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김수영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불량 2004-09-1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살이 되었을 때, 나는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다. 그렇다고 멀리 가지도 않았다. 나는 다만, 스물 세살이 되고 싶었다.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세수를 하다가, 이를 닦다가.. 문득문득 스무 살부터 스무 서너살까지의 추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아직도 '가슴이 저려'지기도 하고, 하많은 실수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다. 바보같이...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들.
지금도 내 소원은 빨리 서른을 넘겨버리는 거다. 하지만, 나는 안다. 기억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잊어버린다해도 그 누군가가 그 기억들을 들고 있을 거라는 것을.. 싫다. 귀찮다.

superfrog 2004-09-18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시모토 바나나의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를 보니 다름아닌 몸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더군요.. 저는 중학교 때까지는 제 인생에 스무살이 안 올 줄 알았어요.. 지금은 스물은 황금빛의 시간처럼 보이지만 서른도 마흔도 쉰도 황금빛으로 보여집니다..^^

불량 2004-09-19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니..절대로 도망따위 갈 수 없겠네요..아이고.
아아..금붕어님 멋져요. 황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