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만 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냉장고만 돈다
안에 넣어둔
술이나 물의 차가움을 위해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해 냉장고만 돈다
친구도 가족도 다 멀리 두고
나 혼자 여기 앉아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세상은 지금 온갖 소음을 내며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데
나는 고요가 좋아 여기에 앉아서
냉장고 도는 소리만 들어도 되는 걸까
내 언어가 세상을 잃어버릴 때
나부터 부패하는 법
마른 잎에게 말 거는 바람 소리 들을 귀는 없이
고작 냉장고 도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린다
조금씩 영혼의 불이 꺼져가는 세상에서
이제 어떤 소리를 내어야 하나
냉장고 소리가.
나를 웅웅웅 울린다
황규관 "물은 제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