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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다하르
모흐센 마흐말바프 지음, 정해경 엮고 옮김 / 삼인 / 2002년 3월
평점 :
영어로 된 글을 읽다보면 "in terms of"라는 어구가 자주 나온다. 사전에 나오는 대로 "견지에서"라고 번역하고 넘어가곤 했다. 어느 날 문득 "견지"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사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뜻일까? 한자를 새겨보면 곧 알 수 있다. "보는 자리"(見地)라는 뜻이다.
내가 어떤 현상을 보는 자리는 어디인가? 나는 카불을 폭격하는 전투기 조종사의 자리에서 내려다보는가? 아니면 안전한 고향 땅에서 저 멀리 지평선에 나타난 이방인들이 우리 땅으로 넘어 오는 것을 바라보는가? 그것도 아니면 고향을 떠나 맨발로 사막을 떠도는 피난자의 자리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되바라보는가?
2001년 10월 미국 정부는 9 11 사건의 배후 인물로 알려진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에서 탈레반 정부의 책임을 물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미국 정부는 수십 년 간의 대내외적 전쟁으로 황폐해진 빈곤과 문맹의 그 땅에 발 한 번 딛지 않은 채 공중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이 아프간 민중을 해방시키는 거라고 선전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웃 나라 이란 사람 마흐말바프는 국경 근처의 난민촌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칸다하르]라는 영화를 찍었다. 같은 이름으로 삼인출판사에서 나온 [칸다하르]는 그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공부하고 그것을 다시 알리기 위해 쓴 글을 모은 작은 책이다. 헐리우드 영화나 CNN에 나오는 전투기 조종석의 시계에만 익숙해진 나는 이 책에서 이방인의 시야를 포착하려고 노력하는 이웃의 시선을 배운다. 책에 실린 아프간 시인의 시를 잊을 수 없어서 이 자리에 소개한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난다.
저금통이 없는 나그네는 떠난다.
인형이 없는 아이도 떠난다.
나의 유랑에 걸린 주문도 오늘 밤 풀리겠지.
비어 있던 식탁은 접히겠지.
고통 속에서 나는 지평선을 방황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떠도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나는 놓아두고 떠난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날 것이다. (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