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가는 나그네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솔시선(솔의 시인) 12
이흔복 지음 / 솔출판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총 175쪽) 
 

 

  우리는 2000년 이래로 (...) 대표하는 시인이 김행숙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녀의 시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새로운 나를 촉발한다. 그녀는 '시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부류의 신느 본질적으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감응'의 대상이다. 그녀의 시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지 말고 그녀의 시와 더불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일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해설. 174쪽)

   참으로 어려운 시집이었다. 이 해설을 읽기 전까지는 참으로 어려운 시, 이해가 안 되는 시들이 <이별의 능력>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주 나자빠지고 걸려넘어지기도 자주였다. 그렇다고 속시원히 감상할 만한 능력은 물론 완비하지 못했다. 다만 시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그것에 대한 화두를 얻었다는 것. 그것으로 우선은 족하다. 

  나와 남, 의 관계는 쓴다는 행위에서, 그 표현 아래에서 구별되는 인칭이다. 그러나 시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내남은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라고 믿기 어려운 나는 역시 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나,를 너인 듯, 그대인듯 그러한 표현을 마주친다. 아무래도 우리가 시를 어렵게 여기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인 인칭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의 난해성은 '나'가 놓인 상황, '나'와 맞서 있는 대상을 찾지 못하는 데에 있다. 시 한편은 길어도 소설을 넘기지 않는다. 거대 서사시의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시는 그렇다. 그렇지만 김행숙 시인의 시집 <이별의 능력>은 이러한 기초 지식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음 인용시는 <이별의 능력>에서 서시격인 "발"이다. 

발이 미운 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나의 무용수들. 나의 자랑.

발끝에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기도할 때 그들의 힘줄을 떠올린다. 

그들은 길다. 쓰러질 때 손은 발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무용은 일순간 자신의 몸을 곧추세우는 동작이 있다. 보는 사람의 눈에도 위태해 보인다. 그들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발은 많은 노력과 단련으로 그 전체적인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흉물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아름다움은 발끝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그 힘줄을 떠올리며 기도를 한다. 그만큰 나는 간절하다. 그리고 '그들이 길다'는 것은 나와 견주어서 그렇겠지만, 그렇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림자'를 연상하게 된다. 


신비한 일
 

낮에 자는 사람과
밤에 자는 사람은
언제 만날까

사람들이 만나는 시간은 신비해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자는 사람에게도 약속은 생기지

12시
13시

내 그림자도 시간에 대해 말하지
나는 지금 길어지고 있어

어디까지? 나는 지금 걸어가고 있어

낮에 자는 사람과
밤에 자는 사람이
만나는 시간 가까이

더 가깝게
사람들이 앞만 보고 걸어다녀
뒤통수는 까맣고 까매
누구일까

 

   김행숙 시인의 시집 <이별의 능력>은 적어도 나에게는 '시로써 무엇을'이라는 질문을 주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역시 사람삶이라는 것, 단지 표현방식의 변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우선은 확고하다. 조금 더 배우고 익혀야만 김행숙 시인의 시집 <이별의 능력>에 가까워지리라 예상한다.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해설부에서 <이별의 능력>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많은 부분 할애하고 있지만 나는 친절하게 제시해준 독법을 무시하고 만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꺼운 무지개
 

   당신은 3분 동안 군화 끈을 매고, 나는 조여지는 발처럼 몰입해요. 전쟁은 언제 끈나나요? 왜 나의 믿음은 퇴폐에 바쳐지나요? 당신은 언제 죽고,, 나는 또 언제 죽나요?

   그녀의 눈꺼풀엔 매일 두꺼운 무지개가 뜨죠. 그녀를 믿을 수 잇겠어요? 전쟁터는 그녀의 테마 카프, 화장대는 그녀가 늘 쓰러지고 일어나는 곳이에요. 그녀의 남자들은 모두 군화를 신고 출근했어요.

   어느 날 군화를 벗고 내 곁을 떠났어요. 용서할 수 없어요. 여긴 전장에서 겨우 2km 떨어진 곳이라구요. 아이들이 총소리를 들으면서 봄소풍을 간다구요. 왜 개나리는 놀하고 진달래는 핑크빛인가요? 왜 당신은 발간 액체를 토하고, 왜 나는 검은 물을 흘리나요? 하늘에선 자주 흰 가루가 뿌려지고 도시 전체가 화학적으로 반응했어요. 색체와 향기를 믿을 수 없고

   그녀의 확신은 알략이 녹으면서 형상을 얻죠. 그녀를 성급하게 믿진 마세요. 그녀가 보이는 화학적 반응 수준은 현실을 초과해요. 미래적인 것은 퇴폐적인 것이에요. 그녀의 눈동자엔 파편과 흙먼지만 찍혀요.

   당신은 언제 죽었고, 나는 또 언제 죽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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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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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133쪽)

   가재미는 경상도 지방말이다. 가자미, 두 눈이 한 데 쏠려 있는 바닷고기다.  문태준 시집 <가재미>에서는 죽음을 지켜보는, 죽음을 치르는 눈동자가 있다.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있을까. 그리고 죽음 앞에서 인간은 왜소해진다. 무력해진다. 그러나 가재미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만을 무력감으로만 지켜보고 있지 않다. 그는 생각한다. 그들의 죽음을 지독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속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 이생에서 남겨진 이들의 몫일 것이다.

   시집 <가재미>에는 거대한 구멍이 있다. 시적 화자는 그 구멍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나'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나'는 누구일까.

 

그 구멍에 내가 그대가 살고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나는 땅 아래로 내려가는 땅벌레의 작은 구멍을 들여다보아요
아침밥 먹기 전엔 봉긋 봉긋 작은 흙무덤이었는데
내가 하얀 고봉밥을 한 그릇 먹고 난 사이 작은 흙무덤은 사방으로 풀어헤쳐지고 빈 구멍이어요
나보다 늦잠을 자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무덤을 열고 누군가 나오는 것이었는데
흙을 덮어 밤을 보내고 햇살이 무서리가 꼬들꼬들 마를 참엔 무덤을 열고 또 어디로 가셨나요
나는 그 구멍에 숨어 산다는 이를 보지 못했어요 그 구멍은
땅벌레의 것인가요 나와 그대의 것인가요
무덤 안에 숨어 산다는 이를 보지 못했어요
나는 하루의 무덤을 보아요
나는 어제의 무덤을 오늘의 무덤을 보아요
어떡하나요 어떡하나요
어느덧 감잎 지고 무서리 내려 흙이 꼬들꼬들해지는 이 가을빛 속에 나 홀로 설 적엔
('어떡하나요 어떡하나요', p 58)



   시 '어떡하나요 어떡하나요'는 죽음에 대한, 시집 <가재미>를 일목요연 정리를 하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생명을 얻어서 성장하고 소멸해가는 모든 생물들이 시적 화자의 시야에 포착되어 있다. 일상적인 이야기, 밥그릇을 놓고서 ‘나’는 거대한 블랙홀을 들여다보듯, 그리고 안타깝게 절망하고 있다. ‘죽음’은 비단 사람만의 노래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비애는 이별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의 비애. 그 어떤 것보다 죽음은 진실이다.

나의 집에는 묵은 오리 한 마리가 있다 암컷이다 알을 많이 낳아 뒤가
청동 주발 같다 항우울제를 먹고 살고 자두가 익는 오늘 황혼에
눈에 늪이 괴어 있었다 눈초리로 늪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옆구리 털이 뽑히고 살이 갉혔다 그때
오리 곁으로 쥐 한 마리가 기어왔다 땅구멍을 뚫어 오리 곁으로
왔다 번들번들했다 곁말 거는 척 도리반거리다 오리 곁으로
바싹 기어왔다 갱지를 갉는 소리가 났다 조금 후 구멍에서
익사한 몸처럼 부푼 쥐와 새끼 쥐가 기어나왔다 새끼 쥐는
눈망울이 또랑또랑했다 일가였다 나와 오리와 세 마리 쥐가
눈이 마주쳤다 오오 이런!
('오오 이런!', p. 54)



    사람인 '나'는 그러한 모든 생명들과 하나가 된다. 동류의식을 지니고 세상을 바라본다. 시 <가재미>에서 언급된 병실에서의 죽음이 시집 <가재미> 전체를 통해서 확장되어 그 여운은 엄청나게 크게 파문을 일으킨다.

구멍이 구멍을 밀고 가는 걸 보여주는 한 마리 게
내 눈 속의 개펄을 질퍽질퍽하게 건너간다

진흙 수렁을 벗어나도 바깥에 진흙 수렁이 있고
문을 벗어나도 문 바깥에 문이 또 있다

돌집 하나 없이 우리는 문의 안과 밖에서 살아갈 것이다

붉은 집,
축축한 노을이 우리가 머물 마지막 집이 될 것이다
('문 바깥에 또 문이', p. 107)


    많은 문학상을 수여하고 문단에서 기대하며 주목한다는 시인 문태준 님의 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시어와 함께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나를 통해서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모든 생명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짊어지고 운반하고 있다고 한다. 시집 <가재미>에서는 타자의 죽음과 타자의 소멸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자아'의 눈동자가 느껴진다.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시집 <가재미>는 읽는 동안은 무심했지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가슴이 아프다. 보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 그것이 운명이다. 외면하고 싶지만 인정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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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2007.10
대한황토협회 엮음 / 대한황토협회(잡지)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총 80쪽)

 

 

 





가 닿을 수 없는 것은 언제나 풍경으로 늙어간다

(한려수도 외딴섬 오곡도에 홀로 사시는 꼬부랑 할머니, p. 42)


 

   문화지 <황토>의 두 번째이야기이다. 생명과 어울림, 모듬살이를 주제로 하고 씌어진 문화지 <황토>.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강한 시적 감수성이 자주 눈에 띈다. 자연예찬, 삶에 경외심을 드러내는 표현에 본디 글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증이 증폭된다. 수록 글 가운데 '바람의 기항지 변산반도(p. 32)'에서는 유독 미려한 글귀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사진보다 아름다운 글편들이 <황토> 두 번째 이야기에 들어찼다.


 

해안의 절벽은 바닷물에 침식되어 수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모습으로 남아 있고

가만히 보면 채석강은 바다와 내륙이 은밀히 밀어를 즐기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두처럼 상처받은 마음이 있다면

평생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의 경계를 넘어 삶 그자체가 실존이고 행복일 뿐이다.

부지런한 염부는 그래서 한낮의 태양과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무는 천년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아 왔겠는가.





 

 

   '바람의 기항지 변산반도'는 옛시조가 그렇듯 전경후정의 방식으로 글을 풀어내고 있다. 기행글이다. 변산반도 기행에 필요한 지역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감수성 짙은 문장, 최루탄처럼 번져 있다. 매캐하다. 변산반도 가면 다시 한 번 꼭 읽어봐야겠다. 내소사 가는 길이 어디쯤인지 정보도 챙겨들고 가야겠다.

 


가 닿을 수 없는 것은 언제나 풍경으로 늙어간다


 

   실천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화석이 되고 만다. 풍경으로 늙어간다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 오래 생각하게 된다. <황토>의 의미를 진중하게 살펴보아야겠다. 바위가 흙이 되는, 고운 숨결 황토. 아주 먼 길을 단시간에 떠났다가 돌아온 느낌이 든다. 현무암이 많았던 철원 군복무지, 당시에는 그 시커먼 돌이 현무암인지 몰랐으나 수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낯선 돌이, 지금은 희석된 기억의 그 돌이 현무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풍경으로 늙더라도 가고자 하는 마음까지 접지는 말자. <황토>에서는 많은 곳을 떠나고 있다. 그 종착점, 목적지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땅의 사람들. <황토>는 그들을 만나러 가는 오솔길이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온다. 솔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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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이며 샘물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226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8월
평점 :
품절


(총 110쪽)

 
  시집을 읽을 때 굳이 시집 뒤쪽에 덧붙여진 해설을 읽을 필요는 없다. 더욱이 정현종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 경우에는 더더욱 읽을 필요가 없다. 때때로 비평가들의, 동류 시인들의 해설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 정현종 시인의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 경우 읽기도 쉽고, 다행인지 쉽게 이해가 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알아들 을 수 있는 말은
배우 윗호주먼에 꽂은 장미뿐,
(시 "사랑은 나의 권력", p. 67)
 
   분명 내가 알아들은 것은 시인의 삶이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에서 나는 무엇을 알아들었을까. 명확히 정의하기는 힘들다. 누구든 하루하루를 살면서 무수한 일상을 익숙하듯 낯설게 보내고 있다. 100 쪽 여남은 분량의 시집이 한때는 적다고,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시 한편 한편이 모두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일상은 사람세상을 사는 그 누구의 것이다)


숲가에 멈춰 서서 

내 일터 손바닥만한 숲
포장한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섰습니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지요)
내가 움직일 때는 나무들도 움직였군요.
멈춰 서자 나무들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
아주 잘 들렸습니다. 그 고요
부동이 만들어내는 그
고요의 깊이에 빨려들었습니다.
없는 게 없었습니다.
(...)
움직이지 않는 것의 미덕이
쟁쟁했습니다.



   내가 움직일 때 나무도 움직인다는 것은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볼 때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내가 앞으로 나아가면 나무들은 뒤로 나아간다. 멈추어 서면 나를 포함한 나무들도, 이 공간 속의 모든 사물은 멈추게 된다.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은 무엇이냐 하면, 그 자리 붙박여 흔들릴 뿐 이동과는 거리가 멀다고 얼렁뚱땅 얼버무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시 '숲가에 멈춰 서서'에서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와 나무가, 세상이 동시에 한 곳에 머무른다는 것을 곧잘 잊고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며 아옹다옹, 때때로 자학도 일삼으며 망가지고 있는 사람의 일상. '움직이지 않는 것의 미덕'은 그렇게 '고요'한 순간 많은 생각이 솟구쳤다가 다가 잠잠해지기를 반복하며 '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하고, 정화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걸음으로

한 여자가 웬일인지
게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어요
봄인데
산수유가 피는데
웬일인지
봄인데
웬일인지
게걸음......



   게걸음으로 걸어가는 여자가 이상한 것일까. 왜 게걸음으로 걸어야 했을까를 더 앞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게걸음'에서는 그래서인지, "웬일잊"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게걸음' 뒤에 생략된 무수한 말들, 말못할표(말줄임표)를 표기하고 있다.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시편들은, 모성의 안부를 묻는 시편들이다.

안부

도토리나무에서 도토리가
툭 떨어져 굴러간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토리나무 안부가 궁금해서


    그리고 시 '너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보다......'에서는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나'뿐 아니라 함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크다는 걸
너를 통해서 안다
너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보다 크다는 걸
나를 통해서 알 수 있을까
(...)


   시집 <갈증이며 생물인>은 아주 쉬운 일상 언어로 씌어진 시편들이 가득 담겨 있다. 때로는 짤막한 글귀 하나가 큰 울림을 만들어내듯,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에서는 울림이 좋은 글귀가 많다.

기적 - 간이역


바라보면 항상 이쁜
이쁘고 나서 또 이쁜
조그만 간이역
앞에 있는 버스 정거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별일이야
벌써 가고 있네 어디론가
선 채로 가고 있네 어디론가
기차에 탄 듯 바람에 불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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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 오세영 산문집
오세영 지음 / 작가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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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290쪽)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오세영 시인은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를 통해서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2007년은 2001년에 이어서 다시 시집을 펼쳐들었는데도, 무수히 사다 모은 시집 가운데 오세영 시인의 시집은, 그리고 여태 그의 시 한편 알지 못한다는 것에 우선은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지금이 그 첫 인연이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와 함께 시작인 듯하다.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는 오세영 씨의 시를 문두에 내세우고, 다시 시인이 풀어쓴 산문으로 짧게 이어져 있다. 시인의 산문은 시적이기 쉽다.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역시 산문에서 강한 감성적 문체가 두드러진다. 시인의 산문은 아름다운 문체로 씌어져 있다. 

담배


담배를 먹는다고 한다.
(...)
담배는 연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실은 불을 먹는 것이다
한 모금
(...)
가슴속으로 빨아들이는 불,
육신은 밥으로 살지만
정신은 불로 산다.
용암을 빨아들여
(...)


 

   그리고 시와 함께 이어지는 산문에서, 그 첫문장은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남자는 불을 먹고 여자는 불을 지킨다." 산문을 따라 읽으면 왜 이러한 명제를 내세우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에서는 남녀의 이야기가 곧잘 나오는데, 사람의 이야에 속하는 남녀의 관계는 서로 아끼고 보살피며 위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열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안느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 "열매"를 통해서 오세영 시인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강렬히 와닿는 것은 단지 나만의 감성적 책읽기에 비롯된 것일까. 그뿐일까. 아니다. 개인적으로 열매,라는 시와 함께 어울려 있는 산문들이 참으로 좋았다. 모든 독서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읽히게 마련, 도종환 시인의 <부드러운 곡선>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를 읽게 되었다. 곡선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졌고, 그리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는 시인의 글이다. 시인 역시 우리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유사한 사람과 얽혀 있는 '사람'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삶'일 것이다. 누구나 시인의 눈을 가지고 있다. 단지 말하는 방식만이 다를 뿐이다.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는 오세영 시인이 말하는 방법에 익숙해진다면, 보다 넓은 공간을 체험할 수 있는 큰 열매라고 감히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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