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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이며 샘물인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26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8월
평점 :
품절
(총 110쪽)
시집을 읽을 때 굳이 시집 뒤쪽에 덧붙여진 해설을 읽을 필요는 없다. 더욱이 정현종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 경우에는 더더욱 읽을 필요가 없다. 때때로 비평가들의, 동류 시인들의 해설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 정현종 시인의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 경우 읽기도 쉽고, 다행인지 쉽게 이해가 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알아들 을 수 있는 말은
배우 윗호주먼에 꽂은 장미뿐,
(시 "사랑은 나의 권력", p. 67)
분명 내가 알아들은 것은 시인의 삶이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에서 나는 무엇을 알아들었을까. 명확히 정의하기는 힘들다. 누구든 하루하루를 살면서 무수한 일상을 익숙하듯 낯설게 보내고 있다. 100 쪽 여남은 분량의 시집이 한때는 적다고,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시 한편 한편이 모두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일상은 사람세상을 사는 그 누구의 것이다)
숲가에 멈춰 서서
내 일터 손바닥만한 숲
포장한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섰습니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지요)
내가 움직일 때는 나무들도 움직였군요.
멈춰 서자 나무들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
아주 잘 들렸습니다. 그 고요
부동이 만들어내는 그
고요의 깊이에 빨려들었습니다.
없는 게 없었습니다.
(...)
움직이지 않는 것의 미덕이
쟁쟁했습니다.
내가 움직일 때 나무도 움직인다는 것은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볼 때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내가 앞으로 나아가면 나무들은 뒤로 나아간다. 멈추어 서면 나를 포함한 나무들도, 이 공간 속의 모든 사물은 멈추게 된다.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은 무엇이냐 하면, 그 자리 붙박여 흔들릴 뿐 이동과는 거리가 멀다고 얼렁뚱땅 얼버무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시 '숲가에 멈춰 서서'에서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와 나무가, 세상이 동시에 한 곳에 머무른다는 것을 곧잘 잊고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며 아옹다옹, 때때로 자학도 일삼으며 망가지고 있는 사람의 일상. '움직이지 않는 것의 미덕'은 그렇게 '고요'한 순간 많은 생각이 솟구쳤다가 다가 잠잠해지기를 반복하며 '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하고, 정화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걸음으로
한 여자가 웬일인지
게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어요
봄인데
산수유가 피는데
웬일인지
봄인데
웬일인지
게걸음......
게걸음으로 걸어가는 여자가 이상한 것일까. 왜 게걸음으로 걸어야 했을까를 더 앞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게걸음'에서는 그래서인지, "웬일잊"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게걸음' 뒤에 생략된 무수한 말들, 말못할표(말줄임표)를 표기하고 있다.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시편들은, 모성의 안부를 묻는 시편들이다.
안부
도토리나무에서 도토리가
툭 떨어져 굴러간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토리나무 안부가 궁금해서
그리고 시 '너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보다......'에서는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나'뿐 아니라 함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크다는 걸
너를 통해서 안다
너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보다 크다는 걸
나를 통해서 알 수 있을까
(...)
시집 <갈증이며 생물인>은 아주 쉬운 일상 언어로 씌어진 시편들이 가득 담겨 있다. 때로는 짤막한 글귀 하나가 큰 울림을 만들어내듯,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에서는 울림이 좋은 글귀가 많다.
기적 - 간이역
바라보면 항상 이쁜
이쁘고 나서 또 이쁜
조그만 간이역
앞에 있는 버스 정거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별일이야
벌써 가고 있네 어디론가
선 채로 가고 있네 어디론가
기차에 탄 듯 바람에 불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