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하고 조리하며 배우는 과학
리틀쿡 지음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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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독서치료'를 목요일 밤마다 듣는다.  무료다. ^ ^   무엇인가 배운다는 것보다는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에 마냥 재미를 느낀다.  물론 1번밖에 듣지 못했고 15주 강좌로 여름 더운 날 열대야가 극성을 부릴 그 언젠가 1학기 야간 수업은 끝이 날 것이다.  좋은 반향을 일으킨다면 2학기 강좌 개설까지 생각해 볼 것이라는 도서관 관계자의 말에는 관계없이 그냥 즐겁게 듣고 있다.  

 

     독서치료에서 독서는 그냥 매개체일뿐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도록, 부담없이 표출하도록 유도하는 하나의 장치인 셈이다.  굳이 완독을 강요할 필요도 없고, 구태여 단편 소설일 필요도 없다.  시 한 편을 읽더라도 전체를 다룰 필요 역시 없는 셈이다.  아이가 집중하는 단어, 문장 하나에서도 충분이 이야기를 하고, 심정을 토로하고, 도움이 될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이다. '함께 논다'는 것이다.  함께 놀면서 응어리진,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사람세상의 관계이다.

 

     <요리하고 조리하며 배우는 과학>(이하 <요리 과학>)은 그와 상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굳이 음식을 다 만들 필요는 없다. 우선은 시장 보는 법. 아이와 손 잡고 시장에 함께 가는 것부터 해보자. 그리고 시장통에 좌판을 펼치고 쪼그려 앉아서

     "이봐 새댁 하나 사가라. 무심타, 무심타 어째 그래 모질꼬. 하나도 안 사가나."

     악담을 놓는 할머니들의 구성진 음성도 아이와 함께 즐기자. <요리 과학>은 아이를 위한 책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읽어내고,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다소 버거운 내용이라는 것, 이 내용들은 어른인 내가 익혀 체득하기에는 굉장히 버겁다.  그러니 엄마가 함께해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표제에는 '부엌에서 아인슈타인을 키운다'는 거창한 문구를 내걸고 있지만, 아니 우리는 인성을 기르도록 아이에게 배려하는 시간이,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요리는 분명 부담스럽기도 하고 때론 귀찮기도 한 일상의 한 부분이지요. (...) 과정에서 배우는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있다는 얘기이지요. (...) 교육의 장이 될 수도 (...) 요리를 싫어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단지 아이들과 함께 요리하는 걸 겁내는 엄마가 있을 뿐이죠. 커가는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하루가 다르죠. 오늘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습니다. (...) 이 책에서는 요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과학의 원리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 아이와 함께 과학 요리를 할 때, 부모님은 어디까지나 보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활동의 주체는 아이가 되고 .... (머리말, 에서 )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요리가 소개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라 해서 이 책이 저급한 내용, 단순한 요리법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착오다. 착오에 그치지 않고 <요리 과학>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정보를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일상 생활에서 무심코 넘겨보는 요리과정에 얼마나 많은 화학반응이 깃들이고 있는지, <요리과학>을 통해 좋은 학습 시간을 누렸다.  가능하다면 독서치료, 독서지도뿐 아니라 요리치료도 개발하면 좋지 않을까. 나는 또 엉뚱한 생각을 한다. 요리를 하면서 체득하게 되는 건강한 행동들, 아이에게 얼마나 유익할지 생각해본다면 <요리 과학>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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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인 비즈니스
글로벌 아이디어스 뱅크 지음, 고은옥 옮김 / 쌤앤파커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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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습게도 나는 이 책 제목을 서평 남기는 순간까지 기억해내지 못한다. 트... 트... 트랜스? 뭐지 뭐지 하면서 다시 책표지를 살피는 난감함. 읽고 있는 책이 뭐고, 물으면 나는 눈만 슴벅거린다. 특화상품에 관한 내용인데 정말 재미있다. 짤막하게 2장 안쪽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기발한 상품, 아이디어 상품들인데 읽어보라... 니도 좋아라 할거다... " 그러면 묻는다, 그 책 제목이 뭐냐고.... 나는 눈만 끔벅인다. 이 책 제목은... 쉽지만 왜 나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단박에 말하지 못하는 걸까. 너무 많은 제품들에 치여서일까 아니면 부주의한 정신세계의 발랄한 저항일지도.

 

     '단지 트렌드를 아는 것만으론 불충분하다! 내일의 금맥이 될 비즈니스 아이템을 찾아라!'

     아니 나는 금맥까지 찾을 생각은 없다. 그냥 읽어본다. 실로 대단한 생각들이 백주대낮에 실체를 이미 실체를 드러냈다는 사실을 <트렌드 인 비즈니스>(이하 <트렌드>)에서 만나게 되었다.

 

     당신은 '술집'이라는 단어에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가? (...) 그간 술집이 향락과 퇴폐의 온상처럼 여겨져도 상관없었다. 변화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겐 작은 일탈이 필요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술집이니까. (...) 오늘날 일탈은 더 이상 '규범에서 엇나가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 요즘 사람들은 소비활동이 소비만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 돈은 돈대로 쓰고 건강은 건강대로 잃는, 잘못된 음주문화가 외면당하는 이유다. (...) 고객이 구입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상품에 담긴 스토리 (도네이션 바/ 15~17쪽) 

 

    이바지,라는 말이 있다. 도움이 되게 함/ 힘들여 음식을 보내줌/ 물건을 갖추어 바라지함, 이라는 뜻이다. <트렌드>는 그러한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윤창출을 우선으로 하는 경제적 논리에서 서술되고 있는 듯하지만 기발한 상품의 중심에는 사람이 서 있다.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그 음식을 '이바지'라고 한다. 공명심이 아니다. 실제로 함께 나누는 데에서 우리는 기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트렌드>를 다른 이름으로 제목을 붙여라, 명하면 나는 <이바지>라고 할 것이다. 모두 7개의 장으로 구성된 <트렌드>는 사고의 전환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환경(2장 밀려오는 물결을 타라), 상품의 가치(3장 자유를 팔아라), 상품의 의미(4장 휴먼에 집중하라), 다각화(5장 커뮤니티도 비즈니스다), 자연친화(6장 환경과 손잡아라), 판매 방법(7장 개인을 모니터하라)로 짜임새를 잡고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이바지'가 있다는 것은 누구도 그르다,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재미있는 책이다. 각각의 상품들, 아 나도 이런 생각은 했는데 이마를 탁 치게 되는 아쉬움도 느낄 수 있고,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 이런 상품이 벌써 시판되고 있구나 감탄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감탄보다 더 앞서야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는 고대 원시사회의 습성이 그대로 고수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가 이럴수가, 이럴수가 혀를 차면서 목격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고도사회가 되더라도 그런 한탄은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틀 속에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 <트렌드>는 다양한 상품 속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소의 방귀와 트림을 통해 배출되는 메탄가스가 전체 온실가스 발생량의 50%나 된다. 목장의 소에 '방귀세'를 부과하는 입법까지 추진됐을 정도다. 농민들의 거센 반발로 백지화됐지만 말이다. (방귀세/ 245쪽)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이 생각나는 구절도 <트렌드> 곳곳에서 읽힌다. 기가 막히다. 어처구니 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도 있지만 <트렌드>는 그것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당신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묻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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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하십니까?
이영대 지음 / 이코노믹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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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자기계발서는 간략하다. 반면 쌀나라 서구권의 자기계발서는 장황한 편이다. 쌀나라의 자기계발서는 다양한 사례를 중심으로 해서 글쓴이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고 일본인이 쓴 자기계발서는 정말 간략, 요점만 요약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여태 내가 만나온 자기계발서는 역시 문화권마다 그러한 특색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내 주관이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하십니까>(이하 <누구를 위해 일>는 두 문화권의 특색을 잘 접목한 듯한 느낌이다. 자기계발서에서도 글쓴이의 세계관, 인생관, 우주관을 느낄 수 있다면, 너무 자신만만 거만하다고 할까.  사실 나는 거만하다.  <누구를 위해 일>은 드물게 만난 우리나라 글쓴이가 쓴 책이다. 그러나 읽으면서 하는 내 생각은 발칙하다.  이 책 고유의 특색은 무엇일까.  그건 나중에 가려 생각하고 먼저 이 책의 장점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책 속에 한 구절만이라도 심금을 울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이 좋은 책, 나에게는 좋은 책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많은 문장을 읽더라도 무심히, 정말 스쳐 읽고만 만다면 그것 낭비다.

 

     명심하라! 이건 당신의 일이다. (프롤로그/ 8쪽)

 

     나는 동시에 여러 권을 읽는 얄망궂은 책읽기 법을 즐긴다. 책 욕심이라기보다는 허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잠시잠깐은 고민도 했지만 그 나름대로 만족감도 있다. 여러권을 읽으면서도 희한하게 비슷한 책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 그것은 내가 계획한 것이 아닌데도 자주 그렇다. <누구를 위해 일>을 읽는 동안 나는 사회비평집, 노동운동, 전교조 관련 책, 그리고 철학책을 동시에 읽고 있었다. 마치 3대 1의 집단구타를 연상하게 하는 책읽기. 즉 <누구를 위해 일>은 그 3권의 책들에 짓눌렸다고나 할까. 어쨌든 열악한 상황에서도 <누구를 위해 일>은 고군분투를 했다. 명심하라! 이건 당신의 일이라고 핏대 세워 주창하는 <누구를 위해 일>은 당신의 짐작대로 '개인'의 노력과 마음가짐, 충성심에 많은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직장에서 성공하는 사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다섯가지 분야, 즉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라는 일의 목적에서 시작하여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 일할 때의 태도, 직장에서 슬기롭게 살아남는 처세의 방법, 미래를 위한 자기계발의 5부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담을 풍부하고 실음으로써 그들의 생생한 현장 경험을 통해 남다른 성공비결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프롤로그/ 9쪽)

 

      자기계발서는 심리학적 측면을 자주 언급한다. <누구를 위해 일> 역시 기존의 자기계발서의 서술 방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누구를 위한 일,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투자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이다.  다섯 가지 분야, 자기계발의 5측면을 <누구를 위해 일>에서 우리는 만날 수 있다. 사례 중심으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장황하다는 느낌이 간혹 든다.  하지만 많은 사례 중에 나에게 적합한,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는 여럿 있다. 그 이야기들을 역할모델 삼아 일하는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 그럴 때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일>의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곁가지로 붙이고 싶은 말은

"명심하라, 이건 당신만의 일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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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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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211쪽)

 

 



1.

     아... 탄성 말고는 더 이상 쓸 말도 할말도 없다.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를 만나다니.  행운이요 내게는 값없이 얻은 큰 복이다.  말 대신, 글 대신 그냥 마냥 박수만을 치고 싶다.  그러다 멋쩍으면 손을 꼼지락거릴 테고, 먼산바라기 짓을 하든가 손톱을 따작거린다든가 괜한 생살을 긁어댈지도.  그러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말 일이지만, <첫사랑 마지막 의식>이 준 '강렬한 인상'과 '평이한 이야기'가 순간순간 불거져 나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당분간 <첫사랑 마지막 의식>의 그럴싸한 '연극'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그럴 것이다.  

 

 

2.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 최근작은 물론이고 고전조차 외국작가의 문학작품을 등한시해 왔다. 우리 문학 작품 역시 읽기 힘든데 다른 나라까지 넘보다니 어불성설 욕심이라 여겼다.  하지만 간간이 우연찮게 읽히는 외국소설은 몇 편 있었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최근에 몇 권 읽지 않은 외국소설 가운데 단연 최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한다.  최고라 함은 있음직한 이야기라는 것에, 그리고 논란을 품고 있는 소재를 능청스럽게 풀어나가면서 사회의 단면, 인간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읽을 만한, 읽어야 할 소설이라고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이름하고 싶다.  하지만 추천은 조심스럽게 해야 옳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소재일, 아직은 그러한 현실을 액면 그대로 직면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고통으로 새겨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 다루어야 하지만 함부로 근접하기 어려운 이야기, 사람의 사회에는 그러한 문제들이 산더미로 쌓여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성적인 농담?이 최고가 아닐까. 이언 매큐언 님은 그 이야기를 가학, 피학의 관점에서 풀어나가고 있는 듯하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특히 남성은 성에서 자유롭기가 굉장히 어렵다.  표면적으로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성적인 놀음이다.  성적인 표현, 성적인 학대가 다루어지기 때문에 '표면적'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서사의 중심에서 멸 발짝 비켜서서 들여다보면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  폭력의 순환이다.

 

 

3.

     사람들은 가장(가면)을 했지만 서로를 알아봤고 부담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 누군가는 결국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닐까? (...) 그는 누구도 아니었다. 그저 들어올 때 문을 열어주는 어떤 조그만 남자에 불과했다. 모든 것이 예상처럼 흥겹지 않아 헨리는 와인을 넉 잔이나 마셨다. (...) 누군가는 다른 사람처럼 입고, 다른 사람인양 행동한다면, 그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에 대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타인으로서 했던 짓에 대해...? 천천히 움직이는 큰 숫자들, 이 모든 것엔 뭔가가 있는데, (...) 무슨 의미가 있을 텐데. (...) 큰 숫자가 지나간다. (...) 사람들이 붐비는 방에서 헨리는 그들에게 가기 시작했다. (가장무도회/ 205~207쪽)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소설집이다.  몇 개의 소설을 하나의 꼬치가 꿰고 있다.  그것은 '연극'이다.  연극을 하고 있다.  무대에서건 무대 밖에서건 등장인물들은 연극을 하고 있고 마지막에 수록된 "가장 무도회"에서는 그러한 연극,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편은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이해하는 데에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연극은 다채롭다.  그래서 읽는 동안 눈을 뗄 수가 없다.  실제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물론 띄어쓰기가 조밀하게? 된 탓에 눈이 모이고 눈알이 얼얼한 통증을 경험해야 하는 흠이 있기는 하지만) 활자를 넘어서면 '불편한 그들'이 눈 마주치기를 거부하며, 혹은 어색해하며 손톱을 물어뜯거나, 머리카락을 돌려서 뽑는 행동을 하며 벽을 허물고 있다.  사회적 약자다.  그들은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거나, 학대를 받았거나, 제구실을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상처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그들은 우리 주변에 참으로 많다.  상처가 곪고 썩어서 사회악으로 꽃 활짝 피며 사그러드는 현상을 우리는 <첫사랑 마지막 의식>에서 목도할 수 있다.  그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은 오히려 추궁에 가깝다.  당신의 주변은 과연 청결하고 위생적인가. 

 

     목과 턱이 구별 안 되는 내 얼굴은 사람들에게 불신감을 준다. 어머니 턱도 그랬다. (...) 내 죽음도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 내 관심을 끌려는 게 눈에 보여 아이를 보내기가 더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며칠째 누구와도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 소녀가 내게 진심으로 관심을 보이는 게 싫지 않았다. (나는 그전에 다른 사람의 입술을 만져 본 적도, 그런 충동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나비/ 100~110쪽) 

 

     연극은 계속되고 있다.  이 연극의 연출자는 무대가 없어도 괘념치 않는다.  관객도 필요없다. 강물이 흐르듯이 그냥 진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강물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연출자는 누구일까.  현실이면서 동시에 가공의 세계인 듯한 지금 이 땅 위의 인간들의 연기는 기묘하다.  너무나도 기묘해서 자주 '소설 같은 이야기', '소설처럼 허무맹랑한'(어느 정치인이 한 말이라고 한다. '소설 쓰세요'라고 했다던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 참. ㅡ,.ㅡ)이라는 말들이 입버릇처럼 궁싯거리게 된다.  철학에서는 '욕망의 상충'으로 빚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사회적 모순과 병리 현상을 '욕망의 상충'으로 발생하는 갈등이고 소음이며 상처라고 부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언 매큐언은 그와 같은 현실을 참으로 탁월한 묘사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편한 진실'이 이언 매큐언을 통해 수용가능한 상태로 조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존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할 때 <첫사랑 마지막 의도>는 큰 공감을 이룬다.  그것은 실제 나의 문제,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4.

     작아지고 싶어요. 소음과 사람들로 둘러싸이는 게 싫습니다. 아무하고도 상관없이 어둠 속에 있고 싶어요. (...) 아마도 그 애들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었나 봐요. 나는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이에요. 난 외톨박이죠. (...) 저 같은 놈은 드물겠죠. 훔친 이불들은 벽장 속에 있어요. 몇십 개고 벽장을 채우고 싶어요.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 140~141쪽)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분노한다.  분노는 혈류를 빠르게 한다.  머리통에 피가 모여서 뵈는 것 하나 없다. 미친짓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자의든 타의든 어쨌든 궁지에 내몰린 사람들이 주된 인물로 등장한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에서 이 남자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야기 대상이 있기나 한지, 사회복지사?의 존재는 없다.  차라리 그가 말하기 위해서 누군가, 가상인물을 끌어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의심스럽다.

    

     누가 당신을 작아지게 만들었고, 또 어둠으로 몰아댔는가... 왜 너는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기능하는 인간'으로 이 사회의 정직한 도구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그것을 추궁할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이 인물을 밖으로, 그리고 어울리도록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당면 과제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는 동시에 생겨났을 문제이다. 많은 대안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사람 목숨에도 끄덕 않는 현실세계는 그저 혀만 끌끌 찰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사랑, 마지막 의식>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문자 그대로 읽어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드디어 성인 세계로의 입장에 성공했고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난 벌거벗은 소녀를 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가정처방/ 59쪽)

 

    '가정처방'은 근친상간이 아니다.  하나의 폭력이다.  나의 욕구 충족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순간 그 행동은 범죄가 된다. 너무 두루뭉술하고 피상적이지만 그것이 죄악이다.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곳, 관계에는 수많은 범죄가 자생할 수밖에 없는 듯. 냉정한 시선을 띄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 문제가 유발되는지, 부모가 없는 곳에서의 아이들이 저지르는 범죄. 부모의 자리가 만들어낸 자리가 어떠한 결과를 유발하는지 우리는 다시금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5.

    운하는 이 근처를 흐르는 유일한 물이다. (...) "강물이 너무 더러워요."/ "원래 그래. 운하잖아." 수로로 향하는 돌계단을 내려갈 때 제인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소녀는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여느 때 운하는 북쪽으로 흐르는데 오늘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바람이 없어 수면에 떠 있는 노란 오물 거품도 흐르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가끔 머리 위 다리로 자동차가 지나가고 그 너머로는 런던의 교통 소음이 들려왔다. 그것만 빼면 운하는 고요했다. 더위 때문에 오늘은 냄새가 더 지독했다. 폐수 거품이 붐는 냄새는 화학적이라기보다 동물적인 것에 가까웠다. 제인이 소곤거렸다.

     "나비는 어디 있어요?" (나비/ 111쪽)

 

     나비는 어디 있을까. 단순히 나비로만 읽지 말자.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소설이고 문학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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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 - 외로운 곳에 서 있는 당신에게
소본푸 소메 지음, 서정록 옮김 / 샘터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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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39쪽)

 

 



     소본푸 소메 님의 책 <은총>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읽은 책 서평을 남기려니 막막하다.  그 생각에 순간 멈칫한다.  종교? 철학? 아니면 심리학, 풍속학, 아 그래도 풍속학은 아니다. 아니 풍속학도 들어맞을 것 같다... 갈팡질팡이다.  어쨌든 갈래를 따로 구분할 필요없을 것 '같다'.  그래도 구태여 구분이 필요하다면 명상집이라 할까.  책을 덮고 앉으니 많은 도움을 얻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책을 읽고 나서 포만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은총> 역시, 뻐근한 결림과 함께 기분 좋은 끝맛을 지니고 있다.

 

     소본푸 소메 님의 약력?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은총>을 읽기에, 거부감을 다소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느 정도 문체에 익숙해지면 진정으로 글쓴이 소본푸 소메 님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아챌 수 있다.  사실 소본푸 소메 님의 문체는 불친절하다.  분명 문맥에서 느껴지는 소본푸 소메 님의 사상-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 인생관 들은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 사회가 서구화되고 자본력 본위가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소본푸 소메 님이 성토하는 서구 사회의 모순점이 곧 우리의 흠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은총>에 다가가기 위해서 문턱 몇 개를 넘다보니 완독까지 꽤 오랜 시일을 지체했다.  <은총>은 239쪽이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술이고, 게다가 단문으로 읽기 역시 어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은총>은 하나의 큰 산맥, 아니 낮은 야산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산을 넘을 만한 체력이 없었던 것 같다.  이미 소진해 있었던 터라 오르기가, <은총>에 다가가기가 참으로 힘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 책을 만난 것은 '은총'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글쓴이 소본푸 소메 님은 서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이 책은 남편과 결혼해서 서구 사회에서 머물다가 이혼하기까지, 그가 겪은 일들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산문 형식을 띈다. 그러나 각각의 문장과 문장 사이는 응집력이 강하면서도 약간의 틈, 여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 하나하나 읽을 때조차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붙들어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딴생각을 하도록 붙들어매고 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은총>을 읽으면서 하게 된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해야 할까. 왜,라는 질문은 우리의 생존방식, 존재의 근원까지 위협하고 있다.  서구화된 우리의 사고체계에 정면으로 "그렇게 살 것인가" 묻고 있다.  매섭다. 날카롭다. 그러나 왜 소본푸 소메 님이 이러한 말을 하는지 우리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개개인 잘난 맛으로 사는 곳에서 왜 다시 공동체고 함께 사는 사회인가. 정면으로 맞서야 할 질문이다. 그 말을 <은총>에서는 하고 있다. 왜 다시 집단주의 속으로 사회를 재편성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서부터.

 

     사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은총 속에 머물러 있다가 떠나기를 반복한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경험이다. 신의 은총을 잃었을 때 우리는 인생에 실패한 것처럼 느낀다.아니,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부르며, 그중 몇몇은 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끝내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실패야말로 새로운 어떤 것, 우리에게 보다 진실하고 갑진 어떤 탄생을 위한 과정이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기/ 22쪽)

 

     은총의 사전적 의미는 높은 사람, 특히 임금으로부터 받는 특별한 사랑,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은총>에서 은총을 바라보는 것은 고마움이라고 읽힌다. 무엇이 고마운가? 그것은 읽는이가 판단할 성질이다. 고마워한다는 것에서 경외심이 발동되고 더 나아가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나 잘났소, 세상 무엇에도 꿇릴 것이 없는 자세, 태도를 우리는 거만하다고 정의한다.  꼴사납다고 말한다.  우선 보는 사람의 위치에서도 역겹지만 당사자는 주위 소중한 것을 아끼고 보살필 만한 여력을 순간 놓치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순수한 걱정이 얹힌 것은 아닐까.  큰 근심이다.  내 발 아래 밟힌 꽃씨를 눈여겨보지 못해서라기보다 그 꽃씨가 나에게 주는 혜택을 눈치 채지 못하고 함부로 대한 행동, 물론 이것은 이기적이지만 극단적 이기심과는 다소 차이가 날 것이다. 소본푸 소메 님은 '은총'에 대해서 강력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은총>에서 은총을 짐작할 수 있다.  고마움이다.  일단 나는 그렇게 정의하고 싶다.

 

    내 목적은 원주민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되, 그들의 소중한 전통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공동체가 현대세계의 개인들과 공존하는 곳(...) (팔 벌려 어깨동무하기/ 63쪽)

 

    <은총>의 집필의도는 '공동체'이다. 물론 구시대를 답습하자는 의미가 아님은 물론이다. 다가라 마을과 서구사회의 지금을 비교하면서 무엇이 잘못인지 비교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칼로 무 자르듯이 논리정연한 서술과는 무관하다. 그렇기 때문에 <은총>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소본푸 소메 님의 문체에 더 친근감을 느끼고, 힘을 실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소본푸 소메 님은 <은총>을 통해서 개인, 가족, 사회, 자연까지 아우르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화 되면서 노인을 경시하는 풍조, 고리타분한 경험은 더 이상 필요없다는 단정론이 지금은 유효하고 가장 경제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믿고 있는 인사도 많다. 그래서? 뭐가 틀렸나 되물으면 나는 말을 말자, 함구한다. 그러나 소본푸 소메 님은 이리 앉아 봐라, 내 말 좀 들어봐라. 운을 떼고 하나하나씩 풀어놓는다. 소본푸 소메 님은 망상적 낙천주의자일까. 

 

     우리의 어린 시절이 비록 고통과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부모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마저 거부해서는 안된다. (...) 어쩌면 그분들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 여건과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한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부모를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좀 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드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집으로 걸어가기/ 77~78쪽)

     모든 이야기에는 신비로운 의례의 차원이 있다. 실제로 많은 의례들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한다. (...)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는 것은 친밀한 관계의 또 다른 방식이다. (맑은 마음으로 기도하기/ 174쪽)

     (위기에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이전에 마주쳤던 그 장애물(위기)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혜의 길로 나서기/ 110쪽)

 

     소본푸 소메 님은 허황된 낙관론자가 아니다. <은총>에서 우리가 가려 읽을 내용들은 기존 사회의 모순점을 정확히 꼬집는 데에 있다. '나'로 집약된 개인주의, 배타성이 소본푸 소메 님이 소개하는 다가라 마을의 사회에서 우리는 현재 난관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물론 개인이 이루어기에는 어려운 난제이다. <은총>은 종교적인 뜻 이외에 그 무엇이 있다. 유일신 종교의 은총이 아니라는 뜻이다. 화합과 어울림. '함께'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그러면서 '나'의 존재를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 귀한 책이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말한다. 만일 한 사람이 아프면 모든 사람이 아프다고. (...)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에게 잠재적인 위험 요소가 되기 때문 (...) 마을 사람 누군가에게 좋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게 내가 아닌 것이 기뻐' 하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이 어서 좋아지도록 돕기 위해 무엇이건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 (...) 공동체 차원에서 정기적인 속죄와 화해의 의례가 필요한 것이다. (나날이 새로워지기/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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