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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창비교양문고 48
제인 오스틴 지음, 조애리 옮김 / 창비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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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히스토리채널'에서 '제인 오스틴 바이오그래피'를 할 때

한 교수가 출연해 "사실 그녀에겐 악녀 기질이 약간 있지요.."라고 했는데,

영국 작가들에게서 종종 보는 신랄한 유머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모르겠다.

그 프로그램을 보고 흥미가 생겨

집에 있던 [설득]을 읽다가

그 말에 딱 어울리는 표현을 몇 개 발견했다.

악녀 기질이든 아니든 하여튼 나는 이 부분들을 읽으며 즐거워져서 소리내어 웃었다.

이를테면 이런 표현들이다.

"그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부인을 얻게 된 것은 외모와 작위 때문이었다. 엘리어트 부인은 분별있고 상냥하며 훌륭한 여자였다. 젊어서 사랑에 홀려 엘리어트 부인이 된 것 말고는, 사죄할 만한 행동이나 판단을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약점을 웃어넘기거나 누그러뜨리거나 숨겨주면서, 그녀는 17년 동안 그의 체면을 유지시켰다."  (9)

좀더 심한 것도 있다.

"이 슬픈 가족사의 사연은 이랬다. 머스그로우브 집안에 아주 골치 아프고 장래성 없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다행히도 스무살도 되기 전에 죽었다. 육지에서는 아무도 다룰 수 없는 망나니인데다 멍청이여서 해군이 되었고, 물론 그런 대접을 받을 만했지만 가족들도 그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아 소식도 거의 두절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2년 전에 외국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그 당시엔 거의 슬퍼하지도 않았다." (66)

제인 오스틴을 처음 읽었는데

예전에 내 친구 정은이가 얘기한대로 정말 생각 이상으로 재밌었다.

잘 된 번역이라고 소문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오만과 편견]도 빨리 읽고 싶다.

[설득]을 읽으며, 내가 속한 곳이나 내 머리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했던

유머 감각을 만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서술자의 유머와 통찰과 판단력과,

주인공의 공정함과 자신에 대한 솔직성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서술자와 인물의 성격이 만들어내는 작용 속에서

앤(주인공)이 느끼는 설레임과 기쁨 같은 감정이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남자가 자기에게 남긴 쪽지를 읽고

그동안 가려져 있던 그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가 느끼는 아찔한 행복감이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보라.

빅토리아 시대에 그러한 감정은 숨겨야 하는 것이었나 본데,

그런 강도의 감정은 숨겨지지 않는 것이니 문제다.

앤은 혼자서 그 감정을 음미하고 명상을 통해 평정을 되찾으려 하지만

주위 환경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런 편지를 받은 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반 시간쯤 혼자서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면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채 10분도 못 되어, 사람들의 방해라는 상황의 제약이 심해지면서, 평정을 찾기 위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시시각각 더욱더 마음이 설레었다.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녀가 이 풍요로운 행복감의 첫단계를 벗어나기도 전에, 찰즈와 메어리와 헨리에타가 모두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곧 정신을 수습하려고 몹시 애를 썼다. 그러나 잠시 후 더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 몸이 아프다고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실제로 그들 눈에도 몹시 아픈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깜짝 놀라 걱정을 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가 아니면 꼼짝도 않겠다고 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그들이 가주고 방에 혼자 조용히 있으면 나을 수 있는 병인데, 그들 모두가 둘러서 있거나 기다리고 있는 바람에 더욱더 심란해졌다. 자포자기하여 그녀는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래요, 어쨌든," 머스그로우브 부인이 큰소리로 말했다. "저녁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어서 집에 가서 쉬세요, 쌔러가 있어서 돌보아주면 좋을 텐데, 어떻게 돌봐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찰즈, 종을 울려 마차를 불러라. 앤 양은 걸으면 안되겠구나."

하지만 마차로 해결될 일이 전혀 아니었다. 그건 최악이었다. 혼자서 조용히 도시 위쪽으로 걷다가 웬트워스 대령에게 그 두 마디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다면(그녀는 꼭 그를 만날 것만 같았다), 그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절대로 마차를 타지 않겠다고 했다. . .

당혹스러운 일이 또 한가지 벌어지고 말았다. 원래 착한데다가 정말 앤이 걱정이된 찰즈가 바래다주겠다고 나섰으며, 사양할 길이 없었다. 이건 거의 잔인한 일이었다!" (308-10)

웬트워스 대령이 자신에 대해 가진 감정을 확인한 앤이 "가슴 속 깊이 행복해져 사랑스럽게 빛"났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갑자기 사람은 가슴 속 깊이 기쁨을 느끼지 못하면 우울해져서 죽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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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5-22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쁨이 없는 상태가 보통 인간의 상태 아닌가요?;;
그날그날 잠깐 맛보는 소소한 기쁨말고......

killjoy 2005-05-2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여성영화제에서 "꿈꾸는 카메라-사창가에서 태어나"를 보는데, 한 열 살쯤 먹은 아이가 어른 서양인 다큐멘터리 감독의 카메라에다 대고 "사는 게 원래 고통이잖아요" 하는 게 아니겠어요. / 리뷰는.. 대체 왜 우울증이 유행병이 되었을까를 궁리하던 중에 쓴 것이다 보니 그런 문구가 들어갔네요. ;;;
 
칸다하르
모흐센 마흐말바프 지음, 정해경 엮고 옮김 / 삼인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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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된 글을 읽다보면 "in terms of"라는 어구가 자주 나온다. 사전에 나오는 대로 "견지에서"라고 번역하고 넘어가곤 했다. 어느 날 문득 "견지"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사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뜻일까? 한자를 새겨보면 곧 알 수 있다. "보는 자리"(見地)라는 뜻이다.

내가 어떤 현상을 보는 자리는 어디인가? 나는 카불을 폭격하는 전투기 조종사의 자리에서 내려다보는가? 아니면 안전한 고향 땅에서 저 멀리 지평선에 나타난 이방인들이 우리 땅으로 넘어 오는 것을 바라보는가? 그것도 아니면 고향을 떠나 맨발로 사막을 떠도는 피난자의 자리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되바라보는가?

2001년 10월 미국 정부는 9 11 사건의 배후 인물로 알려진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에서 탈레반 정부의 책임을 물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미국 정부는 수십 년 간의 대내외적 전쟁으로 황폐해진 빈곤과 문맹의 그 땅에 발 한 번 딛지 않은 채 공중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이 아프간 민중을 해방시키는 거라고 선전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웃 나라 이란 사람 마흐말바프는 국경 근처의 난민촌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칸다하르]라는 영화를 찍었다. 같은 이름으로 삼인출판사에서 나온 [칸다하르]는 그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공부하고 그것을 다시 알리기 위해 쓴 글을 모은 작은 책이다. 헐리우드 영화나 CNN에 나오는 전투기 조종석의 시계에만 익숙해진 나는 이 책에서 이방인의 시야를 포착하려고 노력하는 이웃의 시선을 배운다. 책에 실린 아프간 시인의 시를 잊을 수 없어서 이 자리에 소개한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난다.
저금통이 없는 나그네는 떠난다.
인형이 없는 아이도 떠난다.
나의 유랑에 걸린 주문도 오늘 밤 풀리겠지.
비어 있던 식탁은 접히겠지.
고통 속에서 나는 지평선을 방황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떠도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나는 놓아두고 떠난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날 것이다.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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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1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너무 좋네요.
잘 지내시죠?
이 DVD 어제 주문했습니다.^^

killjoy 2006-01-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예요
잘 지내세요?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 일을 시작한지 다섯달째 접어들고 있고요
과로의 공포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맥베스 - 셰익스피어전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 민음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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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게임의 규칙 두 개. 1 왕에 대한 충성. 2 왕에 대한 반역. 1번 규칙으로 유지되는 것이 질서이다. 2번 규칙도 1번과 다르지 않다. 왕에 대한 반역은 새로운 왕에 대한 충성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크게 말해서 남자들의 게임의 규칙은 위계질서의 수호이다. 남자들의 본성이 그러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남자들이 지배 집단이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지배 집단은 지배 질서의 유지와 주기적인 쇄신을 요구한다고.

그런데 지배 질서의 규칙이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절대'왕권의 지배권역에도 바깥이 있다. 이 책에서 그 바깥 영역은 마녀들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마녀들에게는 지배 질서의 법이 작용 못한다. 이들에게는 왕에 대한 충성심도 없고 왕권에 대한 야망도 없다. 이러한 마녀들의 존재 자체가 지배 질서에 대한 교란이다. 지배 질서 내부에서 자기가 속한 체계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마녀란 ‘절대성의 파괴자’라는 개념화조차 하기 힘든 모순 존재이다. 이렇게 지배 질서의 중심에서는 그 힘이 주변부까지 고르게 미치지 못하지만, 주변부에서 이루어지는 마법의 힘은 중심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그리고 레이디 맥베스. 문제적인 여자. 그는 여자이면서 남자들의 게임의 규칙에 몸을 싣는다. 여자는 지배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높은 신분의 자기만은 예외적인 여자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의식적으로 자기 안에서 남성성을 일깨우려고도 했다.

그는 남자들의 질서 내부에 자기 자리가 있다고 오인하는 캐릭터이다. 맥베스의 부인으로서 남편의 이름을 공유하면서 그는 자신이 맥베스인 줄 안다.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는 권력의 취득이라는 남자들의 게임의 규칙에 따라 그들의 욕망을 모방하면서 남편에게 대신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왕위에 오른 맥베스는 죄책감과 의심으로 광기로 치닫는 과정에서 레이디 맥베스를 점점 밀어낸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아내를 자기와 한 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제 그에게 아내는 과거의 자기 행동을 상기시키는 이물질로서 지배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맥베스 그 자신이었던 레이디 맥베스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좌천된다.

그녀에겐 본래 고유의 이름이 없었다. 그녀는 온전한 맥베스가 아니라 레이디 맥베스 즉 불완전한 맥베스이다. 오인의 결과였던 이름과 자리와 욕망의 대상을 상실하게 되자 레이디 맥베스는 자살한다. 존재 의미의 상실로 인해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배 질서 내에서 벌어진 이 모든 비극이 질서 바깥의 마녀들에게는 전혀 비극적인 것이 아니다. 지배 질서의 내면화 없이 어떻게 그 낯선 사건에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는 지배 질서의 법은 낯선 것이다. 결혼으로 여자가 남자에 동화되고 남자의 욕망을 모방하게 되는 것도 이들에게는 기이한 풍습이다. 여자가 남자와의 차이를 발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존재 의미의 상실이 되는 것도 그들에게는 이상한 논리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허공의 거미줄에서 거미가 추락하듯 남자들의 체계에서 탈락하였지만 그 결과가 꼭 죽음이었어만 했을까? 마치 그 법의 체계가 세계 전체이고 그 바깥은 없다는 듯이? 그러나 레이디 맥베스가 맥베스 자신과 동일인이 되는 것만큼이나 황야의 마녀들에게로 건너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황야에도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고귀한 신분의 ‘레이디’가 어찌 알았겠는가? 고귀한 신분의 대가가 여자들에게는 고립과 단절이구나.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방법은 자기가 맥베스 자신이라는 환상 속에서 사는 방법이었다. 환상이 깨지면? 죽거나 미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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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없어서 슬펐니?
김미경 외 열 명의 엄마들 지음 / 이프(if)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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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옆집 여자는 아이가 셋이다. 노상 야단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엄청나게 굵고 큰 목소리이다. 사람이 뒤집어질 만큼 온 힘을 다해 지르는 소리다. 그렇다고 별 효과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고함은 계속 된다. 말은 규율을 가르치는 매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여유를 상실한 한 사람의 삶의 조건이 기입되어 있다.

2
이 책이 독서모임에서 논란거리가 된 것은 책 내용 중 어떤 부분 때문이었다. 밖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온 엄마가 귀가하자마자 자기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잠긴 문밖에서 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독서모임의 어떤 회원들에게 이 내용이 아동학대로 읽혔던 모양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자아실현을 위해 아이가 희생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3
격렬한 토론이 이어졌는데 귀결은 대략 이렇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육아는 가족공동의 책임이다'에 동의했다. 그러나 심층적으로 우리는 '가족이 공동으로 육아 책임을 분담하지 못할 경우 육아는 일차적으로 어머니의 책임이다'라는 일반적인 가정을 인식했고 그에 대한 반응은 '그러므로 모성은 굴레다'와 '그러나 모성은 축복이다'로 분열되었다. 사회가 책임지기와 가족 모두가 책임지기가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목표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데 아직 그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개인이 부닥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가 문제거리인 것이다. 결국 독서 회원들 중 젊은 여자들은 아이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여기고 책임지기와 안 낳기 이 둘 중에 선택하게 될 것 같았다. 젊은 남자들은 대체로 육아를 도와야 한다는 각오를 보였는데 물론 젊은 여자들보다는 좀더 여유 있어 보였다. 일차적인 책임 소재가 그들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4
나는 언제나 여자들이 더 도덕적인 이유에 대해서 궁리하게 되었다. 여자들이 약자들에게 더 책임의식을 느끼는 것은 여자들의 본질일까 구성된 것일까? 예를 들어, 가족 중에 누군가 데려온 강아지가 찬밥 신세가 되었을 때 개가 아무리 싫어도 끝까지 똥오줌을 치우고 신경 쓰는 어머니는 도덕적이어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명령할 권리나 일을 떠넘길 누군가가 없는 유일한 가족구성원이어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여자들의 도덕성이 어떤 시스템의 유지에 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5
기억나는 구절: '내가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 집 남자들에게 행하는 유일한 목적의식적 교육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노동을 타인, 특히 여자들의 노동에 의지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며,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배우고 익히라는 것이다.'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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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여자
서영은 지음 / 문학사상사 / 200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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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본 텍스트보다 뒤에 딸린 작품 해설이 더 재미있다. 비평가 김정란은 이 소설을 [그녀의 여자]가 아닌 [그녀의 아들]로 읽어 낸다. 중견화가인 '그녀' 현여사가 아들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을 아들의 애인인 소연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란의 비평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이 소설에 동성애 소재와 모순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현여사와 그의 양아들 사이의 긴장은 소연과의 관계에서보다 더 팽팽해서 무언가 억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영화 [페드라]가 인용되는 것도 이상하다. 페드라는 양아들을 사랑하여 파멸하는 희랍 비극의 여자 주인공이다. 결국 이 소설의 핵심 모티브는 동성애가 아니라 근친상간적 욕망이다. 현여사에게 소연은 아들 대용이며, 소연은 자기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주고 싶었던 욕망을 현여사와의 관계를 통해서 충족하려 한다.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과 어머니에게 아들이 되어줄 수 없었던 딸의 좌절이 이 소설에서 여자들 사이의 사랑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녀와 그녀의 여자 사이의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소설을 레즈비언 소설로 볼 수 있을까?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관계는 이성애적인 사랑법을 따르고 있으므로 레즈비언 관계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레즈비언 관계란 사회적으로 강제된 이성애 관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의 관계는 에로틱함이 가미된 우정에 가까워서 폭력성이나 일방성과는 다르다. 토니 모리슨이나 엘리스 워커 같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여자들 사이의 사랑은 (유색인 여자로 두 번 소외된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어 주는 것이지 상대를 파괴하는 정념이나 다른 욕망의 가면으로서의 사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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