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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 - 이덕무 선집 ㅣ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9
이덕무 지음, 강국주 편역 / 돌베개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모두 242쪽)
출판사 돌베개를 신뢰한다. 다산시선집을 읽고 입안 가득 꽃향기가 번지는 듯, 기분 좋았다. 이덕무 시선집은 그래서 읽기를 고대했다. 참으로 좋은 만남이다. 다산 시선집은 그 나름으로 향기가 있다면 이덕무 시선집 역시 그 나름으로 향기가 있다. 독특한 멋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책 읽기를 즐기는 분, 바로앉아 차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원하는 분들께 이덕무 시선집을 권하고 싶다. 책 선물로 마땅한 책이 한 권 더 생겼다는 느낌, 나는 좋은 책 선물하는 것이 참 기분이 좋다. 좋은 책으로 이덕무 시선집을 추천, 선물로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1. 내 살에 닿는 글
이덕무 선집은 시편 이외에도 산문이 들어 있다. <청장관장서>에 선생의 글이 모두 수록, 그 가운데 읽는데 무리 없는 글편들을 따로 엮어 낸 책이 <이덕무 선집>이다. 적은 분량이다. 그렇지만 울림은 웅혼하다.
어느 책이든 '나'를 중심으로 읽게 마련이다. 그 많은 글편에서 유독 "어제와 오늘과 내일, 바로 이 3일!"이 나를 끄잡아당기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심이 유심이 되어버린 일상, 그 속에서 나는 시간개념을 상실한 채 하루하루 어제인듯, 오늘인듯, 내일도 어제일 듯 기대도 없이 무작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선생은 시간을 어떻게 여겨 단속을 해 왔을까. 그 글이 "어제와 오늘과 내일, 바로 이 3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습자지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스민다. 순식간이다. 이 글 역시 그렇게 순식간에 내 혀끝을 점령했다. <이덕무 선집>을 읽을 때 다른 책과 달리, 그러나 <다산 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리내어 읽었다. 그래서 혀끝에 짜릿한 맛을 느끼지 않았을까. 탄산음료가 쏘아대는 그 자극과는 다르다. 물맛이라고 할까. 오염되지 않은 물맛이다. 상쾌하다.
옛날과 지금의 차이도 따지고 보면 잠깐일 수 있고, 잠깐의 시간도 따지고 보면 옛날과 지금의 차이만큼 긴 시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잠깐의 시간이 오래도록 쌓여 옛날과 지금이라는 긴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듯 서로 교대하며 돌아가지만 늘 새롭다. 모두 이 세 가지 날 가운데 태어나고 이 세 가지 날 가운데 늙어간다.
그러므로 군자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 바로 이 3일에 유념할 뿐이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 바로 이 3일/ 197쪽)
하루이틀사흘나흘 할 때 그 '날'과 칼날의 '날'에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글 문맥과는 상관없이 '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문득 하게 되는 생각이다. 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그러한 공통점 때문일까. 내 살을 지난 날은 칼날이었을까, 일수를 말하는 며칠이었을까. 생각해볼일이다.
2. 이덕무 선생
시와 문(산문)으로 양분 구성이 되어 있다. 그리고 뒤편에서는 이덕무 선생의 삶과 작품 세계를 말하고 연보, 작품의 본디 제목 등, 그리고 색인까지 마련해 두고 있다. 친절한 구성이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덕무 선생은 잠시 접어두고, 다만 글로써 느껴지는 선생의 느낌은 결 고운 모시적삼이랄까. 곱지만 곱기 위해서는 많은 손을 필요로하는, 마치 그렇게 단련된 존재인 듯하다. 정련이라는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글 짧은 것을 탓해야지, 그리고 탓하며 앞으로 글 다듬기에 정성을 쏟아야겠다. 이덕무 선생을 내가 직접 선생의 글편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한 마디로 말하지 못하는 것에는 문제가 크다.
예스런 생김새에 마음 맑은 이형암
포부는 몹시 어리석다네.
담박하고 고요히 앉아 있느라
콩과 팥도 구분 못하네
(나를 조롱하다/ 21쪽)
서얼 출신인 선생은 벼슬길이 막혀 있고, 그렇다고 몸이 좋아 막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잦은 병치레가 선생의 일평생을 벗으로 함께한 듯하다. 서얼의 길이 무엇인지 정확히 느끼지는 못한다. 나는 그들의 계급에 대해서 들어 알고만 있을 뿐 공감하지 못 한다. 다만 막막하지 않았을까 지독한 가난과 아무리 영민해도 기개를 떨칠 수 없는 당대 현실 속에서 가망없는 내일을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곧 형벌이 아니었을까. 그것만 아슴푸레 짐작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선비'로서의 삶을 이덕무 선생은 지향하고 있다. 한치 흐트러짐 없이, 벗들과의 교우 역시 귀중히 여기며 학문에 깊이를 더하는 날로 삶을 채우고 있다. 존경스럽다. 막막한 현실, 가망 없는 내일에도 그러한 성실을 보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선생은 말한다. "책만 보는 바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책에서 배우고 익히고 다시 책으로 돌아가며 생각을 넓히는 선생의 모습에서 하나의 모범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책을 대하는 자세. 나는 책을 소모품이라 생각하지만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것을 확인케 해주시는 선생의 글들.
"도대체 글을 즐겨 하지 않는다면 (...) 나를 귀머거리와 장님으로 만들 작정이십니까?"
"너를 한 번 시험해 본 것일 뿐이다. "
(책만은 버릴 수 없어/ 174쪽)
3. 격리된 삶
낙숫물을 맞으면서 헌 우산을 깁고, 섬돌 아래 약 찧는 절구를 괴어 두고, 새들을 문생으로 삼고, 구름을 친구로 삼는다.
이런 형암의 일생을 두고 "그것 참, 편안한 생활이군"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 참으로 우습다, 참으로 우스워!
(나의 일생/ 176쪽)
<이덕무 선집>에서 보기 드문 구절이다. 선생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다.
슬픈이 지극하여 울음이 터지게 되면 그 참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다. (참된 정과 거짓된 정/ 199쪽)
조용히 관찰해 보면 그 속에 지극한 이치가 있음을 (저마다 신묘한 이치가/ 200쪽)
교활한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나를 공경하기 때문 (교활한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 201쪽)
내가 사랑해도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모든 것이 나의 좋은 친구인 것이다. (나의 친구/ 164쪽)
내 이처럼 나 자신을 친구로 삼았으니 다시 무슨 원망이 있을 것인가. (나 자신을 친구 삼아/ 161쪽)
이덕무 선생의 글편에서 문득 자주 보이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들어다, 관찰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차분해진다. 원망이 사라지는 형상을 엿보게 된다. 다산 선생의 글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이덕무 선생의 글은 그래서 다산 선생의 글과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선집이 더 낫다 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빛깔을 이렇게 영묘하게 간직한 글편들, 그것이 우리 선조의 멋이 아닐까. 다산 시선집을 다시 한 번 살펴 읽어야겠다.
일생 동안 마음에 꼭 맞도록 처신할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복사나무 아래에서 한 생각/ 129쪽)
이 문장 다음은 내가 새로 써넣어야 할 것이다. 아직음 붓방아만 찧고 있지만, 곧 써넣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날 선 삶의 단면을 이덕무 선생처럼 오래 관찰하고 눈 감아 깊이 생각하는 자세가 아닐까. "힘들 것이다" 이 다음 문장을 쓰기 위해서 나 역시 선생이 삶을 대하던 그 자세를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