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는 광화문 거리는 물빛으로 몽롱하다. 노란색 아크등은 가로수 이파리들을 하나씩 비추고 하나씩 반짝이게 한다. 포도위에 거울처럼 깔린 수면에는 휘황한 조명과 자동차들의 불빛으로 눈부시다. 사람들이 어지러이 그 위를 지나친다. 내 초라한 우산을 무심하게 툭툭치면서 이런 것도 인연이라 생각하렴 무얼 하염없이 보고 있는거야 .. 그렇게 예의없이 제 갈길들을 간다.
버스를 또 잘못 탔다. 운전도 안하면서 버스나 지하철 타는 건 서투르기 짝이 없다. 생리적으로 이동을 거부하는 증거다. 십년전부터 나는 BMW. Bus Metro Walking! 그러나 입때까지 제 번호 찾아서 제대로 탄 적 드물고 제 자리에 어쩌다 잘 내리면 그렇게 신통할 수 없다. 광화문 가는 버스가 광화문에 도착하면 기쁘다. S형도 아니면서 그 버스가 세종문화회관에 서면 여기가 광화문인가 한참 어리둥절해 한다. 아닌가보다 하고 내처 가면 남대문까지 가고, 여긴가 싶어 내리면 내가 모르는 광화문이 또 있다. 이런 삶에는 적격이 아닌게 틀림없다.
대학다닐 때 소주 마시고 지하철 2호선 플랫폼에 서면 신촌방향과 잠실방향이 양 옆으로 지나간다. 십중 팔구 나는 집과는 정반대인 신촌방향의 전철을 타게 되고 아뿔싸 또 잘못탔네 하고 알아채는 건 전철이 지상으로 빠져나오는 신대방역에 이르러서였다. 지하도를 건너 맞은 편 플랫폼으로 가면서 나는 번번히 실실거리며 웃었다. 나의 방향감각 부실은 이 나이에 삶의 방향감각 상실로 이어지고 말았다.
분당까지 한시간 반이 걸렸다. 오랜만에 입은 양복이 땀으로 축축하다. 벗기도 짜증스럽고 안벗자니 울렁거린다. 차안은 비 오는 날 특유의 음습한 공기와 멀미나는 소음들로 불쾌하다. 옆자리의 아가씨는 내게 종아리를 척 붙이고 깊이 잠들었다. 곤하게 벌어진 입과 코끝에 맺힌 송글땀이 곁눈에 잡혔다. 인생에 유치란 없다.
제대로 탔으면 한시간이면 족했을 텐데. 나는 버스에서 책을 읽지 못한다. 한페이지를 못넘기고 어지럼과 울렁증이 치솟는다. 딱이 눈 둘 곳이 없어 창 밖을 내다본다. 비 안개 사이로 사람들이 드문드문 서있다. 궁금하다. 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걸까. 사춘기 소녀처럼, 첫 휴가나온 신병처럼 나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들을 주시한다. 바빠 보이지만 딱이 그들을 기다릴 사람은 없으리라. 고단한 표정, 무료한 눈길, 의미없는 걸음들. 뒷 모습은 거짓말을 안한다던가. 그들은 지금 귀소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나는 저기 우산없이 비를 맞으며 호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넣은 청년을 아까부터 보고있다. 그도 나처럼 외로운 것일까? 친구들과 소주잔 걸칠 땐 제법 헛웃음도 떠뜨릴게다. 하지만 그 역시 돌아서면 차가운 어깨를 움츠리고 말것을.
버스에서 내려 아무도 없는 공원을 걷는다. 어제 이맘땐 고운 먼지만 풀썩이던 길이 재빨리 물기를 먹어 딱딱해졌다. 가끔 우산을 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땅위로 화살처럼 꽂히는 직선들. 아주 가끔 이 작은 눈 안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있다. 대단한 확률에 성공한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다. 갑자기 내가 저 직선들과 함께 검은 하늘로 말려 올라가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한다. 저들은 내게로 떨어지고 나는 저들을 올려보는데 그 정반대의 물리적 현상을 짐짓 비웃으며 나는 우주로 날아간다. 어지럽다.
어제 뒷산에 올라가다가 문득 친구 생각이 났다. 산에 함께 오르던 아들녀석이 아비에게 물었다. 아빠 저 나무 이름이 뭐야? 잘 모르겠는데. 그럼 저 꽃은 뭐야? 글쎄. 아빤 공부 잘했다면서 모르는게 그렇게 많어? 자존심 상한 친구는 그날 부터 식물도감 펴놓고 우리나라 야산에 있는 풀나무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이름 뿐 아니라 무슨 과의 식물이며, 꽃은 언제 어떻게 피고, 뿌리와 잎, 열매는 어떤 병에 좋은지까지 몽땅. 어느새 그는 뒷산에서 자라는 모든 나무와 풀을 정복했다. 그랬더니 더이상 나무가 말을 걸지 않더란다. 꽃도 고개를 숙이고 웃지 않는다고 했다. 알만큼만 알면 그것으로 족한 줄 왜 몰랐던고. 만물의 영장임을 고작 그렇게 확인하려 했던가. 바보같은 사람 숙맥같은 짓을 하였구먼. 농 삼아 한마디 던졌다. 그래서 이공계가 미달인거야. 알어.
저녁 일곱시밖에 안됐는데 산중엔 어둠이 짙다. 달도 뜨기 전이라 한밤중보다 더 어둡다. 가느다랗게 산길만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더듬듯이 내려오다 얼핏 하늘을 보았더니 별이었다. 잉크빛 밤하늘에 단 한개의 별이 참 밝게도 빛난다. 하늘 보며 산 적 없어 그 별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어떠랴. 별은 그저 별일 뿐인 것을. 몇 백 광년 떨어진 어느 별자리 어느 궤도를 돌고 있으며, 위성은 몇개고 사람이 살 확률은 몇 백만분의 1퍼센트인지 알고 싶지 않다. 아름다운 나의 옛일이 떠오르면 그것으로 족하다. 별은 산을 내려와 우리 집까지 쫓아왔다. 베란다 밖 먼발치에서 나를 바라보던 별이 한 눈 파는 사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오늘도 그별을 볼까 싶더니 이 비가 내리고야 말았다. 아름다운 별도, 가을비도, 고단한 삶도 이 해설픈 노래처럼 통속할 뿐이다.
오늘도 별이 진다네 아름다운 나의 별 하나 / 별이 지면 하늘도 슬퍼 이렇게 비만 내리는 거야
나의 가슴속에 젖어오는 그대 그리움만이 / 이밤도 저 비되어 나를 또 울리고
아름다웠던 우리 옛일을 생각해 보면 / 나의 애타는 사랑 돌아올 것 같은데
나의 꿈은 사라져가고 슬픔만이 깊어가는데 / 나의 별은 사라지고 어둠만이 짙어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