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내공이 아니더냐. 몇번 속다짐하고 또 다그쳐도 모르겠느냐. 그렇습니다. 삶은 곧 내공이더이다. 공부하는 만큼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설마 다시는 잊지 않겠지. 예... 아 그러나...그러나 ....쥐새끼처럼 통안에서 좌우로 왔다갔다 대가리 내밀고 좁쌀같은 눈깔을 굴리는 소생의 가볍고 천한 마음을....이놈아 그러니까 내공이라 하지 않느냐. 딱!

주장자가 내 정수리를 강타한다. 맨머리통에 일타를 격하시니 진땀이 밴다. 혼곤하다. 빨아 널은 솜이불처럼 땅바닥을 향해 주르륵 흘러내린다. 누더기같은 마음과 두억시니같은 몸피가 흉하다. 어쩌자고 꿈마저 이모양이다. 아침 일찍 산을 타기 시작했다. 날래진 걸음으로 산입구까지 단숨에 도착한다. 머릿속에는 온통 화두 뿐이다. 굵은 땀이 눈에 흘러드는 바람에 잠깐 멈춘다. 아무 생각도 없이 벌써 중턱이다.  

하늘이 푸르다. 시인의 말대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한다.  얼마전까지는 어느 누구를 떠올려도 노해지는 마음 때문에 힘이 들었다. 지금은 푸른 날에도 그리워할 누군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멍할 뿐 그리움이 무엇인지조차 아득하다. 보고싶어 생각나는 것이 그리움이던가.

서울가는 길에 보니 온통 논이 노랗다. 벌써 그렇게 됐나? 가을 걷이가 끝나면 저 땅엔 온통 하우스가 가득 세워질 것이다. 겨울에 땅을 놀리는 건 옛날 얘기다. 혀빠지게 돌려댄다. 애낳다 지친 늙은 여인의 뱃가죽처럼 푸슬푸슬 메말라간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 애정을 갖게 됐다. 나무가 그렇고 땅이 그렇다. 한평생 제자리를 지키는 나무가 답답하고 불쌍해보였다. 그러나 워낙 아무생각 없이 파제키고 부산을 떠는 세상이 되고 보니 날때부터 마를 때까지 언덕위에 올곧이 선 나무를 보면 복많은 노인네를 뵙는 듯 마음이 편하다.  

못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지만 과연 무에가 못났을까? 잘 난 소나무는 일찌감치 사람 손을 타, 잘리고 켜져서 어느 큰 도둑의 육간 대청마루를 받치고 있거나 소슬대문 노릇을 하고 있을텐데 그건 뭐 그리 잘난 노릇인가. 두툼한 옹이와 비틀린 가지가 대목장의 눈에는 쓰레기로 보이겠으나 시인이나 환쟁이의 눈에는 또 다른 법이다.  평생 어버이의 산소를 품안에 넣고 있다가, 한식이며 추석에  자손들이 저만치 아래서 올라오는 걸 보면 좋아라 가지를 끄덕이며 노인네들을 깨우는 못난 소나무가 나는 훨씬 좋다.

몇번째 생일이던가. 어머니가 조그만 케익이라도 하나 사자는 것을 부득부득 잡아끌었다. 어머니가 그럼 촛불켜놓고 노래 부르셔. 안그럴거면 관두고. 그래도 어머니는 꼭 노래할 건 없잔여 하며, 아무도 챙기지 않는 늙은 아들의 생일이 자기 몫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고집을 피운다. 어제 아침에 책상에 웬 봉투가 하나 있길래 들여다봤더니 빳빳한 만원짜리 지폐가 들어있었다. 어머니가 생일 선물을 고심하시다가 알아서 사라고 그리 놓아두신 모양이다. 

옛날에 어머니 생일이라고 삼남매가 돈을 모아 싸구려 브롯치도 사고, 손수건도 사고, 스타킹도 사서, 예쁘게 싼답시고 포장지를 자글자글 초주머니로 만들어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내밀면, 어머니는 흘끗 보신 후 어디서 샀냐 얼마주고 샀느냐를 꼬치꼬치 물으신 후 얼른 가서 돈으로 바꿔오라고 하셨다. 그 후로 20년동안 어머니에게 선물은 없었다. 어머니는 보복이 두려웠던 것일까? 아예 돈으로 시작하셨으니 당장 가서 바꿔오라 할 게 없다. 역시 내공이다. 

내공이 딸리는 나는 어머니의 생각깊이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내공을 닦는 길도 내가 아는 것만으론 어림없는게 아닐까. 하루저녁에도 대여섯권의 책을 집적거리다 바꿔치고, 삼십분만 들여다본다 싶으면 어느새 잡념으로 머리에 안개가 잔뜩 끼는 이 따위 서푼도 안되는 내공으로 무엇을 할까보냐.  정수일선생의 서간집 <소 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를 펴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잡아묶는다.  

설산 끝에 올라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니 무엇이 보이더냐. 사람들이 개미처럼 바글대는게 보입니다. 이 놈아 도대체 몇대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는고. 모진 인연 질기고 질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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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10-10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면 허접하지 않은 정말 정갈한 산문을 대하는 것 같아 한숨이 저절로 나옵니다. 뭔가 말을 걸고 싶은데 대답이 없으시군요. 그래서 이렇게 댓글을 남기는 것 조차 님에게 실례가 될 것만 같아 조심스러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