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unny Valentine

 

 허비 행콕의 연주는 아주 드라이하다. 퍼즐을 맞추듯이 한 음 한 음 건반으로 짚어낸다. 많은 감정을 담아내지 않고, 피아노 소리에 집중한다. 쳇 베이커는 단선율을 트럼펫으로 멜로디를 표현하고 노래를 불렀다. 허비 행콕은 그 단순하고 아련한 멜로디를 검은 건반과 흰건반으로 이야기를 한다. 쳇 베이커가 독백을 하듯이 마이 훠니 발렌타인을 읊조렸다면, 허비 행콕은 길게 정돈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음악도 지적이라는 표현이 있다면 허비 행콕의 곡이 그렇다. 그 사람과 대화를 처음 하게 된 노래가 이것이다. 이 음반을 틀고나서 이 곡이 들리자 그 사람이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 허비 행콕의 음반을. 그렇지만,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단답으로 서고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 지금 나 혼자 이 곡을 듣고 있다. 여전히 나는 그 사람이 내게 한 질문과 목소리와 얼굴을 잊지 않고 있다.

 

 영화를 보고 있다.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쳐서 마지막 결혼, 사랑에 들어서는 이야기이다. 사실 영화 내용을 보면 이 여자에게 이 남자가 마지막이 될 지 알 수 없다. 위태로운 그녀의 인생을 통해 관객인 나는 그저 그녀가 또 다시 모험을 하는구나 생각한다. 그녀는 누군가가 그녀를 완전한 행복에 젖어들게 해주기를 바란다. 누구나 그렇겠지. 그녀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한다. 그녀가 사는 삶의 방식이 그런 것이다. 나는 요가를 하고, 커피를 만들고, 사랑하고, 쌍둥이를 낳았다. 나의 삶은 수행인 것 같다. 나의 행복은 요가를 하고, 커피를 갈아서 한 잔의 음료를 만들고,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가진 것.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그 남자의 이마 위 상처이다. 나는 그 상처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물었는데, 알려주지 않았다. 그 남자가 모자를 쓰고 내 카페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나는 그닥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수만가지 이유가 다 다를 것이고, 난 그것이 이유였다. 그 모자 아래 그 남자의 얼굴. 그리고 그 상처.

 

 두 쌍둥이에게는 상처가 없다. 매끈하고 우윳빛의 피부를 지닌 은과 호를 보며, 심해어를 다시 떠올린다. 심해어를 꿈 속에서 보았을 때, 나는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단순한 행복과는 달랐다. 동시에 고통이었고, 동시에 열망이었다. 은과 호는 잠이 들어서 방 안에 있다. 나는 거실에서 지낸다. 내 방은 작다. 나는 그닥 여유있는 삶은 아니다. 그것에 불만이 있지는 않다. 나는 오히려 점점 소박하고 내가 스스로 꾸려갈 수 있는 삶을 원한다. 그 방식 속에 은과 호가 등장한 것은 내게 선물일까? 알 수 없다. 내가 그 사람에게 끌렸듯이 내 아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면 흘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 마음에 품었다고 해서 미칠듯이 보고 싶다는 것과는 다르다. 뭐랄까. 삶이 더없이 지루하고 삶이 더없이 복잡해질 때 문득 신기루라도 만나듯이 나는 그 사람을 내 기억 속에서 꺼내보는 것이다. 그건 달콤한 한 방울의 음료처럼 내 타는 갈증을 풀어준다.

 

 거실 벽에 얼마전에 찍은 사진이 제법 큰 사이즈로 걸려있다. 아가들 중심에 서 있는 나는 나무가 되어있다. 검은 실루엣의 나무. 나는 그 사람을 통해 아이를 갖고 나무가 되었다. 나무 자세를 하는 내 모습은 자못 늠름하다. 나는 그 사진에 그 사람이 함께 있으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의외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 두 아이 사이에 나는 균형잡혀 있었고, 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군더더기 같다. 그 사람은 그런 존재인가 보다. 슬며시 내 삶에 찾아와서 나를 나무로 만들고 간 사람. 그렇다면 나는 이 자리에 꼿꼿히 서서 가지를 뻗고 잎을 달고 열매를 맺고 낙엽을 떨구고, 다시 봄이 오면 새로 태어날 것이다. 그 나무 아래에서 은과 호가 잘 자라겠지. 사진 아래에 나는 스티커를 하나 붙인다. 그 스티커가 그 사람의 존재인 것처럼. 스티커는 언젠가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러면 나는 다시 그 존재를 새롭게 생각해 볼 것이다.

 

 초코 초코 브루드 라떼를 만들었던 나였다. 이제는 내 커피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뜨거운 그리고 베어지는 듯한 맛을 낸다. 베어지는 듯한 이라는 말을 어느 손님이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 속으로 감탄을 했다. 내가 원하는 맛이었다. 커피는 모든 맛의 정점에 그 맛이 있다. 그것을 어떤 이는 쓴 맛, 탄 맛, 고소한 맛, 마일드, 다크 등등 온갖 표현을 붙이지만 내게는 베어지는 듯한 맛이다. 커피는 기호 식품이 아니다. 커피는 뜨거운 용액이고, 그것을 마시며 사람들은 망각을 한다.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람들은 커피를 통해 하루를 시작하고 커피를 통해 하루를 끝낸다. 커피는 마치 피와 같아서 수혈을 받는 이들이 이 곳에 찾아온다. 나, 요기니 바리스타, 은과 호의 나무는 그렇게 커피를 내린다. 하! 언젠가 커피를 악마의 액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통해 나는 사랑을 맛보았고, 지금은 사랑 너머 삶을 선택했다.

 

 마이 훠니 발렌타인이 흐른다. 오늘 밤 나는 아무래도 이 노래를 들으며 혼자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는 홀로 독백을 한다. 가만히 이 거실에 앉아서 말이다.

 

 이불을 돌돌 말았다. 무슨 동작을 할까 멈칫하고 있을 때, 창 밖으로 빠람빠람 빠람바하고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산자세. 내가 제일 잘하는 자세이다. 두 다리가 땅에 이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산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내 몸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린다. 호흡을 아래로 배꼽 아래로 보내는 기분으로 무겁고 길게 한다. 두 발에 느껴졌던 몸무게가 배 근처로 오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하체와 상체의 중심에서 호흡으로 지탱하는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 머리. 몸의 끝에 위치한 부분들이 처음에는 의식이 되다가 그것이 사라진다. 그러면 호흡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해진 내 몸. 호흡은 소리도 없이 깔린다. 귀. 열린 귓구멍으로 째깍째깍 소리가 들리면 그마저도 버린다. 집중. 그리고 호흡. 그리고 산.

 

 눈을 떴을 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 모르겠다. 나는 오랜만에 긴 잠을 자고 난 듯 몸이 가볍고 머릿 속이 환해졌다. 쌕쌕거리는 은과 호의 숨소리가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작은 집에는 방 하나와 거실이 있고, 거실 끝에 부엌이 있다. 나는 산자세로 잠을 잤다. 내 어깨가 산등성이가 된 듯이 견고한 기분이 든다. 그림으로 그리면 둥근 붓터치로 내 어깨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림이 떠오른다. 어두운 피부 톤의 모델 여자는 정말 몸이 그렇게 비대한지 우람하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녀가 여자라는 것이 느껴지는 부분은 칠흑같은 머리카락과 꽃장식이었다. 그 여자의 모습을 보고 왜 이 미술가는 모델로 이 여자를 택했을까 생각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근데 지금 나의 몸이 마치 그림 속 그 여자같이 느껴진다. 내 몸이 산이 된 듯한. 그 미술가는 그녀의 몸에서 산을 느낀걸까? 두꺼운 입술, 두꺼운 손가락, 어두운 피부 톤.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던 그 여자를 정성껏 그려놓은 그림. 그 그림 속에서 나는 나른한 평안을 맛보았다. 머릿속은 매력없네 했지만, 마음은 놓여지는 기분이랄까. 내가 이제 그녀가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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