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 탄성 말고는 더 이상 쓸 말도 할말도 없다.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를 만나다니. 행운이요 내게는 값없이 얻은 큰 복이다. 말 대신, 글 대신 그냥 마냥 박수만을 치고 싶다. 그러다 멋쩍으면 손을 꼼지락거릴 테고, 먼산바라기 짓을 하든가 손톱을 따작거린다든가 괜한 생살을 긁어댈지도. 그러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말 일이지만, <첫사랑 마지막 의식>이 준 '강렬한 인상'과 '평이한 이야기'가 순간순간 불거져 나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당분간 <첫사랑 마지막 의식>의 그럴싸한 '연극'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그럴 것이다.
2.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 최근작은 물론이고 고전조차 외국작가의 문학작품을 등한시해 왔다. 우리 문학 작품 역시 읽기 힘든데 다른 나라까지 넘보다니 어불성설 욕심이라 여겼다. 하지만 간간이 우연찮게 읽히는 외국소설은 몇 편 있었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최근에 몇 권 읽지 않은 외국소설 가운데 단연 최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한다. 최고라 함은 있음직한 이야기라는 것에, 그리고 논란을 품고 있는 소재를 능청스럽게 풀어나가면서 사회의 단면, 인간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읽을 만한, 읽어야 할 소설이라고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이름하고 싶다. 하지만 추천은 조심스럽게 해야 옳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소재일, 아직은 그러한 현실을 액면 그대로 직면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고통으로 새겨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 다루어야 하지만 함부로 근접하기 어려운 이야기, 사람의 사회에는 그러한 문제들이 산더미로 쌓여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성적인 농담?이 최고가 아닐까. 이언 매큐언 님은 그 이야기를 가학, 피학의 관점에서 풀어나가고 있는 듯하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특히 남성은 성에서 자유롭기가 굉장히 어렵다. 표면적으로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성적인 놀음이다. 성적인 표현, 성적인 학대가 다루어지기 때문에 '표면적'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서사의 중심에서 멸 발짝 비켜서서 들여다보면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 폭력의 순환이다.
3.
사람들은 가장(가면)을 했지만 서로를 알아봤고 부담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 누군가는 결국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닐까? (...) 그는 누구도 아니었다. 그저 들어올 때 문을 열어주는 어떤 조그만 남자에 불과했다. 모든 것이 예상처럼 흥겹지 않아 헨리는 와인을 넉 잔이나 마셨다. (...) 누군가는 다른 사람처럼 입고, 다른 사람인양 행동한다면, 그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에 대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타인으로서 했던 짓에 대해...? 천천히 움직이는 큰 숫자들, 이 모든 것엔 뭔가가 있는데, (...) 무슨 의미가 있을 텐데. (...) 큰 숫자가 지나간다. (...) 사람들이 붐비는 방에서 헨리는 그들에게 가기 시작했다. (가장무도회/ 205~207쪽)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소설집이다. 몇 개의 소설을 하나의 꼬치가 꿰고 있다. 그것은 '연극'이다. 연극을 하고 있다. 무대에서건 무대 밖에서건 등장인물들은 연극을 하고 있고 마지막에 수록된 "가장 무도회"에서는 그러한 연극,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편은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이해하는 데에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연극은 다채롭다. 그래서 읽는 동안 눈을 뗄 수가 없다. 실제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물론 띄어쓰기가 조밀하게? 된 탓에 눈이 모이고 눈알이 얼얼한 통증을 경험해야 하는 흠이 있기는 하지만) 활자를 넘어서면 '불편한 그들'이 눈 마주치기를 거부하며, 혹은 어색해하며 손톱을 물어뜯거나, 머리카락을 돌려서 뽑는 행동을 하며 벽을 허물고 있다. 사회적 약자다. 그들은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거나, 학대를 받았거나,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상처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그들은 우리 주변에 참으로 많다. 상처가 곪고 썩어서 사회악으로 꽃 활짝 피며 사그러드는 현상을 우리는 <첫사랑 마지막 의식>에서 목도할 수 있다. 그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은 오히려 추궁에 가깝다. 당신의 주변은 과연 청결하고 위생적인가.
목과 턱이 구별 안 되는 내 얼굴은 사람들에게 불신감을 준다. 어머니 턱도 그랬다. (...) 내 죽음도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 내 관심을 끌려는 게 눈에 보여 아이를 보내기가 더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며칠째 누구와도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 소녀가 내게 진심으로 관심을 보이는 게 싫지 않았다. (나는 그전에 다른 사람의 입술을 만져 본 적도, 그런 충동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나비/ 100~110쪽)
연극은 계속되고 있다. 이 연극의 연출자는 무대가 없어도 괘념치 않는다. 관객도 필요없다. 강물이 흐르듯이 그냥 진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강물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연출자는 누구일까. 현실이면서 동시에 가공의 세계인 듯한 지금 이 땅 위의 인간들의 연기는 기묘하다. 너무나도 기묘해서 자주 '소설 같은 이야기', '소설처럼 허무맹랑한'(어느 정치인이 한 말이라고 한다. '소설 쓰세요'라고 했다던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 참. ㅡ,.ㅡ)이라는 말들이 입버릇처럼 궁싯거리게 된다. 철학에서는 '욕망의 상충'으로 빚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사회적 모순과 병리 현상을 '욕망의 상충'으로 발생하는 갈등이고 소음이며 상처라고 부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언 매큐언은 그와 같은 현실을 참으로 탁월한 묘사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편한 진실'이 이언 매큐언을 통해 수용가능한 상태로 조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존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할 때 <첫사랑 마지막 의도>는 큰 공감을 이룬다. 그것은 실제 나의 문제,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4.
작아지고 싶어요. 소음과 사람들로 둘러싸이는 게 싫습니다. 아무하고도 상관없이 어둠 속에 있고 싶어요. (...) 아마도 그 애들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었나 봐요. 나는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이에요. 난 외톨박이죠. (...) 저 같은 놈은 드물겠죠. 훔친 이불들은 벽장 속에 있어요. 몇십 개고 벽장을 채우고 싶어요.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 140~141쪽)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분노한다. 분노는 혈류를 빠르게 한다. 머리통에 피가 모여서 뵈는 것 하나 없다. 미친짓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자의든 타의든 어쨌든 궁지에 내몰린 사람들이 주된 인물로 등장한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에서 이 남자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야기 대상이 있기나 한지, 사회복지사?의 존재는 없다. 차라리 그가 말하기 위해서 누군가, 가상인물을 끌어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의심스럽다.
누가 당신을 작아지게 만들었고, 또 어둠으로 몰아댔는가... 왜 너는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기능하는 인간'으로 이 사회의 정직한 도구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그것을 추궁할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이 인물을 밖으로, 그리고 어울리도록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당면 과제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는 동시에 생겨났을 문제이다. 많은 대안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사람 목숨에도 끄덕 않는 현실세계는 그저 혀만 끌끌 찰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사랑, 마지막 의식>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문자 그대로 읽어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드디어 성인 세계로의 입장에 성공했고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난 벌거벗은 소녀를 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가정처방/ 59쪽)
'가정처방'은 근친상간이 아니다. 하나의 폭력이다. 나의 욕구 충족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순간 그 행동은 범죄가 된다. 너무 두루뭉술하고 피상적이지만 그것이 죄악이다.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곳, 관계에는 수많은 범죄가 자생할 수밖에 없는 듯. 냉정한 시선을 띄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 문제가 유발되는지, 부모가 없는 곳에서의 아이들이 저지르는 범죄. 부모의 자리가 만들어낸 자리가 어떠한 결과를 유발하는지 우리는 다시금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5.
운하는 이 근처를 흐르는 유일한 물이다. (...) "강물이 너무 더러워요."/ "원래 그래. 운하잖아." 수로로 향하는 돌계단을 내려갈 때 제인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소녀는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여느 때 운하는 북쪽으로 흐르는데 오늘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바람이 없어 수면에 떠 있는 노란 오물 거품도 흐르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가끔 머리 위 다리로 자동차가 지나가고 그 너머로는 런던의 교통 소음이 들려왔다. 그것만 빼면 운하는 고요했다. 더위 때문에 오늘은 냄새가 더 지독했다. 폐수 거품이 붐는 냄새는 화학적이라기보다 동물적인 것에 가까웠다. 제인이 소곤거렸다.
"나비는 어디 있어요?" (나비/ 111쪽)
나비는 어디 있을까. 단순히 나비로만 읽지 말자.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소설이고 문학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