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이렇다할 국경일이 없는 나라다. 많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거나 구체제가 붕괴한 날을 기념하는데 반해 영국은 그럴만한 기억이 없는 모양이다. 단 영국인들의 가슴속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 자랑스러운 해가 있었으니 1940년, <안누스 미라빌러스> 즉 <기적의 해>였던 것이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함락시키자 유럽은 전운이 감돌았다. 이어 독일은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붕괴시켰다. 처칠은 1940년 체임벌린 총리 사임후 전시걱구내각을 구성하여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했다. 전쟁 최기 영국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41년 소련과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전황은 서서히 유리하게 전개됐다.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고군분투했던 이 시기를 '홀로섰던 386일'이라고 한다.
영국은 다른 열강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첫 이틀만 빼고 일본의 패망으로 종전이 선언되던 그 순간 까지 전선을 지킨 것이다. 이때의 영광을 잊지 않고 T S 엘리어트는 'Littel Gidding'이란느 1941년작 시에서 "역사는 지금, 영국에 있다"라고 노래했다.
========================================================
이토록 다르면서 이렇게 닮을 수는 없다. - 히틀러와 처칠-
이 영광의 시간을 이끌었던 처칠과, 그의 영원한 숙적이었던 히틀러. 두사람의 리더십을 분석한 책 <CEO 히틀러와 처칠-리더십의 비밀>-앤드류 로버츠-은 모처럼 만나게 된, 제법 내용이 탄탄한 책이다. (원제는 Hitler & Churchil: Secrets of Leadership 인데 한국판은 어색하게 CEO라는 상업적 모자를 달고 나왔다.)
히틀러는 처칠에 비해 개인적 매력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부하에 대한 다정다감한 관심과 행동들, 반면 철저하게 계산된 부하 용병술과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는 인간관계, 채식주의에 가까운 절제된 식사, 대중앞에 절대로 안경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초인주의적 자세, 녹색과 회색빛이 감도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종교에서 도입한 신격화된 카리스마. (이 말은 '영혼'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됐음. ) 그러나 성장을 거부하고 조그만 철십자훈장만 단 소박한 제복으로 서민성을 대변하려했던 히틀러. 그는 사람들과 떨어져 산꼭대기 성에서 기거하며 독서와 그림그리기로 시간을 보냈던 게으른 지도자였다.
이에 비해 처칠은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독설가이며 변덕장이였고, 비서들을 못살게 구는 일벌레,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다. 히틀러가 세계최초로 금연의 병리학적 연구를 했던 것에 반해 처칠은 공공장소에 들어설 때마다 시거에 불을 붙여대는 것을 트레이드 마크로 삼을 정도였다. 물방울무늬 나비넥타이와 햄버거처럼 생긴 중절모, 그리고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군복을 즐겨입었던 수상이었다. 식성도 까다로운 미식가인 동시에 술독에 빠져살았던 주당이다. 그는 대중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MBWA(Management by Walking Around) 즉 관리자가 순회하며 공식, 비공식 의사소통의 기회를 마련하는 방식을 즐겨 취했다.
먼저 히틀러의 얘기부터. 집념과 카리스만만 가지고 독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부단히 자신과 자신의 비전을 팔았다. 지도자는 성공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일차적인 수단은 언제나 철저히 계산된 정치 연설이었다. 히틀러나 처칠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울 웅변가였지만 대중연설 능력을 선천척으로 타고나지는 않았다. 즉 남다른 웅변술을 터득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했다.
1933녀 11월10일 베를린의 지멘스 다이나모공장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했던 히틀러의 연설은 선전참모 괴벨스의 작품이었다. 좌파적 성향이 강한 대중들 앞에서 그는 "친애하는 나의 독일 노동자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수백만 독일 노동자에게 고하노니, 나는 어떤 사람보다 이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합니다."라며 노동자 대부분이 경험한 1차대전 참호전시절 얘기를 꺼내 단 1분 만에 청중을 압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p100~101)
초기에 그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바바리아 출신의 코미디언 바이스 페르들의 연기를 공부하기도 했다. 누추한 방에서 히틀러는 배우처럼 거울 앞에 서서 몸짓이나 포즈를 끝없이 연습했다. 말년에는 이 연습을 더 많이 했다. 그는 거리연설의 경험을 통해서 아침이나 점심에는 청중들이 반발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저녁이나 야간에 강자의 지배에 쉽게 굴복한다는 점을 이용했다.
처칠은 대중집회에서 연설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주로 의회나 라디오 방송국이 무대였다. 그는 말로써 상대를 설득시키는 토론에 의존했다. 그를 최고의 웅변가로 만들어준 것은 선동이 아니라 탁월한 영어구사 능력이었다.
"나는 모든 소년들에게 영어를 배우게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영리한 소년에게는 명예를 위해 라틴어를 , 그리고 접대를 위해 그리스 어를 배우게하겠다. 하지만 내가 매질을 해서라도 꼭 가르치고 싶은 것은 영어이다."(p118)
처칠은 열네시간씩 웅변연습을 하기보다, 밤새워 연설문을 고쳐쓰는데 노력했다. 처칠이 쓴 소설<사브롤라>에서 주인공이 연설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연설을 수없이 해봤지만 노력하지 않고는 좋은 연설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흥연설의 성패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렇다.고상한 생각과 환한 미소, 무식한 사람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확한 어휘선택, 가장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도 끌어당길 수 있는 호소력, 세속의 물질적인 걱정을 잊고 정신을 고양시켜 감성을 깨워줄 어떤 내용들이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적절한 단어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그는 아무렇게나 한문장을 적은 다음, 첨삭하고 매끄럽게 다듬어 다시 적었다. 들었을 때 부드럽게 넘어가고, 마음에 감동과 자극을 줄 수 있는 문장이어야 하리라. 이것이야말로 게임이 아닌가. 우너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패를 내놓고 승부를 걸어야 하니 말이다. 이윽고 그는 완벽하게 정리한 생각과 어휘들을 머릿속에 담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방안을 오가기 시작했다 . 그러면서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갑자기 멈추더니 불끈 쥔손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이제 연설이 끝난 것이다."
그의 연설은 영국역사와 세계사를 아우르는 사실과 교훈을 인용했으며, 위엄있고 고풍스런 관용구를 즐겨 사용했다. 1940년 여름 처칠의 연설은 국민 모두가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총리가 되고 3일 후 하원연설에서 "내가 드릴 것은 피와수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다.
처칠은 대중연설에선 치명적인 가벼운 말더듬과 혀 짧은 소리로 고통을 겪었다. 사람들은 그가 평생 눌변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완벽하게 고치진 못했다는 사실을 알지못한다. 당시 정적들은 그가 술에 취해 발음이 똑똑치 못하다고 비난하기조차 했다.
대중연설을 통한 두 인물의 대결말고도 재미있는 사실 몇가지가 더있다.
19세기 러시아군에 의해 처음 고안되어, 현재 나토에서 공식적인 독트린으로 채택하고 있는 임무형 전술은 총사령관의 역할은 목표제시로 국한하고, 목표달성을 위한 최선의 전술을 결정하는 것은 현지 사령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즉 명령에 대한 복종보다 성공과 실패가 궁극적인 평가기준이다. 히틀러가 프랑스전을 승리로 이끈 놀랄만한 비결이 바로 임무형전술이며, 리더십의 핵심이다. 지도자는 자기 부하의 주도권과 전문갇적 의견을 신뢰해야 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독일군 누구나 어떤 명령이 떨어졌을 때, 상관의 직무를 인계받을 수 있도록 특별히 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현대경영의 핵심인 권한부여(Empowerment)를 전투에 활용해 대성공을 거둔 독일군이 패망하게된 원인은 아이러니하게 히틀러의 우유부단함에 있었다.
또 한가지 에피소드. 히틀러는 대부분의 명령을 개인 비서 마틴 보르만을 통해서 구두로 했다. 절대 서류로 명령하지 말고 구두로 하라느 것이 철칙이었다. 덕분에 그와 그의 옹호자들은 유태인 대학살을 비롯한 범죄에 대해 책임을 부인할 수 있었다. 반면 처칠은 자신이 말하거나 들은 내용을 종이에 메모해놓고 절대 잊지 않았다. 1940년 7월 그는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을 전시 내각 사무국에 전달하고 종전까지 원칙으로 삼았다. "내가 지시하는 모든 사항은 글로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하거나, 기록한 것을 내게 보여주어 즉시 나의 확인을 받을 것. 국방에 관해 본인이 결정한 어떤 사안도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을 것임."
처칠은 통계와 양적인 분석의 가치를 인식한 최초의 현대 지도자였다. 그는 전생시 스무명 남짓한 조직으로 통계국을 신설하고 "특정한 관점을 갖도록 인위적으로 사례를 만들려고 생각하지 마시오. 단지 냉엄한 현실만 알게 해주오."라고 책임자 린드먼교수에게 쪽지를 보냈다.
실패한 지도자의 리더십을 굳이 옹호할 생각은 필자에게 없는 듯하다. 요즘 처질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언급되는 것도 현대적 리더십의 원형을 그에게서 찾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공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성공의 원인을 히틀러나 처칠의 리더십 덕분(탓)으로 돌리기에 2차대전은 너무 복잡하고 거대하다.
다만 그들이 국가존망을 다투는 치열한 전장에서 혼신을 다하며 발휘했던 리더십은 결과에 무관하게 리더십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무한한 레퍼런스를 제공해주고 있다. 처칠이 훌륭한 것 못지 않게 히틀러의 지도력을 폄하해선 안된다. 오히려 일개 노동자의 아들이었던 그가, 오스트리아의 거리를 배회하던 화가지망생이었던 그가 1차대전을 겪고 독일의 지도자로 급격히 부상하는 과정에 보였던 리더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