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꽃들이 피어 있는 문학과지성 시인선 61
안수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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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시집보다 많은 분량이다. 182쪽. 아침에 집을 나서며 두툼한 시집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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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들꽃들이 피어 있는 문학과지성 시인선 61
안수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10월
평점 :
품절


    여느 시집보다 많은 분량이다. 182쪽. 아침에 집을 나서며 두툼한 시집을 가방에 넣으면서 적이 걱정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 평소 시집 한 권 읽어내기가 수월치 못했음을 되돌아본다면...  보통 시집이 120쪽 안팎인 것을 감안한다면 안수환 시집 <저 들꽃들이 피어 있는>은 굉장히 많은 시편들을 수록하고 있다. 시선집도 아닌데... 그러면서 시인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서문을 펼쳤다. 자서(自序). 
    시집 한두 권으로 말을 마칠 수 있는 시인은 행복하다
    정말 행복할 것이다. 시집 한두 권, 일반 독자들이 생각하면 대단한 집필이지만 전문 작가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 하나의 화두에서 시작한 그들의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펼쳐진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삶이 계속되기 때문이고, 그의 눈은 세상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자신을 찾아볼 수 있는 온갖 사물(사람까지)과 대화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1. 왜 아직도 살아계신 거죠?
    믿어서는 안 될 삼대 거짓말 속에 하나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말씀, 빨리 가야 하는데... 그 말씀이다. 요즘 자주 생각한다. 아무래도 연말, 지금은 연초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르신들은 날씨 풀리고 세상 좀 살 만하면 가신다. 훌쩍 가버리신다. 그래서 봄날은 가혹하다.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우리 할머니도 꽃시샘 바람과 함께 떠나실 거라 여겼다. 그런데 반평생 자리보전하셨던 할머니는 그예 마음이 바쁘셨는지, 한겨울 잠시 날이 풀렸나 싶을 때 돌아가셨다. 곧 기일이다. 
    시집 <저 들꽃들이 피어 있는>은 하늘을 담고 있다. 시적화자는 늘  하늘을 갈망한다. 기독교적 의미를 내포한 하늘이다. 아마도 안수환 시인은 일요일 교회를 다닐 것이다. 

2. 기독교적 감성
겨울
우리들의 산야여, 언제 죽었느냐
미루나무 소나무 묵묵하게 서서
아침 저녁 단독으로 거기 있구나
누군지 가득하게 서 있는 것 또 있구나
사랑 진실 생명 불활이 아니라
누군지 가득하게 또 거기 있구나
신직산 허허벌판 건너온 찬바람이
미루나무 소나무를 할퀴고 있을 때
산야여, 마른 잎새 허공으로 말하여라
지난날 거짓말은 다 드러났구나
사랑 진실 생명 부활이 아니라
산야여, 마른 잎새 허공으로 말하여라
누군지 가득하게 또 거기 있구나
무슨 무슨 슬픔이든 섬기고 싶구나
우리나라 신직산 허허벌판이여
오늘 내일 이대로 감출 일 더 없어라
이 지상에서 진정으로 강한 자여
오너라 금년 겨울 한복판이 다 드러난 연후에
오너라 이 지상에서 진정으로 강한 자여   


 

    안수환 시인의 시들, 적어도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살필 때 반복어구를 사용한 운율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어의 반복만이 아니라 길쭉한 어절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시를 읽는 동안은 미처 어디에서 운율이 발생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저절로 느끼는 리듬감에서 시편들이 쉽게 읽힌다.  ㅡ구나, 감탄형 종결어미의 반복을 우선은 살필 수 있다. 그리고 거기 있구나와 명령조 ... 이렇게 쉽게 읽히는 시들은 위험하다. 이야기가 느껴지는 산문조의 시일 때는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조심해야 한다. 시적화자가 무엇을 바라는,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놓치고 줄글로 읽고 만다. 그리고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안수환 시인의 시편에서는 접속사 사용이 빈번하다. 리듬감을 깨뜨려 환기작용을 하는 효과를 기대했을 법하다. 나도 한 번 써볼까 했는데, 이미 수없이 써오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 ^ 
    시 '겨울'은 <저 들꽃들이 피어 있는>에서, 어쩌면 안수환 시인이 동경하는 기독교적 사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그러나 노골적이지 않은 시편으로 기억될 만하다. 

 
3. 고유어와 독자 사이의 거리 
    신직산은 어디에 있을까. 안수환 시인의 시들에서는 고유명사가 즐겨 사용되고 있다. 자연물 또한, 특히 야생풀꽃을 시어로, 대상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록 그 시어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시적화자에게만 특별할 고유명사와는 달리 그 이외의 문장성분은 보편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시 '겨울'에서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이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시 한 편으로 자신을 되돌아볼 수 또한 있다.  
   2007년 대구 팔공산을 시집을 통해서 자주 만났다. 안수환 시인의 거주지도 대구일까. 그것은 모른다. 하지만 안수환 시인의 시에서 만난 팔공산은 반가웠다. 내게 팔공산을 다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는 산이다. 언제라도 오르겠지만, 찾지 않아도 그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고유어의 특징이 아닐까. 내게 팔공산은 낮잠이 쏟아지는 봄날, 큰 일교차 때문에 등산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산 정상에 가까울수록 손에 쥔 옷이 늘어나는 산이다. 

4. 개인적인 가치
    2007년 마지막 날 펼치고 있던 시집이다. 안수환 시집 <저 들꽃들이 피어 있는>. 부분부분 기독교적 감성을 발견하면서, 기독교 특유의 배타성을 상상하고 멈칫거렸다. 그러나 무목적성을 띄며 마냥 예찬하는 시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읽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고유어의 이해까지 다다르는 감식안을 지니지 못한 것은 오로지 내 탓.

   2008년 새벽에 읽던 시집이다. 그리고 불특정 몇몇^ ^에서 선물로 하고자 1월 둘쨋날 주문을 하고 지금 기다리고 있다. 연말 종소리를 기대하며 누군가 함께 읽어도 좋지 않을까, 시 몇 편을 읽고 그렇게 무턱대고 생각한 것에 머리를 긁적인다. 다 내 탓이다. 쉽게 읽히지만 쉽게 읽고 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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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 몸, 마음, 영혼을 위한 안내서
아잔 브라흐마 지음, 류시화 옮김 / 이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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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다 읽고서야 이 책 제목이 <술취한 코끼리>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인즉슨 <술취한 코끼리>로 책을 읽었다는 ㅡ,.ㅡ  그렇다고 해서 엽기 기발한? 아잔 차 스님을 만나지 않은 것도 아니요, 브라흐마 스님의 강연을 곁귀로 들은 것도 절대, 절대 아니다. 류시화 시인의 옮김으로 우리글말로 다시 태어난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는 읽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아잔 차, 브라흐마 스님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한 번 나자빠졌다가 오똑 앉아서 생각하면, 과연 옳다구나 남발하게 된다. 무엇이 이토록 감동을 주는 것일까.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 좋은 책을 만났다. 종이곽 속에 든 엽서와 책갈피, 그 분에 넘치는 구성뿐 아니라 책은 훨씬 기대 이상이었다. 

    교회 건축물은 현대 도심지 곳곳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근 백년 이상 이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불교만큼의 포용력이 없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이다. 수많은 이단을 자체 생산해내는 기독교의 특성 왈가왈부할 것은 사실 아니다. 불교도 근원을 찾아 캐내기 시작하면 뿌리가 복잡하고 폐해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러나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는 여느 기독교 서적과는 달리 거부감이 없다는 것, 솔직한 나의 주관이다. 한때 다녔던 교회 목사님께 불교서적을 선물로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내게 회개기도를 명했고, 나는 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기독교 건축물, 그 속에 들어있는 생명체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친 것은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를 빌어 말하자면 문제는 내게 있었던 셈이다.  누가 내게 종교는 헌신적이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이타심이 가득한 모임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와 유사한 말을 하기는 했지만 콕 꼬집어 그렇게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나 역시 종교라면 이러저러하지 않습니까, 묻지 않았다. 믿습니까로 만사형통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내가 믿었던 모든 종교?들의 핵심이었고 불문율이었다. 사람의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만이 아실 뿐이다. 앞으로 예전 종교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종교는 배타적이면 안 된다고. 내가 무릎꿇고 회개할 때 그만큼의 공간을 내어줍시사하고, 그래서 배타적인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억지를 부린다. 구원은 받고 싶은가 보다.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는 불교색채가 있지만 불교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표지와 내용, 브라흐마 스님의 법문은 모두 불교적이다. 아니 불교에 속한다. 그러나 누가 읽어도 공감하고 수긍할 내용들이다. 왜? 그것은 우리 삶 전체를 꿰지르는 보편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흐마 스님의 말씀도 참 좋았다. 이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대부분은 브라흐마 스님이 화자로 나오며 조금씩 아잔 차 스님의 일화가 언급되는데, 일화마다 예사롭지 않은 강단?을 느끼게 된다. 좋고 귀감될 만한 글이 참으로 많은 책이라, 그 중에서 옮겨담을 내용 추리는 것 역시 만만찮다. 아잔 차 스님이 처음으로 딱 한 사람에게만 미래, 즉 점을 봐 준 것이 있다. 뭐라 하셨나, 그 말씀이 참으로 참이다.

"잘 들으십시오. 당신의 미래를 말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 점괘는 틀린 적이 없습니다."

불교도는 너무 흥분해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아잔 차가 말했다

"당신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과연 그의 점괘는 틀리지 않았다.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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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이 뭔데 난리야? - 분석 : 가로수길
TBWA KOREA 지음 / 알마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특이한 책을 만났다. 특정공간을 주제로 해서 우리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내용, <가로수길이 뭔데 난리야?>(이하 <가로수길>). 이 책은 교정본 형식을 디자인으로 채택했다. 그래서 표지를 보면 낙서를 많이 해두었고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는 만큼 무성의를 느낄 분도 있으리라. 규형화된 짜임새를 신뢰하는 나 같은 읽는이들에게는 다소 거부감이 생길 수 있는 구성이다. 그것을 감안했으리라. 그렇다고 인쇄분량이 많다는 것, 그것도 아니다. 적다. 인쇄 크기도 제멋대로다. 탈자를 디자인화하는 심보는, 기발하다. 하지만 누구를 놀리나, 책 읽는 동안 어지러워죽는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장까지 다 읽어내는 이유는 현시점 우리나라의 사회의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의 의도는 내용보다는 오히려 디자인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읽을수록 느낄 수 있다. 

   <가로수길>을 읽으면서 개화기 당시의 종로 운종가가 연상되었다. 지금 우리사회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여전히 진행형이고 그 해결책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분하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가로수길>이 어디인지, 나는 안다. 그곳을 무심히 걸어지나가면서 나는 서울이 이렇게 되어 있구나, 사람을 만나는 대신 길, 건축물, 고궁만을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굴리며 돌아다녔던 때가 벌써 3년이 흘렀다. 그 동안 서울은 많이 변했을까? 아니다. 변하는 것은 건축물이 아니다. 사람이 변한다. 부단히 변해가고 있다. <가로수길>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 이 책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낯선 사람처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호기심에서 나는 이 책을 마저 읽었다. 그들과 우리, 즉 나의 거리를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이 책 <가로수길>을 읽는 독서법이다. 

    물론 <가로수길>에서 소개되고, 서술되는 이야기들을 전부 공감할 수 없다. 어떠한 책이든 모두 옳다구나 맞장구친다는 것은 읽는이로서의 '나'를 망각하는 줏대없는 짓이다. 적극적인 독서는 현실 여건상 어렵더라도 이 책과 나와의 거리를 가늠해보는 것, 그리고 읽은 책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더 배울 수 있고, 공감을 하며 감동을 받을 수 있는지, 그래서 내 생활에 미치는 영향까지 세심히 살필 수 있다면 책의 내용을 둘째치고 그 책은 기억될 것이다. 좋은 책, 한 번쯤을 읽어도 좋을 책이라고 추천까지 하게 된다. <가로수길>은 어떠한 책은 그러한 측면에서 한번쯤 읽어도 시간을 헛되이 소비했다는 불명예, 혹은 타박을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한 구역, 그 구역이 지닌 상징성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우리 사회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살필 수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이고 우리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가로수길>은 안내하고 있다. 비록 지나치게 낙관적인 서술로 일관되어 논박의 공간을 개방적으로 터놓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그 사회를 살아야 할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가로수길>은 간략한 단면도를 내밀고 있다.  

    <가로수길>은 개방적이다. 그러나 그 개방성은 국외로 향한다. 우리 땅, 우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혹자는 보수적이라고 부르고, 도피행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단히 묵살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할까. <가로수길>의 진취성을 보면서 우리 문화에도 개방적인 자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도록 그러한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우리 문화를 진일보하자 선동적인 구호가 아닌 가슴을 치는 책이 있을 것이다. <가로수길>은 그러한 책과 아울러 읽으면 더욱 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우리 문화를 섬세하게 다루는 책을 한 권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언제 운때가 맞으면 가로수길을 찾지 않을까, 기분 좋은 공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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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이 초라한 나를
윤석전 지음 / 연세말씀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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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 못박힘으로 인류는 구원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기독교는 그렇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두꺼운 성경책은 불면의 밤을 달래는 특효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눈이 너무 아려서 스스륵 잠에 빠지는 성경책이 <주여 이 초라한 나를>(이하 <초라한 나>)에서는 다소 신선하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신약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왜 제목을 이렇게 정했을까, 인간 보편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제목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고 ^ ^ 누구나 할 것 없이 "위대한 나"라고 형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기독교, 즉 종교서적이다. 윤석전 목사의 설교집이다. 많은 종교서적을 편찬했다는 것을 본문에 수록된 내용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책날개에 안내하고 있는 책소개들은 윤석적 목사의 저작활동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의 책을 애독하는 것은 아닐까, 어림짐작해본다. 

    <초라한 나>는 예수의 고행과 그 제자들에 대해서 많은 부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윤석전 목사는 설교형식을 빌어서 책을 서술하고 있다. 기독교 서적이기 때문에 당연 성경 인용구절이 많다. 기다림방(호텔 로비)에 잠시 앉아서 읽으며 희한하게 1층 모임방에는 목회자 세미나가 진행중이었다. <초라한 나>를 읽는 내가 그들의 눈이 의식되어 굉장히 위축된 채 책을 읽었던 하루, 나는 여전히 기독교 서적을 읽기가 저어한 듯하다. <초라한 나>를 읽으면서 나의 원죄를 생각해보고, 또 교회 건축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딱히 잡히는 것이 없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신실한 기독교인이 아닌 탓이 첫번째요, 종교의 첫째는 포용성이라는 기준이 어느틈에 확고히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초라한 나>는 전통 기독교의 설교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 크게 다르지 않은 말씀을 경청하게 된다는 뜻이다. 내게 악마가 들씌어져서 그럴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닮았을까,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을까 그러한 분별은 내게 없다. 그러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씀, 동학의 이야기가 <초라한 나>를 읽는 동안 머리 가득 채우고 울리고 부딪히는 통에 이 책 읽기는 솔직히 수월하지가 못했다. 그래 나는 동학적 독서를 한 셈이다. 기독교 서적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의 고행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신심이 일어 이유없이 뜨겁게 감동 받아서 열정적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에서는 비난받아 마땅한 현세구복적 신앙으로 재해석을 하면서 읽었다. 예수의 고행과 그 제자들. 순국선열의 죽음과 연관해서 다시 읽게 되고, 승천하는 예수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그의 뜻을 이어가는 무리들이 많았음을, 그리고 지금 인류를 지배하는 거대한 종교로 팽창했음을 읽게 되었다. 이단적인 해석일까. 

    신약 3복음서의 내용을 <초라한 나>에서는 가깝게 만날 수 있다. 예수의 고행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독실한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대중에게 <초라한 나>는 종교에 마음을 둔 사람들에게 하는 설교로서 귀 솔깃한 구문이 많다. 그러나 나는 다음 구절이 참으로 인상깊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태복음 26장 38절)
    여기서 '죽다'의 의미는 생물학적 측면과는 다소 간극이 있을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성경은 시문학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듯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을 허락치 않는다. 이단과 정교는 아무래도 '나를 따르라' 그 선동적인 구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내 아버지가 읽으시면 <초라한 나>는 어떻게 부활할지가 참 궁금하다. 우리 어머니께서 나를 보면서 하는 소리만 같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태복음 26장 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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