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이 마흔에 김영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국립예술대학의 교수였고 네 권의 장편소설과 세권의 단편소설집을 낸 소설가였고
라디오 문화 프로그램의 진행자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서울에는 내 이름으로 등기된 아파트가 있었고 권위 있는 문학상들을 받았고
서점의 좋은 자리엔 내 책들이 어깨를 맞댄 채 사이좋게 놓여 있었다.
소설들은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팔려나가는 편이었고
개중에 어떤 것은 영화나 연극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또 몇 권의 소설은 해외에서도 출판되었다.
밟으면 으르렁거리며 달려 나가는 힘 좋은 승용차도 있었고 묵직한 오디오 시스템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한 일간신문으로부터 연재소설 제의도 받았다.
한마디로 부족한 게 없던 시절이었다.
2007년 가을에 <퀴즈쇼>의 연재가 끝나고 책이 나왔다.
다섯 번째 장편이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다섯 권의 번듯한 장편소설을 가진 작가가 되고 싶었다.
어느새 나는 그렇게 돼 있었다.
'어느새' 나는 이런 인간이 되어 있었다. 모텔에서 그날의 일정을 가늠하며 눈을 뜨는,
노트북과 휴대폰의 배터리 잔량을 걱정하는, 서울의 은행에서 빠져나갈 자동이체 공과금들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
내 안의 어린 예술가는 어디로 갔는가? 아직 무사한 것일까?
작가 김영하는 캐나다로 떠나기로 결정하고, 남는 시간동안 이탈리아 시칠리아 여행을 떠난다.
떠나기로 결정하자 온갖 물건들이, 온갖 청구서들이 달라붙는다.
시칠리아의 섬 리파리.
리파리에서는 모두가 모두를 알았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현재를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어린 날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날, 건달의 세월을 견딜
줄 알았고 그 어떤 것도 함부로 계획하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문득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새삼 깨닫고 놀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엇다. 그런데도 나
는 내가 변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듣던 음악을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새 내가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
의 사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애써 외
면해왔는지도 모른다. 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
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
로든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젊은이들은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 없이, 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
생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