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로 온 책 보퉁이를 뜯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절세미인의 옷고름을 푸는 즐거움이 그에 비할까. 성정이 포악하고 손끝이 거칠어 처음엔 아무거나 들고 있던 것으로 무지막지하게 열어 젖히곤 했다. 그러다가 그 재미를 알고 부터 가급적 그 시간을 느긋하게 즐기려고 애를 쓴다. 개봉행위의 절정이라면 상자의 양 날개를 펼치고 널찍한 가슴을 열고 난 직후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투탕카멘의 황금관을 열듯, 그 안에 정말 대단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흥분, 떨림.
게다가 나는 어제가 무슨 요일인지도 가물가물한 한자릿수 기억력의 소유자. 닷새전 쯤 주문한 책이 무엇인지 단 한권도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개봉의 신비감은 더욱 짜릿하고 감미로울 밖에. 음. 그날 난 마치 리마리오처럼 두눈을 지긋이 감고 입가엔 니끼한 미소를 머금으며 첫 대면의 환희를 만끽하려는데....
앗 이게 모야? 상자에 담긴 맨 위의 책은 촌스런 무지개색이 동심원을 그리며 파스텔톤으로 빛났다. 반투명 트레이싱 페이퍼로 만든 띠지(이걸 뭐라고 하던데. 여기선 띠지라는 우스꽝스런 이름이 어울린다)에는 반갑지 않은 이름의 만화가가 썼다는 <남자들의 속마음 어쩌구>라고 제목이 붙어있다. 내가 미쳤나? 이런 책이 왜 들어가 있는 거야? 혹시 딴데 갈게 여기 왔나? 상자 겉면을 뒤적거려 주소를 확인했다. 주손 맞는데. 쩝.
도날드닭으로 이름을 냈다가 요즘은 노빈손 시리즈로 지가를 올린다는 이우일군을 처음 만난 때는 96년 경이었다. 그때까지 신문에 나오는 만화는 고바우, 왈순아지매 같은 4단만화 아니면 2면에 한컷으로 나오는 만평이 고작이었다. 물론 스포츠신문은 논외로 치고. 전혀 새로운 신문용 만화를 생각했던 나는 홍대 출신의 아트디렉터에게 만화동아리 애들을 데려와 보라 했다. 야구모자를 쓴 떠꺼머리 총각들 몇이 왔다. 일주일 시간을 줄테니 신문에 집어넣을 만화를 그려오라고 했다. 컨셉은 섹시하게 젊은 애들 취향으로. 열흘 쯤 지나 눈이 쾡해서 나타난 그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못그렸노라 했다. 그중 한명은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 탈모증에 걸렸다고 울상을 지었다. 감당하기 어려웠을게다. 만화책도 아니고 국내 최대라는 일간지에 그것도 컬러면 반을 채울 사람이 몇이나 되랴.
한참 뒤에 나타난게 우일군이다. 배포가 있는 친구였다. 키가 멀쑥하고 눈이 찢어진게 전형적인 몽골계인데 웬만해선 주눅이 안들고 농담으로 맞장구를 치길래 이 놈 봐라 싶었다. 사실 그 친구를 알아본 양반은 인보길 사장이었다. 포트폴리오랍시고 남자 여자 성기만 잔뜩 그려놓은 포스터를 들고 사장실에 들어갔더니 인사장님 왈, <재밌다 야.> 그래서 우일의 신문만화가 시작됐다.
밖으로 나갈 얘기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는 신문에 만화가 게재되고나서야 지금의 부인하고 결혼승락을 득할 수 있었다. 맨 그런 그림만 찍찍 그려대는 정신나간 만화쟁이한테 귀한 딸을 줄 부모가 어딨을까. 그러나 그 신문에 만화를 올린다면 얘기는 완전히 틀려진다. 결국 장가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된 나는 <아무거나 소원있으면 하나만 말씀해보시라>는 우일군의 성화에 못이겨 당시 연령 제한으로 엄두도 못냈던 홍대앞 락카페를 그날 밤부터 새벽까지 다섯 군데를 도는 접대를 받았다.
나와는 면식이 없었던 광수는 한참 후 그 신문의 본지에 실려 이른바 광수생각으로 대박을 쳤고, 우일은 동아로 건너 가서 <도날드닭>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걸고 전성기의 문을 열었다. 그땐 수많은 아이디어중의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신문만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일이 된 셈이다. 그래서 만화를 유독 싫어하는 내가 그 두 사람의 만화 만큼은 애정어린 눈으로 쭉 보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중 한사람이 오랜만에 낸 책을 그토록 흰눈으로 갈겨보며 타박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우선 광수의 무사안일, 나아가 쟁이정신의 포기를 마뜩찮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책의 맨 뒤를 보면 이름 두자만 들으면 알만한 연예인과 그 언저리의 사람들로 장장 두페이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오랜만에 내는 책이라면 그동안 신세진 사람들에 대한 인사는 용납할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광수는 도를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돈주고 이 책을 산 사람은 아예 안중에 없다는 태도다. 원래 그런 인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 책이 나오는데 수고한 사람들의 노고를 함께 기억하자고 쓰는 것이다. 건방진 인사같으니라구. 도대체 내가 이문세와 황경신과 전화번호까지 적힌 허섭한 성형외과의사의 이름을 왜 기억해야 한단 말인가.
책 내용이 그나마 좋다면 눈을 질끈 감아줄 용의가 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기대조차 안했다. 스스로 유명인사 연하며 들떠서 다니는데 단 한치의 발전이 있을 턱이 있겠나. 결국 화장실에서 휘리릭 몇번 뒤적거리고 책꽂이 저쪽에 꽂아버렸다. 여자들이 궁금해하는 남자들의 속마음이라. 이 친구는 어쩌다 이런 내용의 책을 낼 생각이었을까. 한참 여기저기다 제 마누라 새끼 얘길 장님 산대 놓듯 주절주절 늘어놓더니 들리는 말에 이혼하고 딴 여자와 산다던가. 그래서 그 노하우를 다른 여자들에게 남김없이 전해주려는 선의일까?
몇가지 얘기는 겉으론 그럴 듯해서 골빈 계집애 몇몇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지도 모른다. 허나 남자들의 그따위 속마음을 안다는 것이 여자들에게 도움이 될 리가 만무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훨씬 낫다. 광수는 자기 딸을 생각해서 솔직하게 썼다지만 그도 제 딸에게는 정작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남녀관계를 그런 날라리 양아치 시각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술한잔 찌끄리며 저희들끼리 킬킬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책으로 펴내는 건 잘못이다. 그 유명한 사람들과 매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얘기가 무엇이길래 고작 이런 입냄새나는 쪼가리 글밖에 못쓰는가.
차라리 우일군처럼 문 쳐닫고 애들 참고서 비슷한 만화책이나마 부지런히 그려 돈 잔뜩 버는 쪽이 훨씬 영리하고 사회적으로 유익하다. 서점에서 들쳐보니 내용도 그만하면 좋고 만화도 받은 돈 만큼은 성의있게 그려대는 것 같다. 자기 그릇을 보이기 창피하면 겸손해야 한다. 소설이나 시도 아니고 삼척동자들도 다 아는 만화를 그리면서 그리 눈가림하면 못쓴다. 분하면 일년동안 배낭여행 돌면서 고생 바가지로 하고 돌아와 컨셉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른 그런 만화를 그리던가. 고작 연예인들과 시시덕대며 사람들 눈길이나 즐기는 3류 환쟁이로는 얼마 못버틴다네.
뜨는 것도 어렵지만 떠있는게 더 힘들다. 패러다임을 만든 사람중에서 정말 성공한 자는 다음 패러다임까지 만드는 사람이다. 자기 패러다임에 안주하는 자의 무덤은 초라할 수 밖에 없다. 새벽에 느닷없이 험담하고 자려니까 무척 민망하다. 이래서 백수는 허구헌날 속상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