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어머니는 말할 수 있을까?"
딸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여성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성 혹은 어머니란 기본적으로 남성의 호칭이고 담론이다. 마리아와 예수. 이 모자 커플은 서구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보편화된 모성의 영구 정형이다. 이상적인 모성애의 대상은 남성일뿐이다. 이에 대한 가장 적실한 사례는 여아 낙태일 것이다. 딸은 자식의 범주에 속하지 않기 떄문에 수백만 명의 어머니(여성이 아니라)들은 '어미의 본능'마저 거부하며 자발적으로 아이를 죽일 수 있다. 자녀는 성별에 따라 선택되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의 질서를 따르기 위해 어머니를 죽이고 버린다.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이는 성별화된 구호이다.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도 이런 다짐이 필요없다. 현대 교육을 받고 아들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딸도 어머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버리지는 못한다. 라깡의 말대로 버리지 못한 어머니의 시체를 껴안고 울며불며 사막을 헤매는 것. 이것이 딸들의 인생이다. 몇 년 전 내가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기보다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난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 (35)
'생계 부양자 남성 / 가사 노동자 여성'이라는 성 역할 모델은 극히 일부 중산층만의 전형일 뿐, 대부분의 가족에서 여성은 생계 부양자이자 가사 노동자다. (38)
어머니와 딸의 분열과 이간을 통해서 작동하는 남성 체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은 어머니와 딸의 연대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은 모녀 연대에 버금가는, 남성 연대를 파괴하는 체제 전복적 행위다. (43)
어머니의 노동이 여성에 대한 통제와 착취라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한국 사회가 전체 예산의 4분의 1을 국방비에 쓰면서도 이 정도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여성들의 가족 내 무보수 노동으로 사회 복지 비용을 대체했기 떄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문화, 미풍 양속, 전통으로 정당화한다. 군비 축소 ,반전 반핵, 평화 통일 운동은 여성의 성 역할에 대한 도전과 파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46)
아들이 원하는 변화무쌍하며 한없는 요구. 이것이 어머니론의 핵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는 변화하지 않아야 한다. 아들의 입장에서 어머니는 자기 요구대로 맞춰져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화해서는 안 된다. (51)
오늘날 자본주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어머니 억압의 역사는 자본의 역사보다 20배는 더 오래되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어머니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언어가 없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부과된 희망과 스스로가 원하는 희망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다지 대단한 언어는 아니지만,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게 '언어 있음'에 대해 어떤 쾌락을 느꼈다. 그런 점에서 (물론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겠지만) 내게 언어를 가르쳐 준 아버지들에게 감사하며, 그들 아버지 언어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고 상대화시켜준 여성 지식인들에게 감사한다. 앞으로 딸들은 아버지의 검은 잉크를 엎지르고 어머니의 젖으로 만든 흰색 잉크로 어머니 / 아버지에 대해 다시 써야 한다. 구체적으로? 이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 딸은 어머니를 자신에게 투사하지 말고 스스로 욕망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사회는 여성을 어머니로부터 분리시키고, '성스러운' 어머니의 일을 남성에게도 부과해야 한다.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