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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05년 7월 13일 읽고 쓰다
번역은 삽으로 석탄을 퍼 넣는 일과 조금은 비슷했다. 석탄을 퍼올려 그것을 노 안으로 던져 넣는, 석탄 덩어리 하나하나는 단어이고 한 삽 한 삽은또 다른 문장들인데, 그 일을 여덟아홉 시간씩 연달아 계속할 끈기가 있을 만큼 등이 튼튼하다면 불길을 계속 뜨겁게 유지할 수 있다. 근 백만 단어에 이르는 글을 앞에 놓고 나는 가능한한 오래,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설령 그 불길이 집을 태워 먹는 한이 있더라도.
(93p)
좋아한다는 건 뜻이 너무 약해요. 나는 그 이야기에 사로잡혔죠. 그 이야기가 나를 산 채로 먹어 치웠던 거예요.
(158p)
..얘기했던 것과 똑같이 그 모든 일이 다 일어났던 거예요.
내가 그분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마다 그 말이 모두 진실인 것으로 밝혀졌어요.
그분 이야기가 그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건 그래서예요. 그분이 내게 진실을 이야기했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286p)
<Les moments de crise produisent un redoublement de vie chez les hommes.>
사람들은 곤경에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충실한 삶을 살지 못한다.
(311p)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들은 그 자체로서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감각에서 우리의 주관이나 주관적인 형식을 버린다면 시공 속에서의 모든 특성, 사물들과의 모든 관계, 아니 시공 그 자체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344p)-칸트로부터 따온 구절.
어때요? 내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내 생각은요, 그녀가 천천히 대답했다.
내가 눈을 뜨면 당신이 거기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요. 당신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이 눈을 뜨지 않으면 내가 있는지 없는지를 절대로 알 수 없잖아요. 안 그래요?
(377p)
책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는 샤토브리앙이라는 와인의 이름에 어울릴 것같은 한 문학가의 말을 앞세운다.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끝에서 끝까지 이르는 여러 다른 삶을 살며 그것이 바로 비극의 원인이다."
폴 오스터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책은 처음 읽었다.
이 사람 글, 영미문학가들의 버터냄새가 나지 않아 좋았다. 화려한 미사여구는 딱 질색이다.
소설적 진실과 현실적 진실이 뒤엉키면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이다. 여기가 거긴지 거기가 여긴지 분간할 수 없는 것.
예전에 이와이 슌지의 [윌리스의 인어]를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미국 무성영화배우 헥터 만을 찾고 싶었다. 사실일 것 같으나 사실이 아닌 인간의 상상.
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과연이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것의 한계는 어디인가?)
사람은 한 가지 길로만 걸어갈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다고 해도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타인의 삶에 끼여들기도 하고
끼임을 당하기도 한다.
내가 원한 삶을 살 수 도 있고, 내 뜻과 반하는 삶을 살 수도 있다.
어디가 더 행복할까?
그러리라 예상된 삶과
그렇게 될 지 정말로 몰랐던 삶은.
문체도 간결하고, 중간중간 시니컬한 위트도 맘에 들었고
긴듯 아닌 듯, 계속 뒷이야기를 궁긍하게 하는 내용전개도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