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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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읽기를 시작한지 1년이 넘었으나 아직 그리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는 ‘신화의 시대’를거쳐 ‘역사의 시대’로 들어갈 차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과장되고 허풍이 넘친다는 우려가 있지만,
직접 읽어보고 난 후에 판단하는게 낫겠다 싶어 바로 읽기에 돌입했다.

 
1. 헤르도토스는 누구인가?

헤로도토스는 BC 485년경 소아시아 카리아 지방(터키 서남부 지역) 할리카르낫소스(지금터키 보드룸) 시에서 태어났다.
 
이게 언제쯤인고 하니 페르시아 전쟁(BC 499~449) 중
다리우스 1세가 보낸 페르시아 제국군이 마라톤 평야(BC 490)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참패한 후,
다리우스 1세가 직접 복수의 칼날을 갈며 침략 준비를 하던 도중 사망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가 새로운 페르시아의 황제로 등극한 그 때쯤이었다. (BC 486)
 
그가 태어났던 카리아 지방은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곳으로 이오니아 지역으로 불리는데,
당시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중에 넘어간 상태였다.
 
어린 헤로도토스가 열심히 자라는 가운데,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모아 10 년만에 다시 그리스 본토를 침략한다.
BC 480년 테르모퓔레, 아르테미시온전투에서 선전하고
아테네까지 점령, 도시를 약탈하고 신전을 불태우며 승리를 확신하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자 두려워진 크세르크세스는
마르도니우스와 함께 30만 육군 병력만 남기고 해군 병력과 함께 퇴각한다.
 
BC 479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또다시 아테네를 점령하지만
그리스 연합군과 맞선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참패한다.
얼마 남지 않은 페르시아군은 재빠르게 페르시아로 퇴각한다.
이런 어수선한 틈을 타 그리스군은 이오니아 지방을 회복하기 위해 함대를 보낸다.
사모스를 점령한 후 뮈칼레곶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그리스군이 승리함으로써
마침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승자가 정해진다.
 
이렇게 이오니아 지방이 페르시아의 지배하에서 벗어나자
주변의 그리스인들이 살던 곳들에서도 여기저기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살았던 할리카르낫소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자신이 할리카르낫소스 참주 뤽다미스(Lygdamis)를 축출하는데 실패하자 사모스로 망명했던 사실로 알 수 있다.
(책에 나오는 사모스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이 시기의 경험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그 후 BC 454년(31살)에 마침내 뤽다미스 축출에 성공하지만
동료들과의 견해차로 헤로도토스는 영영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BC 444년(41살)에 남이탈리아 범그리스 식민지 투리오이(Thourioi)로 이주했고 그 곳에서 살다가 사망했거나
마케도니아 펠라(Pella)에서 사망했다고도 한다.
 
BC 445/4년(40/41살)에는 아테네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을 낭독하여 돈을 벌었으며,
이 때 페리클레스(BC 495~429), 소포클레스(BC 496~406)와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BC 431년(54살) 이후 몇 년 간의 전쟁을 체험한 그는
BC 424년(61살) 이전에 '역사'를 출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2. 헤로도토스 여행 경로
 
책에서도 알 수 있지만 헤로도토스가 여행했던 곳으로 추측되는 지역은
교통편이 발달한 지금 살펴봐도 어마어마할 정도로 광대하다.
어떻게 여행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리스 본토의 모든 지방, 소아시아,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흑해 연안 -> 스퀴타이족의 나라 -> 흑해 남안 -> 트라케 지방 -> 마케도니아 지방
-> 나일강 상류 엘레판티네시, 나일강 제1폭포 여행, 북아프리카의 퀴레네시 (이집트 4개월 여행)
-> 서아시아 튀로스시, 에우프라테스강, 바뷜론
 
 
3-1. ‘역사’의 시대적 배경

'역사'가 다루고 있는 고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중국은 공자(BC 552~479), 묵자(BC 480~390) 등 제자백가 사상가가 활약하던 춘추시대였으며,
인도는 석가모니(BC 563~480?)가 생로병사의 뜻을 깨닫고 열반에 들었던 시대였다.

 
3-2. ‘역사’ 출간 시기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책 안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6권 98장,7권 137장)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BC 431년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아카르나이 구역민들'(523행 이하)에서 책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희극이 공연된 BC 424년 사이에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
 
 
4. 책을 쓴 목적
 
헤로도토스가 책을 쓴 목적은 서문에 언급되어 있다.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그리스인)들과 비헬라스인(非그리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5. 책의 신빙성
 
나는 솔직히 말해 아이귑토스의 경계 말고 아시아와 리뷔에의 경계를 알지 못한다.(2권 17장)
 
내가 지금까지 아이귑토스에 관해 말한 것은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하고 탐사한 것에 근거한다. (2권 99장)
 
나는 들은 것을 전할 의무는 있지만, 들은 것을 다 믿을 의무는 없으며, 이 말은 이 책 전체에 적용된다. (7권 152장)
 
정복하러 간 각 부족들과 마주칠 때 그 부족의 유래와 관습, 중요인물들의 에피소드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후 다시 사건을 진행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직접 여행한 곳은 사제나 서기, 부족민들의 얘기를 듣고 인용하며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다.
 
 
6. 책의 내용
 
페르시아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퀴로스 2세(재위 BC 559~529) 시기의 뤼디아와 메디아 왕국 정복,
캄뷔세스 2세(재위 BC 530~522) 시기의 아이귑토스(이집트) 정복,
다레이오스 1세(재위 BC 522~486) 시기의 스퀴티스(스키타이) 및 리뷔에(북아프리카) 원정 실패, 이오니아 반란(BC494),
마라톤 전투 참패(BC 490)를 통한 헬라스 원정 실패,
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BC 486~465) 시기의 테르모퓔라이 전투, 아르테미시온 해전, 살라미스 해전(BC 480),
플라타이아이 전투, 뮈칼레 전투(BC 479)를 통한 헬라스 원정 실패를 다루고 있다.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1권 29~33장 솔론과 크로이소스
크로이소스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솔론 : 무슨 일이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눈여겨 보아야 하옵니다.
        신께서 행복의 그림자를 언뜻 보여주시다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
 
1권 119장 퀴로스와 하르파고스 인육식사
 
2권 86장 아이귑토스 미이라 제작
 
3권 39~43장 사모스 참주 폴뤼크라테스의 행운의 반지
가장 아끼는 반지를 버리지만 잡은 물고기를 통해서 다시 되찾은 운좋은 폴뤼크라테스 이야기
매사에 성공하는 것보다는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성공하는 사람치고 말로가 비참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에 하는 말입니다.
 
4권 73장 스퀴타이족 사우나
 
4권 149장 오이디푸스 가문 요절
 
6권 105장 마라톤 전투 원군을 스파르테에 요청한 전령 필립피데스
 
7권 35장 헬레스폰토스 바다를 채찍질하는 크세르크세스
 
7권 226장 테르모퓔라이 전투의 영웅 레오니다스와 디에네케스
페르시아인들과의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그는 어떤 트라키스인에게서 페르시아인들이 활을 쏘면
화살들에 해가 가려질만큼 그들의 수가 엄청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페르시아인들의 수가 많은 것에 놀라기는커녕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트라키스 친구여, 그대는 좋은소식을 전해주시는구려.
 페르시아인들이 해를 가려준다면, 우리는 햇볕이 아닌 그늘에서 싸우게 될 테니 말이오.”

 
7.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원인
 
그렇다면 헤로도토스가 말하고 싶었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20척의 함선은 헬라스인들에게도,비헬라스인들에게도 화근이 되었다. (5권 97장)
 
다레이오스는 이오니아인들이 반기를 든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에 관해서는 아무언급도 않고 아테나이인들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답을 듣고 나서 활을 달라고 하더니 시위에 화살을 얹고는 하늘을 향해 쏘았다고 한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며 외쳤다고 한다.
“제우스시여, 제가 아테나이인들을 응징할 수 있게 해주소서!”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시종 가운데 한 명에게 식사 시중을 들 때마다
“전하, 아테나이인들을 기억하소서!”라고 세 번씩 외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5권 105장)
 
이오니아 반란(BC 494)시 밀레토스 참주 아리스타고라스의 지원요청에 스파르테는 거절했지만
아테나이는 함선 20척을 제공함으로써 다리오스1세가 헬라스를 정복하기로 결심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8. 페르시아 제국이 패배한 이유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페르시아군의 기병에 중점을 둔 편제와 온갖 민족이 함께한 구성에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은 경무장보병이었고 헬라스인들은 중무장보병들이었다. (9권 63장)
 
페르시아군에 수많은 이민족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페르시아군이 달아나자
적군과 맞붙어보지도 않고 달아났다. (9권 68장)
 
그리스 연합군의 데미스토클레스와 레오튀키데스는 페르시아군 내에 이오니아인이 많다는 것을 이용하여
전투 전에 그리스어로 전투에서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내분을 불러 일으켰다.
이오니아인들이 마음을 돌이켜 그리스인들 편이 되거나 페르시아군이 그들을 불신해
더 이상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였고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8권 22장, 9권 98장)
 
또 하나 가장 큰 이유는 페르시아 제국의 오만(Hybris)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을 깔본 것은 물론이고 아테네 점령시 신전을 불태워 신들을 모독할 만큼 그들의 오만은 하늘을 찔렀다.
아르테미시온 전투에서는 북풍이 불어 페르시아 함대를 침몰시켰고,
플라타이아이전투, 뮈칼레 전투에서는 엘레시우스의 데메테르 성역 옆에서 벌어졌는데
페르시아군이 엘레시우스에 있는 자신의 신전을 불태운 까닭에 여신께서 그들을 멀리하신 것 같다. (9권 65장, 101장)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알려져 있는 것처럼 과장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이 직접 여행을 하면서
얻은 경험과 현지 사제, 서기, 주민들의 진술에 기반하여 사건을 기록하여 신뢰를 얻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처럼 신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한 부분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생생한 문체와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책 읽는 즐거움을 한 껏 배가시킨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역사의 아버지’라는 말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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