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전장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73. "그 애가 노상 하는 말이 이 세상에는 누구나 바라는 그 파랑새가 없다는 거예요. 치루치루 미치루는 산을 넘어 파랑새를 찾아갔다가 못 찾고 집에 와서 파랑새를 보았다 하지만 그건 바보였을 거라는 거예요. 제일 바보들이 회색새를 파랑새라 믿고 살고, 그 다음 바보들이 때때로 회색 새를 보면서 파랑새로 볼려고 애를 쓰고, 그 다음 눈이 바로 박힌 사람들이 제대로 회색으로 본다는 거예요. 제일 바보가 인생을 속아 살아서 병신이지만 저 자신은 좋고, 다음은 비겁하고 미련스런 인생을 살고, 세 번째는 숫제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진리는 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애는 세 번째에 속하니 자기는 아무래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1. 파랑새를 언급하는 단락의 말처럼. 만약, 파랑새가 없었더라면 지영과 가화는 이름 모를 누군가처럼 삶의 의지를 단념하고. 순순히 세상을 떠났을것이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은 전쟁 한복판에서 아주 억척스럽게 삶을 이어나간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들이 지키고 싶었던 새로운 파랑새가 있었던 것일까?  

 

지영의 경우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 오히려 더 삶의 의욕이 없어보였다. 이미 그때 당시의 대한민국은 해방된 이후에도 가부장의 권위가 지속되던 사회였었고, 그러한 세상에서 그녀가 자주적으로 무언가를 도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혼인을 한 몸이고, 아이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 조용히 살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6. 25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시장과 전장>의 본격적인 막이 오른다. 과거와 현재를 지탱하던 모든 가치관이 힘을 잃어버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신과 가족들의 생존 가치 그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이 말은 그녀가 애를 쓰면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긴 것이다. 그 무언가는 바로 자신의 가족들의 안위였다.  

 

한편, 가화는 목숨을 잃기 직전 기훈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시장과 전장>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시작되었다. 회색새가 가득한 하늘에서 지영이 발견한 새로운 파랑새가 가족이었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가화가 발견한 파랑새는 흥미롭게도 한 남자였고, 그 남자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지영과 가화는 각각 전쟁 속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찾은 인물들이지만. 두 사람이 파랑새를 찾기 위해 내디뎠던 방향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지영은 순간순간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공산주의를 기피했고, 남편을 빨갱이로 몰아서 수감시킨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도 증오했다. 

 

하지만 가화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양쪽을 고려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했을 뿐이다. 아주 본능적이다. 그렇지만 그 본능이 내린 선택을 두고 그녀를 바보라고 부를 수는 없을 듯하다. 가장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훈은 자신을 흔들리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단호했고 냉소적이었다. 잔인함과 온화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스승의 말처럼 시인 같은 사람이었다. 기훈은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커뮤니스트. 즉,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소설 내내 그의 공산당 활동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하지만 그의 스승 석산 선생. 그리고 한솥밥을 먹던 장덕삼 같은 인물과의 사상에 대한 논쟁을 통해서 극단주의자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그리고 극단주의를 직접 행하는 것은 기훈과 덕삼 같은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이 아니라 뼛속까지 프롤레타리아인 노동자의 본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맨 처음 인용한 파랑새의 단락을 기준으로 봤을 때, 회색새를 그냥 파랑새로 믿는 사람들이 정말 무섭다는 것이다.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행하는 자들 말이다. 중국의 홍위병처럼…. 기훈은 그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평생 배우고 행동해왔던 근본적인 가치에 그런 무서운 오류를 인정하는 순간 그의 삶은 헛된 삶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장덕삼과는 달리 최후의 순간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를 쫓아온 가화는 그에게서 멀리 떠나보내고 싶었다. 

 

이처럼 <시장과 전장>의 세 인물. 지영. 기훈. 가화의 인생에서 우리는 회색새 밖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상황에서도 파랑새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초인적인 모습에 담긴 숭고함. 그리고 위대함을 볼 수 있었다. 

 

자살을 선택했던 이름 모를 누군가처럼 이 세상에는 파랑새가 없다는 절망 앞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 만이 볼 수 있는 새로운 파랑새를 발견하여. 전쟁의 한 가운데 팽배한 회의주의를 보기 좋게 깨뜨려버린 인물은 지영과 가화였고, 회색새를 보며 자신이 보는 것이 파랑새일 것이라고 믿으려 애쓰다가 마지막에서야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깨닫는 인물이 기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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