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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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읽는 하루키의 단편집이다. 예전에 한참 하루키 책을 탐독하던 때가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뿐만 아니라 하루키에게 청춘의 첫 시작을 온전히 맡기는 나 같은 사람이 꽤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하루키가 주는 감흥이 시들해지고 자연스레 그의 책을 멀리하던 기간이 있었다. 


이번 신간을 읽겠다고 다짐한 것은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본 책의 홍보 내용이었다. 바로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묘하게 왔다 갔다 하는 내용에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시나가와 원숭이 이야기만 마음에 들었고, 나머지는 소금 빠진 삶은 계란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총 8편의 단편을 읽을수록 뭐랄까 이제 과거를 회상하는, 아버지 혹은 옛사람의 추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에서 교훈이나 소설을 분석하여 어떤 특별한 무엇인가를 찾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그냥 하루키가 심심할 때 후루룩 써 내려간 글 같기도 하고 그만큼 쉽게 읽히기도 했다.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마다 희뿌연 안개가 가득한 산속을 홀로 거니는 듯한, 특유의 서늘한 감성이 좋았는데 이번 신작을 읽고나서의 느낌은 좋게 말하면 작가의 작품이 여유롭고 능글맞아졌다고 표현할 수 있겠고, 나쁘게 말하자면 특유의 기운이 빠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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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 기분 따라 행동하다 손해 보는 당신을 위한 심리 수업
레몬심리 지음, 박영란 옮김 / 갤리온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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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표지에 나와 있는 말이 내 눈길을 끌었다. '어리석은 사람은 기분을 드러내고 현명한 사람은 기분을 감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처럼 마음에 새겨야할 문구가 또 어디있을까싶다. 굉장히 가볍게,금방 읽을 수 있지만 인간관계로 고민을 해봤던 사람이라면 결코 가볍게만 치부할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있다. 혹자는 '뻔한 자기개발서류의 책들이다'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로 나름의 고충을 겪었던 나에겐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가끔 미친자가 되는 시기가 있다. 이 때에는 세상 모두가 나를 미워하고, 우습게 여기는 것같다. 내 자신이 너무 작고 초라해서 우주의 먼지도 못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미친 시기.



누군가가 문제 제기를 한다면 그 말에서 감정을 분리하는 버릇을 들여라. 언뜻 들으면 상대의 말이 나를 상처주기 위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내 기분이 만들어낸 오해일 때가 많다. 


다른 사람에게 지적을 받았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에 따라 나의 그릇이 드러난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높은 기대감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에게 덜 기대할 것, 내가 준 만큼 똑같이 받으려고 욕심내지 않을 것. 나는 늘 남에게 호의를 베풀 때 내가 원해서 한 것이니 계산기를 두드리지 말자는 생각을 항상 했었다. 그러나 이를 또 망각하고 '기대'를 너무 많이 했던 인연 탓에 상처를 많이 입었다. 서운하고 소외감이 들어도 순간 내가 만들어내는 착각이다. 나를 좀먹는 감정에 속지말고, 내 중심을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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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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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번도 엄마가 내 곁을 떠나갈 생각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라고 말하는 보부아르처럼 나에게 있어 '엄마의 죽음'이란 개념은 먼 옛날 전설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쉽게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무엇이 있다. 애증, 사랑, 애달픔, 미움 모든 감정이 섞여있는 복잡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보부아르가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당황스럽고 생소한 감정의 변화 과정을 이 책을 통해서 미리 간접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일흔이 넘은 보부아르의 엄마 프랑수아즈는 어느 날 욕실에서 넘어져 대퇴부 골절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때 소화기에 암 덩어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보부아르와 동생은 엄마를 수술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갈등을 겪게 된다. 결국 엄마 프랑수아즈에게 복막염 수술을 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암 수술을 하여 한 달 가량 엄마의 시간을 연장한다. 프랑수아즈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끝없는 삶에의 의지로 병마를 이겨내려 노력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신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야"라고 동생에게 말했었다. 

이날 밤 이전까지 내가 느꼈던 슬픔은 모두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 있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슬픔에 잠겨 있을 때조차도 정신을 차린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에 느낀 절망감만큼은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서 울고 있는 듯했다. 나는 사르트르에게 엄마의 입에 대해, 아침에 본 모습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 입에서 내가 읽어 낸 그 모든 것에 대해 들려주었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탐욕, 비굴함에 가까운 고분고분함, 희망, 비참함,죽음과 대면해서뿐만 아니라 살아오는 내내 느껴 왔을, 하지만 털어놓지 못했던 고독함에 대해서.사르트르에 따르면 내가 더 이상 입을 내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내 얼굴에 엄마의 입을 포개어 놓고 나도 모르게 그 입 모양을 따라 했던 모양이다. 내 입은 엄마라고 하는 사람 전부를, 엄마의 삶 전체를 구현하고 있었다.

엄마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몇년 전 정정하시던 외할머니께서 사고를 당했다. 나는 그때의 엄마를 잊지 못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샜던 나의 엄마는 아마 보부아르가 말한 이해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슬픔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보부아르는 엄마의 죽음, 엄마와의 관계, 설명할 수 없는 절망감 등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는, 잊힌 여인에 불과했던 엄마가 한 명의 주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엄마의 이름을 불러줌과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프랑수아즈 개인 그 자체로 인식하며, 그녀의 삶을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나름 엄마의 죽음에의 애도와 예의를 갖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엄마도,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의 엄마도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있는 하나의 개인이었는데, 삶의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나'라는 이름을 잃어가고 있는게 아니었을까, 죽음을 통해 다시 '나'의 이름을 되찾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 이름없이 왔다가 나의 이름을 되찾고 다시 떠난다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이란 과정을 함께하며 보부아르는 엄마와 화해한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은 가부장제 속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던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 미움, 답답함, 절망감, 혐오라는 감정이 뒤엉킨 평생의 숙제와도 같았을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 회복을 통해 이러한 모든 감정에 대한 안녕을 고하고, 또한 자신의 엄마처럼 가부장제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만했던 모든 여성들에게 보내는 연민어린 시선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되어 뇌사 상태라던가 피치못할 사정이 생기면, 생명연장은 원하지 않으니 편안히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말라며 무시했다. 무심한듯 평온한 그 문장이 내게는 벼락같이 다가와서 순간 감당이 되지 않았었다.



나는 병원에서 가져온 압지 속 가느다란 종이 띠 위에서 스무살 무렵처럼 반듯하게 꾹꾹 눌러쓴 필체로 엄마가 남긴 두 줄로 된 문구를 발견했다. "나는 장례식을 아주 단순하게 치렀으면 한다. 꽃도 화관도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도만큼은 많이 해 주길 바란다."


아주 어릴 적 외할머니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의 외할머니는 죽으면 화장(花葬)을 시켜달라 하셨다. 들꽃같던 나의 외할머니는 이른 나이에 남편을 보내고 억척스레 잡초처럼 살아왔다. 죽으면 다시 생전에 좋아하던 예쁜 꽃밭으로 돌아가고싶다 했다.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거죠"

이 말은 노인들을 슬프게 하고, 또 그들을 유배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자기가 죽을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역시 엄마에 관해서 그런 상투적인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일흔 살이 넘은 부모나 조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막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에 몹시 슬퍼하는 쉰 살가량의 여자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 여자를 신경 쇠약증에 걸린 환자로 치부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죽을텐데, 여든 살이면 죽을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은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도, 살 만큼 살았기 때문도, 또 늙었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은 무언가로 인해 죽는다.

(중략)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란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은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얼마 전 영어회화 수업 주제로 '죽음과 나이듦'에 대해 튜터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시아권 튜터는 나와 죽음과 나이듦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죽음은 모두에게나 찾아오는 것, 겁내지 말고 하루하루를 후회없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서양권 튜터는 죽음과 나이듦에 대해 보부아르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갑작스런 천재지변, 폭력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살만큼 살았다는 말만큼 슬픈 이야기가 없다. 사실 누구나 삶에의 의지는 강렬하다. 보부아르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실존에의 질문을 던지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더 서양과 동양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식 차이를 새삼스레 느꼈다. 


153페이지 가량의 분량으로 삶과 죽음, 실존한다는 것의 의미, 엄마와 자식간의 갈등 등 삶의 보편적인 부분을 다루고 성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보부아르의 역량이 뛰어나다고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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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5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LilacWine 2021-06-07 10: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적당히 가까운 사이 - 외롭지도 피곤하지도 않은 너와 나의 거리
댄싱스네일 지음 / 허밍버드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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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거리감, 적당한 친밀감 그 속에서 지켜나가는 나의 자존심과 공간...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적당함'을 지킨다는 것에의 어려움을 절감하게 된다.

나는, 우리는 늘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입고, 괴로워한다. 때문에 '내가 나이를 이렇게나 먹고서도 늘 인간관계가 어렵다니 난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닌걸까' 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저자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인간관계, 거리감은 오히려 나와 너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려니'와 '아님말고'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나 일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땐 그러려니 넘기기도 하고 

목소리를 내야할 땐 아님말고 라는 방패를 준비해두자.

인류애 소멸 직전 단계에서 내 마음을 구출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러려니와 아님말고 정신이 누구보다 필요한 나에게 정신이 번쩍드는 문구였다. 

늘 나는 전전긍긍하며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지 않으려 고군분투했다. 마음을 더 쓰는 관계이기에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다시 원래의 나로 회복하는데 꽤 오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했다. 상대방의 말과 표정을 그냥 지나칠 수 없고, 혹시나 내가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내가 무례를 범한 것은 아닐까 스트레스를 받기 일쑤였다. 이젠 그러려니와 아님말고가 나의 쿠크다스같은 마음을 지켜주는 호신술로 작용했음한다.


중간중간 들어간 삽화와 그리 길지 않은 문장에 가볍게 후루룩 넘겨볼 수 있었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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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 내 삶과 세상을 바꾸는 페미니즘
김현미 지음, 줌마네 기획 / 반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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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스트로서 살아야 할 삶의 형태와 기준'이 따로 있는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던 제목이다. 페미니스트로써 '내가 지금 하는 행동과 생각이 옳게 가는 것인가?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생활 속에서 문득문득 의문이 밀려오곤 한다. 답을 찾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이다. 페미니스트로써 '내가 지금 하는 것이 혹 동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잘못하고 있는건 아닌가' 끊임없이 검열하고 질문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실현하고,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해답을 찾아왔다.


저자는 현재 한국 여성들의 일, 삶, 관계 등을 다각도로 살펴보며 한국여성을 둘러싼 복합적인 사회를 분석하고, 신자유주의 가부장제 사회를 대체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라이프스타일로서의 페미니즘은 즉 내 에너지(성적,감정적,지적에너지, 경제적 자원 등)를 누구와 무엇을 모색하며 어떤 희망과 목적을 갖기 위해서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입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소비나 문화를 통해서 여성들이 자신의 감각, 쾌락, 원하는 삶의 형태를 확인하고 자신이 택한 패션, 음악, 음식 등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곧 여성의 지위와 권력을 향상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실험하는 페미니즘이다. 내 에너지를 어떻게, 건강하게, 올바르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오랜 나의 질문이었다. 저자는 이것을 설명하기위해 노동과 소비,삶에 대해 고찰한다. 책의 여러 부분이 다 공감가는 내용이었다.



워킹맘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빨리 가서 엄마 품에서 떨어진 아이들을 돌봐야죠."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요." "어린이집에 있는 아이를 데려와서 빨리 씻기고 먹이는 게 엄마의 역할 아닐까요?" "죄책감에 시달려요" (중략)

일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일에서 활력을 찾고 보상을 얻는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여성을 여전히 전통적인 모성이라는 성역할로 판단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마치 일하는 엄마는 늘 혼란에 빠져 있는 것처럼 재현하곤 하죠. 모성 신화가 강하지 않은 사회일수록 여성은 역할 갈등을 덜 느끼고 이것이 아이 교육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일에서 활력을 찾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아이가 성평등의 가치를 내면화할 수 있도록 사회화하는 것도 엄마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봅니다. 반면 한국처럼 일하는 여성을 끊임없이 죄책감이나 모성 실패로 언어화하는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일 경험이 모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p.31-32


 가정이 더 이상 편안하고 안락한 휴식 공간이 아닌 또 다른 노동이 기다리고 있는 일터라는 말에 공감을 했다. 내 주위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워킹맘들의 모습이다. 어린이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를 보고파하면서도, 엄마로써의 나와 분리될 수 있는, 나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일터에 오래 머물고 싶어하는 이중적인 모습. 이에 혹자는 모성애가 없는 이기적인 여자라고 욕을 하는 경우도 보았다. 일하는 여성을 요구하면서도 모성신화를 내세워 늘 여자를 죄인으로 만드는 사회, 이제는 바뀔 때도 되었는데 아직도인가 싶다.


여성이 처한 노동 현실과 내용을 정리하는 부분은 매우 공감되었다. 여러모로 '여성의 노동력'은 저평가 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러 사업의 기획 단계에서 일회용으로 쓰임받거나, 유리절벽인 줄 알면서도 망해가는 프로젝트에 우두머리가 되어서라도 일에 대한 끈을 잡으려하는 현실... 한편으로 이러한 부분 때문에 여성들의 능력주의 신화가 견고해지기도 한다.

 


나아가 자신이 성차별이나 성희롱 등을 당하지 않을 유일한 길은 일로 자신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과로하고 자기 스스로 일에 종속된 삶을 기꺼이 수행하다가 탈진하는 여성들이 늘어납니다. p.61-62


미생에 안영이 캐릭터가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우리 사회에는 수많이 안영이들이 오늘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남성과 같은 선상에 서고 평가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또한 여성은, 특히 20대, 어리면 어릴수록 사회에서 한 성인으로써 일을 해내는 것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기분을 북돋아주는 치어리더같은 면을 요구받는다.  나 또한 전 직장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굴려지고 있을 때 이러한 부분을 강요받기도 했다.  "넌 왜 막내다운 맛이 없니?"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더럽고 벙찌는 기분이란...

기업과 사회에서 하지 않는 감정노동의 결핍과 공동화를 20대 여성이 메워주길 기대하는 모습이 함축적으로 들어간 말이다. 이와 더불어 여성들은 성희롱이라는 위협을 직장에서 직면한다.



이처럼 낯선 환경에서 빠르게 동료들 안으로 들어가야 일을 할 수 있는 여성들은 가짜 친밀성을 매우 자주 연기합니다. 실제 마음과 달리 이런 대사를 하면서요."어머 오늘 우리 팀장님 너무 멋있으세요." "오늘 날씨 화창한데, 우리 그럼 또 옥상에서 티파티?(웃음)" 그런데 여성들의 이런 퍼포먼스가 매우 잘못된 메세지로 읽힙니다. 여성이 처한 이 구조적인 조건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성들이 왜 그런 방식의 친절과 세련됨을 수행하고, 빠른 시간 내에 친밀함을 보여주고 옷을 예쁘게 입고, 초창기에 명랑하고 빠릿빠릿한 척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이 여성들은 노동시장의 구조와 열악한 노동 조건 때문에 가짜 친밀성, 연출된 친밀성으로 빨리 회사에 진입해서 일하기를 택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수치적 평등에 도달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만큼 일터가 여성에게 '정의롭지'못한 위치를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p.64

 

자본주의 미소를 성애적 관계를 암시하는 메세지로 오입력한 남자들과의 문제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 가깝게는 주위 친구들에게서도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다. 남자도 물론 직장에서 적응하는 것이 힘들겠지만, 하나의 거대한 가족같은 회사에서는 뛰어난 업무능력과 더불어 좋은 성격, 살가움, 애교 등 사회에서 규정한 딸과 아내의 역할을 여자들이 수행하길 바란다.



신자유주의 경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근로주의와 성과주의 원칙에 붙들려 과시, 자책, 나르시시즘이라는 삼중의 유아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지요.(중략) 쇼잉이 만연한 사회가 되었습니다.p.100


요즘은 특히 더 '내 자신'에 대해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사회같다. 누가 내 친구이고 적인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시대...끊임없는 남과 나의 비교, 마음을 고쳐먹어도 나를 좀먹어가는 열등감, 피로한 사회...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어떻게 삶과 일의 균형을 찾아야할지 저자는 질문하고 고찰한다.


군대식 사회, 여성차별적인 사회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인지 늘 궁금했다. 저자는 이를 초남성적 발전주의에서 근원을 찾고있다. 식민지배의 경험을 통해 무너진 남성의 자존심을 극복하고자 과도한 남성성을 추구했고, 유교적 가부장제 모델을 더욱 더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국가의 빠른 발전은 곧 가족의 성공이고, 이를 위해 엄격한 성역할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곧 국가였고, 산업역군인 딸같은 노동자...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과 여유, 평등한 관계에의 외침은 묵살될 수 밖에 없었다. 성별임금격차의 당연화는 바로 이러한 사회에서 주장한 '가족임금' 체계가 한 몫을 했다. 



이 패러다임 변화에 자연적으로 순응하게 만들려면 국가가 남성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박정희 정권 때도 군대 안가고 병역을 기피하는 남성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전쟁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군대를 누가 왜 가고 싶겠어요? 남성들이 병역을 기피하자 박정희 정권은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는 한편, 노동과 군사주의를 엮습니다. 제일 중요한 유인은 군대에 갔다 오면 보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병역필자에게만 제공하는 일자리, 근로의 기회가 그것입니다. 남성들에게 약속되었던 또 다른 보상은 '가족임금'입니다. (중략) 기업에 취직하면 주택자금도 대주고, 교육비도 대주는 등 한 가정을 먹여살릴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해줬다는 뜻이지요. 대기업이나 중공업 분야 노동자에게 가족임금제를 통해 '당신의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월급'을 약속해준것입니다. (중략) 가족임금제의 도입과 함께 남성만이 생계를 부양한다는 남성 생계부양자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면서 여성 노동자에게는 남성의 절반 수준의 임금만 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남성과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비혼 여성에게는 '당신 아버지한테 가족임금을 줬으니까 당신의 생계비는 아버지 임금에 일부 포함되어있다'라고 전제하고...p.131-132



이러한 초남성적 발전주의 사회에서는 남성 동성사회가 강화된다. 남성이 사회나 공적인 영역을 장악하여 여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군사적 위계사회에서 남성이 다른 남성을 통제하고 모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무시당한 남성은 이 스트레스를 섹스 중심의 일시적 쾌락에 집중하고, 남성끼리의 유대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고착시키는 데 온 에너지를 쏟게 된다. 멀쩡한 남자도 남자끼리 모이면 여자 얘기를 하고, 여성을 성적으로 모욕하고 희화하면서도 아니라고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같다. 이것은 또 하나의 남성 동성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남자친구와의 관계, 남성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 토로하는 내용을 듣다보면 여성은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이 아닌, 이성적 관계, 성애적 관계로만 대우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대학교 때 조별과제나 남자와 여자가 모이게 되는 공간에서 그것이 일적인 관계로 모였다 할지라도 서로 언제든지 사귈 수 있는, 남녀간의 팽팽한 연애 가능성의 긴장감만 나도는 분위기가 대부분이다. 나는 늘 이에 피곤함 마저 느꼈었다. 왜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여성은 같은 동료 혹은 라이벌이 아닌 연애상대, 성애적 상대로만 여겨지는걸까



남성이 권력, 부, 지위를 독점하는 사회일수록 '동성사회적 규약으로서의 남성성'은 강화됩니다. 자신의 신분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남성들의 인정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그만큼 남성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자원에 접근하거나 권력을 공유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중략) 여성이 이런 남성들 간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매개체나 교환물로 기능한다고 말합니다. 남성들은 여성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자로서 친밀한 연대를 구성해나가고, 이런 남성들 간의 친밀성은 자신이 선택한 '실재하는 여성'에 대한 사랑보다 강력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심심찮게 동성사회적 규약으로서의 남성 사회를 보고 자랐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미래의 부인이 바뀐다'같은 문구도 멋 모르고 자주 사용했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동성사회에서 여성은 하나의 선물, 매개체로 주고받는 물건과 다름없다. 남성들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여성을 성적 객체화 한다. '자기 여자'를 소유하는 것은 주류사회에 편입하기 위한 남자로써의 필수 조건이다. 남자다움이라는 것은 한 여자를 자기 지배 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 서로를 남성으로 인저한 이들의 연대는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함으로써 성립한다.


저자는 소비자본주의에 붙들리지 않으면서 경제적 생존, 자기돌봄, 타자에 대한 돌봄, 자연과의 공존을 실현하는 것에 고민한다. 좋은 삶이란 일과 삶의 선순환 체제에서 나의 능동성 회복에 대한 문제라고 말한다. 즉 근로주의와 초남성적 발전주의에 빼앗긴 우리의 시간과 감각, 정서를 회복하는 것이 좋은 삶이 되는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여성 우선주의가 페미니스트들 간의 여러 갈등을 낳는다는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경험과 피해를 경청하고 감정이 움직여서 함께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욕구와 실천의 범주에 들어온 사람들 모두 운동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페미니즘 운동이 디지털로 옮겨가고 트위터와 여초 등 다양한 사이트에서 빠르게 의견을 나누고 결집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부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제점과 발전 가능성이 두드러지는 것같다. 하나의 과도기이기에, 여러 소리가 터져나오는 시기이기에 조금 혼란스러운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 그동안 여성들은 너무나 많은 검열사회 속에 살아갔기에 이것이 체화되어 끊임없이 자신의 발언을 검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같은 여성, 같은 동지 사이에서도 적용하는 것같다. 나와 같은 의견이든 반대입장이든 모든 사람의 의견을 열어놓고, 모두가 눈치보지 않고 소리낼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소비, 시간 활용, 일자리 환경,페미니즘의 변화,연대 문제 등 다양한 부분에서 좋은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 담긴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옳아서 모두 리뷰에 담고 싶었지만 나의 능력이 부족하여 한탄할 뿐이다. 하나의 주체적인 인간으로써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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