쓰기 시작한다.

 

-골라봐.

-송곳, , 도끼, 혁대, 망치.

-송곳.

-?

-가장 뾰죡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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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상자, 수면(睡眠)

 

  -저 어디에 있게요? 선생님.

아이가 잘 하는 놀이이다. 아이는 내가 오기 전에 항상 숨어 있다. 숨는 장소도 일정해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도, 아이는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 숨어서, 내가 찾기를 바란다.

지난번에는 피아노 의자 아래에서 훤히 보이는 몸통을 보이고 웃으며 내게 물었는데, 이번에는 벽장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짐짓 어려운 듯이 기웃거리며 어디에 있을까하며 아이 물건을 주섬주섬 만졌다. 아이는 키득거리며 웃는다.

-여기에 있지요.

아이가 벽장문을 벌컥 열고 나온다. 아이는 고학년인데,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서 남자아이 목소리가 소프라노처럼 높고 곱다. 벽장에서 나오며 환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오늘 피아노 레슨은 잘 될 것 같다. 아이는 귀가 예민하고 절대음감이 있어서 피아노 소리를 아름답게 울리는 타건을 할 줄 안다. 아이의 손은 매끄럽고 고운데다가, 손톱이 뾰족하게 다듬어져있다. 처음에 나는 손톱이 길어서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는 요령 있게 건반을 건드린다. 피아노 건반은 누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건반이 내려가는 깊이를 따라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소리가 아름답게 울린다. 아이는 오늘도 톡톡거리는 손톱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들려준다. 아이의 피아노 소리를 듣자 얼마 전에 갔던 호수가 떠오른다.

 

  호수에 다다랐을 때, 물안개가 덮여있는 광경을 보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침부터 엄마와 다투는 말을 해서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밥을 먹으며 속이 불편해서 집에 있기가 싫었다. 무작정 밖으로 나와서 경차를 몰고는 호숫가로 왔다. 가을이라서 물안개가 자욱했다. 차창을 내리자 짙은 안개가 콧속으로 스몄다. 안개는 습하고 차가웠다. 아무런 냄새가 없지만, 무게는 느껴졌다. 무게. 안개가 공기 중에 떠있는데 왜 무게가 느껴졌을까.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안개는 내 호흡을 길게 늘이며 걸음을 무겁게 했다. 발밑에는 작은 모래 알갱이가 밟히며 자글자글 소리를 냈다. 호수는 소리가 없었다. 고요함과 습함 사이에서 나는 걸었다. 엄마와 말다툼은 요점이 없었다. 나는 요점을 분명히 하려고 말을 하는데, 엄마는 감정에 중점을 둔다. 그럴 때 나는 내가 딸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나는 마치 남자인 것만 같다. 나는 엄마보다 논리적이다. 엄마는 내가 주관 있게 이야기를 하면 너는 생각이 너무 강해라며 어깃장을 놓는다. 나는 내 생각이 강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조금 남다르기는 하다. 그게 나인데, 엄마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를 계속 담금질을 하듯이 부드럽게 연마하려고 말을 한다. 나는 말을 섞다가 지친다. 그러면 말이 끊기고 내 마음은 육중한 철문이 닫히듯이 갑갑해진다. 안개를 보며 그 마음을 열어보려고 하지만 철문은 오히려 녹이 스는 것 같다. 내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 그 누군가가 누구일까 과거를 되짚어본다. 현재를 떠올려본다. 미래를 바라본다. 그 누군가가 내게 있다면 나는 이 고독을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있었지만, 현재는 없고, 미래에 만날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분홍빛 꿈을 꾼다. 아침 햇살이 서서히 안개를 걷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선생님!

아이는 또 이상한 질문을 할 것이다. 아이는 예술적 기질을 가진 만큼 독특한 생각을 가졌다. 나는 그런 아이가 좋다. 질문에 대한 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궁금해서 질문을 하는 것뿐이다. 나도 그랬기에, 나는 아이가 질문을 하면 재미있게 들어주고, 나도 재미가 떨어지지 않게 아이에게 도로 질문을 한다. 그래서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의 생각을 주어 담는다. 아이는 그러나 고집이 있어서 다시 반문을 한다. 그런 반문은 가끔은 짜증이 난다. 그럴 때는 내가 어른이기는 하나보다 싶다. 고분고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른들에게는 조금씩 생긴다. 그게 아마 나이가 들면 생기는 권위가 아닐까. 반문을 하는 아이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다. 이 아이는 예술가 기질도 있고, 고집도 있고, 성깔도 있다. 나중에 이 아이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나는 아이가 반문을 하는 것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러자 아이는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다시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들려준다. 나는 이 아이가 굳이 피아노를 배우지 않고 독학을 해도 충분히 잘 할 것이라고 아이 어머니에게 얘기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피아노 레슨을 즐거워한다고 말했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상자에 들어가기를 좋아했다고 나에게 얘기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도착하기 전에 방 안에서 오늘은 어디에 숨을지 온통 쑤신다고 했다. 그것은 아이에게 한 가지 애정표현인 것이다. 다정하게 웃거나, 공손하게 말하는 것을 못하지만, 아이는 제가 어디에 있게요 하는 질문으로 나를 반기는 것이다. 처음에 아이가 방 안에 없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방안에 흐르는 정적 때문에 갑자기 내가 있으면 안 될 곳에 온 것 같았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서 나는 큰 소리로 어머니 아이가 방 안에 없어요하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아이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며 저 여기있는대요 했다. 나는 이게 무슨 조화이지 싶었다. 어머니는 레슨이 끝나자 아이가 조금 독특하다고 이해해 달라며 내게 상자 이야기를 해주었다. 상자는 아이에게 아늑한 공간이며 숨어 있는 것은 그 아이에게 즐거움이었다. 나는 아이가 측은해졌다. 아마 아이는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내게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이 반가웠다.

 

  오늘 배우는 새 곡은 마블홀이다. 멜로디가 3박자 속에서 묘하게 음정이 반음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래서 느리게 흘러가는 멜로디가 꿈꾸는 느낌을 준다. 아이는 그 반음정을 놓치지 않고 피아노의 검은 건반을 명료하게 울린다. 반음 부분이 깨끗하게 들려서 마치 종소리같다. 나는 흐뭇하다. 이 아이는 분명 예술가가 될 충분한 소질이 있다. 나는 피아노를 전공하며 이 아이만큼 음정에 민감한 사람을 아직 못 봤다. 아이가 마블홀을 다 치자. 이 곡이 마음에 든다며 마블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너 대리석 알아? 건물에 들어가보면 아주 매끄럽고 구슬같이 빛나는 돌이 바닥에 깔린 것 본 적 있지? 그게 마블이야. 마블홀에 들어가면 아마 자기 발소리가 너 피아노 소리처럼 똑똑히 들리겠지.

 

  아이는 마블이 무엇인지 몰라도 소리로 충분히 표현하고 느낀다. 마블이 무엇인지 알아도 소리를 들을 줄 모르면 다 허탕인 것을 이 아이는 뛰어난 음감과 손가락 감각으로 피아노로 표현한다. 사람 마음도 이런 것 아닐까. 말이 아무리 번드르르해도 마음 속을 간파하지 못하면 한마디로 끝나는 것을 열 마디를 해도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 포장은 알 수 없다. 포장은 그 사람 스타일을 알려주는 것뿐이지, 그 사람 속은 결국 겪어봐야 안다. 내가 그 사람과 악기를 연주한다면 아마 얘기가 다를 것이다. 악기는 호흡이 함께 하는 것이니까. 말을 하는 것은 그럼 어떨까? 만약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계속 맞춰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분명 언젠가는 깨질 관계일 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왜 코가 끝이 굽어있어요?

-그걸 매부리코라고 하는 거야.

-매부리코?

-선생님 어렸을 때 마녀라고 많이 놀림 받았어.

-마녀면 좋은 거잖아요.

-?

-마법을 부릴 줄 알잖아요.

-하하하. 너 덕분에 선생님이 마법이 생겼다. 고마워.

  아이는 기분 좋게 내게 덕담까지 했다. 아이가 보는 눈은 분명하고 의미가 있다. 나도 어릴 적 눈으로 본 사람을 생각해보면 한 번에 간파하는 일이 많았다. 아이는 꾸밈이 없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질문을 할 줄 안다. 어른이 되면 그것이 버릇없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사는 동안에 그 시선을 잃어버리면 관찰자가 죽어버리는 것이다. 관찰자는 죽고 그 대신에 눈치 보는 사람이 들어서겠지.

 

  차창을 내리고 경차로 달렸다. 이른 봄이라 아직 바람에 찬 기운이 있었지만, 햇살은 따뜻했다. 요새 나의 기분이 안 좋은 이유는 꼭 엄마 때문이 아니다. 친구 정희 때문이다. 정희와 나는 고교 동창인데, 대학에 와서 친해졌다. 정희는 나와는 다른 과이다. 그녀는 경영학과를 다닌다. 그녀는 나보다 한 뼘은 더 넘게 키가 크다. 우리는 많이 걷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오늘 또 걷다가 서로의 대화가 싸늘하게 식어서 끝났다.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하면 내가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뭐가 문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내가 매우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그러면 나는 꼭 울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처참해진다. 우리는 처음에 그러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만남이 고역이 되었다. 그녀는 큰 근심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바로 내가 그 근심거리인 것인지 분명치 않게 말을 한다. 우리는 강변을 따라서 많이 걷는다. 오늘도 그 길을 걸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걷다가 그녀가 점점 심각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통에 긴장이 되었다. 내가 너무 내 멋대로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나는 정희와 걷는 것을 좋아하고, 그녀를 만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만남이 점점 어긋나는 것 같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야말로 관찰자는 죽고 눈치 보는 사람만 있다. 관찰자가 되기에는 이제 내게 정희는 너무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중요한 말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녀의 생각에 몹시 다다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친구 정희는 꼭 처음인 마냥 소중하다. 우리는 함께 밤길을 걷다가 말이 트였다. 그녀는 대학 생활이 좀 별로인 듯 했고, 나도 동감이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와 그 밤길을 걸으며 그녀를 동경(憧憬)하게 되었다. 그 날 밤, 하늘에는 반달이 차갑게 떠 있었다. 나는 묘했다. 반달과 정희. 나는 어떤 예감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와 나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고교 시절에 잠시 마주치거나 얘기 나누었을 때는 몰랐던 내 감정은 그 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 감정을 반듯이 세워서 내 마음에 곱게 모셨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시작된 것과 같았다. 나는 열아홉 살이 되었고, 대학 청춘 시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고, 성인으로 첫 발을 내딛는 시간이 맞물리고 있었다.

 

  차 안에는 별 물건이 없다. 나는 경차를 깔끔하게 썼다. 나는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쓰는 버릇이 있다. 물건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나는 먼지가 쌓일 정도가 되어야 장소를 정리했다. 좀 건조하고 냉랭한 경차 안에 나 홀로 있다. 도로를 따라 경차는 가볍게 속도를 낸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속도를 줄이기도 하고 올리기도 한다. 핸들을 아웃코스에서 지그시 당기는 기분으로 조작하며 천천히 풀어준다. 속도를 느끼는 순간에는 마음이 고요하다. 아무리 큰 사운드의 음악을 틀었다 해도 속도가 주는 집중력에 마음은 단 하나로 모여진다. 나는 지금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어디에도 발 붙지 못하는 나의 이십대 마음을 말이다. 다행이다. 내게 경차가 있어서. 계기판을 보고 기름이 어느 정도 들어있나 가늠해본다. 반 이상을 썼다. 나는 드라이브를 마치고 천천히 브레이크로 속도를 줄이고 앞에 보이는 주유소로 향한다. 주유소에 도착하자 알싸한 기름 냄새가 난다. 3만원어치 기름을 넣고 계기판을 보니 주유 눈금이 서서히 올라간다. 나는 좀 더 달리려고 핸들을 꺾어 좌회전을 하며 주유소를 빠져나간다.

 

  생각해보니 정희와 가장 처음 있었던 시간이 고교 시절 영화를 함께 본 시간이었다. 나는 그 때 말이 없고 조용해서 정희가 말을 더 많이 했다. 우리는 학교 특별 활동 시간에 함께 영화관에 갔다. 단체로 갔는데, 정희가 내 옆에 앉아서 보았다. 스크린에는 거대한 우주선이 떠 있고, 그 우주선에서 광선 검을 든 주인공이 로봇들과 싸우고 있었다. 블랙 투구를 쓴 로봇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주인공은 블랙 로봇이 하는 말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그가 주인공에 게 ‘I’m your father.‘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비명과 동시에 한 쪽 팔을 광선 검에 잃는다. 그리고 우주 속으로 떨어지는 주인공. 사실 이 영화는 어렸을 때 오빠와 함께 본 영화이다. 다시 보아도 그 장면은 가슴을 움찔하게 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정희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장면이 인상적이었니? 정희는 딱히 대답을 안 했다.

 

  과거를 떠올리니 현재의 정희가 더욱 이해가 안 된다. 한 번은 그녀와 나 사이에 누군가가 있는 건가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나는 너에게 남자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그래서 너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지?‘ 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정희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게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살얼음을 내딛는 심정으로 서로의 말을 들어야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내가 무심코하는 말이 정희에게는 비수에 꽂혔고, 그러면 다시 내게 화살이 되돌아왔다. 지겨웠다. 더 이상 그만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정희는 친구였다. 친구란 모름지기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 그녀가 연락을 안 한다면 이대로 서서히 소원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희는 꼭 그럴만한 시간이 되면 연락을 하고 나를 만났다. 우리는 걷고, 이야기 나누고, 서로에게 아픔을 주고, 헤어지고.

 

  외곽 도로를 타고 달리는 경차는 미세하게 진동을 하고 있다. 왜 이리 외로운지 모르겠다. 겨우 스무살이 지났는데 왜 사는 게 이리도 지겨운 것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관계란 무엇인가 싶다. 엄마와 나, 정희와 나. 둘 다 여자들이다. 나는 여자들이 그래서 싫다. 동성이 주는 친숙함과 편안함 속에는 이상한 자학이 들어있다. 내게 무엇이 결핍이 되어있는 것일까. 수다를 떨 줄 모르는 것이 나의 결핍일까? 정희 심중을 꿰뚫지 못하는 나의 아둔함이 결핍일까? 엄마의 말에 순응하지 않는 나의 고집이 결핍일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궁핍하게 만드는 걸까?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순간에도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이 나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좀 더 밟는다. 경차가 소리를 왜앵 내며 앞으로 내달린다. 정희에게 전화를 하자. 그래야겠어. 이번에는 내가 뭔가 말하고 말겠어. 그것이 무엇이든지.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는 문자를 날린다. 그리고 그 곳으로 간다.

 

  기다린지 1시간이 다 되는데, 문자 답도 없고, 전화도 없다. 나는 기다린다. 이 기다림이 망쳐지면 내 의지가 산산 조각나서 나는 정희에게 할 말을 한 마디도 못할 것만 같다. 시켜 놓은 페퍼민트 차가 식어서 쓴 맛이 난다. 나는 눈을 감는다. 이대로 눈을 감고 정희가 인기척을 낼 때까지 수면(睡眠)을 해야겠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정희가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아서 나에게 먼저 말을 시킨다.

나는 가슴이 시리다. 말을 하기도 전인데, 벌써 나는 지고 들어간다.

-나는 우리 사이가 힘들어. 왜 그런지 너가 더 잘 알거라고 생각해.

-나는 힘들지 않아. 뭐가 어떻게 힘든 지 얘기해봐.

-...

나는 할 말이 점점 없어진다.

-나는 전공이 너와 달라서 그런거겠지. 너의 생각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우리는 자주 만나는 편이고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만, 쉽지 않아. 나에게는 뭔가 다른 돌파구가 필요해.

정희는 천천히 차를 마신다.

정희 눈빛은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내 눈빛은 정처없이 나부낀다.

나는 너무나 배신감이 든다. 나는 이렇게도 힘이 든데, 그녀는 어쩌면 저리도 평안해보일까.

우리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정희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나는 패배자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정희의 찻잔이 달그락 소리가 날 때, 나는 벌떡 일어선다. 나는 그냥 나와 버린다.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흐린 하늘에 눈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나는 뜨거운 것이 내 속에서 흘러넘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계속 걷는다. 핸드폰이 울린다. 정희다. 도저히 받을 수가 없다. 나는 핸드폰을 끈다. 걸으며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내 눈은 빨갛게 변하고 눈물은 소리없이 흐른다. 나는 그녀에게 처절하게 패한다. 나는 정희 그녀가 나를 짓뭉개는 것을 수없이 참아왔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으리라. 걷다보니 길 옆에 나뒹구는 큰 종이 상자가 눈에 띤다. 바람에 종이상자 뚜껑이 흔들리고 있다. 나는 무심코 그 종이상자를 집어든다. 내 몸이 너끈히 들어갈 만한 크기이다. 아이가 생각난다. 아이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몸을 숨기고 나를 기다렸다. 어둡고 좁은 공간. 그 속에서 조용히 맞이하는 자신만의 세계.

 

  난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 상자 안에 내 몸을 살포시 집어넣는다. 뚜껑을 닫자 바람이 들어오지 않고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상자 안에서 마분지 냄새가 난다. 나는 그 속에서 1부터 100까지 세어보겠다. 하나, , ... 밖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인도 아래에는 차들이 쉭쉭 지나간다. 나는 숫자를 세다가 다시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하며 셈을 반복한다. 나는 누구에게 이 상자 속의 나를 찾아달라고 해야 할 지 생각해본다. 아무도. 아무도 없다. 스무살을 갓 넘긴 나는 여전히 외롭고, 지치고, 패배자이다. 상자 안은 암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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