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피아노 교육의 가장 큰 맹점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교육이 재미없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며 이율배반적이다. 그런데도 전국의 피아노학원수가 1만여개라니 우리 학부모들의 음악교육열을 칭찬해야하는 것인지, 무지몽매한 부화뇌동을 탓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렇게 비난은 편한 마음으로 하였으되 정작 피아노, 나아가 음악이라는 장르가 주는 재미란 무엇인가라고 되물어보면 대답이 썩 궁해지는게 사실이다. 재미? 흥미롭다, 신난다, 흥분된다, 기쁘다, 황홀하다.... 음악은 분명히 이상의 열거한 감정을 북돋운다. 그림이나 소리를 뺀 동영상은 결코 이만한 감정의 폭발을 야기하지 못한다. 신경세포의 수나 인지기관의 발달수준으로 볼 때도 청력은 시력의 상대가 못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런데 왜 우리는 피아노 교육을 재미있게 못하는 것일까. 소리 음,즐길 락. 그 뜻도 명확하게 소리를 즐기는 것인데 음악을 왜 고통스러움으로 만드는 것일까.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로베르 주르뎅-라는 책은 서울대 동물학과 최재천교수, 울산대 음대 채현경교수 부부가 결혼 20년을 기념하여 공역한 책이다. 역자들의 면면을 보건데 이 책은 음악과 과학의 만남을 담고 있는게 뻔하다. 그러나 서문만 읽어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책은 전공학도 아니면 나처럼 사업을 생각하는 이 정도가 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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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에서 제10장까지의 흐름을 보면 재미있다. 소리에서 음으로, 멜로디로, 하모니로, 리듬으로, 작곡으로, 연주로, 감상으로, 이해로, 그리고 황홀경으로. 책 전체가 미괄식으로 꾸며졌지만, 내 목적은  책 제목처럼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이기 때문에 거꾸로 읽기로 작정했다.

신경학 전문의인 올리버 색스박사는 많은 파킨슨씨병 환자들이 어떤 음악을 듣는 순간 어색하고 부자연스런 증세들이 모두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동작을 보였으며, 심지어 웃으면서 지휘를 하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려면 환자들이 그냥 수동적으로 듣기만 해선 안되고, 음악의 흐름에 대한 예상을 하며 적극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하자.  <우리가 경험을 통해 얻는 '느낌'이란,  '감각에 대한 예측'과 '실제 감각'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음악을 인식하는 정도 역시 우리의 <예측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음악의 움직임은 우리 몸의 움직임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음악으로부터 얻는 경험은 완전히 인위적이라서, 일상에서는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집중시키는 특별한 순간에만 음악이 주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완벽함이 있기 때문에 음악은 예술로 승화된다.  

즉 음악이 파킨슨씨병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환자로 하여금 더 높은 수준의 인식 활동에 빠져들도록 하여 이 병의 증세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게 하는 것 뿐이다. 음악이 잠시나마(음악이 지속되는 동안만) 우리의 마음이 평소에 하지 못하던 것을 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는  <음악이 우리의 지적 능력을 높여준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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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느낌, 나아가 감정이라는 것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지 음악의 기원을 더듬어 추론해보자. 음악이 종족을 불문하고 대대손손 전승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섹스는 번식을 해야한다는 절체절명의 코드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간다. 식욕이나, 좋은 와인을 고르는 것도 원초적 욕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은 순수한 정보일 뿐, 우리 몸에 아무런 물리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 않나. 게다가 인위적이라 이 세상에 대한 직접적 정보도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리듬이 최초의 뼈대를 이룬다고 하지만 이런 논리에 반하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이 책의 3장에서는 아이들이 음악을 배울 때 리듬보다 <어떻게  가사의 자연스러운 억양에 집중하며, 선율을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지> 가 나와있다. .

각도를 달리해보자. 매우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경우라야만 음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머리가 이렇게 큰 건가?라고 질문을 던져본다. 학자들은 인간이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키우며 협력하기 위해 두뇌가 발달했다고 본다.  즉 절대이기적인 모든 생물체는(인간을 빼고) 전체를 위해 내가 희생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런데 협력을 하면서 '지금 주고 나중에 받는 것'을 잘하려면 오래 전의 일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고 앞날의 위험 여부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오직 어떤 사실을 기호화할 수 있는 인간의 두뇌만이 이러한 일을 가능케한다.

이렇게 협력을 실천하는 머리 큰 인간에게 음악이 결속을 다지고 내부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분명히 음악은 인간의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즉 음악이 감정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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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감정이란 또 무엇이냐?  우리는 감정을 <비이성적인 것>과 동일시해왔다. 그러나 최근 심리학자들은 감정이 이성적 사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한다. <감정은 예상치 못한 경험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뇌에서 우측 전두엽은 감정을 관리하는 곳이다. 이 곳이 장애를 일으키면 자신의 상태에 대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반면 좌측 전두엽을 다친 사람들은 감정이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 상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전두엽은 어떤 지침을 내리는 곳이며, 단기기억을 되살리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뭔가를 집중하게 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우리의 두뇌는 신체가 움직이며 겪는 일의 극히 일부만을 처리할 수 있다. 이 선택과 통제의 메카니즘이 전두엽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뇌는 끊임없이 어떤 판단을 내릴 동기들을 부여받고 있다. 평상시와 달리 전두엽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해야 할 때 우리는 보통 <동기부여>라는 말을 사용한다. 심리학자들은 <감정을 동기부여의 특별한 예>라고 본다. 우리들의 감정은 그렇게 자주 폭발하지 않는다. 대부분 소폭으로 등락할 뿐이다.

자, 그렇다면 음악이 어떻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이 대목이 핵심이다. <음악은 어떤 예상이 일어나도록 하고, 이를 만족시킨다. 그런 기대를 계속 불러 일으키고 더 큰 만족을 줄 수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흐름을 변화시켜 사람들의 예상을 깨면, 우리들은 그것을 보고 <감동적>이라고 한다.> 감동은 일상적인 예상을 깨는 것이다. 너무 변화를 많이 주면 집중할 수 없고, 너무 변화를 주지 않으면 별 감동을 못받게 된다.

여기서 반대 질문. 왜 사람들이 같은 곡을 몇번씩 들어 이제는 곡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디서 변화가 일어날 지를 알게 됐는데도 계속 감동을 느끼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음악학자들은 곡을 이루는 화음이나 형식처럼 음악을 이루는 요소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기본적인 예상을 떠올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전체 화음계가 갖고 있는 기본구조가 우리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같은 곡을 여러번 들어도 우리는 매번 같은 예상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예상과 다른 흐름이 나올 때면 아무리 익숙한 곡이라도 여전히 감동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너무 규칙적으로 들리는 음악은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컴퓨터 연주곡같은 것이 그렇다. 우리 신경계가 변화하는 것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것에는 타성이 생긴다. 우리 두뇌는 새롭거나 잘 모르는 것에 집중하도록 돼있다. 따라서 박자나 음조, 소리의 크기, 높낮이의 변화가 적을 수록 감동도 줄어든다.  

물론 바로크 음악의 대다수는 시계처럼 정확하게 흘러가는데 이런 곡들도 우리를 끄는 것인 무슨 이유인가. 이런 음악의 매력은 그 형식의 정밀함에 있다. 이를테면 높이 솟은 빌딩이나 가구, 도자기를 볼 때 감정적 요소는 거의 없지만 그 형식들이 엮어내는 깊은 관계성을 인식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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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뛰어넘는 기쁨은 무엇인가? 이 개념은 신경과학이나 심리학에서 별로 다루지 않는다. 우리 삶이 기쁨의 연속이면서도 무엇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지 아는 학자는 거의 없다. 기쁨이라는 것은 우리의 신경계안에 그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기쁨은 다양한 감각계, 운동계, 관념계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가지 행동이 여러 종류의 기쁨을 주기도 한다.

우리 몸은 황홀함을 느끼기도 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기도 한다. 하나의 유기체는 그 자신의 주변과 늘 균형상태(항상성)를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 이 균형이 깨지면 고통이 발생하고 다시 균형으로 돌아가면 기쁨이 생겨난다. 따라서 기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균형상태가 무엇이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신경계는 자신이 인지하고 행동하고 이해하게 되는 정도에 따라 그에 맞는 수준의 예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예상과 현실이 상충하는 정도에 따라  두뇌는 재빠르게 상황을 재인식하려하고, 이로인해 스트레스와 근심이 생긴다. 이와는 반대로, 나타나는 현실과 예상 간에 별 차이가 없다면 인식과정은 아무런 마찰없이 진행되며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성생활과 식도락처럼 지극히 동물적인 기쁨들이란, 결과에 대해 강한 예상(욕구)을 하고 이것이 충족되면 큰 기쁨을 느끼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

이 개념은 기쁨이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세상은 매우 혼란스럽고 서로 깊은 관련을 맺으며 갈등과 혼돈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모든 존재들은 어느정도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 우리가 하는 일련의 예상들이 현실과 맞아떨어지면 기쁨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으면 근심에 빠진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우리의 예상이 잘 맞아들어가 기쁨을 주는 일들은 음악을 비롯해 몇가지 안된다.

사실 우리가 어떤 음악을 듣고 기쁘다고 느끼는 것은 음악의 모든 요소로부터 받은 기쁨과 실망을 합쳐놓은 것의 평균이 기쁨쪽으로 기울었다는 정도를 뜻한다. 그래서 엉성한 곡은 기대감도 못주고 감동도 전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얘기!! <하지만 음악이 주는 가장 심오한 기쁨은 기대가 어긋나면서 생긴다.>  앞의 논리와는 반대가 아닌가.  평범한 음악이 주는 기쁨을 매일 아침 먹는 식빵으로 비유한다면 잘 만든 음악은 캐비어라고 할 수 있다. 잘 만든 음악은 사람들의 기대를 쉽게 만족시키지 않는다 빙빙 돌리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곡이 전해줄 감동의 크기를 슬며시 보여준다. 이런 큰 감동을 전달하는 비결은 사람들에게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을 쓰는데 있다. 이런 점은 연애에 있어서나 음악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다. 애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당신은 서프라이징 파티를 하거나, 신기한 선물을 주거나, 폭죽과 조명을 터뜨린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 연이어, 가급적 일시에 전달한다. 우리가 피아노 교육에서 아이들을 기쁘게 만들 때도 이런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클라이맥스에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음악의 모든 요소들이 최고의 관련성을 맺으면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훌륭한 연주자는 오랜 연습을 통해 그 악기로부터 특정한  구조의 소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 과정은 자신도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로는 정말 훌륭한 음악을 들을 때에도 고통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멜로디가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은 그러한 멜로디의 변화와 형식에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 즉 이미 깊은 수준의 감정을 겪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음악으로부터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우리들이 삶으로부터 받은 경험만이 음악의 흐름에 대한 예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고통은 그 예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 우리가 클래식을 통해 접근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이 고통스럽거나 덜 기쁜 현상으로 나타나기 쉬운 것도 이런 이유때문 아닐까.

어떻게 음악이 기쁨과 여타 감정들을 이끌어내는지 알아보자. 음악과 춤의 관계가 여기서 드러난다. 핸리 맨시니의 <핑크 팬더>를 들어보자. 이 음악은 물리적인 움직임, 즉 팬더가 몰래 접근할 때 느끼는 움직임에 의해 표현된다. 우리가 돌아다닐 때 우리의 신체구조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그 속에서 소리의 요소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것 같다. <음악을 들으면 웬지 춤을 추고 싶어지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설명한다. 음악은 우리 몸의 근육을 움직이는 신체상의 요소들과 연결돼있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소리를 물리적인 감각으로 인식할까. 분명한 것은 음악이 우리의 근육계로 직접 흘러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결과 우리가 음악을 <의식적으로> 근육계에 집어넣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겉보기엔 크고 작은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음악의 중요한 특징을 만들어내고, 근육을 사용해 음악을 표출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마음 속은 어떤 동작에 대한 예상으로 가득 차있어, 그 동작을 유발하는 운동력을 몸속에서 계속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의 움직임을 통한 음악 표현이 갖고 있는 두가지 기능을 알아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살펴보자.

첫째기능은 이렇게 신체를 통한 표현은 일종의 기록장치를 갖고 있어서 우리가 순간적으로 음악의 특징을 새겨 넣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런 특징들을 몇초 동안 보다 쉽게 기억할 수 있다. 춤을 통해 음악을 더 빨리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기능은 음악을 통해 우리의 경험을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체를 청각적 경험을 키우는 공명기로 사용한다. 마치 현에서 나는 소리는 작은데 바이올린 몸통을 통해 나오는 소리는 그렇게 큰 것과 마찬가지 경우다. 음악을 듣는 사람은 스스로 악기가 되어 자신을 음악에 맡긴 채 연주되도록 놔두는 것이다.

결국 춤이나 음악에 맞춘 신체의 동작은 음악을 더 잘 이해하고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기능을 갖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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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음악이 주는 황홀경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는 마약에 취한 상태와 유사하다. 실제로 음악을 통해 황홀경에 빠질 때는 뇌로부터 다량의 엔돌핀 즉 마약이 분출하게 된다. 

음악이 주는 황홀경은 모든 예술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작용한다. 또 황홀경을 일으킬 가능성 또한 가장 높다.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 청각이 더 직접적이고 압도적이다.  그 이유는 <소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즉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이야말로 모든 신경계의 존재이유 아닌가. 즉 우리의 신경계에 도달한 음악은 우리의 두뇌에 일련의 예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 예상을 통해 음악의 멜로디와 하모니와 형식을 인식한다. 이런 예상을 만들어 내면서 음악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의지를 이끌어내 황홀경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조금 더 알아보자. 위대한 음악은 아름다움(완벽한 질서와 논리에 대한 경험) 그 이상의 황홀경을 전한다. 위대한 음악가들은 음악의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결합시켜 새로운 환경을 머릿속에 조성한다. 두뇌는 그 안에서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심오한 관계성을 경험하고 마치 조물주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을 갖게 된다. 마약에 취한 상태와 같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내 존재를 신격화하게 되며, 세상도 예전보다 더 아름답게 느낀다. 이것이 음악의 황홀경이다. 

과연 앞으로 바흐나 베토벤이 만든 곡들보다 더 크고 훌륭한 구조를 갖춘 곡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것들보다 더 깊은 관계성을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는 곡이 가능할까. 그들은 초자연적인 천재성을 갖고 태어났고, 엄청난 양의 연습을 했으며, 평생을 음악 만드는 일에 매진했다. 누가 이들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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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어렵지만 문장을 잘게 잘라서 몇번 읽으면 문맥이 잡힌다.

음악은 우리 신경계의 예측과 실제 감각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마술이다. 그 예상과 현실이 잘 맞으면 기쁨이, 잘 안맞으면 고통과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그러나 음악이 주는 최고의 심오한 기쁨은 그 기대가 어긋났을 때 생긴다. 마치 연애하는 이들이 상대에게 기쁨을 줄 때 하는 행동처럼. 그렇게 절묘한 어긋남이 발생할 때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기쁨은 이미 깊은 수준의 경험자에게만 다가온다. 즉 경험이 없는 자는 예상하지 못하고, 결국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음악은 의식적으로 운동계를 자극해 몸을 움직이게 한다. 즉 춤을 추게 한다는 뜻이다. 춤을 추면, 거꾸로 음악을 잘 이해하고 되고 경험의 폭도 저절로 더 넓어진다.

마치 음악은 마약처럼 시간과 움직임이라는 묘약을 통해 신경계를 장악하고 일련의 예상을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위대한 음악은 모든 음악요소를 완벽하게 융합시켜 머릿속에 새로운 구조를 짓게 되고, 두뇌는 그 구조를 경험하면서 조물주의 기쁨을 만끽하는데 이것이 바로 음악이 주는 황홀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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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효자 2003-11-28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을 과학으로 설명하면 그동안 감으로 느껴왔던 것들이 기가 막히게 논리로 변한다. 너무 기쁘고 감동적이다. (이 기쁨과 감동에 대해서도 이젠 충분히 과학적으로 설명가능하다.) 더구나 이 논리는 향후 문화교육사업에서 매우 중요한 설득기제가 될 것 같아 기쁨이 두배가 됐다. 우습게도 지금 이 페이퍼의 장황한 요약문은 책 전체의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지금의 열배 노력을 들여 이 책을 독파한다면 그 내공은 생각만해도 흐뭇하다. 책이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영국은 이렇다할 국경일이 없는 나라다. 많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거나 구체제가 붕괴한 날을 기념하는데 반해 영국은 그럴만한 기억이 없는 모양이다. 단 영국인들의 가슴속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 자랑스러운 해가 있었으니 1940년, <안누스 미라빌러스> 즉 <기적의 해>였던 것이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함락시키자 유럽은 전운이 감돌았다. 이어 독일은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붕괴시켰다. 처칠은 1940년 체임벌린 총리 사임후 전시걱구내각을 구성하여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했다. 전쟁 최기 영국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41년 소련과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전황은 서서히 유리하게 전개됐다.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고군분투했던 이 시기를 '홀로섰던 386일'이라고 한다.  

영국은 다른 열강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첫 이틀만 빼고 일본의 패망으로 종전이 선언되던 그 순간 까지 전선을 지킨 것이다. 이때의 영광을 잊지 않고 T S 엘리어트는 'Littel Gidding'이란느 1941년작 시에서 "역사는 지금, 영국에 있다"라고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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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다르면서 이렇게 닮을 수는 없다. - 히틀러와 처칠-  

이 영광의 시간을 이끌었던 처칠과, 그의 영원한 숙적이었던 히틀러. 두사람의 리더십을 분석한 책 <CEO 히틀러와 처칠-리더십의 비밀>-앤드류 로버츠-은 모처럼 만나게 된, 제법 내용이 탄탄한 책이다. (원제는 Hitler & Churchil: Secrets of Leadership 인데 한국판은 어색하게 CEO라는 상업적 모자를 달고 나왔다.)

히틀러는 처칠에 비해 개인적 매력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부하에 대한 다정다감한 관심과 행동들, 반면 철저하게 계산된 부하 용병술과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는 인간관계, 채식주의에 가까운 절제된 식사, 대중앞에 절대로 안경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초인주의적 자세, 녹색과 회색빛이 감도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종교에서 도입한 신격화된 카리스마. (이 말은 '영혼'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됐음. ) 그러나 성장을 거부하고 조그만 철십자훈장만 단 소박한 제복으로 서민성을 대변하려했던 히틀러. 그는 사람들과 떨어져 산꼭대기 성에서 기거하며 독서와 그림그리기로 시간을 보냈던 게으른 지도자였다.  

이에 비해 처칠은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독설가이며 변덕장이였고, 비서들을 못살게 구는 일벌레,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다. 히틀러가 세계최초로 금연의 병리학적 연구를 했던 것에 반해 처칠은 공공장소에 들어설 때마다 시거에 불을 붙여대는 것을 트레이드 마크로 삼을 정도였다. 물방울무늬 나비넥타이와 햄버거처럼 생긴 중절모, 그리고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군복을 즐겨입었던 수상이었다. 식성도 까다로운 미식가인 동시에 술독에 빠져살았던 주당이다. 그는 대중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MBWA(Management by Walking Around) 즉 관리자가 순회하며 공식, 비공식 의사소통의 기회를 마련하는 방식을 즐겨 취했다.

먼저 히틀러의 얘기부터. 집념과 카리스만만 가지고 독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부단히 자신과 자신의 비전을 팔았다. 지도자는 성공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일차적인 수단은 언제나 철저히 계산된 정치 연설이었다. 히틀러나 처칠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울 웅변가였지만 대중연설 능력을 선천척으로 타고나지는 않았다. 즉 남다른 웅변술을 터득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했다.

1933녀 11월10일 베를린의 지멘스 다이나모공장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했던 히틀러의 연설은 선전참모 괴벨스의 작품이었다. 좌파적 성향이 강한 대중들 앞에서 그는 "친애하는 나의 독일 노동자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수백만 독일 노동자에게 고하노니, 나는 어떤 사람보다 이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합니다."라며 노동자 대부분이 경험한 1차대전 참호전시절 얘기를 꺼내 단 1분 만에 청중을 압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p100~101)

초기에 그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바바리아 출신의 코미디언 바이스 페르들의 연기를 공부하기도 했다. 누추한 방에서 히틀러는 배우처럼 거울 앞에 서서 몸짓이나 포즈를 끝없이 연습했다. 말년에는 이 연습을 더 많이 했다. 그는 거리연설의 경험을 통해서 아침이나 점심에는 청중들이 반발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저녁이나 야간에 강자의 지배에 쉽게 굴복한다는 점을 이용했다.

처칠은 대중집회에서 연설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주로 의회나 라디오 방송국이 무대였다. 그는 말로써 상대를 설득시키는 토론에 의존했다. 그를 최고의 웅변가로 만들어준 것은 선동이 아니라 탁월한 영어구사 능력이었다.

"나는 모든 소년들에게 영어를 배우게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영리한 소년에게는 명예를 위해 라틴어를 , 그리고 접대를 위해 그리스 어를 배우게하겠다. 하지만 내가 매질을 해서라도 꼭 가르치고 싶은 것은 영어이다."(p118)

처칠은 열네시간씩 웅변연습을 하기보다, 밤새워 연설문을 고쳐쓰는데 노력했다. 처칠이 쓴 소설<사브롤라>에서 주인공이 연설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연설을 수없이 해봤지만 노력하지 않고는 좋은 연설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흥연설의 성패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렇다.고상한 생각과 환한 미소, 무식한 사람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확한 어휘선택, 가장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도 끌어당길 수 있는 호소력, 세속의 물질적인 걱정을 잊고 정신을 고양시켜 감성을 깨워줄 어떤 내용들이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적절한 단어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그는 아무렇게나 한문장을 적은 다음, 첨삭하고 매끄럽게 다듬어 다시 적었다. 들었을 때 부드럽게 넘어가고, 마음에 감동과 자극을 줄 수 있는 문장이어야 하리라. 이것이야말로 게임이 아닌가. 우너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패를 내놓고 승부를 걸어야 하니 말이다. 이윽고 그는 완벽하게 정리한 생각과 어휘들을 머릿속에 담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방안을 오가기 시작했다 . 그러면서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갑자기 멈추더니 불끈 쥔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이제 연설이 끝난 것이다."

그의 연설은 영국역사와 세계사를 아우르는 사실과 교훈을 인용했으며, 위엄있고 고풍스런 관용구를 즐겨 사용했다.  1940년 여름 처칠의 연설은 국민 모두가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총리가 되고 3일 후 하원연설에서 "내가 드릴 것은 피와수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다.

처칠은 대중연설에선 치명적인 가벼운 말더듬과 혀 짧은 소리로 고통을 겪었다. 사람들은 그가 평생 눌변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완벽하게 고치진 못했다는 사실을 알지못한다. 당시 정적들은 그가 술에 취해 발음이 똑똑치 못하다고 비난하기조차 했다.

대중연설을 통한 두 인물의 대결말고도 재미있는 사실 몇가지가 더있다.

19세기 러시아군에 의해 처음 고안되어, 현재 나토에서 공식적인 독트린으로 채택하고 있는 임무형 전술은 총사령관의 역할은 목표제시로 국한하고, 목표달성을 위한 최선의 전술을 결정하는 것은 현지 사령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즉 명령에 대한 복종보다 성공과 실패가 궁극적인 평가기준이다. 히틀러가 프랑스전을 승리로 이끈 놀랄만한 비결이 바로 임무형전술이며, 리더십의 핵심이다.  지도자는 자기 부하의 주도권과 전문갇적 의견을 신뢰해야 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독일군 누구나 어떤 명령이 떨어졌을 때, 상관의 직무를 인계받을 수 있도록 특별히 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현대경영의 핵심인 권한부여(Empowerment)를 전투에 활용해 대성공을 거둔 독일군이 패망하게된 원인은 아이러니하게 히틀러의 우유부단함에 있었다.

또 한가지 에피소드. 히틀러는 대부분의 명령을 개인 비서 마틴 보르만을 통해서 구두로 했다. 절대 서류로 명령하지 말고 구두로 하라느 것이 철칙이었다. 덕분에 그와 그의 옹호자들은 유태인 대학살을 비롯한 범죄에 대해 책임을 부인할 수 있었다. 반면 처칠은 자신이 말하거나 들은 내용을 종이에 메모해놓고 절대 잊지 않았다. 1940년 7월 그는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을 전시 내각 사무국에 전달하고 종전까지 원칙으로 삼았다. "내가 지시하는 모든 사항은 글로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하거나, 기록한 것을 내게 보여주어 즉시 나의 확인을 받을 것. 국방에 관해 본인이 결정한 어떤 사안도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을 것임."

처칠은 통계와 양적인 분석의 가치를 인식한 최초의 현대 지도자였다. 그는  전생시 스무명 남짓한 조직으로 통계국을 신설하고 "특정한 관점을 갖도록 인위적으로 사례를 만들려고 생각하지 마시오. 단지 냉엄한 현실만 알게 해주오."라고 책임자 린드먼교수에게 쪽지를 보냈다.

실패한 지도자의 리더십을 굳이 옹호할 생각은 필자에게 없는 듯하다. 요즘 처질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언급되는 것도 현대적 리더십의 원형을 그에게서 찾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공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성공의 원인을 히틀러나 처칠의 리더십 덕분(탓)으로 돌리기에 2차대전은 너무 복잡하고 거대하다.

다만  그들이 국가존망을 다투는 치열한 전장에서 혼신을 다하며 발휘했던 리더십은 결과에 무관하게 리더십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무한한 레퍼런스를 제공해주고 있다. 처칠이 훌륭한 것 못지 않게 히틀러의 지도력을 폄하해선 안된다. 오히려 일개 노동자의 아들이었던 그가, 오스트리아의 거리를 배회하던 화가지망생이었던 그가 1차대전을 겪고 독일의 지도자로 급격히 부상하는 과정에 보였던 리더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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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는 아마 알고 있을거야."

당신은 고민스러운 일을 만날 때마다 제인이 황금박쥐를 찾듯 보스라는 절대자를 찾는다. 그러다 어느새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습관처럼 돌려놓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보스는 미안한 얘기지만 더이상 해결사가 아니다. 당신의 잘못된 습관은 꽤 유능한 당신의 상사를 결국 실패한 조직의 원흉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보스가 무죄라고 항변할 순 없다. 자만심과 독재의 맛에 길든 그는 부하들의 판단능력을 마비시켰고 결국엔 조직의 전신마비를 초래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코칭의 기술. 책을 다 읽고 보니 제목이 약간 잘못 달려있다. 이 책은 기술보다는 패러다임, 즉 세계관의 변화를 강조한다. 보스가 아니라 부하가 문제 해결의 당사자이며 주체라는 입장이다. 경영의 핵심은 부하를 제대로 모시는 것이다. 조직의 발전은 일하는 자들의 개인적 역량이 최고조에 달할 때 실현된다. 이렇게 부하가 자아실현을 해낼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것이 상사의 직무이며, 코칭의 핵심이다.  

다음은 이 책의 줄거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현대를 <해답이 없는 시대>로 규정한다. 이제까지 해답의 보유자로 군림해왔던 직장의 상사들은 자신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해답은 어디 있을까? 이 책은 고객만족, 사원만족이란 단어에서 보여지듯 문제해결의 실마리, 즉 해결능력의 주체가 고객이나 사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고객이나 부하의 능력과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해답이 그들 스스로에게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흔들림없는 철학이요, 가치관이다.

당연히 기업은 고객/사원과의 접촉면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며 조직형태도 세로형 조직에서 가로형 조직으로, 스탭형에서 라인형으로 바뀌는 게 당연하다. 이때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달라져 <지시명령형 커뮤니케이션>에서 <쌍방향 질문형 커뮤니케이션>으로 전환되야 한다.  

가로형조직에서 상사는 지위라기보다 역할 또는 기능이 된다.  즉 부하가 가진 해답을 이끌어 내는 특정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직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은 애당초 타인을 자기 생각대로 컨트롤한다 또는 조작한다는게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타인을 조작하려 헛된 노력을 들일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상사들은 <내가 하라는대로 해!> 또는 <네가 알아서 해, 난 모르겠어.>의 극단적 자세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걸까. 조작주의와 방임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이 있어야 한다. 상사와 부하가 협동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을 <코칭>에서 찾는다.

코팅의 정의는 <개인의 자아실현을 서포트하는 시스템>이다.

자아실현부터 따져보자. 인간의 욕구에는 5단계가 있다. 가장 하위욕구부터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 인정과 존경의 욕구, 마지막 최고 단계가 자아실현의 욕구다. 즉 자신이 지닌 능력이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서포트의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헬프와의 차이점에 주목해본다. 맨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후자요, 흔들리는 사다리를 붙잡아달라고 하는 것은 전자다. 즉 무력한 상태의 상대방이 마이너스에서 제로로 가는 것이 헬프라면, 서포트는 유력한 상태에 있는 상대방을 제로에서 플러스로 가게 돕는 것이다. 코칭은 한마디로 유력한 부하를 도와서 그의 자아실현을 이루게 하는 행위인 셈이다.

시스템은 단순히 기술이나 방법론만을 뜻하지 않는다. 코칭에는 <3대철학>이 있다 1. 모든 사람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2. 그 사람에게 필요한 해답은 모두 그 사람 내부에 있다. 3.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즉 시스템은 코칭의 철학에 근거한 협동적인 인간관계까지 포괄한다.  

3대 철학에서 세번째 해답을 찾는다, 즉 해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코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사람의 의식은 마치 빙산처럼 드러난 현재의식보다 물밑의 잠재의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은 보통 현재의식을 통해 문제해결을 하려들지만 정작 해답은 잠재의식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그래서 의식의 화살표를 거꾸로 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잠재의식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바로 질문이다. 코치는 질문을 통해서 부하의 잠재의식에 들어있는 해답을 스스로 끄집어 내도록 유도하는 사람이다.

코칭의 다섯가지 핵심스킬을 소개한다.

첫째가 질문스킬이다. 코칭에 반드시 필요한 질문스킬은 확대질문(특정질문), 미래질문(과거질문), 긍정질문(반대질문)이 있다.

확대질문은 질문받은 사람이 즉석에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 혹은 예, 아니오로 대답할수 없고, 둘이상의 해답이 있는 질문이다. 확대질문의 강점은 잠재의식으로 화살표를 확 돌려놓는 효과가 있다.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코칭이라면 그 가능성의 시간축은 현재에서 미래로 달려가는 미래형이다. 따라서 부하의 화살을 계속 미래로 향하게 해야 한다. 과거질문은 대부분 과거의 실패 또는 자아실현의 좌절을 떠올리게 한다.

부정적인 질문을 던지면 부하들은 그 질문에 충실히 반응해서 부정적으로 사고하기 쉽다. 자동차경주에서 드라이버는 벽에 부딪혀선 안된다는 부정적 생각을 해선 안된다. 그러면 벽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결과적으로 벽에 충돌하는 경우가 곧잘 발생한다. 부하의 가능성을 이끌어낼 때는 긍정질문을 통해 긍정적인 해답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가 경청스킬이다.1단계는 <부하의 이야기를 귀로 듣는다.> 경청의 첫걸음은 부하의 말을 들을 때 그에게 의식의 화살을 돌리는 마음가짐이다. 내 머리를 비우라는 것이다. 2단계는 <부하의 이야기를 입으로 듣는다.> 부하가 이야기하는 동안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되 나를 위한 질문이 아닌, 부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3단계 <부하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듣는다.> 그 전제는 마음으로부터 부하의 자아실현의 주체는 그 자신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부하의 척도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부하의 척도는 그 사람 입장에서 사물과 사람을 보는 것이다.  

세째가 직관스킬이다. 부하의 잠재의식과 가장 거리가 먼 곳에 상사의 현재의식이 있다. 즉 부하의 잠재의식을 깨우려면 상사는 현재의식을 가동시켜선 안된다. 그래서 첫째 상사는 생각하면 안된다. 즉 열심히 머리를 굴리게 되면 상사는 그동안 자기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은 일을 하는 셈이다. 그러면 부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코칭에서 일은 부하가 해야한다. 질문이라는 공을 받으면 재빨리 순발력있게 부하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둘째, 예측해선 안된다. 상사들은 "부하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잘못된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부하들과의 대화에서 결론을 예측한다면 상사의 생각으로 유도하려는 기제가 작동하게 된다. 결국 부하들은 문제해결을 스스로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는 체하지 말고 솔직히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해답이 존재하는 부하의 잠재의식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생각하는게 옳다.

셋째, 리드하지 말라. 그냥 따라가면 된다. 부하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그 힌트는 조금전에 그가 한 말중에 있다. 부하가 헤맨다고 절대로 흥분하거나 뭔가를 지시 또는 강권하려 들지 말라.

네번째, 자기관리스킬이다. 상사가 부하를 위해 100% 자기 자리에 있으려면 세가지를 다잡아야 한다. 첫째 머리를 관리한다. 앞에서 머리를 비우라 했는데 그만 깜박 생각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집착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영화에 자막 지나가듯이 흘려버린다. 둘째, 마음 즉 감정을 관리한다.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코칭하지 말라. 부정적 요소들을 확인하거나 해결 또는 잊을 수 있도록 사전에 조정해야 한다. 세째, 몸을 관리한다. 부하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부하가 편하게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자세나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다.

다섯째, 확인스킬이다. 부하의 미래, 현재, 과거에 대한 확인이며, 동시에 부하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인정하기 위한 기술이기도 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문에 외부로부터의 확인절차가 필요하다. 부하의 미래부터 확인한다. 다함께 미래를 꿈꿔보자. 부하가 가고자 하는 곳, 즉 미래의 비전이나 꿈이다. 부하가 목표를 잊었다면 그것을 상기시키고 자신감을 상실했다면 격려해줘야 한다. 둘째 부하의 현재를 객관적으로 확인한다. 이때 중요한 확인기준이 가치관이다.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지 확인한다.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해야할 때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 것인가. <자네의 가치관에 비춰볼 때 올바른 선택은?>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세째, 부하의 과거를 확인한다. 실패담이 아닌 성공담,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를 상기하게 해서 의식의 화살표를 과거로 꺾지 말고 계속 미래를 지향하도록 한다.  

이렇게 코칭을 해서 얻어질수 있는 성과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쌍방향으로 달라지고, 패러다임도 X축(부하는 당근과 채찍으로 부린다)에서 Y축(사람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부하가 문제해결의 당사자다)으로 변화한다. 코칭은 상사-부하의 관계에만 존재하지 않고 모든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사내에서 코칭관계가 확산되어 모든 개인이 자아실현을 하게 된다면 그 회사는 발전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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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효자 2003-11-23 22:08   좋아요 0 | URL
마이 리뷰쓰기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바라던 대로 마이 페이퍼라는 메뉴가 생겼다. 그 첫글을 <코칭의 기술>-에노모토 히데타케-에 관해 쓰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참 그럴 듯하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데 과거의 실패가 끈질지게 머리채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별수없이 사람들에게 판단을 맡겨놓고 뒷전에 앉아있노라니 불안하기도 하고 가끔은 앞으로 불쑥 나오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마음이 놓인다. 사람들이 참 열심히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내가 코칭을 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코치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