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이 초라한 나를
윤석전 지음 / 연세말씀사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 못박힘으로 인류는 구원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기독교는 그렇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두꺼운 성경책은 불면의 밤을 달래는 특효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눈이 너무 아려서 스스륵 잠에 빠지는 성경책이 <주여 이 초라한 나를>(이하 <초라한 나>)에서는 다소 신선하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신약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왜 제목을 이렇게 정했을까, 인간 보편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제목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고 ^ ^ 누구나 할 것 없이 "위대한 나"라고 형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기독교, 즉 종교서적이다. 윤석전 목사의 설교집이다. 많은 종교서적을 편찬했다는 것을 본문에 수록된 내용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책날개에 안내하고 있는 책소개들은 윤석적 목사의 저작활동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의 책을 애독하는 것은 아닐까, 어림짐작해본다. 

    <초라한 나>는 예수의 고행과 그 제자들에 대해서 많은 부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윤석전 목사는 설교형식을 빌어서 책을 서술하고 있다. 기독교 서적이기 때문에 당연 성경 인용구절이 많다. 기다림방(호텔 로비)에 잠시 앉아서 읽으며 희한하게 1층 모임방에는 목회자 세미나가 진행중이었다. <초라한 나>를 읽는 내가 그들의 눈이 의식되어 굉장히 위축된 채 책을 읽었던 하루, 나는 여전히 기독교 서적을 읽기가 저어한 듯하다. <초라한 나>를 읽으면서 나의 원죄를 생각해보고, 또 교회 건축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딱히 잡히는 것이 없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신실한 기독교인이 아닌 탓이 첫번째요, 종교의 첫째는 포용성이라는 기준이 어느틈에 확고히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초라한 나>는 전통 기독교의 설교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 크게 다르지 않은 말씀을 경청하게 된다는 뜻이다. 내게 악마가 들씌어져서 그럴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닮았을까,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을까 그러한 분별은 내게 없다. 그러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씀, 동학의 이야기가 <초라한 나>를 읽는 동안 머리 가득 채우고 울리고 부딪히는 통에 이 책 읽기는 솔직히 수월하지가 못했다. 그래 나는 동학적 독서를 한 셈이다. 기독교 서적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의 고행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신심이 일어 이유없이 뜨겁게 감동 받아서 열정적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에서는 비난받아 마땅한 현세구복적 신앙으로 재해석을 하면서 읽었다. 예수의 고행과 그 제자들. 순국선열의 죽음과 연관해서 다시 읽게 되고, 승천하는 예수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그의 뜻을 이어가는 무리들이 많았음을, 그리고 지금 인류를 지배하는 거대한 종교로 팽창했음을 읽게 되었다. 이단적인 해석일까. 

    신약 3복음서의 내용을 <초라한 나>에서는 가깝게 만날 수 있다. 예수의 고행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독실한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대중에게 <초라한 나>는 종교에 마음을 둔 사람들에게 하는 설교로서 귀 솔깃한 구문이 많다. 그러나 나는 다음 구절이 참으로 인상깊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태복음 26장 38절)
    여기서 '죽다'의 의미는 생물학적 측면과는 다소 간극이 있을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성경은 시문학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듯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을 허락치 않는다. 이단과 정교는 아무래도 '나를 따르라' 그 선동적인 구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내 아버지가 읽으시면 <초라한 나>는 어떻게 부활할지가 참 궁금하다. 우리 어머니께서 나를 보면서 하는 소리만 같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태복음 26장 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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