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남자가 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오랜만에 쓰는 이 글의 서두에서 어줍잖은 표절의 냄새를 맡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 드디어 평생에 한번 맞고자 염원했던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를 눈앞에 내려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아무도 없다. 건너편 빵집 앞에 좀전까지 오도방정 떨던 가짜 트리도 집안으로 들여놓았는지 흔적조차없다.

실로 얼마만인가. 이토록 무심할만큼 고요하고, 게다가 온전히 나홀로 거룩하게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마흔 네해만에 처음이다. 돌이켜보면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제 애비 생일날도 기억 못하는 천하의 망나니 여드름딱지들이 명동으로, 종로로 휩쓸려 다니며 엉터리 캐롤을 불러쌓는 것도 남자의 눈에는 여간 거슬리는게 아니었다. 그보다 나이 좀 먹었다는 놈들은 어떻게 하면 계집애들을 집에 안보낼까 궁리하고 전파하는데 족히 한달을 탕진했으며, 급기야 그날에 이르러는 죄다 똥마려운 강아지들처럼 바지춤을 움켜쥐고 새벽 이슥토록 떼지어 종종걸음을 치곤 했다.  

나 클 땐 이랬다 했더니 젊은 선수들 말이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단다. 다만 예전엔 룰도 없고 노하우, 노웨어, 노훔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들이댔다면,  요새는 제법 잘난 척/ 까진 척/ 쿨한 척 하는 꼬마들이 있는 정도란다. 어디가면 물이 좋고 누구한테 얘기하면 히트율이 높으며 어떻게 다뤄야 X팔리지 않게 윈윈하는지 레벨별로 공유가 된다는 뜻이다.

어쨌든 이런 하루살이들이 올해는 크게 줄었다 하고, 내가 눈이 있어 어제 오늘의 거리를 둘러봐도 도통 성탄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데 다들 역부족인 듯하니, 꼴보기 싫은 것들을 안보게 된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실로 감개무량할 뿐이다. 자고로 성탄전야는 이래 조용하고 성스럽게 가족끼리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어머니는 일년내내 십원짜리 삼립 크림빵이나 샤니 카스텔라 이상을 사주신 적이 없다. 애당초 장식적인 사치엔 관심이 없는 분이다. 마룻바닥은 내려다 보고 눈꼽도 뗄만큼 반들반들 윤을 내시는 양반이지만 쓸데없는 호사는 용납치 않는 청교도적 세계관의 소유자이다.  더구나 기독교에 대해선 <행실 못된 계집아이들이 연애질하러 가는 곳이 예배당>이라는 깜짝 놀랄만한 종교관을 오랫동안 견지해오신 분이다. 그런 어머니가 일년에 딱 한번 케잌이라는 묘한 물건을 사는 날이 바로 성탄전야였다.

누르끼한 버터 덩어리가 두껍게도 발라져있는 기성품 케익에 규칙도 없이 촛불을 있는대로 꽂아놓고 전깃불을 끄면 고단하고 궁핍했던 우리의 일상도 함께 사라졌다. 그 어느때보다 엄격한 기다림속에서 아버지와 나, 남동생, 여동생의 순서대로 한조각의 빵이 전달되면 우리는 덩어리의 크기를 곁눈질하다 그 위에 고명으로 꽂힌 장미꽃크림과 이파리 설탕조각의 유무에 희비가 엇갈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처럼의 노블한 분위기를 깨는 어떤 행위도 용서치 않았다. 새끼들은 돌아가며 캐롤을 불러야 했고, 저마다 인민군 박수를 치면서 분위기를 고양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 코너가 끝나면 다같이 TV시청을 해야 했다. KBS에선 흥청망청인 시내를 흑백화면이 터지게 생중계하고, MBC에선 어김없이 종교영화를 상영했다. 위풍이 말도 못하게 심한 방에서 식구들은 흥부네 집처럼 큰 이불을 뒤집어쓰고 성탄의 거리풍경을 신기한 듯 또랑또랑 바라보곤 했다. 그때 아버지가 쯧쯧 혀를 차며 하신 말씀.  저 자식들은 제 애비에미 생일도 모르는 놈들이 예수가 제 부몬가 왜 저 지랄들을 하고 있는겨. 도대체 공자와 부처를 반만년 넘게 모신 백성들이 워쩨 저러는지 알다가도 모르겄어~. 속으로 맞장구를 치면서 나는 궁금했다. 그럼 아까 혀를 깨물어가며 먹은 케익은 뭐하자는 음석인가? 그래도 우리는 성탄이 이러면 못쓴다고 생각했다. 그후로도 쭈욱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고나면 부모님은 옆동네에 모여사는 회사 분들과 만나기 위해 나란히 집을 나선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좀 이상하지만 여기서 회사란 경찰서, 회사분들은 당연히 경찰 아저씨들, 만나서는 속칭 도리짓고 땡 또는 섯다라 불리우는 도박놀이를 하셨다. 난 그게 나쁜 짓이라고 생각 안했다. 물론 지금도 그닥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건강에 나쁜 정도. 그땐 올 성탄절에 끗발이 어느 분에게 붙을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속기화투의 달인인 아버지실까? 철저히 운에 모든 걸 맡기시는 어머니의 지구전이 빛을 발할 것인가.

그러다가 강도도 잡았다. 어른이 집을 비운 틈을 타 윗동네 도둑이 강도로 변해 들어온 것이다. 맏이인 남자가 초등학교 5학년,  끄트머리 여동생이 1학년. 신나게 TV를 보고 있던 우리는 부엌쪽에서 쿵하는 소리가 나자 일단 부모님이 가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끗발을 방해하는 새끼들의 귀찮은 제보를 건성으로 들으시며 그 집 꼬마에게 수화기를 대신 들고 있으라 하시고는 힘차게 갑오를 던지며 환호를 터뜨리셨다. 

일단 통신축선 상에 위치한 우리 세 남매는 다소 안심하며 짧은 막대기를 호신용으로 움켜쥐고 부엌쪽으로 갔다. 벽에 붙은 냉장고를 툭툭 치며 <나와, 나와> 호기있게 외쳤는데. 어둠속에서 집채만한 덩어리가 걸어 나오며 <이 쉐끼들, 들어가. 안들어가?>하는게  아닌가. 게다가 손에는 반짝거리는 짧은 칼이 들려져 있었다. 기겁을 한 우리는 엉덩이를 발로 채이며 안방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갔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강도는 천천히 장농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역사에 길이남을 멋진 기지를 발휘했으니, 발길에 걷어채인 소년이 아직도 교신상태에 있는 전화기로 넘어지며 <살려달라>고 연호했던 것. 건성 수화기를 들고 있던 그 집딸의 귀에도 단말마의 비명소리는 들렸나보다. <엄마. 이상해. 오빠가 살려달래.>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화투판은 엎어지고 2킬로 미터에 달하는 성탄절 축하 단축마라톤대회가 즉석에서 개최돼 불과 몇분만에 집 주위는 민완형사 겸 심심풀이 도박사들에게 완전히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어허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불속에서 빠꼼히 내다보니 강도 아저씨 너무 느긋한거라. 여차하면 장농의 이불까지 싸갈 요량이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월담을 하고 현관문앞까지 진출한 기동타격대가 간단없이 문을 두들겨 대자 그때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강도는 허둥지둥하면서도 그 와중에 방바닥에 흘린 값어치 나가는 것들을 되는대로 호주머니에 쑤셔넣더니 내게 물었다. <야, 어디로 나가는거야> 이런 젠장. 여기가 무슨 서울 한복판이라서 사대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문열고 나가면 된다고 했더니 이 아귀힘좋은 친구가 문고리를 그만 쑥 뽑아버린게 아닌가. 둥그런 손잡이를 들고 망연자실해 있는 강도로부터 손잡이를 빼앗아 문 구멍에 꽂고 엽렵하게 돌리니 방문이 쏙 열렸다. 평소 소년에게 손재주가 발재주라며 혀를 끌끌 차시던 아버지에게 다신 그런 말씀 마시라고 할만한 묘기였다. 여차하면 문을 부수고 들어올 태세인 타격대를 피해 부얶 들어온 문으로 나간 강도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부모님과 감격의 해후를 맞게 된 우리 남매는 조별로 나뉘어 동네 어귀에 배치됐고 온동네를 이잡듯 뒤지는 색출작전이 전개됐다. 그때만해도 인심이 좋았던 터라 동네 사람들이 몽땅 쏟아져나와 한편으론 경찰을 안내해 집을 둘러보고, 다른 한편으론 오늘 성탄 전야의 대 활극을 저마다 밸류 애디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결국 불운한 강도는 잡혔고 나는 겨울방학 중간중간에 있었던 소집일날,  전교생들 앞에서 영등포경찰서장이 수여하는 무슨 상을 타게 됐다. 물론 어머니는 따로 우리를 불러 <이번 쾌거를 과신한 나머지 용감한 행동을 아무때나 저질러선 결코 제 명에 못죽는다>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다.  

30여년 세월의 강을 훌쩍 뛰어넘어 남자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느닷없는 옛 생각들을 하나씩 떠올리다 희미하게 웃는다. 버석대는 얼굴의 촉감이 심난하다. 거리도 조용하고 집도 조용하다. 기름덩어리 케익도 없고, 어둠속에 동동 떠있던 노란 촛불도 없다. 아이들의 기다림도 없고, 흔해 터진 성탄특집방송도 없다. 아버지 어머니는 더이상 화투를 치러 나가지 않으신다. 강도가 들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더 이상 여드름쟁이도 아니고 압구정동 선수로도 불명예 퇴직한지 오래다. 어떤 계집애도 그때처럼 예뻐보이지 않는다. 성탄전야도 예외는 아니다.  

어엇 추워... 진저리를 치며 추리닝 지퍼를 턱밑까지 올려붙인 남자는 양손을 가랑이에 끼우고 싸삭싸삭 비벼대다가.... 크리스마스 더럽게 재미없네... 에이.XX.. .. 그러고 방으로 종종걸음친다. 하여튼 내년에 두고 보라며 남자는 절치부심의 흔적을 알라딘에 남겨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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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5 0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2-2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절치부심의 흔적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04-12-25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재밌네요. 소설 같아요.^^ 읽다보니 케잌이 먹고 싶어졌다는...^^

2004-12-26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