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노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9
미셸 오스트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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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전쟁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

 

전쟁과 아버지라는 두 가지 키워드는 지난달 고블린에서 읽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과 겹친다. 하지만 두 작품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다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박경리 선생이 말씀하신 삶(열림)과 죽음(닫힘)이라는 기준으로 정확하게 분류된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열려있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는 전쟁의 상처로 인해 자식을 두고 떠나갔다. 주인공의 가족에게는 아버지로서 책임지지 못한 후회가. 아들로서 아버지를 부르지 못했다는 후회가 남아있다. 그리곤 그들은 깨닫는다. 엄청나게 시끄러운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은 믿을 수 없게 가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 깨달음에서 중요한 것은 후회를 더는 후회로 남기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지였다. 

  

반면. 미셸 오스트의 <밤의 노예>는 닫혀있다. 이 작품의 아버지 역시 자식을 떠나간다. 하지만 그들에게 후회라는 감정은 보이질 않는다. 프랑스의 독립을 위해 레지스탕스로 전쟁에 참여했던 아르쉐의 훌륭한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가족에게 자신의 재산을 모두 넘겨주고, 그것을 관리할 대리인까지 보내주었으니 이제 더는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159. "당신들은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거요.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결과가 결국 어떤 불행으로 나타났는지를 보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전쟁 동안 자유를 쫓아 스페인으로 가는 도중에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런 아픔을 가진 어머니의 보호막 아래에서 자란 아르쉐는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유지하려는 성향을 강요당한다. 그런 상황(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과보호. 그리고 관리인과 어머니와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저항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밤의 노예>는 아르쉐를 둘러싸고 있는 불합리한 세계를 사물처럼 딱딱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 세계와 말랑말랑한 내면이 서로 충돌하는 모습을 격렬하게 보여준다. 남들에게 비쳐지는 겉모습만 보면 아르쉐는 무기력한 인간의 전형 그대로였지만, 그의 글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2. 밤의 노예

 

이 소설의 제목은 밤의 노예다. 제목의 의미에 관해서 생각해봤다. 밤 그리고 노예. 밤은 아마도 전쟁 후. 피폐해진 파리의 모습을 표현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그와 더불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기억까지 포함하는 의미인 듯 느껴졌다.

 

그리고 노예라는 단어. 이것은 세상을 경멸하지만, 세상이 주는 쾌락의 유혹을 끊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자조1의 의미가 담겨있지 않나 생각해봤다. 띠지의 의미심장한 내용처럼 아르쉐의 아버지는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레지스탕스를 주도한 영웅으로 기억되었었고, 실제로도 그런 기상을 간직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타락한 늙은이가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노예같은 삶이었다. 

 

3. 전쟁 비판서

 

근접해서 보면 이 소설은 사회의 기준과 자신을 이끄는 기준이 팽팽하게 줄다리기 하는 주인공이 타락한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줄다리기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어버리는 씁쓸한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시야를 확장해보면 이 모든 씁쓸함의 원인을 전쟁이 제공했다는 것에 이르게 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우리가. 아니 주인공 아르쉐는 그의 아버지 샤를르 에바리스트의 전쟁 때의 기억을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점은 사진 몇장으로서는 에바트리스가 겪었던 전쟁 동안의 기억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 트라우마. 이것을 어떻게 말로. 글로 설명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라고 하니 떠오르는 몇 가지 잔상은 <제노사이드>의 학도병을 사살해야만 하는 군인들. 그리고 <황색인>에서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던 군인들 정도다. 아마 샤를르 에바리스트는 독일군에게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동참했거나 아니면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인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타락하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동정을 건네본다. 

 

106 : 지네트 : "필립, 너도 알겠지만 전쟁이랑 온 도시와 나라만을 잿더미로 만드는 건 아니란다. 사람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산 사람들까지도 파괴했지. 난 그걸 알아, 난... 

전쟁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만들어냈지. 샘에는 독이 흘러들었지. 톱니바퀴들은 깨졌고. 물론 아직도 기계는 움직이고 있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금씩 잡음이 일어."


107 : 지네트 : "결국 우린 모두 올가미에 걸린 거야. 전쟁의 올가미에, 거짓의 올가미에. 우리 인생은 일종의 뜯어 맞추기가 된 거야. 그래, 기묘한 뜯어 맞추기가 된 거라고" 


101. 지네트 : "남자들은 천박해. 남자들은 새털처럼 가벼워. 그저 지식이나 돈, 정치 그리고 음... 그런 것만을 생각하지. (중략) 그들은 전혀 무게가 나가질 않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지. 바람과도 같아. (중략) 남 난자들이란 조그만 어려움에도 위축되는 약한 존재라고 믿고 있단다."


103. 지네트 : "넌 고약한 성격은 아냐. 약한 사람들이 그렇듯 성미가 급할 뿐이지. 내가 널 경멸한다고는 생각 마라, (중략) 난 널 꿰뚫어볼 수 있어. 자기 약점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불행한 거란다. 네가 날 모욕하고 위협할 때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 너도 마찬가지라는 걸 난 알아. 넌 어린애처럼, 갓난애처럼 약해." 


200.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 또한 거대한 주사위의 한 칸 한 칸을 영원히 옮겨 다니는 존재다. (중략)이상하고 터무니없는 게임에서는 사람들이 더 잘 당신을 속여먹으려고 당신 손에 올려놓은 주사위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271. 인간이 바닷가에 흩어져 있었다. 매일 두 번씩, 성실한 바다는 그 쓰레기들을 핥고, 침식하고, 마멸시키고, 삼키고, 제거하지만 플라스틱과 합성수지 제품은 이겨낼 수가 없다. 바다는 그것들을 모래언덕 발치로 밀어내는데, 여기서 그 쓰레기들은 썩지 않는 얼룩덜룩한 환형을 그려내게 된다. 


348. 나는 자극을 받아야만 행동한다. 나의 행동은 솜 같은 것이다. 그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고, 뚜렷한 결과도 없다. 깨어 있을 때의 내 생활과 밤에 꾸는 꿈은 거의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런 생활이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계속된다. 


371. 희망을 가지지 않는 인간은 이미 존재가 아니며 또한 용납될 수 없는 존재다. 희망은 존재의 심층 깊숙한 곳에 박혀 있다. 희망이라는 내밀한 존재는 한순간 환상을 품게 만들고 그러고 난 후에는 분리되어 잘게 부수어져 결국 파괴되고 만다. 거기에는 목적이 없다. 어떤 희망을 결명하게 되면 자신을 경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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