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이해인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알라딘의 서재도,
여태 내가 살아왔던 분당의 아파트도,
언젠가 내가 살게 될 탕헤르의 흰벽 집도,
그리고 나도

그냥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깔끔하고 단정하되 까다롭고 낯을 무척 가리는 그런 집 말이다.


십년 쯤 전에 꿈이 있었다.
처음엔 누가 물어보면 얘기하려고 준비해둔 꿈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러 번 얘기하다보니
그냥 진짜 꿈처럼 되고 말았다.

잘하면(잘못했으면) 그 꿈을 일찍 이룰 뻔 했다.
그땐 그렇게 비껴 간 것이 너무 속상하고 아쉬웠다(지금 생각하면 솔직히 정말 다행이다)

꿈이란 자기 만족이나 자기 과시가 절대로 아니다.
외딴 마을의 빈 집처럼
비어있되 송진향기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 꿈 안으로 들어올 때
음  괜찮은데 .... 하면서 입가에 좋은 미소를 머금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시간을 이십년쯤 두고 조금씩 키워갈 일이다.
지금 내가 새벽 두시반에 갑자기 깨어
이렇게 시 한편을 고르느라 시집 한권을 다 읽는 것도
모두 그 시간의 귀퉁이를 채워가는 미련한 짓으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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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좌절과 실패와 욕구불만의 희생자가 된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 부정적인 질문만 던지기 때문이다. <왜 나는 제대로 되는 일이 없지?><왜 나는 항상 이모양일까?> 질문을 바꿔라. 그러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좋은 질문을 하면 좋은 대답이 나온다. 좋은 대답은 좋은 해결책을 낳는다. 좀더 창의적이고 신선한 생각을 하기위해, 매일의 상황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

질문을 받으면서 말을 배웠고

걷기 시작하면서 질문을 했다.

처음엔 엄마들이 질문을 했지만

얼마후 엄마들은 질문을 귀찮아했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질문을 하지 않게 됐다.

질문이 없어지면서 어렸을 때 나를 들뜨게 했던

그 많은 멋진 꿈과 상상력도 없어졌다.

아이들은 세상의 틀에 조금씩 자신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어른들은 철이 든다고 했다. 

한때 무한한 경이로움을 느끼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신발끈을 묶고, 수영을 하고, 행성과 공룡의 이름을 암기하고, 대수 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배우면서 하루하루를 세상의 위대한 신비를 정복하는 기회로 여겼다. 오랫동안 아이는 신나고 흥미로운 삶을 살았지만 어느새 성인이라고 부르는 숨이 막힐 듯이 갑갑한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호기심은 균형으로 바뀌고 발견과 모험은 안전과 평온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그는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하지 않았던가.왜 어린 시절의 잠재력을 어른이 되면서 탕진하고 잃어버리는 걸까? 그 이유는 부모가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세뇌를 당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 사연을 갖고 있다. 나는 처음 어떤 신통찮은 일자리가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무조건 그 일을 하라고 했던 일을 기억한다. 아버지가 그랬던 이유는 내가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학교에서도 세뇌를 당한다. 우리는 모든 질문에 단 한가지 해답이 있다고 믿었고, 새악을 요구하는 질문은 별로 없어싿.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어떻게 하면 좀더 잘할 수 있을까?><만일 ~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은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질문하는 능력이 퇴화하면서 창의성도 사라졌다.

창의성을 빼앗아버리고 나서 갑자기 창의력을 보여주라 한다.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과, 내 자신에게 하는 것 두종류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 않은 후로 내게도 질문해본 적이 없다.

어쩌다 질문해도 대답이 안나오거나 부정적인 질문만 한다.

결과는 뻔하다. 상심만 더 커지고 부정적인 대답만 나온다.

어디에서도 질문을 왜 해야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질문해서 최선의 대답을 끌어내려면 두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확인질문과 탐색질문. 확인질문은 불분명한 것을 분명히, 알기쉽게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꺼리는 이유는 상대방이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인질문을 하면 상대방의 기대에 맞출 수 있고 종종 상대방에게도 자신의 생각과 요구를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탐색질문은 어떤 문제에 깊이 들어가서 철저하게 조사하거나, 자세하게 질문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좀더 자세한 정보뿐 아니라 상대방이 마음을 열고 생각의 폭을 넓히도록 하기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럴 때 <상술하라, 설명하라. 분명히 하라, 보여달라, 분석하라>등의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런 질문기술이 부족하면 다음과 같은 네가지 장애가 생겨, 적절한 정보습득이 어려워진다.

  1. 사람들은 자진해서 말하지 않는다. 즉 겨냥한 것만 맞출 수 있다. 극장표파는 사람은 내가 심야상영이 몇시냐는 질문을 하면, 밤 열시라고 대답한다. 그 시간이 모두 매진이라는 대답까지 하지 않는다.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해도 반드시 확인질문을 해야한다.
  2. 막연하게 말하고 생각한다. 최고의 코치는 선수들을 막연히 격려만 하지 않고 정확하게 어떤 부분에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걸까?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상대방도 알고 있을 거라고 쉽게 가정한다. 그게 아니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정확히 모르면서 상대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랄 수도 있다. 좀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3. 지레짐작을 한다. 대답하는 사람 못지 않게 듣는 사람도 책임이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가정을 한다. 상황이 어렵고 중대할 수록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나는 이것을 철저하게 생각해보았는가? 내가 지레짐작하고 있는 건 아닐까?>
  4. 같은 말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동문서답한다. 언어는 애매하다. 특히 말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받아들여진다. 성공하려면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아야 한다.

질문없이는 생각도 없다.

왜 아이들은 이전 세대보다 생각을 안하게 됐을까. 훨씬 더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당연히 생각을 더 많이 해야할 것 같은데. 생각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알고 싶지 않은 정보나 대답이 나올 수 있다. 문제의 답을 알기 싫은 심리.
  2. 독창적인 사고가 반드시 득이 되지는 않는다. 말썽꾼으로 비쳐지는 거 아냐.
  3. 행동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생산적이라고 여긴다.
  4. 생각은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다. 생각은 변화를 원하고, 변화는 때로 고통스럽다.
  5. 오락거리가 너무 많다. 즐길 일이 얼마든지 있는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나?
  6.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천재나 사상가들이나 생각하는 거다.

생각이 없으면 목표와, 계획도 없고, 당연히 실천할 것도, 반성할 일도 없다.

요즘 세상은 행동을 중요시 한다. 하지만 조직이나 개인나 긍정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지혜로운 질문으로 생각을 자극해야 한다.

동기부여가 불가능하니까 의욕도 없다.

아이들은 왜 질문을 하지 않게 됐을까? 왜 아이들은 질문 받기를 꺼려하는가? 왜 마음 열기를 망설이는 걸까?

  1. 문제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표현하기 어렵다
  2. 과거에 상처를 받았다.
  3. 진실을 말하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느낀다
  4.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 한다.
  5. 인정받지 못한다. 아무도 관심이 없거나 남 좋은 일만 시킨다.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열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1. 교감을 형성한다. 모든 관계를 떠나 한 자연인으로 대하고 그를 알기 위해 노력한다.
  2. 폭넓은 개방형 질문으로 시작하라. 자신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라.
  3. 어려운 질문은 나중에 한다. 사실과 감정 중에 사실부터 먼저 질문한다.
  4. 관심을 보여주는 신체언어를 보여준다.
  5. 그 사람의 관심사와 의견과 경력, 전문분야를 먼저 질문한다. 그러면 관심과 존중을 받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질문을 하면 어떤 힘이 생기는가?

질문의 일곱가지 힘

  1. 질문을 하면 답이 나온다. 질문받는 사람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2. 질문은 생각을 자극한다.
  3. 질문을 하면 정보를 얻는다.
  4. 질문을 하면 통제가 된다. 질문하는 사람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5. 질문은 마음을 열게 한다.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죽는다.
  6. 질문은 귀를 기울이게 한다.
  7. 질문에 답하면 스스로 설득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 말을 믿는다.

어떻게 아이들을 질문하도록 만들수 있나? 질문하는 아이로 키우려면 먼저 질문의 모범을 보여라.

  1. 진심으로 대답을 원하는 질문을 한다. 불성실한 질문은 금방 드러난다.
  2. 아이에게 귀를기울인다.
  3. 아이의 대답을 칭찬해준다.
  4. 아이의 질문하는 능력을 살려준다. 모범을 보이기 위해 되묻는다.
  5.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대답한다.
  6. 모든 질문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7. 아이가 왜 질문을 하는지 생각한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8. 다른 사람에게도 질문을 한다. 부부끼리, 친구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여준다.
  9. 동화를 읽어주면서 만약에~ 라는 질문을 계속 한다.
  10. 친구, 형제와 싸웠을 때 질문한다. 네가 그렇게 하면 동생이 어떻게 느낄까? 어떻게 하면 둘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동생은 어떻게 해주길 바랄까.
  11. 아이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12. 다그치지 말고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 선택의 여지를 남겨서 아이가 자기 결정에 자신감을 갖게 한다. 
  13. 문제점을 질문으로 바꾼다.

 

질문과 경청은 언제나 같이 다니는 쌍둥이.

그러나 사람들은 질문보다 경청을 더 못한다. 좋은 질문을 해놓고도 좋은 대답을 듣지 못한다.

잘 듣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인관계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듣는 기술이 부족하다. 그들이 상대방에 귀기울이지 않는 이유를 열거해본다.

  1. 상대방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무슨 말이 나올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아무런 보상이 없다는 것도 이유다. 정보를 얻거나 상대방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줄 수 있다는 것은 눈에 띄는 성과가 아니다.
  3. 귀를 기울이려면 노력이 요구된다. 특히 자기와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을 때 더욱 그렇다.
  4.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
  5. 집중하는 시간이 짧다. 생활에서 집중적인 듣기를 요구하는 것은 별로 없다.
  6. 시간이 없다.
  7.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에 급급하다.

어떻게 하면 잘 듣게 할 수 있나?

경청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우선 귀담아 듣지 않으면 화가 돌아온다는 점부터 생각해보자. 건성 들으면 중요한 정보를 놓치거나 잘못 듣게 된다. 그뿐아니라 사람까지 잃게 된다. 자기 자신이 하는 말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내면의 목소리는 경고성이 강하다. 그것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들으면 화를 당하게 된다.

경청의 가장 큰 혜택은 사람을 사귀기 위한 교감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기 원한다. 그래야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대문이다. 경청만큼 상아대방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면 몰랐던 문제점이나 기회에 눈을 뜨게 된다.

그렇다면 좀더 잘듣기 위한 요령을 생각해보자.

  1. 의도(감정)에 귀 기울인다.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네가지 도구(귀, 눈, 머리, 가슴)를 사용해서 행간의 의미까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2. 내용(사실)에 귀 기울인다.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자신이 이해한 의미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중간중간 요약하거나 의역을 해서 중요한 요지를 파악한다.
  3. 누구에게 귀 기울인 것인지 판단한다. 상대방이 경청할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판단한다.
  4. 경청 테스트를 해본다. (162~164쪽)

2004년 엄마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1. 자녀들에게 스스로 분명히 생각하도록 한다.
  2. 선택을 하고 문제 해결을 연습하게 한다.
  3. 적절한 선택을 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개발하도록 도와준다
  4. 주관을 갖도록 자극한다.
  5. 좀더 행복하고 성공한 어른이 되는데 필요한 자신감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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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음악의 세계

발표: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제가 총장으로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봉렬 교학처장님이 나눔문
화에서 발표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시기에 그냥 "예"라고 답했습니다만, 이렇게 연령층과 분
야가 다양한 분들 앞에 서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떨립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별
로 아는 것도 없고, 천지를 모르고 그냥 음악이 좋아 음악을 듣다 나이가 든 사람일 뿐입니
다. 하지만 제 경험담을 들려 드리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할 이야기가 많습
니다.

음악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제가 미국에 가서 음악인류학이라는 학과목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음악인류
학이라는 말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음악인류학이 무엇인가? 음악교육학, 음악역사학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음악인류학이라는 건 매우 새로운 분야였습니다. 음악학, 통합 음악
학, 분과 음악학, 체계적 음악학, 역사적 음악학 등 새로운 어휘들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
금은 이러한 어휘들이 한국에서 상식이 되어있지만 그 당시 저에게는 음악에 대한 학문에
이렇게 다양한 분야가 있는가 하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음악인류학' 한마디에 모든
것을 배운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음악인류학자는 음악과 인류학을 동시에 연구하는 학자를
말합니다. 그때 제가 수업을 들었던 음악인류학 교수님은 매우 명망이 높으신 분이었기 때
문에 그분의 말씀이라면 공자님 말씀이라 생각하고 들었습니다. 영어가 짧았기 때문에 제대
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못 알아 들으면 못 알아 듣는 대로
감동이고, 어쩌다 알아 들으면 놀라서 감동을 받았습니다.(웃음) 


그러다 하루는 교수가 "Is music natural or artificial?"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때는
음악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
니다. 그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음악은 너희들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 실제
로는 인간이 인위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라 합니다. 당시에는 끝까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가 없었습니다. 베토벤도 그렇고 슈베르트도 그렇고 그 얼마나 자연스러운 선율인데 이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니 그 말씀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국어도 배워서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업은 계속되었습니다. 교수님은 또 자연스러운 것이 인간의 경험과는 상
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다섯을 세는
방식이 국가마다 다르다는 예시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엄지손가락부터 다섯
을 세는 방법이 미국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모국어와 외국어가 다르고, 모국어적 능력과 외국어적 능력이 다르다는 말을 자주하
는 편입니다. 모국어와 외국어 모두 '배운 것'이지만 모국어는 저절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외국어는 인위적으로 배웠다고 생각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외국어는 배우고 나면
나중에도 공부하느라 힘들었던 과정이 생각나고, 열심히 공부했어도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
문에 그것은 '배웠다'는 인식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모국어는 언제 배웠는지 모르고, 저절로
배워졌으니 '안 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가치관이라든가 생각하는 방식이라든
가 혹은 습관이라든가 이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성적으로 타고 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
습니다만 제가 느끼기로 모국어가 자연스럽게 배워지듯이 모르는 사이에 학습되고 형성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러움은 것은 문화적으로 조건 지워진 것

'동의하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동의의 의미
이고 좌우로 흔드는 것은 부정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음악인류학 교수님 말씀으로는 어떤
부락에서는 좌우로 흔드는 것이 동의의 표현인 곳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동의의 표시
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하루는 인도사람의 집에 초대받았는데 된장과 비슷한 음식이 있었습니다. 혼자 상상으로
'아! 된장이라는 것이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온 것이구나. 지금 나는 그 된장의
원류를 맛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맛을 보고는 다 토해 버렸습니다. 혀도 물리적 혀
와 문화적 혀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는 똑같은 혀인데 우리나라 사람은 나중에 김치를 맛있
다고 느끼는 혀가 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김치를 매워서 못 먹는 혀가 되는 것입니다. 한
국인의 혀를 가진 저는 인도 사람들이 맛있다고 먹는 그 음식을 토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귀도 그렇고 혀도 그렇고, 원래 태어날 때는 인간의 조건을 똑같이 타고 났지만, 살면서 문
화의 영향을 받아 달라집니다.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은 같지만 어떤 밥을 먹고, 어떻게 먹느
냐는 나라와 문화에 따라 달라집니다. 며칠 후에 답례로 그 인도인을 초대해서 한국 음식을
대접했더니 그 인도인은 맛있게 먹더니 나중에는 화장실을 찾았습니다.(웃음) 저에겐 맛있
는 된장이 그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러움이란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문화에 따라 당신의 음악적 운명이 결정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 특정 시공간에서 존재하는 음악문화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어떤 음악문화 속에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음악적 운명이 정해지는 것입니
다. 음악문화권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집에 아이가 3명 있습니다. 미국 유학을 가면서 첫째 딸은 서울 장모님께, 둘째 아들
은 대구어머님께 맡겼고, 막내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그 음악인류학자의
말에 대해 동의해야할지 말아야 할 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모두 제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온 딸은 절 '아빠'라고 부르고, 대구에서 온 아들은 '아부
지'라고 부르고, 미국에서 태어난 막내는 'daddy'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말하
는 것은 특정문화권에서 태어나면 그 문화권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
니다. 저는 내가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떤 영향 아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 내가 속한 문화의 조건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빠졌습니다.

항아리 속의 금붕어

어느 날 막내가 졸라서 금붕어 4마리가 들어있는 항아리를 사주었습니다. 항아리에 갇혀
있는 금붕어를 보면서 가끔은 술을 한 잔씩 마시며 외국생활의 외로움을 위로하곤 했습니
다. 그러다 하루는 아이들이 먹이를 잘못 주어서 금붕어 한마리가 죽었는데, 야단을 쳐도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 세 마리가 연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교육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을 하고 있었는데 교육학에는 "telling is not teaching" 이라는 말이 있습니
다. 말하는 것이 곧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제가 그것을 가르치면서도 저 스스
로 아이들에게 telling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금붕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저는 마지막 남
은 한 마리는 살려주자는 심정으로 비닐봉지에 담아 호수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욕
심에는 놓아주면 살겠다 싶었지만 그놈은 호수 가장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습니다. 그
래서 왜 그럴까 보니 그 금붕어는 항아리 속에서 헤엄치는 속도와 똑같이 헤엄치고 있는 것
이었습니다. 같은 헤엄이지만 항아리 속에서와 호수 속에서의 헤엄이 달라 이 금붕어에게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유학중이던 1965년 당시 저는 음악평론가로서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왔는
데 이 경험을 통해 물고기와 비슷한 저를 발견했습니다. 항아리 속에서 폼 잡고 살던 사람
이 영어 문화권에서 꼼짝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 항아리에 갖힌 게 아니라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모국어로 한국어를 사용하며 살았으니 제가 모르는
항아리 속에서 그동안 살고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생각
하고 있는데 실은 모국어를 배우듯이 음악을 좋아할 수밖에 없도록 조건지어진 항아리가 나
에게 주어진 것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현재의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런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나 자신의 항아리가 뭔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서양음악역사를 공부하기 시
작했습니다.

Master pieces of music before 1750's 

우리나라의 음악의 큰 병폐가 '음악'하면 '기악성'을 생각합니다. 기악이 탄생하기 이전에도
음악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음악의 기술도 4000여종이 넘고, 음정관도 다르고, 음정수도 다
릅니다. 톤 스킬도 다양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음계, 단음계만 자연스럽게 여기고 다른 것
은 다 이상하게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다고 말하는 장음계, 단음계가 다른 문화에서는
부자연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제가 박사학위를 따고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할 때, 학생들에게 "Is music
natural?"라고 물었습니다. 미국인들도 음악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독어, 중국어, 일어, 영어 이렇게 5개국 언어로 적
고는 학생들에게 어느 것이 제일 자연스럽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I like music."이 가장
자연스럽고 다른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들을 가르치면서 어떤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는 사고가 형성되도록 만든 나의 개인적 역사와 집단적 역사를 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서양음악사를 강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양음악사에
관한 책 중에 《Master pieces of music before 1750's 》라는 책이 있습니다. 1750년
이전의 음악이라는 뜻인데요. 1750년에 바하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라는 음악적 항
아리 속에 사는 사람에게 바하는 음악의 아버지입니다. 이렇게 1750년을 기준으로 해서보
는 음악관이 아무런 논쟁 없이 상투적으로 받아들여진 사회에서는 그 이전의 음악은 음악이
아닌 것으로 경시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항아리 속에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150년간에는 "음악은 국경이 없다" "음악은 만국공통어다" 이런 식의 말이 허용되던 시
기였습니다. 베토벤,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슈만, 브람스 등 뛰어난 작곡가들이 탄생한 시
기입니다. 저 역시 이 음악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를 통해 '이것뿐만이 아
니다' 이러한 사고를 깨치게 되었습니다. 역사 공부를 하니 다른 시대에도 좋은 음악이 많
이 있었습니다. 제가 준비한 악보를 봐주십시오.

한국에게 서양음악사는 1750 - 1900년에 국한

먼저 제일 위에 있는 것이 <그레고리안 성가>입니다. 서양음악을 좋아하는 귀를 가진 이
라면 이 곡을 좋아합니다. 단선율인데 반주도 없고, 화성도 없고, 박자도 없고 단지 가사만
있습니다. 가사만 존재하지만 굴곡이 있기 때문에 그냥 가사만 읽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현재의 예술음악 입장에서는 매우 다른 음악입니다. 소프라노, 테너, 바리톤, 베이스 이것이
4성부 음악인데요. 원래는 4성부 음악이 없었고, 그 이전에 단성부, 2성부, 3성부 음악이
다 있었습니다.
다음 곡이이 2성부 음악인데 일종의 합창입니다. 단성부 음악을 듣다가 2성부 음악을 들으
면 오른쪽 음악을 들어야 할지 왼쪽 음악을 들어야 할지 헷갈리게 됩니다. 그런데 2가지 음
악이 같이 울리니까 그 음향효과가 예전에 비해 낫다고 느끼게 됩니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
람은 진보적인 사람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음악에는 항
상 진보와 보수가 있어 왔습니다. <그레고리안 성가> 같은 단성부 음악은 서기 600년에서
850년의 150년간의 음악입니다. 그런데 850년에 2성부 음악이 나타나니까 이것은 전혀 새
로운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소리는 아니어서 아주 거부할 수는 없으나 받아
들이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2성부 음악에 익숙해져 150년 정도 지나고
나니 사람들은 2성부 음악마저 지겨워졌습니다.
그 다음세대의 3성부 음악으로 가면 상승부는 전혀 새로운 멜로디지만 그 밑의 성부는 같
은 멜로디입니다. 그러나 음향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서양의 예술음악은 아는 것과 모르
는 것이 하나로 움직입니다. 완전히 모르는 게 나오면 사람들이 뭐가 뭔지 모르고 완전히
아는 게 나오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교묘하게 섞습니다. 그러나 그
섞는 타이밍, 언제 섞느냐에 따라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
다.
또 한 세월이 흐른 악보를 보면 상승부의 음악은 모르는 멜로디이지만 그 밑에 있는 멜로
디는 길이만 변했을 뿐 원래 알던 것이 숨어있습니다. 원래 알던 음악이 숨어서 존재하는
'은폐의 미학'이 담긴 것이지요. 이렇게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섞이며 음악은 변하
고 진보해왔습니다.
이 후 시대 1300년은, 처음으로 현대음악이 태어난 해라고 규정지어집니다. 때문에 어떤
이는 14C 음악을 4살 먹은 음악이라고 표현합니다. 1600년에는 오페라가 처음 나타났는데,
기악이라는 것은 아직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음악사를 공부하다보니 저는 '1750
년~1900년의 150년'이라는 항아리가 '한국에게 주어진 항아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국은 아직도 이 항아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항아리를 바꾸자
그러나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말이 영어에도,일본에도, 중국에도 있듯이 서양에만 음악
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에도 유구한 역사가 있었고 갖가지 좋은 음악이 있었습니
다. 다만 서양음악과는 다릅니다. 악보도 다르고 음 체계도 완전히 다른 음악이 수천 년을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저는 동양음악을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소위 말해 국
악을 공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인간의 의식구조 상으로 동서양의 음악
전체가 다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맘대로 먹어라"는 것의 진짜 의미는 전세계 음식
을 모두 가져다 놓고 골라 먹으라고 해야 제대로 된 것입니다. 지금의 음악적 현실은 호떡
집에 가서 맘대로 먹어라하는 짝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학문
중에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어차피 선택을 하게 되어 있다면 선택의 폭이 넓은 항아
리와 선택의 폭이 좁은 항아리는 다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좁은 항아리를 벗어나려면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한국예술종
합학교를 설립하고 '인정받는' 학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항아리
가 바뀌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이나 집단적 차원에서나 항아리를 개조해합니
다. 개조 자체가 자기이익을 위해서라면 속물근성입니다. 진짜 인간의 삶을 위해서 우리가
그 속에서 숨쉬고 헤엄칠 수 있는 항아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눔문화에서 제가 받은 느낌은 사람이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새로운 항아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럭저럭 그냥'은 안 됩니다. 이 자리에 참여한 젊
은 이들에게 특별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도 여러분의 경쟁자가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구에도 경주에도 부산에도 있지만 동경과
런던, 뉴욕에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사회도 모두 좋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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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야 <코엘료 열풍>의 이유를 알았다. '연금술사(Alchemist)'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 책이 만만찮다는 느낌이 손끝으로 전달됐다. 동화같은 책이다. 슬슬 읽으면 반나절만에 휙 던지고 소장함에 2백자 단평이나 꽉차게 쓰면 그것으로 마음 편한 책이다. 그런 책을 사흘을 붙들고 씨름을 했다. 마치 그안에 정말 납을 금으로 만드는 비법이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짜증나는 것이 작가가 만만해보일 때다. 한번 꼬릴 잡히면 그것으로 작가는 끝이다. 재기불능이요, 복권불가능이다. 최인호가 그랬고, 이인화, 공지영 등이 그러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본전생각때문에 슬렁슬렁 별 생각없이 읽는 습관이 들었다. 그후로 소설을 잘 읽지 않게 됐다.

코엘료에게 내내 끌려다녔다. 어처구니 없었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지난 몇년동안 나를 침잠케하고, 불면케 만들었던 질문들 때문이었다. 나는 내내 목동 산티아고였고, 처음엔 그가 끌고다니는 양이기도 했으며, 중간엔 크리스탈가게 사장님이었다가, 또 입장바꿔 파티마이기도 했으며, 내친김에 연금술사 노릇까지 했다. 삶의 군상을 이렇게 전형적으로 설정할 수도 있다니 놀랍다. 그들은 나에게 결코 쉽지않은 조언을 남겼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쉬임없이 던져지는 그 조언들은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균등한 질량을 갖고 있었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 뜻이 없는데 하늘이 도와줄 리 있나. 사주도 그렇고 산통을 흔드는 것, 카드점을 보는 것 모두 우주의 기운과 사람의 기운이 맞닿는다는 전제가 있다. 열심히 사는데도 안풀린다 싶으면 가만히 생각해본다. 내 마음 씀씀이가 잘못된 게 아닐까, 내가 열심히 사는 목적은 분명히 있는 것일까. 그것은 진정 내가 옳다 믿는 것일까. 내 소망은 우주가 도와줄만한 가치가 있는 보물일까.   

팝콘 장수도 어릴 때 떠돌아다니기를 소망했지. 하지만 그는 양치기보다는 팝콘 장수가 남보기 근사하다고 생각한거지. 양치기들은 별을 보며 자야 하지만 팝콘 장수는 자기 집 지붕 아래 잠들 수 있잖아. 결국, 자아의 신화보다는 남들이 팝콘 장수와 양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주요한 문제가 되어버린거지. <-- 팝콘 장수를 부러워할 것 없다. 그는 좌절하고 타협하고 끝내는 합리화해버린, 실패한 양치기일뿐. 한마디 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노심초사하지만 그들은 나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너는 누구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더냐?) 그야말로 저 혼자 지랄병을 하고 있는 것뿐. 설사 나에 대해 말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해도 관심둘 가치가 없다. 내가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하찮게 보는지 잘 알지 않느냐. 그런 분들의 관심은 백해무익할 뿐이니, 알려질까 걱정할 일이며, 그만 잊혀지는게 상책이다.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잊지 않는데 있도다. <-- 이 세상 아름다움을 모두 보기엔 이땅이 너무 좁고 거칠다. 행복이든 아름다움이든 희소성의 원칙은 어김없이 적용된다. 아름다운게 귀한 곳이니 그 기쁨도 상대적으로 클 것이고, 나름대로 심미안도 높아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언젠가 이 세상을 한바퀴 돌며 행복의 비밀을 찾을 때 노잣돈으로 쓸 기름두방울을 잊지 말란 말이렸다.

아무말도 하지 말아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 뿐, 사랑에 이유는 없어요. ...   내가 그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내가 꿈을 꾸었고, 어느 늙은 왕을 우연히 만났고, 크리스털을 팔았고, 사막을 건너왔고, 부족들이 전쟁을 선포했고, 연금술사를 찾아 그 우물가에 갔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모든 천지만물의 섭리가 나를 그대에게 이르도록 했기 때문이에요. <-- 프로포즈는 이렇게 하는 것이렸다. 저를 왜 사랑하나요? 당신의 눈이 어쩌고, 내 아이의 엄마가 어쩌고하는 건 말장난이다. 내가 태어나서 당신앞에 설 때까지 모든 사건은 당신을 만나게 하고 사랑하게 하기 위해 신이 예정했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된 내 인생이 너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내 마음이 내게 말했다. 내가 때때로 불평하는 건, 내가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야. 인간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지. 인간의 마음은 정작 가장 큰 꿈들이 이루어지는 걸 두려워해. 자기는 그걸 이룰 자격이 없거나 아니면 아예 이룰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영원히 사라져버린 사랑이나 잘 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던 순간들, 어쩌면 발견할 수도 있었는데 영원히 모래속에 묻혀버린 보물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두려워서 죽을 지경이야. 왜냐하면 실제로 그런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아주 고통받을 테니까.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 나쁜거라고 그대의 마음에게 일러주게. 어떠한 마음도 자신의 꿈을 찾아나설 때는 결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은, 꿈을 찾아가는 매 순간이란 신과 영겁의 세월을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라고 말일세.   

마음이 말했다.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보물이 있어. 그런데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그 보물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아. 사람들이 보물을 더이상 찾으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만 얘기하지. 그리고는 인생이 각자의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그들을 이끌어가도록 내버려두는거야. 불행히도 자기 앞에 그려진 자아의 신화와 행복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을 험난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은 험난한 것으로 변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들 마음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낮은 소리로 말하지. 아예 침묵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 얘기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기를 원해. 그건 우리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지. 왜냐하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마음이기 때문이야. 마음은 고통받는 걸 좋아하지 않네. <-- 내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아주 작고 미미한 소리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마음이 하는 소리에 고통받지 말자. 내꿈을 얘기하는 것 뿐인데. 더구나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무애(無碍)의 상태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상처들이 있었나. 지금 그 모든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상처는 다 아물어 마음이 모처럼 평정하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마음과의 관계를 복원해야겠다.  

사람들은 오아시스의 야자나무들이 지평선에 보일 때 목말라 죽는다.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되고 반드시 <가혹한시험>으로 끝을 맺는 것이네.  가장 어두운 시간은 바로 해뜨기 직전이지. <--어쩌면 눈썹위에 손으로 챙을 만들어 사막 저편을 응시하고 있는 나는 모래 언덕너머 오아시스를 코앞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갈증이 심한 걸 보면 말이다.  

늙고 교활한 마술쟁이같으니.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었잖아요? 미리 알려줄 수도 있지 않았나요?...아닐세. 만일 내가 미리 일러주었더라면, 그대는 정녕 피라미드를 보지 못했으리니. 어땠나? 아름답지 않던가? <-- 인생이란 현재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보물을 빨리 발견했다고 해서 그만큼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를 그 여정으로 알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다. 책 겉장에 그림을 본다. 둥근 보름달빛을 받으며 저 우주와 더불어 멋진 구상을 보여주는 피라미드. 새벽녘에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행복했으리. 생전처음 나도 사막에 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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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친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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