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 미학기행>은 향수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찾은 그리스는 밀란 쿤데라가 안타까워했던 <향수>의 의미와는 다르게 노스탤지어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과거. 그리고 지금 현재에도 그리스를 뒤덮는 따사로운 태양, 태양에 반사된 대리석의 황금빛, 그리고 파우스트에 등장했던 뿌연 안개, 그 외의 많은 유물과 유적지,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까지. 그곳은 작가가 기대했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점. 쿤데라의 <향수>와 김진영 작가가 느낀 향수의 차이점은 작가가 만난 대상에 인간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 그러니까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를 만난 것이 아니라는 것.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 즉, 나만이 그 존재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리스 소시민들의 풍경에 대해서도 그들을 사물화시켜 나의 시선으로 투영시킨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2. 기왕 쿤데라의 <향수>를 빌미로 삼천포로 빠진 김에 <그리스 미학 기행>을 읽으면서 또 한 가지 생각을 짚고 넘어간다면. 이 책은 아포리즘에 어울릴만한 문장을 실은. 어떠한 감상에 치우친. 그리고 해석에 치우친. 쉽게 말해서 쿤데라와 비슷한 색채의 글이 나열되었다고 느꼈다.
이를 좀 더 심층적으로 바라보자면. 책 속 그의 단상은 분절되어 있으며, 그 분절의 대상은 그가 공부한 모든 것들. 종교, 문학, 신화, 회화, 건축에 대한 지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나열하는 단상은 이 책에서 언급하는 지식에 구멍이 뚫려 있으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다시 찾은 그리스에서 느낀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3. 이중성. 나는 이 단어가 <그리스 미학기행>을 관통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읽어보니 이것을 에필로그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밝혀두고 있어서 빛이 바래긴 했지만, 그래도 그리스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에 초점을 두고 찬찬히 살펴보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부활절, 여인의 눈물과 아이들의 꽃에서 본 기독교와 신화의 공존,
케라메이코스의 오래된 묘비가 주는 삶과 죽음에 관한 근원적 묵상,
아이게우스 바다 앞에선 빛과 무력감,
그리스인의 두 개의 이름, 마리아와 오디세우스,
미케네와 미스트라스의 헐벗은 정오와 충반한 오후,
법과 다이몬의 소리,
신화적 세계와 이성적 세계의 공존, 뮈토스와 로고스,
예술탄생의 두 이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검은 태양과 하얀 고독,
메테오라에 올린 고난과 깨달음,
광기의 조르바와 지식인 카찬차키스,
크레타인의 얼굴에 남은 두 개의 얼굴,
테라의 빛나는 태양과 가난한 살림.
4. 더 손볼 것도 없이 완벽하다. 여기에서 조금 더 붙여서 말하자면 빛과 그림자.이중성에 대한 중용의 자세를 견지하자 정도랄까?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아폴론의 이성을 중시하는 딱딱한 세계관에서 조르바와 만남으로 디오니소스의 세계를 접하고, 좀 더 발전된 인간으로 성장하자는 것이다. 시야를 넓히고 이중성의 공존을 모색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조르바에 대하여도 좀 더 아폴로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실제 소설에서는 지식인이 주체가 되어 디오니소스의 환상을 이야기하는데 그쳤지만 말이다.
다이몬의 소리. 내면에서 솟아나는 욕망의 목소리에 솔직해지자는 메시지는 물론 당연한 말씀이지만 그래도 조르바도 지식인의 고행에서 비롯되는 감정쯤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