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③

 

 

 "그렇지." 이근우가 힘없이 대답했다.
 누들이 메모 하나를 건네주었다. 거기엔 '학암포 최대감'이라고 적혀 있었다. 접선 장소와 시간도.
 "현명한 판단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형님께 베푸는 마지막 호의입니다. 다음에 만나면......알지요?"
 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클럽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이근우는 한 시간 정도 그곳에 더 머무른 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중국 가서 읽을 책을 사러 지하도를 내려가 교보서점으로 들어갔다. 두께가 두툼한 추리소설 두 권을 골라 서점 밖으로 나왔을 때 한 여자 가수가 무대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청중이 별로 없는 걸 보니 무명인 듯 했다. 계단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을 때였다. 젊은 경찰관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요즘 시대에 도심에서 무슨 불심검문인가. 처음 겪는 일에 그는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애써 태연하게 주머니에서 위조 신분증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노숙자의 것을 변조한 것이었다. 경찰관이 무전기를 통해 조회를 해보더니 신분증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일어나 지하철 출구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 때 그 경찰관이 물었다.
 "실례지만 주민등록번호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런, 그걸 어떻게 외우나. 그가 대답 없이 몸을 돌리자 경찰관이 어깨를 잡았다. 그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하도를 나오자 그를 쫓는 이들은 4, 5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골목으로 뛰어들어가며 위조여권과 달러, 차명계좌 용 현금카드를 여러 쓰레기통에 나누어 처박았다. 그러는 동안 경찰들과의 격차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일부는 길을 가로질러 그의 행로를 가로막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을 피하려 화단을 뛰어 넘고 작은 철책을 넘었다. 그러나 포위망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독 안에 든 쥐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커피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여종업원 하나 말곤 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시간을 벌기로 했다. 팀원들에게 자신이 잡혔다는 걸 알리기 위한 필사의 조치였다. 커피숍에 뛰어들어가자마자 여자에게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 문을 잠갔다.
 도주하는 남자의 난데없는 인질 사태로 경찰은 접근을 자제하기로 했다. 지원경력이 속속 도착했고 책임자가 커피숍으로 전화를 걸었다. 남자 입에서 의외의 말이 쏟아졌다.
 "강남서 오정화 오라고 해. 권총을 들고 오든지, 미사일을 지고 오든지 그건 상관 없어. 자수할 테니까. 다만, 반드시 그 여자 혼자 들여보내야 돼."
 "그러는 당신은 대체 누구요?" 책임자가 물었다.
 "나, 이근우다. 오정화에게 그렇게 말하면 알아."
 
 정화는 오랜만에 일산에 있는 별장을 찾기로 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단독주택이었는데 아버지의 유산 가운데 정화 몫으로 남겨진 유일한 것이었다. 평소 한 달에 한 번 들러 청소를 하고 휴식도 가졌지만 찾지 않은 지 벌써 3개월이 넘었다. 벌써 휴가 마지막 날이다. 심상치 않게 며칠 걸러 비가 내리더니 그제야 기상청은 장마가 시작됐다고 발표했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도로엔 차들이 밀리고 있었다. 긴 차량정체 대열을 따라가면서 지난 이틀 동안의 휴가를 떠올려 보았다. 하루는 오피스텔에서 빈둥거렸고 또 하루는 혼자 쇼핑을 하고 영화도 한 편 봤다. 꿀맛 같은 이틀이었다.

 오늘 오전엔 시사N의 현아영기자를 만났다. 작년에 그녀 주선으로 그 저널지에 칼럼을 썼고 인터뷰도 했다. 그 내용이 문제가 되자 편집장에게 경찰 상부의 압력이 가해졌고 결국 그녀는 정치부에서 쫓겨나 문화부로 발령이 났다. 아영은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부자를 중심으로 한 기사를 쓰자니 배알이 꼴린다는 점 빼고는.

 "특종 좀 줘라, 언니." 아영이 말했다. 그녀는 정치부에의 복귀를 바라고 있었다.

 "기다려 봐." 정화가 대답했다. 정화 역시 정관계 물밑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아영이 필요했다.
 아영에게 고위직 경찰 내부의 비리 의혹에 대해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신이 난 듯 얽히고 설킨 사연들을 수도 없이 털어놓았다. 별로 근거가 없는 것들이었지만 정화에게 도움이 됐다. 어느 순간,  정화가 식상해서 물었다.

 "대체 착한 간부는 어디 있다니? 그런 얘기 좀 해 봐." 

 그러자 아영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언니 앞에서 미안한 소리지만, 짭새든, 판검새든, 군바리든 간에 남자 간부공무원 가운데 그런 짓 안 하는 넘들이 어딨수?" 그리고 덧붙였다. "여자 공무원들도 간부가 되면 거, 만만치 않드만."
 정화는 할 말을 잃었다. 실제 여자 경찰 가운데 고위직에 오른 인사들이 여럿 있었지만 얼마 안 가 줄줄이 경찰을 떠났다. 

 사실 이 망할 놈의 비리 공화국을 만드는 주범은 일반국민이 아니라 바로, 비리 기업가와 공무원인 것이다. 그 중심에 재벌은 물론, 청와대와 검경 등 권력기관이 있다. 그런데 정화 자신도 정작 떳떳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똥물에 몸담은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정화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영과 헤어져서도 언짢은 기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한편 정화는 강력3팀으로 돌아와 몇 사건을 처리하면서도 조 경정이 주도하는 이근우 연쇄살인 특별수사팀의 정보를 규영을 통해 수시로 전해듣고 있었다. 수사관이 직접 호주로 날아가 청담동 의사의 전처를 만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 조 경정의 특기인 저인망 식 수사도 별 소득이 없다는 이야기 등. 또 이근우의 군복무 동기들과, 각급학교 동창들, 친척들, 이웃들을 광범위하게 탐문했지만 그가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두 아연실색했을 뿐, 단서가 되는 진술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예상보다 치밀한 자임이 틀림없었다. 다만 구기동 북한산 등산로 입구에서 그가 사용하던 벤츠를 발견한 게 유일한 성과였다. 이근우는 정황 상 렌터카와 대포폰을 이용하는 듯했고 뒤에서 누군가가 도피를 돌봐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규영은 조 경정에게서 이 사건보다도 다른 일에 더 골몰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게 무어냐고 물었더니 중국에서 죽었다고 경찰이 지난 4월에 발표한 다단계사업 사기범 조희팔의 행적 조사라고 했다. 조 경정의 책상 위에 있는 두툼한 관련 자료철과 전화통화 내용이 그를 뒷받침한다고 했다. 안 그래도 정화 역시 조희팔이 중국에서 죽었다는 것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조희팔과 내통한 경찰 여럿이 이미 구속되거나 옷을 벗었지만 경찰과 검찰 간부들 가운데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리인사들이 있다는 소문을 정화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조연현이 그 사건을 추적하고 있다니, 정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사는 조 경정의 측근으로 알려진 양하섭 경감이 주도하고 있었다. 정화와 경찰대 동기로, 재작년에 경감으로 진급한 정보통이었다. 정화와는 몇 년 전 수원경찰서에서 같이 근무했다. 당시 껄끄러운 일이 하나 있었다. 사이비종교재단의 이탈신도살해사건을 마무리하던 도중, 그가 속한 정보과가 그 공을 가로채갔던 것이다. 그 핵심인물이 양하섭이라는 소문이 당시 수사과 안에서 파다했다.

 

 별장에 도착한 건 오후 두 시 무렵이었다. 마당에 잡초가 우거진 걸 빼곤 건물에 큰 이상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열쇠가 말을 듣지 않았다. 잠금장치가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문을 밀자 그대로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안은 엉망이었다. 거실엔 술병과 유리조각이 뒹굴고 있었고 먹다 남은 음식들에 파리가 잔뜩 들러붙어 있었다. 티브이는 깨져 있었고 냉장고 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내용물은 다 썩어 있었다. 누군가 문을 따고 들어와 파티를 한 것이다. 동네 불량청소년들의 짓일 수도 있었다. 규영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방으로 갔을 때 화들짝 놀랐다. 침대 시트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매트리스 위엔 과도가 하나 꽂혀 있었다. 침대 머리맡 벽에 붉은 스프레이로 휘갈긴 낙서가 보였다. 정화가 우뚝 그 자리에 섰다.
 - Will Kill You(너를 죽일 거야)!
 기억이 나는 메시지다. 종서가 항소심에서 실형 판결을 받고 법정을 나가며 방청석에 있던 그녀에게 던진 말이었다. 정화는 서재 책장을 옆으로 밀고 바닥 판자 몇 개를 걷어냈다. 권총과 실탄은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글록18. 가볍고 연사력이 뛰어나 정화에게 잘 맞았다. 그것을 챙겨 핸드백에 넣었다. 그리곤 별장 안팎 곳곳을 꼼꼼히 살폈다. 거실과 안방 말고는 손을 타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종서는 대체 어떤 무리와 여기서 즐긴 걸까. 다시 한번 거실 바닥을 조사해 보았다. 희미했지만 백색가루가 양탄자에 묻어 있었다. 정화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주방서랍에서 다른 칼을 꺼내 양탄자 일부를 잘라 조심조심 비닐봉지에 넣었다. 빈 캔 두 개와 침대의 칼, 그리고 쓰다 남은 스프레이캔도. 도저히 별장 안을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화는 잘 아는 이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집안을 치워줄 인부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장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통화를 마친 뒤 소파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을 때 규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전화했느냐고 물었다.
 "노처녀 히스테리를 며칠 안 겪겠다 싶어 좋아했는데 이틀 지나니 궁금해지네요."
 "뭐가 궁금해?" 때가 때인지라 정화는 약간 짜증을 냈다. 그러나 규영은 그녀의 지금 기분을 모르고 있었다.
 "혹시 누군가가 납치해 간 건 아닐까, 아니면 삶의 외로움에 지쳐 극단의 선택을 한 건 아닌가, 말이죠."
 "이 새끼가." 씨팔, 하는 욕까지 붙이려다 말았다.
 규영은 자기도 휴가를 냈다면서 저녁을 같이 먹고 싶다고 했다. 거절했지만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나왔다.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마침 기분전환이 필요했던 정화는 결국 그와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화를 끊었다. 갈수록 그의 늘어가는 수다가 지겨웠지만 며칠 안 보니 그녀도 이상하게 그가 그리워졌다. 그리고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상관으로서 진지하게 들어보고 싶었다. 아내와의 문제일 게 뻔하지만 말이다. 엉망인 지금 기분을 돌리려고 규영과의 저녁식사를 상상해 보았다. 연한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와 샐러드, 거기에 곁들인 와인. 귀를 간지럽히는 은은한 음악, 앞에는 제법 잘 생기고 젊은 남자. 그것만으로도 로맨틱했다. 상상의 나래를 더 펴보았다. 진진한 대화 속에서 깊어가는 밤, 눈빛이 마주치는 분위기, 자연스러운 입맞춤, 그리고 아늑하고 시원한 모텔방, 푹신푹신한 침대, 몸 곳곳을 더듬는 젊은 남자의 손길과 체취, 뜨거운 숨결......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정화는 혼자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후배 경찰놈과 섹스하는 걸 상상하다니, 이게 무슨 추태람. 정화는 벌떡 일어나 핸드백과 수거물을 챙겨 별장을 나왔다.
 비는 그쳐 있었고 초저녁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싶었다. 규영과의 약속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규영의 목소린 다급했다.
 "비상이 걸려 종로로 출동하랍니다. 이근우가 나타났대요!"
 "뭐라구?"
 "아마 팀장님에게도 곧 연락이 갈 텐데요?"
 그의 말대로 통화 중에 수신음이 들렸다. 규영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곤 그 전화를 받았다. 조연현 경정이 직접 건 것이었다.
 "휴가인 건 알지만 비상사태야. 급히 종로로 와줬으면 하는데, 얼마나 걸리겠나?"
 "대체 무슨 일인데요?" 정화가 모른 체하며 물었다.
 "이근우가 종로에 나타났대. 인질극이야. 놈이 자네와 만나고 싶다고 하는군."
 왠지 불길하더라니, 그래서 수사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화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속도 메슥거렸다. 놈은 왜 그녀를 걸고 넘어지려는 걸까? 알겠다고 하곤 그 전화를 끊고 다시 규영과 통화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왠지 아쉽고 서운했다.
 차 시동을 걸고 라디오 뉴스채널을 틀었다. 연쇄살인 용의자가 종로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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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 2012-12-07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후의 글은 없나요?
궁금궁금...ㅡ.ㅡ;;;

이주하 2013-01-03 09:47   좋아요 0 | URL
아이고,졸고에 관심을 주셔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