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만 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냉장고만 돈다

안에 넣어둔

술이나 물의 차가움을 위해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해 냉장고만 돈다

친구도 가족도 다 멀리 두고

나 혼자 여기 앉아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세상은 지금 온갖 소음을 내며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데

나는 고요가 좋아 여기에 앉아서

냉장고 도는 소리만 들어도 되는 걸까

내 언어가 세상을 잃어버릴 때

나부터 부패하는 법

마른 잎에게 말 거는 바람 소리 들을 귀는 없이

고작 냉장고 도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린다

조금씩 영혼의 불이 꺼져가는 세상에서

이제 어떤 소리를 내어야 하나

냉장고 소리가.

나를 웅웅웅 울린다






황규관 "물은 제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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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2004-06-16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취할 때 골골거리며 유독 돌아가는 소리가 컸던 내 냉장고에 붙여 두었던 시.
참, 좋아하는 시다....

nrim 2004-06-1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 냉장고도 큰 소리로 엉엉 울어요.. 간혹 눈물도 흘려요;;;;

불량 2004-06-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리크다고 툴툴거리다가도 가끔 소리가 멈추면 더 불안한 그 무엇이 있지 않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