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2. 2012년, 서울 강남 ①

 

 

 2. 2012년, 서울 강남 ①

 

 

 

 

 

 

 

 5월 초. 명환은 아내의 서른두 번째 생일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구청에서 계약직 행정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아내 은지의 생일은 다가오는 토요일이다. 연애시절부터 작년까지 매 해 그 날이 오면 일곱 살 난 아들과 함께 오붓하게 외식을 하고 크고 작은 생일선물을 건네주곤 했다. 그러나 올해엔 사정이 좀 달랐다. 올초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트러블 때문에 둘 사이가 한참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발단은 아내의 무단외박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2월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내에 대한 걱정으로 그는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 그러나 아내는 받지 않았다. 걱정과 노여움으로 잠도 못 자고 밖을 서성이고 있을 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창 모임에 왔다가 늦어 여자친구 집에서 자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에도 동창회에 간다하고선 친구들 집에서 밤을 새우고 온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동창회란 보나마나 아내의 중학교 동창회일 것이다. 남녀공학을 나온 아내는 동창들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남자 동창도 있었다. 아내의 다른 동창으로부터 듣자니 만나면 술 마시고 노래방도 가고 때론 나이트클럽도 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외박하기 전에 꼭 전화를 했고 그도 설마 무슨 일이 있으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주었다. 그러나 이번엔 아무 사전연락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화가 치밀었다. 
 "그 친구 좀 바꿔 줘." 하자 아내는, "다 자는데 어떻게 깨워. 아침 일찍 들어갈게." 했다.
 수화기 너머의 사위가 너무 조용했다. 밀폐된 공간었다. 모텔방이나 그 화장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라고 이야기해주지 않는 이상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하는수없이 통화를 마쳤다. 다음 날 저녁에 퇴근해 보니 아내는 집에 없었다. 아이가 말하길 회사일로 늦는다고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외박한 데 이어 다음날도 늦게 들어오면서 전화조차 없다니! 그날 밤 부부는 대판 싸웠다. 그러나 아내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하루는 지방 출장을 갔다가 일이 일찍 끝나 예정보다 이틀 앞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아이만 있고 아내는 없었다. 어디갔냐고 아이에게 물었더니 그냥 '어디 가는데 오늘 집에 못 들어올 거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일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집에 나타났다. 외출이 2박3일인 셈이었다. 와서 하는 말이 기도원을 다녀왔다고 했다. 무슨 기도원이 주일날 교회도 안 보내고 기도시키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자기 일에 간섭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하도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다음엔 외박을 하고 오더니 친구들과 찜질방 갔다가 그만 잠이 깊이 들어 못 들어왔다고 했다. 언젠가부터는 자기 전화기를 잠금상태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개입된 게 분명했다. 기독교 신자라도 그 안에 속물이 얼마나 많은가. 그 뒤로 그는 아내와 아예 말하지도 않았다. 방도 따로 쓰면서 이혼의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이가 문제였기에 하루하루 망설이고 있었다.

 

 드디어 토요일, 명환은 간단한 짐을 꾸려 새벽에 현관문을 나섰다. 아내는 깨어 있었지만 자는 체를 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탔다. 아내 생일축하 자리를 만들어 보았자 서로 어색할 게 뻔했다. 그런 위선적인 모습을 아내와 아이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1박2일 여정을 잡은 것이었다. 그는 당진으로 빠져 서해안으로 가 바다를 보며 하루 묵고 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나면 마음 속 답답함이 가실 것 같아서였다. 점심 무렵 태안반도 꽃지에 들어섰다. 바닷가에 있는 모텔에 방을 잡고 인근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후엔 바닷가를 걸었고 일몰을 본 뒤에 횟집에 들렀다. 거기에서 여자 하나를 만나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같이 모텔방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네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처음엔 받지 않았지만 벨이 재차 울리자 폰을 끌어당겼다. 여자는 잠에 빠져 있었는데 시트 밖으로 벌거벗은 엉덩이를 내보이고 있었다. 전화를 건 이는 굵직한 목소리의 남성이었다.
 "박은지 씨 남편 되시죠?"
 이 시간에 아내 이름이 다른 남자 입에서 나오다니. 불쾌했다.
 "그렇습니다만." 명환이 언짢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남경찰서 고찬진 형삽니다. 박은지 씨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혹시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이렇게 묻는 형사의 목소리엔 다소 의심하는 기운이 묻어 있었다.
 "충남 태안입니다. 무슨 사고인지요?"
 "그건 오셔서 확인하십쇼. 여기 수서동인데요. 삼성병원 아시죠? 빨리 오셔서 신원 확인을 해주시겠습까?" 형사가 말했다. 어조에 높낮이가 없었다.
 "무슨 사고인지 물었습니다." 명환이 짜증을 냈다.
 "저희도 지금 수사를 하는 중입니다."
 "혹시 제 처가 사망했다는 걸 뜻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명환은 당황하지 않았다. 불륜녀의 죽음. 흔한 일이다. 아마도 남자와 함께 있다가 변을 당했으리라, 명환은 그렇게 예상했다.
 "지금 충청도 태안에 있습니다. 서둘러 올라가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몇 시간 걸릴 것 같군요. 급하면 처남을 먼저 보내겠습니다. 지금 전화 거신 번호로 연락을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명환은 아들이 걱정 되어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처남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잠을 깨운지라 처남은 귀찮은 말투로 받았다. 아이가 와 있다고 했다. 아내가 어제 저녁에 데려왔다는 것이었다. 명환은 아내에게 변고가 있으니 경찰에게 전화해 병원으로 먼저 가보라고 부탁했다. 처남이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에 고 형사에게 들은 얘기를 해주었다. 그 이상은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처남이 그렇게 하겠다면서 경찰관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일을 처리한 뒤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내가 과연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해졌다. 별의별 상상이 머리 속에서 다 일어났다. 두 시간을 달려 올림픽대로에 접어들었을 때 처남한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 있다면서 어디 쯤이냐고 물었다.
 "올림픽대로야. 30분이면 도착해. 병원 어디로 가면 되지?"
 "일단 도착하면 전화해요. 시신이 어디로 이동할지 나도 몰라요."
 "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됐대?"
 "오면 알아요." 처남이 퉁명스럽게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병원. 처남과 고 형사의 안내로 시체안치실로 갔다. 시체로 보이는 침대가 몇 개 보였고 그것들 주위로 연고자와 많은 경찰관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장인과 장모가 시신에 흰 천을 씌운 한 침대 옆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를 보자 장모가 울부짖었다. 경찰이 천을 살짝 들어 아내의 시신을 보여주었다. 얼굴과 목, 가슴이 만신창이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흰 천이 다시 덮였다. 젊은 경관 하나가 다가와 잠깐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장건희 형삽니다. 현장은 수서동의 한 모텔입니다. 직장 동료와 10시 경에 투숙했고요, 새벽 1시에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유감이지만 현장 사진은 이렇습니다."
 그가 파일을 보여주었다. 사진은 A4 크기의 다섯 장이었다. 첫 사진을 보았다. 벌거벗은 두 사람이 침대에서 피범벅인 채 십자가에 매달린 형태로 누워 있었고 침대와 바닥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명환은 속으로 혀를 찼다. 남자 배에선 장기 일부가 빠져나와 있었다. 명환은 더 이상 안 보겠다며 파일을 도로 건넸다. 남자와 아내의 관계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예상대로였다. 경찰관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시신을 보내 부검을 해야 한다며 서류를 내밀었다. 명환은 형식적인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분명한 알리바이가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글쎄요, 아직 뭐라 말씀드릴 수 없네요. 수사 중이라서요." 장 형사가 무심히 말했다. "여길 떠나지 마십쇼. 선생님도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명환이 폭발했다.
 "조사? 아내를 잃은 이 마당에 조사라니?" 새벽부터 내내 형사들 말투와 행동에 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우라질 놈의 경우가 다 있나? 새벽부터 속을 긁어놓더니만. 책임자 오라고 해!"
 명환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모두 이쪽을 바라보았다. 구레나룻을 기른 형사가 다가와 팀장이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명환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구레나룻이 구두발로 장 형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 새끼, 벌써부터 조사는 무슨 조사야? 아내를 잃은 분한테!" 구레나룻의 일격을 받은 장 형사가 무릎을 절룩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보아도 과장된 몸짓이었다. 구레나룻이 명환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조사가 아니라 그냥 참고로 몇 가지 물어볼 겁니다. 저희도 업무가 많아 힘듭니다. 좀 도와주십쇼."
 "잠시 집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명환이 물었다. "여행을 하고 온 뒤라 좀 씻고 옷도 갈아입으려고요."
 "그러시죠, 뭐." 구레나룻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나 '네가 튀어봐야 벼룩'이라는 표정이었다.
 명환은 화장실로 가 문을 잠그고 옷을 입은 채 변기에 걸터앉았다. 생각 끝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새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그의 희망과 달리 장미빛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오후 세 시까지 병원으로 돌아오겠다고 하곤 집에 왔을 때였다.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서랍이란 서랍은 죄다 열려진 채 내용물을 흉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새로 장만한 컴퓨터 본체가 보이지 않았고 아내의 빈 보석함은 바닥에 팽겨쳐져 있었다. 도둑이 들었다는 걸 확신하고 명환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험한 동창생들 - 1. 전학생 소녀 ④

 

 

 

 

 

 20일이 지나서야 시신 부검결과가 나왔다. 설희가 걱정했던 대로였다. 호석은 익사한 게 아니라 물에 빠지기 전에 이미 날카로운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는 게 그것이었다.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경찰의 움직임이 분주해졌고 학교와 마을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단순 실종사망사건으로 간잔히 처리하려 했던 경찰은 뜻밖의 결과가 나오자 신경질을 부렸다. 주변 인물을 닥달하고 혹시나 목격자가 있는지 꼼꼼히 수사를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실종일로 추정되던 그 날에 호석이 버스를 타고 학다리 근처에서 내린 걸 봤다는 이가 나왔다. 그리고 미란이 학다리 아래에서 올라오더라는 목격자도 등장했다. 버스 목격자는 평소 술을 좋아하는 같은 마을의 노인이었고 미란을 목격한 이는 고모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집사였는데 종교에 심취해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었다. 엉뚱하게 용의자로 몰린 미란은 처음에 경찰에서 그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 이틀이 지난 오전, 미란은 호석의 실종 추정일 저녁에 설희가 학다리 아래에서 호석과 같이 있는 걸 봤다고 털어놓았다. 수업을 하다가 졸지에 경찰에 연행된 설희는 미란의 진술에 관한 설명을 듣고 미란이 창호까지 엮지는 않았다는 걸 알았다. 설희는 사실을 부인했다. 미리 말을 맞춘 대로 창호가 농구하는 걸 지켜보고 학교에서 혼자 돌아와 집에서 잠을 조금 잔 뒤에 고모를 찾아 면사무소로 갔던 일, 치킨집에 들러 여러 사람을 만났던 일을 설명했다. 조사를 받는 동안 경찰이 집을 수색했지만 허탕을 친 듯했다.  오후 들어 소식을 들은 고모가 경찰서로 뛰어 왔다. 설희는 수사과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고모가 구세주로 보였다. 고모는 경찰서장 나오라고 길길이 뛰었다. 자기에게 연락도 없이 설희를 연행하고 집까지 수색한 데 대해 항의하고 경찰을 고발할 거라고 윽박질렀다. 이미 경찰 생리에 익숙한 고모였고 게다가 지역 유명인사였다. 같은 공무원으로서 고모에게 신세를 진 경찰도 있었다. 경찰은 그 기세에 눌려 일단 설희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다시 소환할 계획이니 주거지를 집으로 한정한다고 경고를 했다. 수사과를 나오기 전에 고모는 경찰들이 다 보란 듯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남편 없다고 무시하는 거냐? 내 더러워서 니들 같은 공무원 관둬야지. 씨팔."
 고모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고모는 말이 없었다. 도중에 마트에서 내려 맥주와 음료수를 샀다. 경찰이 어질러놓은 집을 같이 치우면서도 시종 침묵했다. 정리가 끝난 다음에 고모는 홀로 탁자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설희는 그 침묵이 두려워 방에 틀어앉아 주니어 잡지만 들추고 있었다.


 한참 지나 고모가 설희를 불러 탁자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설희 앞에 조그만 유리잔을 놓다니 맥주를 가득 따랐다. 설희가 안 마시겠다고 하자 한 모금만 마시라고 했다. 쓰고 맛이 이상했다. 고모가 설희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설희는 얼굴을 돌렸다. 고모가 물었다.
 "왜 그랬다니?"
 느닷없는 질문에 설희는 하마터면 양 손으로 잡고 있던 맥주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설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날을 곰곰이 더듬어봤다. 내 사무실을 찾아오고, 사람들 앞에서 유독 명랑한 체하고. 네가 평소에 안 하던 짓이었다. 더군다나 그날 네가 입고나간 옷이 없다는 걸 진즉 알아차렸지만 물어보는 걸 깜빡했구나. 설마했는데 지금 보니 주방 가위가 하나 안 보이더구나. 이만하면 내 추리가 맞니?"
 설희는 고개를 숙였다. 고모가 말을 이었다.
 "서에 가기 전에 학교에 들러 네 친구 몇을 만났다. 너와 호석의 사이가 어땠는지 물어보려고. 꾸준히 너를 괴롭혔다고 하더구나. 이유는 모르겠고. 얻어맞고 돈까지 뜯겼다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선생들에게 항의할까 하다가 일이 커질 것같아 그만두었다만 지금도 화가 나고 억울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그동안 그 얘길 나한데 왜 안 했니? 이 멍청한 계집애야."
 고모가 울면서 설희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그러나 아프지는 않았다. 고모가 울자 설희도 덩달아 울었다. 그 모습에 고모는 설희의 범행을 확신하게 되었다.
 "너를 도울 수 있는 건 첫째 너 스스로고, 그 다음은 누가 뭐래도 이 하늘 아래에서 이 고모만 유일하다. 사정을 알아야 너를 도울 수 있지 않겠니?"
 고모의 유도심문에 마침내 설희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호석이 괴롭힌 일, 창호가 그걸 못하게 한 일, 다시 호석이 나타나 다리 아래로 끌어가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일. 그리고 호석을 찌른 일, 그걸 창호와 미란이 봤고 창호가 수습을 해주었던 일, 집으로 돌아와 수습했던 그동안의 일들을......다 털어놓았더니 속이 시원했다. 
 얘기가 끝나자 고모는 고개를 끄덕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일어나 거실을 서성거렸다. 다시 자리에 앉은 고모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겨 가며 턱을 괴고 천장을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으로 뭔가 그려보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창호가 큰 일을 했구나. 고마운 녀석."
 다시 한참을 생각하던 고모는 생각의 어느 대목에서 화들짝 놀라는 것 같았다. 그리곤 얼굴을 설희에게 바싹 들이대며 말했다.
 "이건 큰 의문인데 너답지 않은 게 하나 있구나. 왜 호석이에게 그렇게 꼼짝을 못했니? 걔한테 뭔가 약점 잡힌 게 있었니?"
 설희는 얘기를 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어느 순간에 판단이 섰는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고모가 고모부를 강으로 밀어버리는 걸 호석이가 봤대요. 나도 그날 봤고요."
 그리곤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 말에 고모는 충격을 받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가더니 마신 맥주를 다 토해냈다. 그리고 욕실에서 나와 설희를 껴안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널 위해 이 나라 최고의 변호사를 불러야겠구나."

 그 뿐, 설희 고모는 자신이 남편을 강물에 밀어버린 것에 대해 자신이 죽기 전까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창호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시체유기죄로 잡혀간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미란이 경찰에서 자기 이름은 불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가족이든 누구에게든지 간에 실토하고 말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다. 설희 역시 경찰의 추궁에 못이겨 자포자기하면 어쩌나하고 걱정했다. 그렇지만 설희가 일단 풀려나자 깊은 안도했다..
 미란은 계속 그를 피해다녔다. 몰래 찾아가 불러냈지만 나오지 않았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불러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란은 금세 친구들 사이로 도망쳐버렸다. 그런 창호를 주위에서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기에 창호는 미란을 만나는 걸 포기했다. 설희가 두 번째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날 저녁에 설희 집을 찾아갔다. 어지간하면 만나지 말자는 게 약속이었지만 창호가 그걸 깼다. 설희 고모는 집에 없었다.
 "너 괜찮니?"
 창호의 물음에 설희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마음 강하게 먹어라. 알았지?"
 "응."
 "네 고모에게 사실을 얘기했지?" 창호는 묻고싶던 말을 꺼냈다.  설희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창호가 담배를 꺼내물었다. "어쩐지 날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다라니. 뭐라시든?"
 "끝까지 잡아떼라고 하셨어."
 그 말에 창호는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곤 연기를 허공에 뿌렸다. 그리고 말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네가 곤란해지면 경찰에게 내 이름을 말해도 난 상관없다."
 "진짜?"
 "그럼. 아무 상관없다. 알아보니 우린 아직 미성년자기 때문에 큰 벌은 받지 않을 거다."
 그러자 설희는 심각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깔깔거렸다.
 "오빠 이름이 나오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하늘에 맹세해."
 이 조그만 아이가 어떻게 그리도 독한 마음을 먹었는지, 창호는 설희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론 설희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창호는 저도 모르게 설희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설희는 따뜻한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래, 설희야. 이 일 끝나면 우리 서울로 놀러가자."
 "좋아."
 설희는 얼굴을 붉히며 창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손을 잡은 건 세월이 한참 지나서였다.

 

 검사는 경찰을 밀어붙여 증거 없이 미란의 진술을 토대로 설희를 기소하려고 했다. 서울에서 온 변호사는 별로 성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희는 기소에서 벗어났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미란의 진술 번복이었다. 그 직후 고모는 설희를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1997년 1월의 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험한 동창생들 - 1. 전학생 소녀 ③

 

 

 

 

 

 

 "그럼 뭐야?" 설희가 몸을 웅크리며 물었다.
 "네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 호석이 혀로 자기 입술을 축였다.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거야."
 "천만에. 내가 따먹은 애들도 다 나를 좋아해."
 "그게 누군데?"
 "미란이, 지혜. 그리고 중학생들 몇 명 또 있어."
 그 가운데 미란은 친구였다. 그러나 한 번도 설희에게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헐. 미친 놈. 거짓말 하지 마."
 "내가 거짓말한다구? 본때를 보여주지." 호석이 설희를 일으켜세웠다. 그리곤 멱살을 잡았다.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뭔가 작정한 눈빛이었다. 목을 조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희는 호석이 자기를 죽일까봐 겁이 났다. 문득 그를 자극하지 않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러지 마. 난 죄 없어."
 "알아,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따라줘야겠어.그러면 영원히 입 다물게."
 그러면서 한 손으로 설희의 가냘픈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설희는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걸 당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손으로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자 호석이 설희의 뺨을 갈겼다. 이어 다른 뺨도 갈겼다. 설희는 아픔 속에서 이 녀석을 가만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희는 머리를 쥐어 짜냈다.

 "알았다, 알았어. 때리진 마. 시키는 대로 할게."
 "처음부터 순순히 나오지 그랬어? 일어나 서 봐. 차려." 놈이 명령했고 설희는 주춤주춤 그렇게 했다.
 "내 말 잘 들을 수 있지? 그럼 너네 집은 안전해질 거야." 설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석은 이제 됐다는 듯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바지 무릎까지 내려."
 "뭐, 뭐라고?" 설희는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귀머거리야? 썅. 바지 내리라고." 다시 호석의 주먹이 날아와 설희의 머리를 쳤다. 그리고 말했다. "딴 년들은 알아서 설설 기던데 넌 왜 그 모양이냐?" 이번엔 주먹이 뺨으로 날아왔다.
 그걸 피한 설희는 공포에 빠졌다. 그제야 이 녀석이 여학생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내가 확 벗겨버린다?" 호석이 설희의 티셔츠를 답아당겼다. 그리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했다. 그러면서도 달랬다. "지금 밤이야.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 너하고 나만 아는 일이니까 꽨찮아. 빨리 벗어. 손 안 대고 그냥 보기만 할게."
 설희는 알았다며 시키는 대로 했다. 호석은 설희의 팬티만 남기고 다 벗게 했다. 굴욕이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호석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설희에게 뒤로 돌라고 시키고선 팬티 안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와 속살을 만지기 시작했다. 처음 당해보는 일에 정신이 다 얼얼했다. 호석의 손가락이 여린 살 안으로 파고들더니 팬티를 아래로 확 벗겨내렸다. 창피한 생각에 아픈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만약 부모님이 하늘나라에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면 수치스럽고 끔찍한 일이었다. 몸부림을 쳤으나 호석은 설희의 샅으로 집어넣은 손에 힘을 가했다. 그리고 자기 바지 혁대를 끄르기 시작했다. 그 때 설희가 호석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거긴 더러운 곳이야. 휴지 좀 꺼낼게."
 호석이 손을 거두더니 자기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냄새 좋은데 뭘."
 "아니야. 생리할 것 같아."
 "네 나이에 벌써?"
 호석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설희는 가방으로 손을 뻗어 휴지를 찾는 체 했다. 그리곤 숨겨둔 가위를 꺼냈다. 그걸 호석에게 겨누자 그가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 틈에 설희는 팬티와 바지를 챙겨 입었다. 호석은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헛, 하며 너털웃음을 짓더니 설희에게 바싹 다가왔다.
 "그걸로 날 찌르겠다고?" 그러면서 주먹을 높이 쳐들었다. "해 봐, 이 썅......"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설희의 가위가 그의 목덜미에 깊숙히 꽂혔다. 빨간 액체가 설희 얼굴에 튀었고 호석은 그 자리에 푹 쓰러져 목을 잡고 버둥거렸다. 설희는 파리마냥 파르르 떨고 있는 호석의 목을 다시 겨냥해 가위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엔 날이 그의 손목에 막히더니 땅에 꽃혔다. 설희는 화가 났다. 설희도 제정신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죽어! 이 새끼!"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지르며 호석의 얼굴과 몸, 목덜미를 찍어댔다. 소리를 지르니 두려움도 사라졌다.

 

 그 때였다. 누군가 달려와 억센 힘으로 설희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곤 가위를 빼앗아 저만치 던져버렸다. 창호였다.
 "설희야. 뭐, 뭐니, 이건? 어? 이 새낀......"
 창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쓰러진 호석의 몸엔 움직임이 없었다. 창호가 몸을 숙여 호석의 숨과 맥박을 한참 점검했다. 그동안 설희의 정신이 돌아왔다. 잠시 뒤 창호는 설희를 보고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설희는 자신이 뭔가 큰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숨죽여 울었다. 귀엔 가끔 교각 위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소리와 벌레 울음뿐이었다. 가끔 모기가 날아와 팔과 얼굴을 깨물었지만 그대로 놔두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설희가 고개를 들었다.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창호는 주저앉은 채 호석의 몸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창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 한 사람이 더 보였다. 
 "어떡하지? 무서워."
 여학생 목소리였다. 설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미란인 걸 알았다.
 "죽었어? 어떡해, 어떡해."
 미란이 울먹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호석이 담배를 내뱉곤 발로 비벼껐다. 얼굴엔 비장한 빛이 보였다. 그리곤 미란에게 말했다.
 "넌 못 본 거야. 아니, 우리 모두 못 본 거야. 이 일은 일어나지 알았어. 미란이 너는 빨리 집에 가. 내가 전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약속하지?"
 그러면서 미란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미란이 엉겹결에 거기에 자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곤 재뻘리 다리 위로 달아났다. 어둠 속에서 창호가 설희 옆에 주저앉았다. 둘은 오랫동안 말 없이 앉아있었다. 이윽고 창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설희가 차분하게 과정을 설명했다. 창호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호석에게 습격을 당한 일, 얻어맞으며 창피한 일을 당한 일,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녔던 가위를 휘두른 일 등. 창호는 나뭇가지로 땅에 낙서를 하며 묵묵히 듣기만 했다. 호석의 행실을 아는지라 설희의 말에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설희의 흐트러진 옷차림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책임져야지 뭐." 설희가 말했다. 반항심도 작용했다. "오빠는 책임 없어. 상관하지 마."
 그 말에 창호가 발끈, 했다.
 "넌 친구이자 내 동생 같은 애야. 어떻게 상관 안 할 수 있겠니?"
 "그럼 어떻게 하려고. 얘를 살릴 수 있어? 죽었다며?"
 "물에 버리자. 너와 나 말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 미란인 내가 알아서 할게."
 설희는 말문이 막혔다. 자기가 잡히면 고모는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동네는 얼마나 뒤집어질지, 자기 인생은 어떻게 될지 초등학생 머리론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난 어리니까 잡혀가도 처벌이 가볍지 않을까?"
 "난 경찰에 잡혀가는 너를 상상할 수가 없어. 안 돼."
 창호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물소리가 더 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호는 호석을 안아들고 교각 아래로 갔다. 호석의 몸이 건장한 창호에겐 가뿐해 보였다. 창호가 물 속으로 시신을 던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곤 설희를 물가로 불러 옷과 손, 얼굴을 물에 깨끗히 씻으라고 했다. 설희가 미적지근하게 행동하자 창호는 답답하다는 듯 설희의 손을 이끌어 손발이며 얼굴, 피로 물든 옷깃을 물에 박박 씻뎠다. 설희 눈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창호의 강한 손길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고마워서였다.
 "집에 가서 목욕하고 피 묻은 옷은 태워버려. 만약 너네 고모가 집에 있으면 우리집으로 와. 알았지?"
 설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챙겼다. 창호가 가위를 주워 강물 쪽으로 멀리 던지는 게 보였다. 다리 위로 올라와 집까지 가는 길에 창호는 앞장서서 망을 보았다. 차 불빛과 사람을 피하는 데에 둘은 땀을 흠뻑 흘렸다. 설희는 창호가 보는 앞에서 집으로 뛰어들었다. 고모는 집에 없었다.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피묻은 옷과 가방을 빨았다. 얼룩은 쉽게 지워졌지만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가위로 조각을 냈다. 그걸 다른 쓰레기와 섞어 쓰레기 봉투에 담았다. 그리곤 문을 나섰다. 창호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 끝 쓰레기장으로 가는 길에 몇 사람과 마주쳤지만 눈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 쓰레기장에 내던지면서 제발 들키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설희는 버스를 타고 면사무소로 가 야근을 하고 있는 고모를 만났다. 
 "무슨 바람이냐? 네가?"
 "심심해서 나왔어요."
 "저녁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가는 길에 치킨이나 먹고 갈까?"
 설희는 그러자고 했다. 안 그래도 배가 무척 고팠다. 치킨집에서 고모는 생맥주를 시켰다. 음주운전은 안 된다고 말렸지만 고모는 듣지 않았다.
 "사고만 안 나면 돼. 이래뵈도 고모가 빽이 많다."
 그러면서 미소를 지었는데 참 젊고 예뻐보였다. 고모의 어디에 그런 잔인한 구석이 있는지 신기했다. 설희는 고모부가 물에 빠지던 날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날이라 치킨집엔 사람이 많았다. 아는 이가 지나갈 때마다 설희는 명랑하게 인사를 했고 친구가 앉아있는 자리로 가 수다를 떨고 오기도 했다. 고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늘따라 네가 왠 일이라니? 그동안 시무룩해 있어 걱정했는데."
 설희는 고모 옆자리로가 목을 껴안곤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고모는 간지럽다며 깔깔거렸다.
 "나도 널 사랑한단다, 얘야."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며 둘을 쳐다보았다. 설희가 손에 피를 묻히고 왔다는 걸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설희와 창호는 매일 만나 그날그날의 상황을 체크했다. 호석이 실종됐다는 건 이제 학생들과 인근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소문도 무성했다. 가출을 한 녀석이 D시에 나타났다느니, 인신매매단에 잡혀갔다느니, 밤에 돌아다니길 좋아하던 놈이라 어디선가 자동차에 치어죽은 게 틀림없다는 것 등이었다. 그에게 희롱당했다는 여학생 이름도 심심찮게 나왔지만 미란을 비롯한 해당 여자애들은 펄쩍 뛰었다. 경찰이 강과 야산을 수색했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경찰이 탐문수사를 한답시고 학교와 집을 찾아오기도 했지만 설희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대했다. 경찰은 헛수고를 하고 있었다. 시체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기에 창호와 설희는 안심했다. 


 그러나 약 한 달 뒤였다. 한강 하구에서 물에 퉁퉁 분 채 심히 부패된 소년 시체가 하나 떠올랐다. 신원파악을 한 결과 실종된 최호석이라는 게 드러났고 소식을 들은 호석의 부모는 망연자실했다. 설희와 창호도 그러긴 마찬가지였다. 미란은 안절부절했고 그럴 때마다 창호가 안심시켰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나날이었다. 차라리 고모한테 사실을 털어놓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그러나 그 뒤로 벌어질 일이 두려웠다. 설희는 창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창호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하지만 힘 없는 웃음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험한 동창생들 - 1. 전학생 소녀 ②

 

 

 

  

 

 

 5학년이 되자 설희의 몸과 마음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사춘기는 어쩔 수 없었다. 김창호라는 이웃집 중학생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가 설희를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친오빠처럼 늘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창호는 아버지가 미군인 혼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4살 된 창호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D시에서 복무를 마친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갔다. 지금은 미국에 있다고 하는데 할머니에게 1년만 맡아달라고 떠난 어머니는 10년이 되도록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연락이 끊어진 지도 5년이 넘었다. 창호는 피부색이 약간 검은 편이고 덩치가 크다는 걸 제외하면 희한하게도 한국 사람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은 작았으며 코는 납작했고 입술도 얇았다. 고모는 창호 할머니를 교회에 나오게 하려고 애썼고 결국 고모가 이겼다. 그 뒤로 두 집 여자는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냈다. 설희도 방학이면 창호네 집에 가서 마루에 엎드려 공부를 같이 하곤 했다.


 운동을 잘 하는 창호는 중학교에 들어가 길거리 농구 학교 대표로 뽑혀 학교가 도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잘 생긴 데다가 공부도 제법 했으니 자연히 또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중학교 언니들이 설희에게 접근해 과자를 사주면서 창호에게 줄 편지와 선물을 건네는 건 다반사였다. 일부는 건넸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설희가 챙겼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좋아한다는 편지는 찢어버렸다. 중학생이 된 창호는 설희와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틈만 나면 농구를 하고, 저녁 늦도록 친구들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하는 통에 설희가 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옆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창호가 바빠지자 설희는 그제야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남학생을 좋아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설희는 잘 몰랐다. 그저 창호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만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창호는 설희를 의식하고 있었다. 창호는 자길 바라보는 설희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창호 친구들도 알고 있었다. 창호는 설희로 하여 자기가 선후배들 사이에 놀림감이 되고 여학생을 사귀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될수있으면 설희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일부러 설희 집앞을 피해가기도 했다. 설희가 여학생들의 선물을 가져오면 받기만 하고 쌀쌀맞게 "앞으로 이런 거 가져오지 마."하며 돌려보냈다. 설희는 창호의 눈치를 알고 가슴이 아팠지만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설희는 나름 어른스러웠다. 이런 아픔은 세상에 혼자 남은 설희에게 있어 시련의 일부며 늘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걱정했던 일이 터졌다. 그 여름이었다.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그날 밤도 고모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 외박이 잦았던 터라 고모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였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고모부의 시신이 그곳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강 하류 철교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경찰이 전해왔다. 경찰은 술에 취해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그가 학다리에서 발을 헛딛여 강물에 빠진 걸로 결론지었다. 고모는 슬퍼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뒤, 고모는 시댁 식구들의 눈총에도 아랑곳 않고 곧 평상으로 돌아왔다. 겉으로 볼 때 고모부가 남긴 것은 보잘 것 없었다. 운영하던 자재상은 빚을 제외하면 남은 게 없었고 저축해 둔 것도 없었다. 오히려 증권사에 큰 빚을 지고 있었는데 용케도 고모가 다 갚았다. 집은 어차피 고모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지만 고모부의 죽음이 고모에겐 인생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고모는 보험설계사 일을 하던 교회 한 여신도의 강권으로 고모부 앞으로 적지 않은 보상액수의 종합보험을 들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으로는 그 액수가 수억 원대라고 했다. 고모부의 사망과 큰 보험보상액 때문에 한동안 경찰관과 보험사 직원들이 집과 고모가 일하는 면사무소를 들락거렸지만 공무원사회와 교회에 인맥을 가지고 있던 고모는 별 문제 없이 부유한 미망인이 되었다. 고모는 Y군을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시로 나가 무슨 일을 해야할지 몰라 아직 주저하고 있었다. 가끔 젊은 경찰관 하나가 집에 들러 고모에게 별 일 없냐고 물어보곤 물이나 음료수를 얻어 마신 뒤에 돌아가곤 했다. 소문에 그 경찰관과 고모가 사귄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설희가 보기에 그건 소문에 지나지 않았다. 고모는 남자를 만나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고모는 그 경찰관이 들르고 갈 때마다 혼잣말로 욕을 했다.
 "싱거운 새끼. 남들 눈이 있지, 왜 뻔질나게 우리 집을 드나든다니?" 

 

 이듬해 들어 설희는 남모르게 또래 한 남학생의 손찌검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호석이라는 남학생으로 설희보다 나이가 두 살 많지만 학교에선 동급생이었다. 언제부턴가 호석은 학교나 집에서 자주 설희를 불러냈다. 그리곤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장난으로 머리를 쥐어박거나 학용품을 빼앗곤 했다. 한번 시작한 장난은 더욱 발전하여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거절하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발로 차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는 근처 야산으로 데려가 씨름을 하자며 설희의 몸을 더듬곤했다. 그러나 왠지 설희는 저항을 하지 않았다. 창호는 어느 날 친구로부터 이 소문을 듣고 분개했다. 호석을 불러내 사실을 확인한 뒤 흠씬 패주었다. 그리곤 설희를 찾아갔다.
 "왜 당하고 있었니?"
 설희는 눈물만 흘렸다. 말 할 수 없는 처지가 괴로웠다. 창호는 답답해했다.
 "앞으로 또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알았지?"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자기를 지켜줄 사람은 오직 창호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게 그 때였다. 그러면서도 호석이 '그것'을 경찰에 발설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경찰차 소리나 집앞을 지나가는 경찰관을 보면 가슴이 덜컥, 했다. 하지만 경찰이 찾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호석에겐 발설해서 얻을 이익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걸로 하여 감당해야 할 창호의 주먹세례가 더 무서웠던 것이다. 창호는 언제부턴가 인근 주목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 뒤로 호석은 설희 주위를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다. 여름방학 무렵에 호석의 가학이 다시 시작됐다. 친구들 사이에 돌던 성인잡지를 접하게 된 호석은 성적 욕구의 발산 대상으로 설희를 찍었다. 사춘기에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호르몬은 창호의 경고를 쉽게 잊게 해주었다. 호석은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설희의 뒤를 밟았다. 임진교를 지날 즈음 설희를 불러세웠다. 호석을 본 설희의 눈에 공포의 빛이 서렸다.
 "잠깐 따라와. 그러지 않으면 다 불어버릴 거야."
 설희는 주저하며 학다리 하류 쪽으로 내려가는 호석을 따라갔다. 누군가 자기를 구해줄 사람이 있는가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호석이 둑 아래로 내려가 갈대 숲 앞에 서더니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설희는 무서워서 도망쳤다. 뒤에서 호석이 외쳤다.
 "너 정말 그러면 재미 없어!!"
 집으로 돌아온 설희는 방문을 잠그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오랫동안 콩닥콩닥 뛰었다. 호석이 장차 설희에게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적했고 호석 말고도 설희의 몸을 훑어보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인근 D시에선 여중생 강간살인 사건도 일어났다. 마음 속의 백기사 창호는 자기 놀이를 즐기느라 바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대한 미움 같은 것도 생겼던 터라 호석의 일을 얘기하기는 것도 어쩐지 싫었다. 설희는 호신용으로 뭔가를 지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커터칼은 너무 작아 몸을 지키는 데에 별 쓸모가 없을 것같았다. 설희는 주방을 뒤졌다. 식칼은 너무 커서 보기에도 끔찍했다. 과도는 하나 밖에 없었다. 없어진 걸 알면 고모한테서 추궁을 당할 게 뻔했다. 서랍을 열어보았다. 마침 요리용 가위가 있었는데 두 개였다. 그 가운데 하나를 집었다. 날은 뾰족했고 무척 가벼웠다. 지니고 다니다가 들켜도 문구용 가위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건 설희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운명의 그 날은 며칠 째 내린 비에 강물이 엄청 불어나 있었다. 설희는 수업이 끝난 뒤 친구 여학생들과 창호 학교로 갔다. 그 날은 창호가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연습을 하는 날이었다. 그들은 매주 목요일마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빗속에서 뛰고 있는 창호의 모습은 늠름했고 중2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다. 창호가 골을 성공시킬 때마다 여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을 본 창호가 희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엇다. 사춘기 여학생들한테 보인 그 모습은 정말 멋있기 짝이 없었다. 연습이 끝났다. 그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간 뒤 여학생들도 각자 갈 길을 갔다. 설희는 혹시 창호가 일찍 나오지 않을까 하여 잠시 교문 근처에서 기다렸다. 한 시간을 기다렸으나 창호 일행은 나오지 않았다. 안에서 웃음과 노래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마 파티 같은 것을 하는 모양이었다. 해가 길 무렵이었지만 흐린 날이라 일찍 어둑해졌다. 설희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학다리를 거의 지나왔을 때였다. 다리 아래에서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호석이었다. 설희의 팔목을 움켜잡는 호석의 힘은 억세기만 했다. 
 "소리치면 죽여버린다."
 호석이 다른 팔로 설희의 목을 잡았다. 예상 못한 기습에 설희는 소리를 지르기는 커녕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설희는 다리 아래로 질질 끌려갔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트럭 한 대가 다가왔지만 그대로 지나쳤다. 비에 불어난 물은 갈대숲 중간까지 차올라 있었고 흐르는 물소리가 굉장했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못 들을 것 같았다. 호석은 교각 축대에 설희를 밀어붙이고는 잡았던 손을 거뒀다. 설희는 주저않아 목을 잡고 켁켁거렸다.
 "내가 경찰에 못 불 줄 알지? 천만에. 넌 그러길 바래?" 호석의 목소리는 흥분에 차 있었다.
 "아니." 설희가 도리질을 했다.
 "내가 그러면 너넨 끝장이야. 네 고모는 빵을 가고 넌......."
 "끔찍한 얘기 하지 마. 원하는 게 뭐야? "
 호석은 대답 없이 발을 들어 설희의 등을 찍었다. 설희는 바닥에 뒹굴었다.
 "대체 왜 이래? 너한테 지금까지 돈도 주고 맞을 만큼 맞았어."
 "그래? 네가 얼마나 줬다고. 그리고 내가 창호 그 새끼한테 맞은 걸 생각하면 너희 둘 다 죽이고 싶다." 호석이 설희의 머리채를 잡았다. "재미있네, 오늘."
 "난 재미 하나도 없어." 설희가 말했다. "오늘 왜 이래? 돈이 필요해? 얼마야?"
 "아니. 돈은 필요 없어. 내가 거지냐? 건방진 년."

 호석이 화난 얼굴로 때릴 듯 손을 치켜들었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느 덧 창호 만큼이나 덩치가 커진 녀석의 몸이 설희 앞을 바싹 가로막고 있어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험한 동창생들 - 1. 전학생 소녀 ①

 

 

 1. 전학생 소녀 

 

 

 

 


 1993년. 강물이 구비구비 관통하는 경기도 북단 Y군에도 봄이 왔다.

 강가의 버들강아지에 물이 오를 무렵, K초등학교 3학년 2반 담임선생은 학생들에게 새 벗을 소개했다. 그 나이 또래의 평균 키에 얼굴 생김새가 수수한 소녀였다. 그러나 눈매가 깊고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워 보였다. 소녀는 학생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근 Y군에서 그리 멀지 않은 E시에서 전학을 왔다며 자신의 이름을 임설희라고 했다. 소녀는 잘 다려진 회색 면바지에 유명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검은 티를 입고 보라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도시풍 옷차림의 이 소녀는 처음 나타난 그 날로 학교 학생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한동안 이 학교에 전학을 온 학생이 없었거니와 자동차 사고로 졸지에 부모를 잃고 당분간 자기 고모 집에 의탁을 하게 되었다는 배경이 호기심과 동정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소녀에 대한 관심도 점차 학생들 사이에서 줄어들어 갔다. 소녀는 명랑했고 친구를 알맞게 사귀었으며 그다지 눈에 띄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특별한 동정을 받을 만큼 이곳 어린이들의 집안 사정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부모의 이혼이나 도시행으로 조부모에게 맡겨진 아이들, 쇠락하고 있는 소규모 자영업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집안의 아이들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전의 설희 부모는 E시에서 작은 식당을 하고 있었다. 지난 해 한가위 명절에 아빠는 승용차에 엄마와 설희를 태우고 자신의 본가가 있는 충남 B시로 가고 있었다. 고향집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 경사가 심한 길에서 차는 중앙선을 넘어온 소나타 승용차와 정면충돌했다. 설희 부모와 소나타 운전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설희는 머리에 찰과상을 입고 목을 다쳤지만 큰 부상 없이 기적으로 살아남았다. 불행하게도 부모에겐 변변한 보험 하나 없었고 죽은 소나타 승용차 운전자가 무보험자였기에 설희 앞으로 나온 보상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보상금마저 아버지가 받은 은행대출금을 갚는 데에 거의 쓰였다. 한마디로 천애고아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고향에 있는 할머니는 경제적으로 설희를 떠맡기에 여러모로 적당하지 않았다. 한편 외가는 그럭저럭 잘 살고 있었는데 외조부모는 연로했고 막 결혼한 외삼촌과 아직 독신인 이모는 설희를 책임지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외조부모는 설희를 친가 쪽에서 맡아주기를 바랐다. 대신 양육비로 일정한 적지 않은 목돈을 내겠다고 제안했다.

 결국 친가 쪽 누군가가 설희를 떠맡아야 했는데 건설노동자인 큰아버지는 결혼하지 않은 채 해외를 떠돌고 있었던지라 우여곡절 끝에 Y군의 한 면사무소에서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고모가 설희를 당분간 맡기로 했다.


 설희의 고모 임지현은 그 해 스물여덟 살로, 5년 전에 Y군에서 건설자재상을 하고 있는 남자와 결혼했다. 3년 전에 이곳에서 공무원 자격증을 따 면사무소에 나가고 있다. 그녀보다 7년 연상인 남편과의 사이에 아직 자식은 없다. 집안에서 장남인 남편은 지현이 아들을 낳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생활이 안정궤도에 오를 때까지 임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그 배경엔 남편의 난잡한 여자관계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지현은 설희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맡겠다는 조건으로 설희의 친권자가 됐다. 그녀의 남편은 그걸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사업이 어려워지고 있던 터라 설희 앞으로 나온 외가의 목돈에 눈독을 들이곤 아내의 계획에 동의했다. 

 

 고모네는 학다리 근처 마을의 한 허름한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겉보기와 달리 집안은 깨끗했고 마당은 제법 넓은 편이었다. 고모는 부모를 잃은 설희의 처지를 생각해 아낌없이 보살폈다. 용돈도 넉넉히 주었고 옷이나 학용품, 장난감과 악세서리도 늘 새것으로 바꾸어주었다. 이웃들은 설희 앞으로 나온 돈을 쓰고 있는 거라고 수군거렸지만 고모는 그 돈에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성품이 꼼꼼한 고모는 설희에게 가끔 통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봤지? 봤지? 이건 너에게 생명과 같은 돈이야."
 그러나 설희는 그 돈의 가치가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고모는 나름 지독한 여자였다. 주말에 가끔 서울로 나가곤 했는데 어느 날 고모는 통장을 다시 보여주었다. 거기엔 동그라미가 제법 많이 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것도 네 거야. 사고를 내고 죽은 사람 있지? 그 부모한테서 받아냈지. 잘 사는 사람이드만. 한 1억 받아낼 걸 그랬지?"
 설희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간단하게 계산해서 피짜 한 판이 오천 원이니까 적어도 피짜 만 개는 먹을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뿌듯했다. 그렇게 마음을 써주는 고모가 몹시 고마웠다.
 고모는 면사무소에서 아주 열심히 일했다. 사무실에 앉아 있기보다 주로 문제가 있는 가정을 찾아다녔다. 독거노인을 챙겨주고 부모가 없는 가정의 아이들을 돌봤으며 지원금이 나오면 그걸 들고 대상자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일손이 바쁠 때면 설희에게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고모는 강한 여자였다. 고모부 사업이 실속이 없어 그리 넉넉한 살림살이는 아니었지만 집안을 알뜰하게 꾸려나갔다. 고모부 도움 없이도 일과 살림에서 완벽에 가까운 여자였다. 가끔 집에서 서류를 늘어놓고 밤새 끙끙거리기도 했는데 다음 날 끄덕없이 면사무소에 출근했다. 고모에겐 또순이, 수퍼우먼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고모는 집안이 흐트려져 있는 꼴을 보지 못하는 성격이라 설희에게도 정리정돈에 관한 교육을 철저히 했다. 안방과 주방 청소는 고모가 했지만 작은 거실과 마당 청소는 설희에게 시켰다. 바닥에 머리카락이 있어선 안 되었고 침대 이불은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했으며 책상은 지우개 똥 하나 없이 깨끗해야 했다. 티브이 리모컨은 늘 한 자리에 있어야 했고 옷은 옷장이나 빨래줄, 옷걸이 말곤 다른 데서 굴러다녀선 안 되었다. 하루는 고모의 헤어스프레이를 썼는데 고모는 퇴근하고 와서 한 눈에 알아차리곤 그것을 썼느냐고 물었다. 냉장고 내용물 위치가 바뀌어도 금세 알아내곤 했다. 심지어 냉동실에 얼려둔 얼음조각 숫자 조차도. 설희는 고모에게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은연 중 설희 몸에 배기 시작한 그 습관은 장차 설희가 살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고모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특히 닭고기 요리를 잘 했는데 닭곰탕이나 삼계탕, 닭볶음탕은 일품이었다. 특히 닭살을 발라내 고추장을 바르곤 숯불에 구운 뒤 나무꼬치에 꽂은 닭꼬치를 설희는 좋아했다. 설희는 그걸 먹을 때마다 찬사를 잊지 않았고 고모는 즐거워했다.
 "고모는 닭꼬치 장사해도 되겠어."
 설희가 그렇게 말하면 고모는 "그렇게 맛있니? 에이 요것."하며 설희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고모의 요리 솜씨가 남다른 데도 불구하고 무슨 일인지 고모부는 거의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 설희로선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무렵 고모부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오는 고모부와는 거의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집에 안 들어오는 날도 많았고 어쩌다 일찍 들어오는 날이나 휴일에는 안방에서 잠만 잤다. 그러니 부부사이에 대화가 거의 없었다. 설희와 마주쳐도 그저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고모 몰래 용돈은 자주 주는 편이었다. 설희는 나름 고모부를 내성적이며 정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좋지 않은 소문도 많았다. 여자 문제 말고도 설희가 이곳에 오기 전에 고모부가 고모에게 자주 폭력을 가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술을 마시고 외박한 것을 고모가 추궁할 때마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고모를 때렸다고 한다. 그러나 설희가 온 뒤로 고모부는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설희는 와장창 하는 소리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고모부가 그릇을 집어던지고 고모를 주먹과 발로 때리고 있었다. 소문대로였다. 설희는 겁에 질려 침대로 올라가 몸을 한껏 웅크리고 밖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날 죽이기 전엔 그 돈에 절대 손 댈 수 없어! 그건 그 애 거야!" 고모가 소리쳤다. 무슨 상황인지 설희는 짐작이 갔다.
 "잠깐 빌리자는 것 뿐이야. 굶어죽고 싶어?" 고모부가 고모의 뺨을 때렸다.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집에 돈을 가져왔다고 그래?" 고모는 지지 않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거의 내 돈으로 생활을 꾸렸어. 네 돈 바라지도 않아. 그러니까 알아서 처리해."
 고모부는 욕설을 퍼붓더니 휑하고 어둠 속으로 사려졌다. 다음 날 아침 설희가 일어나보니 고모는 퉁퉁 부은 눈으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설희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어제 다 봤지?"
 "네."
 "내 집구석도 구제 못하는 판에 남의 가정 보살피고 있다니, 내 팔자도 참." 고모는 그 뒤로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고모는 창피해서인지 그 일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고모에겐 오로지 교회가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평일 새벽기도회를 꾸준히 나갔고 주말엔 종일 교회에서 살았다. 여신도회장과 주일학교 반사를 자창해 맡기도 했다. 설희도 고모의 권유로 교회에 몇 번 따라다녔지만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게 더 좋아 다니길 그만두었다. 고모는 그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이렇게 말하고 했다.
 "너도 언젠가는 예수님을 믿게 될 거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셔."
 그럴 때마다 설희 마음 속엔 반항기가 발동했다. 그렇게 우릴 사랑한다는 예수님이 부모를 빼앗고 고모를 다치게 하다니, 설희는 예수가 없거나 만약 있다면 고모부처럼 참 무심한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부부는 또 싸웠다. 설희가 자기 방문에 귀를 대고 가만히 들어보니 고모부가 무슨 보증인가를 잘못 서서 문제가 된 것같았다. 고모는 닥달했고 고모부는 예전처럼 물건을 던지거나 고모를 때리지는 않았다. 다만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고모 입에서 여자 이름이 나왔을 때였다. 집이 떠나갈 듯이 쾅, 소리가 난 뒤 누군가 후다닥 집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설희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보니 식탁이 엎어져 있었고 컵과 과자 그릇, 과일들이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고모는 설희가 나온 것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수 같은 새끼." 고모가 중얼거렸다. 고모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설희는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런 날이 계속되면 고모나 고모부 가운데 한 사람은 크게 다칠 것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