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 분단의 상징에서 문화의 중심으로
이은정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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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나에게 베를린하면 떠오르는 것은 '베를린 장벽', '오랜 세월 분단되어 있다가 통일된 것'정도였다.

그리고 언론매체에서 흔히 우리나라처럼 분단의 아픔을 미리 겪은 나라이기에 독일을 본받아 통일정책을 수립해야한다는 이야기를 늘 들었던터라 독일도 당연히 우리나라처럼 서독과 동독이 오랜 세월 접점없이 갈라졌다가 어느날 우연히 통일이 되었고, 많은 혼란을 겪었으며 이제 그 혼란기를 지나 잘 화합하여 사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점점 좌절아닌 좌절의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독일의 상황은 우리와 많이 달랐으며, 위의 내용들은 모두 안일한 착각이었다는 것. 아마도 우리의 통일은 갈길이 더 머나먼 가시밭길이라는 것...그래도 한 가지 독일의 사례를 보면서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의 자세를 유지하며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독일이 분할되던 시점은 한반도에서 남한 단독선거가 결정되던 바로 그 시기였다. 서로 분단의 시작점은 같았지만, 분단의 과정과 결과가 다르다는 것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p.60-61

냉전 초기 동서진영의 첨예한 이념 대결로 인한 정치적 긴장은 지속되었지만, 베를린 주민들의 일상적 삶이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 1952년 11월까지는 서베를린 주민이 동베를린에서 생필품을 구입할 수도 있었다. 장벽 건설 전까지는 동독 정부나 사통당 관계자, 경찰 그리고 동독 인민군을 제외한 모든 동베를린 주민들이 서베를린을 방문할 수 도 있었다. 서베를린 시의회 선거에 모든 베를린 주민이 출마할 수도 있었고, 실제로 사통당이 서베를린 시의회 선거에 정식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

이 모든 일은 물론 동서독의 분단이 양쪽의 모든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의미에서 독일의 분단은 한국전쟁 이후 이산가족의 개별적 아픔 외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존재하지 않고 적대감만 남게 된 한반도의 분단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세계2차대전 이후 독일과 베를린을 4대 승전연합국(영국,프랑스,미국,소련)이 분할점령한다는 결정이 합의되었다. 연합국과 소련의 힘겨루기 속에서도 베를린 시민들은 우편이나, 직장때문에 이용하는 교통수단 등을 통해 끊임없이 교류를 이어나갔다. 우편 교류의 경우 우리나라의 경우였다면 대번에 불순분자, 빨갱이로 몰려서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우편제도는 독일이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기 이전 많은 공국과 제후국으로 분할되어 있을 때부터 운영되던 500년 이상의 전통으로 동서독 모두 유구한 전통을 지키자는 것에 합의를 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각자 주권국가로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계승한다는 목적 하에 오랜 전통의 도서전이라던가 박람회를 개최하고 교류할 수 있었다. 만약 분단 당시 우리가 미군정과 소련군 점령하가 아니었더라면, 정치를 담당하는 수뇌부에 빌리 브란트 같은 정치가가 있었더라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던 김구 선생과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했던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바뀌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만약'이라는 가정을 지울 수가 없었고, 아쉬움도 지울 수가 없었다.

 


베를린을 통해서 배울 점은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라는 것, 이것은 두번 세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협상 테이블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보다는 실리적으로, 해결해야하는 일 중심으로 협상했던 방식이 통일을 이루어내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치가들의 협상 능력도 중요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열린 의식이 아니었으면 이 또한 이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념, 사상이라는 것을 넘어서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통일이란 것은 분명 막연하고,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그 이후의 삶은 어떻게 조율을 해야하는지 머리아프고 복잡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책을 통해, 베를린의 사례를 미루어보아 공존이라는 것,교류라는 것이 앞으로 우리 통일과 통일 이후의 삶을 어떻게 좌우할지 알려주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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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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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다음으로 내 책장에 꽂히게 된 두 번째 현대지성에서 나온 책.

걸리버 여행기하면 처음 드는 생각은 초등학교 시절 학급문고에 늘 꽂혀있던 책,

혹은 방학 기간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도서,

소인국과 거인국 이야기 정도였다.

어린이들이나 읽는 책으로 생각했었으나,

성인이 된 이후 읽어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아니 걸리버 여행기가 원래 이런 내용이었나??'싶을 정도였으니까

400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의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분량의 소설은

잡은 순간부터 끝날때까지 멈출 수가 없었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란 이름의 인물이

 1699년 5월부터 1715년 12월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장거리 대양 항해에 나섰다가 뜻하지 않게 경험하게 된

네 개의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 대한 경험기를 담은 소설이다.


소인국 릴리펏과 거인국 브롭딩낵을 차례로 경험한 걸리버는

세 번째 항해에선 해적에 붙잡혔다 쫓겨난 뒤

베링해협 남쪽 북태평양을 떠돌다가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에 도착했다.

(TMI이지만, 라퓨타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어릴 때 봤던 천공의 성 라퓨타 만화가 떠올랐다.

여러모로 영향을 받긴 했겠구나 싶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고개를 모두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돌리고 있고,

한 쪽 눈은 위쪽으로 다른 쪽 눈은 속으로 푹 들어간 모습이다.

그들은 저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어 대화를 하려면

정신을 차리도록 누군가가 입과 귀를 때려줘야만 했다.

고위 직급의 사람들은 일명 때리기꾼을 고용해 데리고 다녔다.

그들에게 있어 때리기꾼을 고용하고 다니는 것은

지성을 겸비한 높은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항해. 알고 보니 해적인 선원들에게 쫓겨나

홀로 버려진 걸리버가 다다른 곳은

순수한 이성에 따르는 후이넘들이 머리와 가슴이 털로 뒤덮인,

타락하고 추한 야후들을 지배하는 말(馬)의 나라였다.

후이넘의 매력에 푹 빠진 걸리버는 다시는 지저분한 인간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겠다 마음먹었으나 결국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가족들이 기다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인간혐오에 빠진 걸리버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혐오하게 되어

여생을 종마를 키우며 위안을 삼고 살게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은 현대에도 적용될 정도로 깊이 공감하며 읽었다.

공직에 사람을 뽑을 때에는 도덕성을 그 무엇보다 일순위로 삼아야 한다는

릴리펏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우매우 깊은 공감을 자아냈다.

판타지스러우면서도 인간세계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은 꽤 흥미로웠다.

몇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로 적용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 작품의 의도는 세상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저자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봤었다면

꽤 화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 인물 중에는 브롭딩낵의 국왕,후이넘에서 주인으로 나왔던 수컷과 같이

비교적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 있는데 비해,

걸리버가 여행지에서 만나는 여성들은 한결같이 변덕스럽고

욕심많고, 성욕이 가득한, 비이성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여성혐오적인 부분에서는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

걸리버는 스위프트의 대변인으로 소설 전반에 걸쳐

영국사회, 인간 문명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걸리버가 인간 사회에 대한, 본인의 조국에 대해

신랄한 풍자가로 점점 변해감에 따라 여성에 대한 언급은

점차 비난조로 바뀌어 간다.


처음 항해를 나설 당시의 걸리버는 아내를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이었지만,

항해를 모두 마치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아내의 포옹과 키스조차 견딜 수 없어 하며 쓰러진다.

걸리버가 이처럼 변화하게 된 것은 후이넘의 영향으로 인해 인간이
야후와 다름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전체적인 걸리버 여행기에서

보여지는 여성에 대한 반감은 유난히 두드러진다.

특히 여성의 육체에 대한 걸리버의 반감은 인간사회에 대한

판적 시각을 이유로 바라보기에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거인족 여성들의 육체에 대해 묘사한 부분에서는

심히 불쾌했다. 걸리버가 처음 브롭딩낵에서 만난 여성은

그를 구해 준 농부의 집에서 일하고 있던 유모였는데,

유모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에서

걸리버는 추한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릴리펏에서 자신의 피부가 거칠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 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육체가 추하게 보이는 것이 자신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임은 걸리버도 알고있다.

러나 걸리버는 이들의 육체를 비교하는 대상으로 자신을 설정하지 않는다.

걸리버는 남성의 육체가 주는 역겨움에 대해서는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브롭딩낵의 거인들에게서 육체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발견할 때,

그 대상은 언제나 여성이다.

여성의 육체에 대한 워딩이 혐오감에 가득 차 있는 것을

읽는 내내 전반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도 이 책인 출간 당시에 여성 혐오적인 부분이 있다고 하여

비판받았다고 한다.)

읽는 내내

소설 속 여성= 감정의 발달이 지나친 나머지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감각적 만족에만 매달려 결국은 육체의 지배를 받는 신세

로 그려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거인국의 여왕은 식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엄청난 양을 먹어치운다.

이때 여왕의 모습은 혐오스럽게 그려지는데,

걸리버는 입 안에 음식을 쓸어 넣고 거대한 새의 뼈다귀를 이빨로 부숴 먹는

여왕을 보며 거인족의 거대한 육체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징그러운 괴물이 희생자를 먹어치우는 것을 바라보는 듯 혐오감을 느낀다.

또한, 걸리버가 바라본 라퓨타의 여성들도

 혐오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걸리버가 바라 본 그곳의 여성들이 라퓨타에서 도망가는 이유는 

라퓨타의 생활이 지겹고 즐길 수 있는 여흥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섬 아래 육지로 도망가는 이유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여자라는 성 자체의 무지함과 비이성적임 때문이다.

그리고 도망가는 이유에 대해 다분히 성적인 암시를 풍긴다.

(육지로 도망간 어떤 장관의 부인이 거지의 아내로 매일 매를 맞고,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라퓨타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후이넘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특히 암야후는 임신 중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성적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후이넘은 이들의 몸은 추하고 더러울 뿐 아니라

성욕이 지나쳐 혐오스럽다고 생각한다.

걸리버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여성은 이러한 야후와 유사한 존재로

식욕에서부터 성욕에 이르기까지 탐욕스러운 육체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위정자들, 현대 사회의 부조리함을

신랄하게 통찰하고 비꼬고 있지만,

여성혐오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점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소설이다.

성인이 되어 다시 읽게 된 걸리버 여행기는

생소하기도하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한 두 권씩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을

다시 한 번 더 읽어보는 기회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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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인문학 - 세계사 속 숨은 음주문화를 찾아 떠난 한 저널리스트의 지적 탐사기
쇼너시 비숍 스톨 지음, 임지연 옮김 / 오아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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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뭔가 미친 듯한 책인 것같은데, 왠지 맥주 한 캔하며 읽고 싶은 책'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가졌던 생각이다.


이 책에 대해 한 줄로 표현하자면 위에 쓴 대로 뭔가 미친 것같고 어이없는데,

신선하고 맥주가 땡기는 그런 책이다.

더불어 저자에게 헛개수를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많이 드는 그런 책이다.

여지껏 술과 문화, 술의 종류, 문화에 따른 술 예절 등 관련 책들은 많이 나왔었지만

본격 술과 숙취해소에 대해 이 저자만큼 집중적으로 파고든 책은 없었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다는 숙취 치료 전문 클리닉 '행오버 헤븐'

패키지 이름도 주일학교, 속죄, 구원, 환희라니...

과음하고 난 후 항상 어제의 나를 질타하며 구원해달라고 울부짖던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숙취로 모두 고통을 받아본 사람들이라면 저 클리닉 패키지 이름만큼

숙취 치료 단계에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클리닉에서는 기념품도 판매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처럼 부활한 느낌이에요'라는 문구에 나는 피식거리던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끈거리는 두통, 하루종일 울렁 울렁 신맛이 올라와 나의 목구멍은 썩은 하수구가 아닐까하는 착각을 일으키는 숙취가 해소된다면 3일만에 부활한 예수님의 기분과 다르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위스키 한 잔을 따르고 옷을 벗었다. 이번엔 불이 쉽게 꺼졌다.


눈을 감자 방이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비로운 귀신이 꼭 안아주는 것같다.


자비로운 귀신이 꼭 안아주는 것같다라는 표현을 보고 이 저자는 정말 천재라는 생각을 했다.

술에 만취해서 금방이라도 드러눕고 싶은 때,어지러움과 울렁거림에 가득한 몸을 푹신한 이불위로 던졌을때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정말 귀신같은 안도감을 여러번 느꼈기에 저 문장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본인의 몸을 과음 후 번지점프, 북극곰 바다수영,시속260킬로 레이싱하기 등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혹사시키며 완벽한 숙취해소 방법을 찾기위해 고군분투한다.

매번 실패로 돌아가는 숙취해소법들을 보면서 도대체 저자의 간은 언제 평화를 찾게 되는가

보는 내가 다 걱정될 정도였다. 그나마 저자가 숙취로부터 조금 자유롭게 된 방법은


스트라토스피어에서 번지점프를 했을 때


북극곰 수영대회



 

적절한 충격이 순간의 숙취를 날려버린다는 이론에 따라 해본 방법인데,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대량의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킬만한 충격요법까지 해야한다니...술 한번 마시기 정말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술만 퍼마시는 장면만 나오지는 않는다.그랬다면 단순히 외국사는 어느 양놈의 술주정 기행기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저자는 숙취해소를 위해 노력한 과정과 더불어 문화에 따른 숙취 해소법과 역사적인 맥락을 잘 엮어서 풀어낸다. 로마, 이집트, 디오니소스,오스만제국에서의 일화...등등 굉장히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저자 특유의 유쾌함으로 잘 풀어내고 있는데, 책의 제목이 이러한 감상을 아주 간결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가 우리나라에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

우리나라의 숙취해소법을 연구해보았어도 재밌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리나라 사람들 만큼이나 음주가무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또 어디있겠는가 과음 후 해장국과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여러가지 음주 전 숙취를 예방하는 제품들...


'뭔가 미친 것같지만 유쾌하고, 독특한 소재의 책을 읽고 싶은데,인문학적인 소양도 기르고 싶다'하시는 분들은 이 책을 추천드린다. 이 책은 나에게 퇴근 후 가볍게 한 캔하는 맥주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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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년 :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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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10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에 이렇게 좋은 책이 재출간되어 정말 기쁩니다. 빨리 받아서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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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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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독립 책방 '달리봄'에서 페미니즘 도서 읽기 모임을 시작하여 만난 첫 책.

일본사람이 썼지만 너무나 한국사회의 모습과 비슷 혹은 똑같은 모습을 그려내 공감을 하다 못해

'너무 당연한 소리를 쓴거 아냐?' 라고 느낀 책이다. 그동안 살면서 느꼈던 여혐에 대해 심리적,역사적,

사회적으로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책이다.


 

 

포르노의 철칙은, 유혹하는 이는 여자여야 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쾌락에 지배될 것,이다.

"유혹하는 건 여자라고. 나는 나쁘지 않아"하고

 남자의 욕망을 면책시켜주는 대단히 단순한 장치이다.

저항하는 여자를 억지로 눕혀 범하는 '강간물'에서조차

결국은 여자의 쾌락으로 끝이 난다.

"왜 그래. 너도 좋았잖아"하고 말하는 듯 말이다.

마치 여성기는 어떠한 고통이나 폭력도 쾌락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같다.

-p.22-


이런 st의 포르노식 사고 방식에 젖어 있으니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시선과 '너도 좋았잖아'식의 언급이 절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호모소셜리티(동성사회성)는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

그리고 호모소셜한 남자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바로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여성의 성적 객체화를 서로 승인함으로써

성적 주체 간 상호 승인과 연대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여자를(적어도 한 명이상) 소유하는 것'이

성적 주체가 되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자기여자'라는 말은 참으로 잘도 만들어낸 표현이다.

 '남자다움'은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

 '자기 마누라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남자가 무슨 남자냐'는

 판정 기준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타자화-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여성멸시-를

 '여성혐오'라고 한다.-p.39-


호모소셜리티를 위한 여성의 객체화...로맨틱이라는 단어로 슈가코팅된

여성혐오적 발언과 여성의 객체화에 우린 얼마나 속고 있었나...


성의 이중 기준은 여성을 두 종류의 집단으로 분할하게 된다.

성녀와 창녀, 아내.어머니와 매춘부,결혼 상대와 놀이상대, 아마추어와 프로 등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분법이다.

실제 살아 있는 여성에게는 몸도 마음도 그리고 자궁도 보지도 달려 있지만,

 생식용 여성은 쾌락을 빼앗긴 채 생식의 영역으로 소외되고

쾌락용 여성은 쾌락에 특화되어 생식으로부터 소외된다.

이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존재인 애 딸린 창녀는 그래서 기분 나쁜 존재가 된다.

-p.57-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엄마,여자=애 낳는 기계=육아=여자=숭고함=모성애'의 강요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위안부와 후방에서 억압받은 일본의 아내들이 같다고 보는 시각은

아무래도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조금 예외를 두고 봐야 하는 부분인데 아무래도 일본인이니 그런가 싶기도 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원들도 모두 한 소리로 불편함을 느낌을 표현했다.


세지윅은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를 남성 간 연대를 성립시키는,

분리하기 어려운 한 쌍의 계기라고 했다. 호모소셜한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

즉 자신이 남성임을 다른 남성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자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유무대립에 의해 성립된 표준으로서의 남성성은

오로지 유표화된 여성성의 결여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이다.

-p.109-


여혐은 여자같지 않은 남자, 용감한 남자임을 끊임없이 증명받기 위한 과정이라면

게이들의 여혐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게이들이 남자들을 좋아하고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

그들이 당당한 남성으로서의 일원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보기엔 사랑의 감정으로 좋아하는 것이다보니

조금 다르게 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흔히 같은 소수자로써 여성운동에 호의적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게이들의 여혐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던 경우를 살펴보면 어떤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할 지 혼란스럽다.



어머니의 딸에 대한 기대는 아들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양의성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딸에게 '아들로서 성공하라'와 '딸(=여자)로서 성공하라'를 동시에 보낸다.

 두 메시지 모두 '제발 나처럼은 되지 말아 달라'는 자기 희생의 메시지이지만

그 속에는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너야'라는 질책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이러한 양의적 메시지를 받은 딸은 가랑이가 찢어질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불만스러운 딸'이 고도 성장기의 산물이었다면,

그녀들이 역사 속으로 퇴장하면서 대신 등장한 것이

어머니의 화신이 되어 그 부채에 신음하는 '자책하는 딸'이다.

 '한심한 아들'처럼 딸 역시 어머니의 행복에 책임을 질 입장과

 능력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들과 달리 딸은 동일화의 대상이 어머니인 탓에

어머니의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을 대리 수행해야 한다는

책무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p.160-


'너는 엄마처럼 살지마' 우리나라에 사는 여자들이라면 대부분 들어봤을 말이다.

늘 고생하는 엄마가 안쓰럽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죄스럽고 잘 되야 한다는,

 엄마를 실망시키면 안되겠다는 압박감, 이것에서 오는 엄마에대한 원망과 더불어 이런 마음을 갖는

 나는 나쁜 딸이라는 자책감...이 책에서 나오는 모든 대목 중에 가장 공감을 하며 읽었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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