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독립 책방 '달리봄'에서 페미니즘 도서 읽기 모임을 시작하여 만난 첫 책.

일본사람이 썼지만 너무나 한국사회의 모습과 비슷 혹은 똑같은 모습을 그려내 공감을 하다 못해

'너무 당연한 소리를 쓴거 아냐?' 라고 느낀 책이다. 그동안 살면서 느꼈던 여혐에 대해 심리적,역사적,

사회적으로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책이다.


 

 

포르노의 철칙은, 유혹하는 이는 여자여야 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쾌락에 지배될 것,이다.

"유혹하는 건 여자라고. 나는 나쁘지 않아"하고

 남자의 욕망을 면책시켜주는 대단히 단순한 장치이다.

저항하는 여자를 억지로 눕혀 범하는 '강간물'에서조차

결국은 여자의 쾌락으로 끝이 난다.

"왜 그래. 너도 좋았잖아"하고 말하는 듯 말이다.

마치 여성기는 어떠한 고통이나 폭력도 쾌락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같다.

-p.22-


이런 st의 포르노식 사고 방식에 젖어 있으니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시선과 '너도 좋았잖아'식의 언급이 절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호모소셜리티(동성사회성)는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

그리고 호모소셜한 남자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바로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여성의 성적 객체화를 서로 승인함으로써

성적 주체 간 상호 승인과 연대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여자를(적어도 한 명이상) 소유하는 것'이

성적 주체가 되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자기여자'라는 말은 참으로 잘도 만들어낸 표현이다.

 '남자다움'은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

 '자기 마누라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남자가 무슨 남자냐'는

 판정 기준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타자화-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여성멸시-를

 '여성혐오'라고 한다.-p.39-


호모소셜리티를 위한 여성의 객체화...로맨틱이라는 단어로 슈가코팅된

여성혐오적 발언과 여성의 객체화에 우린 얼마나 속고 있었나...


성의 이중 기준은 여성을 두 종류의 집단으로 분할하게 된다.

성녀와 창녀, 아내.어머니와 매춘부,결혼 상대와 놀이상대, 아마추어와 프로 등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분법이다.

실제 살아 있는 여성에게는 몸도 마음도 그리고 자궁도 보지도 달려 있지만,

 생식용 여성은 쾌락을 빼앗긴 채 생식의 영역으로 소외되고

쾌락용 여성은 쾌락에 특화되어 생식으로부터 소외된다.

이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존재인 애 딸린 창녀는 그래서 기분 나쁜 존재가 된다.

-p.57-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엄마,여자=애 낳는 기계=육아=여자=숭고함=모성애'의 강요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위안부와 후방에서 억압받은 일본의 아내들이 같다고 보는 시각은

아무래도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조금 예외를 두고 봐야 하는 부분인데 아무래도 일본인이니 그런가 싶기도 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원들도 모두 한 소리로 불편함을 느낌을 표현했다.


세지윅은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를 남성 간 연대를 성립시키는,

분리하기 어려운 한 쌍의 계기라고 했다. 호모소셜한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

즉 자신이 남성임을 다른 남성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자가 아님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유무대립에 의해 성립된 표준으로서의 남성성은

오로지 유표화된 여성성의 결여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이다.

-p.109-


여혐은 여자같지 않은 남자, 용감한 남자임을 끊임없이 증명받기 위한 과정이라면

게이들의 여혐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게이들이 남자들을 좋아하고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

그들이 당당한 남성으로서의 일원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보기엔 사랑의 감정으로 좋아하는 것이다보니

조금 다르게 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흔히 같은 소수자로써 여성운동에 호의적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게이들의 여혐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던 경우를 살펴보면 어떤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할 지 혼란스럽다.



어머니의 딸에 대한 기대는 아들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양의성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딸에게 '아들로서 성공하라'와 '딸(=여자)로서 성공하라'를 동시에 보낸다.

 두 메시지 모두 '제발 나처럼은 되지 말아 달라'는 자기 희생의 메시지이지만

그 속에는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너야'라는 질책의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이러한 양의적 메시지를 받은 딸은 가랑이가 찢어질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불만스러운 딸'이 고도 성장기의 산물이었다면,

그녀들이 역사 속으로 퇴장하면서 대신 등장한 것이

어머니의 화신이 되어 그 부채에 신음하는 '자책하는 딸'이다.

 '한심한 아들'처럼 딸 역시 어머니의 행복에 책임을 질 입장과

 능력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들과 달리 딸은 동일화의 대상이 어머니인 탓에

어머니의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을 대리 수행해야 한다는

책무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p.160-


'너는 엄마처럼 살지마' 우리나라에 사는 여자들이라면 대부분 들어봤을 말이다.

늘 고생하는 엄마가 안쓰럽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죄스럽고 잘 되야 한다는,

 엄마를 실망시키면 안되겠다는 압박감, 이것에서 오는 엄마에대한 원망과 더불어 이런 마음을 갖는

 나는 나쁜 딸이라는 자책감...이 책에서 나오는 모든 대목 중에 가장 공감을 하며 읽었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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