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달을 놀았더니 사람이 아홉번은 바뀌는 것 같다. 오늘같은 내가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세상에 대한 환멸과 내 존재의 부조리를 잊기위해 참 희한한 짓거리를 많이도 했다. 얼마전부터 얼굴에 화장을 해보고 있다. 스킨과 에센스와 로션, 영양크림, 아이크림 등속을 순서대로 얇게 펴바르고 살살 돌려쌓고, 톡톡 도드려 댄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클렌징하고 나갈때는 자외선 방지크림도 발라준다. 일주일에 두번 정도 팩을 하고 여기저기 화장품들을 끄집어내서 쌓아둔다.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 동갑인데 너보다 다섯살쯤 나이들어보이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 "솔직히 눈 아래로 보게되지. 거칠게 살아온 모양인데 무슨 고생을 했길래 얼굴이 그래. 자기관리 못한다는 생각도 들고, 먹고는 사는가 걱정도 하게되지. 근데 왜?" " 너 많이 늙었구나." 친구는 나를 한방에 눕혔다. 누워서 생각했다. 한때는 나도 주름살 하나 없이 땐땐한 얼굴을 가졌었는데. 다들 나보고 동안이라고 했는데. 그래, 살만 빼면 뭐하냐. 얼굴이 쭈그렁 방탱인데.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보고 소스라쳤다. 웬 중노인네가 놀란 눈으로 서있었다. 얼굴엔 눈이고 입주위고 이마곳곳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그 날부터 화장품을 쳐대기 시작했다. 나혼자 하기가 심심해서 어머니를 앉혀놓고 똑같이 발라드렸다. 어머니 얼굴에 화장을 하다가 안 사실인데, 주름살이 보통 깊게 팬게 아니다. 마치 흉터처럼 깊은 주름들이 눈가에 미간에 가득하다. 화장솜에 스킨을 듬뿍 묻혀 주름살을 어루만진다. 나때문에 새긴 상처들을 하나씩 헤아려본다. 며칠 계속해 화장을 해드렸더니 주름살이 놀랄만치 없어진게 아닌가. 대단한 화장빨이라고 놀렸다. 칠십평생에 이런 호강도 처음이라고 하셨다. 어제는 어머니가 어디선가 찾아낸 알로에 팩을 서로의 얼굴에 처덕처덕 바르고 모자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마흔중반의 아들과 칠순 노모가 그러고 있는 모습도 쉽게 보는 구경거린 아닐듯.
어머니에게 말했다. 큰 아들이 큰 딸같지 않수? 세상에 저 위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거만하고 시건방떨던 아들이 이렇게 곰살맞게 될지 뉘 알았겠수. 그나저나 내가 불효막심한 놈이오.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알긴 제대로 아는구먼.
몸살같은 가을이다. 살이 안 아픈데 없고 등줄기에선 얼음이 줄줄 쏟아진다. 헌데 이마는 미지근한게 말짱하다. 하지만 눈앞이 몽롱하고 촛점이 안잡힌다. 입맛도 없다. 옆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 모양인데 먼산 아지랑이같이 귓전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남자라서 그런가. 나이들고 힘빠져서 더 그런가. 가을을 이렇게 타보긴 또 처음이다. 징그럽게 덥던 여름엔 웃통벗고 하루에 몇권씩 책을 떼곤했다. 집중력 테스트라도 받는 듯 눈에 불을 켰다. 살이 좀 빠진 탓인가 더위도 별로 안탔다. 올 가을엔 그 여세를 모아 기록을 세워보리라 기염을 토했는데. 간사한 인간이 찬바람 소슬하고 공부할 때가 되니까 괜스리 헛바람이 드는가보다.
여하튼 심드렁하다. 지식은 여전히 짧고 배움도 나아진 바 없는 것 같다. 역시 공부란 때가 있는 것인가. 꾸준히 조각글이라도 써야한다는 강박은 있는데 도대체 감동이 없다. 마음을 울리는 열정없이, 뒷통수를 짜르르 타고내리는 전율이 없이 무슨 글이 써질까? 하기야 이렇게 팍 퍼진 일상을 글로 써본들 무슨 보람이 있을까보냐.
어머니의 주름이 없어지듯, 내 몸살기운도 그만 가셨으면 좋겠다. 세상은 갈수록 어둡고, 사람들은 제 멋대로 살아가며, 말들은 허황해진다. 하늘은 지랄같이 푸른데, 가을은 왜 이다지도 허무한가. 이러다가 머리를 깎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