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로마의 역사 - 전설 같은 건국에서 장엄한 몰락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초강대국의 이야기
사이먼 베이커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로마사 입문을 위해 여기저기 뒤적거리다 고른 책이었는데 한 챕터만 본다고 들었던게 예상외로 내용이 알차서 끝까지 보고 말았다.

저자 사이먼 베이커는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연구자이다. 하지만 그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섭렵한 참고문헌을 보면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키케로, 타키투스, 세네카, 수에토니우스, 플루타르코스, 카이사르, 요세푸스
폴리비우스, 리비우스, 베르길리우스, 아피아누스, 루카누스, 카시우스 디오, 플리니우스,
에우세비우스, 락탄티우스, 조시무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올림피오도루스

책은 위 1차 사료를 중심으로 최신 연구성과를 참고하여 연대기순으로 로마사를 서술해나간다. 그 중 가장 의미가 있었던 여섯 순간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다.

1. 그라쿠스 - 민중혁명의 실패

2. 카이사르 - 공화정의 몰락

3. 네로 - 고귀한 혈통의 마지막 황제

4. 유대 반란 -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속주를 장악하고 황제가 되다, 그리고 요세푸스

5. 콘스탄티누스 - 기독교 제국의 탄생

6. 알라리크 - 서로마 멸망, 야만족의 힘에 굴복하다


기원전 167년에는 로마의 지중해 장악이 완결되었으며, 그해에 원로원은 이탈리아에 직접세를 면세할 수 있었다. 외국 속주에서 받는 보상금 덕분에 세금을 거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 p.55

로 마는 기원전 2C 공화정제를 바탕으로 시칠리아, 에스파냐, 카르타고,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까지 점령하며 지중해 연안의 패권국가로 부상한다. 속주에서 제국으로 금은보화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들어왔다. 로마인들의 세금은 면제되었다. 하지만 세금을 면제해주고도 넘치는 자금은 적절히 분배되지 못하고 귀족과 평민들 사이의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명문가 자손인 그라쿠스가 농지개혁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원로원 보수파의 반대로 살해되고 만다. 귀족과 평민의 불평등 문제는 이상한 방식으로 해결되는데 민중의 편에 선 독재자, 즉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통해 공화국이 해체되고 왕정국가가 되면서 로마는 제국으로 발전한다. 민중의 권력은 왕에게로 넘어갔고 그 이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자유를 더 좋아하는 것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정한 주인만 있으면 된다."(Sallust, Histories, Book 4, 69, 18)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황제들이 통치할 때는 국가는 그나마 잘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네로 황제에 와서는 사치에 몰두한 나머지 평민들의 삶과 유리되고 결국 마지막 정통 왕조는 막을 내린다.
그 이후에는 힘센 놈이 황제가 되었다. 군사력을 등에 업은 속주 총독들, 예를 들면 유대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로마 사상 최대의 영토를 정복한 트라야누스, 그리고 수염난 하드리아누스 등이 그들이었다. 정복당한지 오래된 속주에서는 유명한 가문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로마인이 아닌 이민족 출신도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제국이 팽창되는만큼 세금과 노예들이 본토로 흘러들어 시민들의 삶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윤택하고 안정되었다. 이른바 '팍스 로마나' 5현제의 시대였다.

막센티우스가 권력을 쥐기 전 해(306년)에 이탈리아 주민들은 거의 500년 동안이나 누려오던 면세 혜택을 잃었다. - p.369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인 293년 4인 체제가 시행되었다. 두 명의 상급황제에게는 아우구스투스(혹은 정황제)라는 호칭이 부여되었다. 각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부관이 지명되는데 카이사르(준황제)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네 사람은 니코메디아(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 테살로니카(그리스), 시르미움(오느날 크로아티아의 미트로비츠),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오늘날 독일의 트리어)에 머물렀다. 그 이후 로마는 새 황제들이 잘 들리지도 않았고, 세금도 다른 지방으로 흘러 들어가 마치 속주처럼 취급받았다.

에드워드 기번은 기독교를 가장 핵심적인 죄인으로 지목했는데, 이는 이 책이 집필되고 있던 시대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로마인들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감내했던 강철 같은 결단력과 규율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것을 서서히, 피할 수 없이 진행하는 복잡한 몰락 과정이라고 본 기번의 견해는 그의 뒤를 이은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자들은 그와 다른 관점을 취한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형태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스타카토 스타일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로마의 몰락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 그 최후의 100년 동안 다가온 결정적이고 거창한 충격파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이 위기를 만들어낸 것은 야만족 침입자들이었다. - p.417

로마 특유의 개방성을 바탕으로 한 로마의 발전은 콘스탄티누스 때 기독교 제국으로 재탄생하면서 균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독교의 폐쇄성이 가장 큰 멸망의 원인은 아니었다. 저자는 강력한 야만인들의 잇따른 침입에서 멸망의 원인을 찾는다.

알라리크는 기독교도였으며, 그것도 지난 2년동안 주교들의 도움을 받아온 기독교도였다. 그들에 대한 존경심과 그 자신의 신앙 덕분에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울 바실리카는 성소로 보존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봉헌한 거대한 은제 성탄식의 컵을 제외한 기독교 보물과 그것을 보유하고 있던 교회들은 존중되고 그대로 보존되었다. 기원전 146년에 있었던 카르타고와 코린토스에 대한 로마군의 악명 높은 약탈, 전면적인 파괴와 대량 학살, 포로, 강탈이 표준이 된 사례들과는 대조적으로, 고트족의 로마 약탈은 정말로 대단히 비로마적이었다. - p.454

위 내용은 410년 8월 알라리크가 이끄는 고트족의 로마 약탈 사건을 이야기한다.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어떤 로마인들보다 이성적이고 독실한 기독교도이며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로마가 한 때 내세웠던 미덕들은 더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이 훈족의 침입을 막아내는 동안, 서로마 제국의 속주들은 야만족들의 손에 하나둘씩 넘어간다.
갈리아 지방은 고트족, 부르군트족, 프랑크족에게, 에스파냐 지방은 고트족, 수에비족에게, 북아프리카 지방은 반달족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제 서로마제국에게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남아있는 로마군들은 주로 게르만족 용병들이었다.
속주를 전부 빼앗긴 로마에는 그들에게 지급할 재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의 장군인 오도아케르는 기존의 로마인 지주들을 내쫓고 빼앗은 토지를 부하들에게 보수로 지급했다.
그 면적은 이탈리아 전체의 3분의 1에 달했다.

서기 476년 오도아케르는 서로마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의 관복, 왕관, 자줏빛 망토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보냈다. 드디어 서로마 제국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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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물질적 성공을 정신적 성숙이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할 때 많은 제국들은 멸망하고 말았다.

페르시아 -> 아테네 -> 스파르타 -> 테베 -> 마케도니아 -> 로마 -> ,,,, -> 미국 ? -> 중국 ?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발전에는 환호했지만, 식민지의 아픔까지는 살피지 못했다.
그것이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식민지에서의 강력한 수탈로, 본토에서 인기를 얻는 예는 비일비재하다.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끔찍한 예다.

레오폴드 2세

1865~1909, 벨기에에서는 선정
성인남자에게 일반참정권 부여
자유무역정책, 석탄과 기계산업 고도화, 프랑스와 맞먹을 정도의 경제 발전
초등교육 의무화, 여자아이들도 중등학교에 입학
12세 이하의 아동 고용 금지, 12세 이상 노동시간 12시간 이하로 제한
노동자의 파업권 보장
도로와 철도 건설 등 대규모 공공산업으로 실업 감소, 도시화 촉진

1885~1908, 25년간 콩고 자유국 통치
콩고 3천만 국민에게는 투표권이 없어 레오폴드 규제할 수 없었다.
값비싼 상아 수탈, 고무 무역 착취
경찰 포르스 퓌블리크, 고무 할당량 맞추기 위해 고무 할당량을 맞추지 못한 자들에 대한 구타와 살해,
고문생산량 달성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고문해 불구로 만들거나 죽게 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레오폴드를 위해 일했다는 증거로, 여자와 아이들의 오른손을 자르기까지 했다.
약 1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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