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추억
사이 몽고메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내 곁에 누군가가 함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용감해지는가? 혼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친구가 곁에 있다면 우리는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야 만다. 재미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그리고 멋지게…….

이 책의 ‘절친’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또한 저자 사이 몽고메리에게 있어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호그우드를 통해 그녀는 마을 사람들 간의 인간관계를 더욱 원활히 할 수 있었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어린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돼지고원에서 양동이를 들고 시끄럽게 설쳐대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돼지와 놀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동물을 주제로 한 책들을 접해보면 대부분의 책에서 인간과 동물의 교감을 그리고 있으며 그러한 교감을 통해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 <돼지의 추억>도 마찬가지로 지은이 사이 몽고메리와 돼지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간의 교감을 통한 그들의 우정이 그려지고 있다.

유대인 남자와의 사랑을 위해 부모와 의절을 하게 된 저자의 상황과 무녀리(가장 먼저 태어나는 돼지로 다른 돼지들에 비해서 몸집이 작고 약한 존재)로 태어나서 어쩔 수 없이 희생당해야만 하는 크리스의 상황이 동질감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난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저자와 크리스 모두가 부모와 사회적 인식의 벽에 부딪혀 시련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질감으로 맺어진 크리스토퍼는 그녀의 이야기를 아무런 제지 없이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리고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이 세상에 없었을 그 작고 약해빠진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면서 예상을 뒤엎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저자의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상처를 치유해나갈 수 있었다.

그뿐이랴 돼지 크리스토퍼는 그녀가 살고 있는 이웃에게도 그녀와 같은 치유작용을 일으킨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딱 그 짝이다. 이 마을에서 크리스와 가까이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과거에 돼지와의 비밀이 하나씩 있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돼지로 맺어지는 저자의 인간관계가 더욱 쉽게 맺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웃들의 돼지와의 추억. 그 끝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의 이웃들은 오래 전에 돼지를 키우면서도 식용으로 넘겨야만 했었던 과거의 추억에 대한 죄책감을 크리스에게 정성으로 쏟아 부음으로 인해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의 죽음과 함께 돼지의 여생을 함께 보냈다는 기쁨에 과거의 상처를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작은 시골에서 벌어지는 전 이웃들의 돼지사랑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를 알아보고 친구처럼 대하는 장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얼마 전 일어났던 우리 동네의 한 비극적인 사건과 맞물려서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해졌다.

때는 바야흐로 복날이었다. 갑자기 오후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이야기인즉슨 이웃집 개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볼품없게 생겨먹었고, 꼬리는 짤막하고, 짖는 소리가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바보 개’라고 막 대했던 그녀석이 없어졌다니 갑자기 왠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그 집에서는 개를 우리 집 강아지와는 달리 아무데나 풀어놓고 키웠기 때문에 마을 온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던 개였다. 그랬던 그녀석이 없어졌다니……. 분명. 그 녀석은 어떤 악질 괴한에게 잡혀서 복날의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 바보 녀석의 높은 톤의 울음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돼지가 경찰관과 함께 거리를 노닐고, 또한 경찰관을 이리저리 끌면서 다니는 책 속의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또한 평화로운 그곳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갑자기 그 녀석 생각이 떠올랐다.

이 책은 돼지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의 추억 이외에도 사람에게 상처만 받고 자랐던 보더 콜리 종의 ‘테스’와의 추억도 그리고 있었다. ‘테스’와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동물과 인간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동물을 대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자들은 인간과 동물의 애정 관계를 좌절된 부모 역할의 대리만족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의 우정은 모두 뒤틀린 감정에서 나온 것이고, 아이에 대한 좌절된 갈망이 동물에 대한 애정으로 왜곡되어 표현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애완동물은 우리의 아기가 아니다. 하워드와 나는 크리스를 새끼돼지로 키웠을 뿐, 녀석을 인간의 아기로 착각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이 말을 곱씹어 본다면 ‘테스’가 온 집안을 어지럽혀 전 주인과의 관계에서 멀어졌던 이유가 설명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테스’를 양치기의 습성을 가지고 있는 ‘보더 콜리’ 종의 개로 생각하지 않고 집안에 들여놓고 키워도 얌전하게 있어야 하는 아이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저자는 인간의 습성을 강요받게 되어 마음속에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고, 또한 그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큰 수술을 받은 ‘테스’에게 그가 가진 습성의 상징물인 주특기 ‘공 잡기’로서 다가간다.

크리스와 테스 이 둘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저자와 함께 보낸다. 그리고 마을 전체의 이웃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한다. 그들이 늙어가면서 살찌고, 눈이 멀고, 병들어감에 따라 진행되는 또 다른 쪽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생애. 그 작별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면서 세월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며, 세월의 힘에 의해 약해져만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슬픔이 묻어나왔다.

이 책에서는 크리스토퍼 호그우드라는 이름을 가진 돼지를 주제로 삼는 새로움의 접근이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테스라는 이름을 가진 개도 있고, 꽥꽥 소리를 내는 공주님들도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대체물이 아닌 동물 그 자체였으며 이것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고 있는 이 가족의 신선함은 다른 책들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매력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또한 그들과 끝까지 함께하면서 겪게 되는 슬픈 운명에 관한 이야깃거리도 자못 진지하게 내 마음을 울렸다. 이 책은 아니지 돼지 크리스토퍼는 이처럼 많은 삶의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하면서 그렇게 잠들었다. 하지만 내 가슴 속에는 그의 기억이 아직도 이렇게 남아 숨 쉬고 있다. 비록 실제로 만나보지는 못하겠지만, 마치 크리스가 바로 곁에 있는것 처럼 생생한 필력으로 우리에게 재미를 선사해준 저자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공익. 보통 우리는 공익이라는 말을 TV에서 자주 듣는다. 어떤 캠페인을 벌일 때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문구 ‘공익광고위원회’. 그리고 또 하나 있다. 바로 참 공익근무요원. 그러나 공익광고가 추구하는 공익을 촘스키가 이야기하는 공익에 비교해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공익이라는 단어가 매우 한정되고 좁은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건전함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벌이는 공익광고. 모든 한국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작아보이게 만드는 촘스키의 공익이 대체 무엇이기에 한정되고 좁은 영역이라고 하느냐고?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전 세계인들의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스케일부터가 국내에서 국외로 커져버리는데 어찌 촘스키의 공익이 더 위대해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촘스키가 내세우는 공익의 근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에 입각한 원칙이 존재하고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공익과 같은 크기를 가진, 즉 '='을 만족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한 참여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여성과 노예를 배제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목표는 공익이어야 합니다. 이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평등, 적절하면서도 ‘충분한 재산’, 그리고 구성원 모두의 ‘지속적인 성장’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19쪽)

국내의 공익. 그리고 전 세계의 공익

그런데 이 공익이라는 것을 우리나라 하나만 대입해놓고 볼 때와 전 세계인들을 대입해놓고 볼 때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혹시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공익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모든 행위들이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그 말은 반대로 우리만 잘 살게 되면 그만이지 다른 나라의 상황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로도 해석이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나라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해도 우리의 수익에만 도움이 된다면야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좁은 영역의 공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촘스키가 주장하는 세계의 공익에서는 우리만 살자고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를 불허한다. 즉, 미국은 자신이 1900년대 초반에 보호무역으로 힘을 길러놓고서는 이제 와서 제3세계의 국가들에게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라며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것은 어폐에 맞지 않다는 이야기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제국주의 정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즉 타인에게는 자유 시장을 강요하고 나는 철저히 보호받겠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부자들은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자유 시장 논리를 강요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130쪽)

촘스키는 우리가 그렇게 긍정적으로 부르짖는 신자유주의를 이렇게 해석한다. 리카도의 절대우위, 비교우위의 이론에 따라서 모든 국가가 자유무역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해석은 힘 있고 돈있는자들의 더 많이 얻으려는 탐욕에 의해서 무참히 깨져버리고 만다. 그렇지 않다고? 리카도의 비교우위가 타당하고? 한번 생각해보시라.

우리는 우리의 뱃속 채우기에 급급하지 타국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게 될지 신경이나 쓰는가? 고양이 앞에 생선이 놓여있는데, 그것을 반만 먹고 다른 고양이가 먹도록 남겨두는 고양이가 어디 있는가? 같은 논리다. 강자가 약자의 문을 열고 자유무역을 강요할 때는 그렇게 되는 자체가 이미 강자에게 모든 자원을 침탈당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강자와 약자의 힘 차이가 더욱 커지면 커질수록 그러한 비극은 극적으로 커져버린다.

거대한 공룡. 미국

한번 쯤은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수 많은 책들에게서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무슨 짓을 저질러왔는지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책들에서 수도 없이 인용되는 촘스키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서 촘스키의 직접적인 대화체로 접할 수 있었다. 촘스키는 미국에 의해서 국부에 커다란 손실을 입은 많은 국가들의 참혹한 현장을 우리에게 낱낱히 조명해주고 있었다.

책 전체가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촘스키의 답을 실은 '인터뷰'를 책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어떤 사건과 인물에 대한 기본적인 언급은 생략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런 사건들을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고 먼저 인지하면서 읽는다면 이 책을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단기 투기자금이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투기거품이 그저 거품이었을 뿐입니다. 경제가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모두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국제금융기관의 경제학자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멕시코의 경제 붕괴를 촉발한 원인 제공자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아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121쪽)

"쿠바는 미국 경제에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쟁자들이 전통적으로 미국시장이었던 쿠바에 진입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데이비드 록펠러와 그의 친구에게는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 (123쪽)

"베트남이 미국의 힘에 철저히 순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 기업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럴듯하게 베트남을 고립시켰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들면서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미국의 경제봉쇄를 무시하면서 베트남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123쪽)

이외에도 석유이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중동지역의 분쟁. 석유뿐인가? 전 세계의 이권이 걸린 곳에는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이와 같이 미국이 휩쓸고 간 비극적인 현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글로벌 기업의 합세 그리고 언론

지난번 <운동화 전쟁>이라는 책을 통해서 나는 어떻게 나이키가 아디다스를 물리치고 세계 점유율 1위를 달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상세히 알 수 있었는데,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나이키는 아디다스가 가지고 있는 높은 인건비라는 약점을 파고들었다. 나이키는 미국이 구축해놓은 저개발국가로 진입하여 매우 낮은 인건비로 대량 생산을 했으며, 그렇게 벌어들인 이익을 광고라는 미디어산업에 쏟아 부어 자신들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렇게 국민의 세금으로 떠받혀진 기업들의 자본(산업화 초기의 정부지원이 있었고, 또한 경기침체기에 도산을 막기 위해서 쏟아 붓는 공적자금은 모두 우리의 세금으로 이루어진다.)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서 전 세계로 흘러들어가며 낮은 인건비가 가능한 제3국의 시장에 그들이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자본만을 투입하면서 노동력을 갈취하고, 대부분의 이익금을 투기, 광고, 스폰서 유치에 할애한다.

그렇게 글로벌 기업들은 부를 집어 삼키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골몰하지, 촘스키가 이야기하는 공익의 개념과는 전혀 상반된 길을 걸어가는 중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위협할 만한 다른 거대 기업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있고, 그러한 상황의 가장 큰 피해자는 노동자 계급이었다.  즉, 기업들의 움직임이란 공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익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거대 공룡에 맞서 우리 개개인이 무엇이 할 수 있을지 촘스키는 같이 생각해보자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처방전을 우리에게 내려준다. 그것은 바로 ‘행동’이었다. 그리고 ‘투쟁’이었다. 그리고 이미 우리들은 ‘투쟁’으로 이뤄낸 값진 성과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민주화 운동’이었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촛불시위’였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세대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결과 지금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으며, 촛불을 들고 비폭력으로 투쟁한 결과 우리의 건강권을 잠재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던 ‘미국산 소고기’의 수입조건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회의 약자를 위해서 존재해야할 의무를 가진 시민단체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몇 차례 신문기사화 되었고, 그들의 도덕성과 투명성에 대하여 의문이 드는 것은 상당히 우려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조직 내에서 약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그것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사용하려드는 행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 궁금한 것이 많고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 그러나 나는 촘스키를 통해서 조금 더 넓은 의미의 공익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넓은 공익'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한 이야기를 촘스키는 제공하고 있다. 그는 우리들에게 투쟁이 앞으로 나아가야할 목표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일러준다. 그의 이야기를 반드시 명심하고 있을 것이다.

“꾸준한 투쟁, 때로는 암울하게 보였던 좌절을 딛고 힘겹게 투쟁한 덕분에 이런 모든 변화가 가능했습니다. 물론 이런 새로운 변화가 때로는 왜곡되고, 때로는 억압 수단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또한 출세지향주의와 자기 권력의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 변화는 원대한 인류애를 목표에 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런 변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핵심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된 기관들이 이런 변화를 인정하고 지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권력과 사회에 대한 지배력까지는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사회 지배력은 오히려 증대되었습니다. 결국 새로운 세계관으로 권력의 실질적인 분산까지 이루어내려면 더 큰 투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20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지음, 이승환 옮김 / 김영사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명박 정부를 비롯한 전 세계의 국가들이 오늘날의 금융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해답으로 제시한 정책은 바로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공적자금으로 현재 위기에 몰려있는 경기를 억지로 부양시키는 것이 하나요, 금리를 하락시켜서 시장에 자금의 양을 충분히 풀어놓아서 사람들의 투자심리를 상승시키는 것이 또 하나의 해답이었다. 

그런데 혹시 알고 있는가? 두 가지의 정책이 모두 소비자들의 수요를 자극시키면서 경기를 부양시키는 정책이지만 경제학의 역사를 놓고 봤을 때, 전자는 케인스가 주장하는 경제정책이었고, 후자는 통화주의자들의 주장하는 경제정책이었다는 사실을…….

그렇다 우리는 저자의 말마따나 하나의 악셀레이터와 브레이크를 가지고 시장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의 악셀과 브레이크를 가지고 불황기에 대응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지금의 경제위기를 벗어나는데 사용되는 정책이 누구의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벗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가 더욱 중요한 것임을 알고는 있지만, 우리는 과거에 태어났던 경제학적 이론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급급해서 ‘아 그런가보다’라고 사고하기에는 무언가 허전하고 수동적이라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예전에 신문기사를 보고 ‘신 뉴딜’이라는 경기부양책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한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해 가지고 뭣도 모르고 신 뉴딜 정책을 부르짖었더니, “대체 ‘신 뉴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소린교?” 라는 질문에 “경기부양책이잖아요.” 라는 대책 없는 소리를 내뱉으면서 얼굴이 부끄러워졌던 기억이 난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읽게 된다면 적어도 예전의 나처럼 신문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 책은 경제학의 역사를 애덤 스미스부터 시작하여, 맬서스, 리카도, 밀, 마르크스, 마셜, 베블런, 갤 브레이스, 케인스, 밀턴 프리드먼, 그리고 그 후의 경제학자들 까지, 지금껏 흘러왔던 살아있는 아디이어를 집중적으로 해부하고 있는 책이다. 

다시 한 번 ‘신 뉴딜’을 들여다보자. 과연 ‘신 뉴딜’이라는 것이 그 당시의 성공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성공을 안겨다 줄까? 이 책에 등장하는 공공선택학파를 창시한 제임스 뷰캐넌의 이야기와 합리적 기대이론파의 이야기의 일부를 차용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성공을 누리는 계층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며, '실업률'과 같은 통계수치는 크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뷰캐넌은 정치와 경제학을 연관성 있게 탐구한다. 정치가들은 권력 있고 목소리가 큰 작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결정하지, 시민들을 위해서 정책을 결정하지 않는 다는 것이 뷰캐넌이 주장하는 이론의 핵심이다. 뷰캐넌은 그 이유를 ‘합리적 무시’라는 용어로서 설명하는데, 500만 원짜리 이득이 있는 정책을 100명의 집단과 5000명의 시민들을 위해 각각 유치한다고 하면 집단의 이익은 만원이 되고, 시민의 이익은 50원이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집단은 만원의 이익이 얻어지기 때문에 훨씬 목소리를 높이는 결과가 될 것이고, 시민은 50원 따위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정책의 방향이 판가름 난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집단의 이익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정치가들에 흘러들어가는 로비자금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소수의 이익에 경제정책이 움직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시민단체들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복지 정책을 실행할 것을 추진하지만 그렇게 드는 비용이 전체 시민이 얻는 비용을 제하고 나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힘에 부치게 된다.

이를 ‘신 뉴딜’의 핵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사대강 사업’과 연관시켜본다면 시민들이 그토록 반대하는 사대강을 왜 그렇게 기를 쓰고 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기타 다른곳에 쓰일 정부예산을 왜 그쪽으로 당기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금융위기로 가장 타격을 입은 업계가 어디일까? 그것은 금융시장과 건설업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 건설업계를 생각해봐야 한다. 아마도 이명박 정부는 토목사업을 통해 건설업계의 경기를 끌어올리면서 얻어지는 수익을 취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물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대강을 정비하겠다는 이야기는 허튼소리이고, 본질은 사대강을 개발하려고 했을 때, 가장 이득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건설업체들의 목소리에 의해서 사대강을 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개발권 입찰을 두고 벌어지는 로비의 열매를 얻으려는 정치권의 계산 물론 들어가 있다. 과연 이러한 열매가 뉴딜이 추구했던 공공의 이득으로 흘러들어갈까? 천만에, 이 열매는 건설업자와 정치인들의 손에 흘러들어갈 것이다. 국민의 세금이 말이다.  

이것은 ‘미디어법 개정’에 적용 해봐도 역시 마찬가지로 원활하게 작동된다. 따지고 보면 시민들이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대강’ 보다는 사실 ‘미디어법’ 이 훨씬 더 먹기 좋은 열매일 수가 있다. 그 이유는 시민들이 ‘미디어법’ 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이면서 작은 양인 동시에 현물로 손에 쥐어지지는 않지만 다양성을 추구하는 논리에 의하면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합리적 무시’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읽으면서 인상 깊게 봤던 부분은 공공선택학파의 이야기 이외에도 존 스튜어트 밀의 기회균등을 추구하는 경제학 이론과 왜 광고와 브랜드에 목매는지를 설명하는 구제도학파의 경제학 이론 등이 있었다.

또한 마르크스의 잉여자본에 관해서 저자가 이의를 제기하는 경영자의 능력과 발명가들의 창의력으로 벌어들이는 가치가 빠져있다는 견해에 또 다시 이의를 제기해 본다면 지식산업은 마르크스의 이론과 별개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물리학에서도 중력, 전자기력 등을 따로 구분해서 적용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의 이론은 산업구조가 고착화되고 기계의 생산라인에 따라서 움직이는 제조업의 근로자들에게만 적용시켜야 하지 않나? 라는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지식인들이 잉여자본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지식인 또한 잉여자본을 창출하지만 지식인들이 받는 보수는 그들이 입고 먹을 수 있는 기초생활금을 뛰어넘는 액수이기 때문에 별 다른 문제가 안 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자, 21세기와 소통하다
안희진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보통 우리는 <장자>라고 하면 딱 한마디로 정의 내려버린다. 바로 <노장사상>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노자와 장자 사이에는 엄연히 사상적인 차이점이 있다도 하는데, 간략하게 찾아본 바에 의하면 그 차이점은 노자의 사상의 경우 무위이무불위.(하는 듯 하지 않는 것)를 강조하고, 장자의 경우에는 절대무위(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를 강조했다고 한다. 

즉, 노자의 사상을 이야기 해보자면 자연을 벗 삼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을 누리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데 반해서, 장자의 사상은 인간이 규정지은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

두 성인의 사상은 같은 도교의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대체적으로 노자의 사상인 무위자연설을 더 보편적으로 알고 있기에 책장을 한 장씩 넘겨나가면서 어쩌면 우리들은 장자가 제시하는 철학적 가르침이 낯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나 조차도 평생 올바른 도덕적 가치관이 어떠한 것이라고 교육받고 그것을 행동하기를 요구받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장자>가 이야기하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을 초월해야 하고, 진정한 가치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정의 앞에 조금은 혼란스러워졌다.

이처럼 <장자, 21세기와 소통하다>라는 책은 그것이 가진 제목 그대로 우리들에게 장자가 생각하는 참된 도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같이 소통하고 공감해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를 몰랐던 21세기의 사람들. 단순히 노장사상의 한 굴레로 뿌리박힌 장자를 <장자> 하나로서의 가치로 분리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억지로 현재의 우리의 삶에 장자를 끼워 맞추려는 지나친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책은 <장자>에 대한 충실한 자세를 취했다. <장자>의 구절을 하나씩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저자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관련된 현재의 정치ㆍ사회ㆍ문화적인 문제점에 대한 질책은 살짝 건드리는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장자, 21세기와 소통하다>가 내게 준 것

첫째. 인간이 만들어낸 기준을 다시 생각해보자

<기적의 사과>라는 책을 보면 무농약 사과재배의 비법은 바로 사과나무의 체력을 튼튼히 하는 것이었다. 즉, 사과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주위의 모든 잡초를 제거하고, 약을 뿌려서 해충들을 제거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를 여러 생명체들과 더불어 살게 놓아두면서 자생력을 키우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면서 해충과 익충에 관한 정의를 내리는데 상당히 인상 깊었다. 해충이란, 인간에게 이로운 사과나무를 해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충으로 불리고 있고, 익충이란, 그러한 해충을 잡아먹으면서 사과나무를 지키기 때문에 익충이라고 불리는데, 현미경으로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생김새가 채식을 하는 해충보다 육식을 하는 익충이 훨씬 더 악독하게 생겨먹었다고 했다.

이 사실은 자연의 해로움과 이로움은 인간이 정의 내리는 고정관념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으며, <장자 21세기와 소통하다>의 가치관에 등장하는 장자의 사상적 가르침인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가치관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둘째, 편 가르기는 이제 그만

이 책에서 얻은 또 하나의 교훈은 우리가 더 이상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한다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우리에게 좌익과 우익은 없고 오직 기득권을 위한 싸움만이 있다며 폄하하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편 가르기는 우리사회가 꼭 타파해야할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러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볼 때마다 접하게 되는 것 중에 가장 아쉬웠던 것은 저자가 이야기하는 일부 내용이 핵심적인 사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디 한 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맞지 않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꼴통 보수니, 좌빨이니 하면서 책 전체를 폄하한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빨갱이들의 논리. 책전체가 쓰레기였다.” 혹은 “친미 보수 꼴통이 하는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없다.”처럼 말이다.

나 역시 책을 읽다보면 어떤 저자가 하는 이야기의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는 않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된다. 어쩌면 나 역시 한쪽의 관념에 고정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의 최대한을 받아들이고 노력하는데 그 이유는 의견이 다른 모든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의 이면에는 반드시 옳은 내용이 있고 새겨들어야 할 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국민의 두가지 선택
김성만 지음 / 상지피엔아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솔직히 나는 이 책에서 치열하게 펼쳐지는 이념논쟁. “주적이 누구냐?”라는 견해에 북한이라고 답하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주적은 북한 보다는 미국과 일본에 더 가깝다. 그렇지만 그가 북한을 주적으로 간주한 채 이야기하는 핵심적인 내용인 ‘한미연합군 사령부 해체’와 관련하여 두 가지 길을 묻는 저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두 가지의 길을 선택하기에 앞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가정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설사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무조건 보수니 꼴통이니 비난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시각으로 판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전부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정1. 이 책에서는 북한을 주적으로 명시한다. 그리고 북한의 평화통일 정책을 적화통일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우리를 침공해 올 것이라는 가정이 필요하다. 이것에 따르면 그들이 주장하는 ‘햇볕정책 무용론’이 이해가 될 것이다.

어차피 무기개발로 한반도를 공산당화 하려는 세력들에게 물자지원은 무의미한 전략이며,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안보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이 이들이 펼치는 주된 의견이다. 즉, 그들은 햇볕정책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해버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야기하는 퍼주기식 정치라는 말은 그들의 이해에 따르면 극히 자연스러운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로 적화통일의 기조를 바꾸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평화통일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 북한의 적화통일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햇볕정책을 펼치는 또 다른 쪽의 논리를 가진 집단. 역시 그들의 이해에 따르면 햇볕정책은 극히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다시 이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북한이 주적이냐? 동족이냐?

가정2. 이 책에서는 미국이 정의요. 테러세력들이 악이라는 견해를 내비친다. 그들에 따르면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미국군은 평화사절단이고, 반미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국가와 북한은 테러를 일삼고 무고한 시민을 공격하는 잔인한 집단이라는 논리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 책의 내용을 되짚어보면 우리들이 미국과의 연합사령부 구성은 매우 당연한 수순이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이 왜 그들에게 미움을 받는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시대에 이슬람 지역을 그들의 세력 다툼의 중심지로 만들어냈고, 그렇게 그곳에서 분열책을 통해서 평화로운 그 지역을 극도로 혼란스러운 지경으로 만들어버렸다. 쉽게 말하면 한국전쟁 발발시에 참전했던 남한과 북한의 대치상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립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고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는 달리 그 지역의 승리는 미국에게 돌아가면서 냉전이 종식된다. 그러자 미국은 그 지역에서 더 이상 얻어낼 것이 없게 되면서 무책임하게도 가차 없이 그 지역을 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이념의 전쟁으로 인해서 가난에 허덕이게된 그 지역 사람들은 미국에 대한 분노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극이슬람주의자 ‘탈레반’은 미국에 대한 적대감으로 그 땅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탈레반은 미국에 비해 약한 힘을 테러와 게릴라라는 전략으로 극복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따지고 들어가 본다면 미국이 ‘선’이라는 개념은 옳지 않다. 어쩌면 이 세계의 절대강자이기 때문에 추종한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이제 미국의 적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적 중에 북한과 중국이 있다. 미군은 되살아나려는 공산주의 국가 북한을 억누르기 위해 한국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중국을 턱밑에서 견제하기 위해서 한국이 필요한 것이지, 우리가 그들의 친구이기 때문에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는 거짓부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맹목적으로 그들을 따를 필요는 없다.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주국방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더 이상 미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 북한과의 관계회복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사고방식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유시민 씨가 그의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급진적인 정책기조를 우려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아직 ‘자주국방’이라는 과제는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나 판단해본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저자가 밝힌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다. 첫째, 우리의 군사력과 무기 수준이 북한군에 미하여 월등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균형이 이루어져야 목소리를 맬 수 있을 진대 우리는 아직 군세에서 미흡함을 느끼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대책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둘째, 현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의 와병에 따른 흔들리는 정세를 봤을 때, 언제 위기가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몰린 김정일이 지금껏 이루어놓은 평화를 한순간에 짓밟을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핵개발정책과 탄도미사일 개발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셋째, 만에 하나 북한과의 경색된 정치상황으로 인해 독도와 이어도를 노리는 일본과 중국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군사력만으로는 그들을 일일이 대응할 수 있을지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한미연합사의 해체가 2012년 4월 17일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해는 북한에게 있어서 김일성 탄생 100주년, 김정일 탄생 70주년이 되는 해이자, 그들이 강성대국의 진입을 외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북한과의 평화 기조를 이어가야겠지만, 2012년에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그들의 그릇된 열망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아직은 한ㆍ미 공조의 틀을 깨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미국이 북한과 중국의 영향력을 두려워해서 우리가 필요하다는데 궂이 우리가 미국더러 나가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더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차버리는 것과 같다. 미국은 우리에게 있어서 광대한 인구와 땅을 가진 열린 시장이고, 아직은 정치와 외교 분야에서도 이용할 것이 더 많은 국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철저히 이용해야 할 것이며, 국제정세에 있어서 그들에게 휘둘리기 보다는 우리가 북한과 중국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더 깊숙하게 주지시켜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주장하는 미국과의 공조의 끈을 놓지 말자고 하는 한 가지 길에 대하여 동의한다. 하지만 친미를 외치는 친미주의자인 저자와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내린 결정이다. 우리는 그들을 더 이용해먹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더 이상 휘둘리지 말자.

‘자주국방’은 우리의 군세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우리가 원할 수 있는 것 또한 ‘자주국방’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