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본푸 소메 님의 책 <은총>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읽은 책 서평을 남기려니 막막하다. 그 생각에 순간 멈칫한다. 종교? 철학? 아니면 심리학, 풍속학, 아 그래도 풍속학은 아니다. 아니 풍속학도 들어맞을 것 같다... 갈팡질팡이다. 어쨌든 갈래를 따로 구분할 필요없을 것 '같다'. 그래도 구태여 구분이 필요하다면 명상집이라 할까. 책을 덮고 앉으니 많은 도움을 얻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책을 읽고 나서 포만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은총> 역시, 뻐근한 결림과 함께 기분 좋은 끝맛을 지니고 있다.
소본푸 소메 님의 약력?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은총>을 읽기에, 거부감을 다소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느 정도 문체에 익숙해지면 진정으로 글쓴이 소본푸 소메 님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아챌 수 있다. 사실 소본푸 소메 님의 문체는 불친절하다. 분명 문맥에서 느껴지는 소본푸 소메 님의 사상-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 인생관 들은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 사회가 서구화되고 자본력 본위가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소본푸 소메 님이 성토하는 서구 사회의 모순점이 곧 우리의 흠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은총>에 다가가기 위해서 문턱 몇 개를 넘다보니 완독까지 꽤 오랜 시일을 지체했다. <은총>은 239쪽이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술이고, 게다가 단문으로 읽기 역시 어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은총>은 하나의 큰 산맥, 아니 낮은 야산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산을 넘을 만한 체력이 없었던 것 같다. 이미 소진해 있었던 터라 오르기가, <은총>에 다가가기가 참으로 힘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 책을 만난 것은 '은총'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글쓴이 소본푸 소메 님은 서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이 책은 남편과 결혼해서 서구 사회에서 머물다가 이혼하기까지, 그가 겪은 일들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산문 형식을 띈다. 그러나 각각의 문장과 문장 사이는 응집력이 강하면서도 약간의 틈, 여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 하나하나 읽을 때조차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붙들어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딴생각을 하도록 붙들어매고 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은총>을 읽으면서 하게 된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해야 할까. 왜,라는 질문은 우리의 생존방식, 존재의 근원까지 위협하고 있다. 서구화된 우리의 사고체계에 정면으로 "그렇게 살 것인가" 묻고 있다. 매섭다. 날카롭다. 그러나 왜 소본푸 소메 님이 이러한 말을 하는지 우리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개개인 잘난 맛으로 사는 곳에서 왜 다시 공동체고 함께 사는 사회인가. 정면으로 맞서야 할 질문이다. 그 말을 <은총>에서는 하고 있다. 왜 다시 집단주의 속으로 사회를 재편성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서부터.
사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은총 속에 머물러 있다가 떠나기를 반복한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경험이다. 신의 은총을 잃었을 때 우리는 인생에 실패한 것처럼 느낀다.아니,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부르며, 그중 몇몇은 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끝내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실패야말로 새로운 어떤 것, 우리에게 보다 진실하고 갑진 어떤 탄생을 위한 과정이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기/ 22쪽)
은총의 사전적 의미는 높은 사람, 특히 임금으로부터 받는 특별한 사랑,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은총>에서 은총을 바라보는 것은 고마움이라고 읽힌다. 무엇이 고마운가? 그것은 읽는이가 판단할 성질이다. 고마워한다는 것에서 경외심이 발동되고 더 나아가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나 잘났소, 세상 무엇에도 꿇릴 것이 없는 자세, 태도를 우리는 거만하다고 정의한다. 꼴사납다고 말한다. 우선 보는 사람의 위치에서도 역겹지만 당사자는 주위 소중한 것을 아끼고 보살필 만한 여력을 순간 놓치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순수한 걱정이 얹힌 것은 아닐까. 큰 근심이다. 내 발 아래 밟힌 꽃씨를 눈여겨보지 못해서라기보다 그 꽃씨가 나에게 주는 혜택을 눈치 채지 못하고 함부로 대한 행동, 물론 이것은 이기적이지만 극단적 이기심과는 다소 차이가 날 것이다. 소본푸 소메 님은 '은총'에 대해서 강력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은총>에서 은총을 짐작할 수 있다. 고마움이다. 일단 나는 그렇게 정의하고 싶다.
내 목적은 원주민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되, 그들의 소중한 전통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공동체가 현대세계의 개인들과 공존하는 곳(...) (팔 벌려 어깨동무하기/ 63쪽)
<은총>의 집필의도는 '공동체'이다. 물론 구시대를 답습하자는 의미가 아님은 물론이다. 다가라 마을과 서구사회의 지금을 비교하면서 무엇이 잘못인지 비교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칼로 무 자르듯이 논리정연한 서술과는 무관하다. 그렇기 때문에 <은총>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소본푸 소메 님의 문체에 더 친근감을 느끼고, 힘을 실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소본푸 소메 님은 <은총>을 통해서 개인, 가족, 사회, 자연까지 아우르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화 되면서 노인을 경시하는 풍조, 고리타분한 경험은 더 이상 필요없다는 단정론이 지금은 유효하고 가장 경제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믿고 있는 인사도 많다. 그래서? 뭐가 틀렸나 되물으면 나는 말을 말자, 함구한다. 그러나 소본푸 소메 님은 이리 앉아 봐라, 내 말 좀 들어봐라. 운을 떼고 하나하나씩 풀어놓는다. 소본푸 소메 님은 망상적 낙천주의자일까.
우리의 어린 시절이 비록 고통과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부모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마저 거부해서는 안된다. (...) 어쩌면 그분들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 여건과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한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부모를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좀 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드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집으로 걸어가기/ 77~78쪽)
모든 이야기에는 신비로운 의례의 차원이 있다. 실제로 많은 의례들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한다. (...)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는 것은 친밀한 관계의 또 다른 방식이다. (맑은 마음으로 기도하기/ 174쪽)
(위기에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이전에 마주쳤던 그 장애물(위기)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혜의 길로 나서기/ 110쪽)
소본푸 소메 님은 허황된 낙관론자가 아니다. <은총>에서 우리가 가려 읽을 내용들은 기존 사회의 모순점을 정확히 꼬집는 데에 있다. '나'로 집약된 개인주의, 배타성이 소본푸 소메 님이 소개하는 다가라 마을의 사회에서 우리는 현재 난관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물론 개인이 이루어기에는 어려운 난제이다. <은총>은 종교적인 뜻 이외에 그 무엇이 있다. 유일신 종교의 은총이 아니라는 뜻이다. 화합과 어울림. '함께'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그러면서 '나'의 존재를 왜소하게 만들지 않는 귀한 책이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말한다. 만일 한 사람이 아프면 모든 사람이 아프다고. (...)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에게 잠재적인 위험 요소가 되기 때문 (...) 마을 사람 누군가에게 좋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게 내가 아닌 것이 기뻐' 하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이 어서 좋아지도록 돕기 위해 무엇이건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 (...) 공동체 차원에서 정기적인 속죄와 화해의 의례가 필요한 것이다. (나날이 새로워지기/ 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