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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 왜?"
 정화의 물음에 규영은 대답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한참 동안 그 자세로 있었다. 정화는 그의 얼굴 옆모습에서 낮에 최 과장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우울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 뒤 그가 얼굴을 다시 정화에게 돌렸다.
 "그런 얘기 재미없죠? 그만둘래요."
 "싱겁긴. 다음 달이 아이 돌이라며? 대체 무슨 일인데?"
 정화가 그의 빈 잔에 와인을 채우며 재차 물었다.
 "제 아이가 아니에요."
 그의 대답에 그녀는 하마터면 병을 엎지를 뻔했다. 그는 아내가 임신 6개월 되던 때에 결혼을 했다.
 "알고 있었어?"
 그가 얘길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는 몰랐죠. 낳고서 알았죠, 아이 혈액형이 이상하더군요. 저는 A형, 아내는 O형인데 아이는 AB형이니. 저도 그렇지만 아내도 당황했어요. 내 추궁에 그 진실을 얘기해 주더군요. 저와 잠자리를 하던 그 시기에 운전교습을 받았는데 운전학원 강사와 하룻밤 지낸 적이 있다고요. 산후조리를 마치곤 집을 나가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임신중독으로 상당 기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죠. 그런 처지인데 아내더러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지난 1년이 지옥 같았습니다. 아내가 안정된 거처를 마련하기까지 1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거절했죠. 안됐지만 저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서요."
 정화는 갑자기 피곤해져서 그 얘길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거 참, 사람들 사는 모양새들이 왜 이래? 그래서 내가 결혼하기 싫은 거야."
 "죄송합니다. 한심한 얘길 해서."
 침묵 속에 둘은 말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게 나와 상의하고 싶은 것이었어?" 정화가 물었다.
 "아니요, 본론이 남아 있습니다."
 "뭐지?"
 "경찰을 떠나려고요."
 "그건 또 왜?"
 "어쩌다보니 박 란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습니다."
 그의 말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둘 사이엔 전혀 그런 조짐이 없어 보였다. 아니, 정화가 부하 직원에게 세세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정화는 속으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도 별 수 없구나.
 "그렇군. 그런데 그게 왜 사직하는 이유가 되는 거지?"
 "경찰직은 남자에게 장래성이 없잖아요. 여자에겐 괜찮은 직업이지만요. 친구와 조그만 사업을 하나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 좋은 데로 옮긴다면야 내가 말릴 이유가 하나도 없지. 결심을 굳힌 건가?"
 "네." 그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기 전에 팀장님께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상의가 아니고 통보로구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해.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내일 사직서를 받아주시는 것과 제가 떠나더라도 박 란을 잘 챙겨주십사, 하는 겁니다."
 하마터면 정화 입에서 '박 란이는 너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인내심이 그녀를 꾹 참게 했다. 대신 와인 잔을 잡은 손이 조금 떨렸다.
 "그러지."
 정화가 짧게 대답하고 이번엔 그녀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왜 괜찮은 남자들은 다들 한심한 여자와 사랑에 빠질까, 정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를 탐하려던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미련이 남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 미련은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가 얼마 있으면 더 이상 자기 부하직원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와인 탓에 하체에 은근히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그 불꽃에 규영이 기름을 부었다.
 "팀장님을 속으로 참 좋아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싱거운 이야기가 계속될 것 같아 정화가 미끼를 던졌다.
 "지금은 안 좋아하고?"
 그러자 규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지금은 안 좋아하냐고?"
 강렬한 정화의 눈빛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와 박 란과의 애정전선에 영향을 끼치고 싶은 욕망이 강렬하게 그녀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손을 뻗어 그의 뺨에 갖다 댔다.
 "오늘 나하고 자 볼래?"
 그러자 규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아닙니다." 그러더니 홀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집으로 간 듯했다. 정화는 쓴웃음을 짓고는 병 바닥에 남은 와인을 남김없이 마시고는 레스토랑을 나왔다. 길 건너편에서 규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삼성동에서도 가장 후미진 골목에 있는 모텔로 들어갔다.
 규영은 거칠었다. 방에 들어서자마 그녀를 침대에 내던지듯 눕히고는 그녀에게 입술을 포갰다. 둘의 옷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정화는 눈을 감고 야수처럼 덤벼드는 규영에게 몸을 온전히 내맡겼다. 그의 입술과 손이 그녀의 목과 가슴, 배와 하복부를 지나 속살을 공략할 즈음엔 그녀의 몸은 이미 활쩍 열려 있었다. 애무의 농도가 진해지자 정화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규영은 입술을 그녀의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삽입을 해오기도 전에 그녀의 몸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곧 잠시 내던져둔 이성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지, 속으로 되뇌며 그녀가 몸을 뒤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 단계까지 와서 젊디젊은 남자에게 있어 정화는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더욱 거칠어지는 규영의 애무에 정화는 에라 모르겠다, 저항을 포기하고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철저히 즐기기로 했다. 규영의 힘과 정화의 기교에 모텔방은 곧 둘의 신음과 교성으로 가득해졌다.
 몇 차례의 격한 정사가 지나간 뒤 정화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큰 대자로 누운 채 정화의 허리를 감고 있는 규영의 손을 잡으며 그녀가 말했다.
 "사직서 내는 것, 잠시  보류해."
 규영이 뭐라고 대답했지만 그녀에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잠에 빠져들었기 떄문이었다.

 

 

 다음 날 정화는 여느 때처럼 출근했다. 새벽 7시경 잠을 자고 있는 규영을 홀로 남겨두고 모텔을 나온 뒤 집에 들러 단장을 하고 탓에 그녀를 이상하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류를 훑어보고 있을 때 규영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 팀장님, 오늘도 화이팅.
 정화가 답신을 보냈다.
 - 사직서 보류?
 곧 메시지가 왔다.
 -넵.
 정화도 다시 보냈다.
 - 짜식. 수고해.
 정화는 미소를 짓고 잠시 간밤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오랜만에 맛본 돌발 섹스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는 것 말곤 구체적인 과정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편 섹스 이후의 허탈감이나 마음의 부담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다만 그와 함께 일하고 있을 박 란에게 은근히 질투심이 이는 건 사실이었다. 정화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서류철을 들추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결제서류를 들고 최 과장 방을 찾았으나 그는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부속실 직원 얘기론 오늘 결근을 할 것 같다고 했다. 정화는 어제 그와 나눈 김창호 건에 대해 자료를 부탁하려던 참이었는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 감식반의 마홍수를 몰래 휴게실 한구석으로 불러 일산 별장에서 가져온 체모와 캔과 스프레이 등을 건네주며 지문 감식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경찰 내규 상, 사적인 청탁을 해선 안 되었지만 마홍수는 흔쾌히 해보겠다고 했다. 정화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머지않아 그를 크게 쓸 날이 있을 것 같았다.
 오후에 서울청 감찰팀에서 연락이 왔다. 감찰실로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지난 번 이근우의 인질극 과정과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 진술을 들어볼 게 있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정화는 바쁜 업무를 핑계로 다음 주에 출두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감찰실 직원이 퉁명하게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박두호 서울청장의 심복인 감찰실의 양하섭 경감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그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으니 한두 시간이면 끝날 거라고 하며 잠깐 다녀가기를 권유했다. 이번에도 정화는 오늘은 시간이 없다며 출두요구를 거절했다. 양하섭이 전화를 끝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장만영 서장이 자기 방으로 오라는 연락을 보내왔다. 
 서장 방엔 서진욱 수사과장도 와 있었다.
 "고생 많지?"
 서진욱이 정화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고생은요." 정화가 활짝 웃었다. "과장님이야말로 고생이 남다를 걸요?"
 그는 세간에 큰 이쓔가 되고 있는 안철수 대선 예비후보의 강남 룸살롱 출입에 대해 은밀히 내사를 벌였다가 언론의 추적보도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안철수 씨가 소위 부유층 패거리들과 함께 관내 룸살롱을 드나들었다는 건 일선 의경도 다 아는 일이었는데 문제는 안 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과 경찰이 비밀내사를 한 데서 비롯되었다.

 
 위험한 동창생들 - 6. 낯선 재회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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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는 인물이지?" 최 과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정화는 정색을 했다.
 "왜 제가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죠?"
 "자네가 미국에 있을 때 놈을 처음 만난 걸로 알고 있어."
 "과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죠?"
 "우린 무서운 조직이야."
 정화는 입을 다물었다. 과장급 이상이면 부학 직원의 인사파일을 언제든 열어볼 수 있다. 정화 자신도 아직 모르는 내용. 아마 거기서 알아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소소한 사실까지 적시해 있나? 정화는 문득 '인권'에 대해 생각했다. 침묵에 싸인 찻집엔 노래만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 지난 밤에 내 님은 무슨 꿈을 꾸셨나 바람에 실려와 내 곁에 찾아...
 정화의 표정에 흐르는 어두운 기색을 최 과장은 놓치지 않았다.
 "자네 인사파일엔 없는 내용일세."
 "그렇다면?" 정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옛날 자네에게 놈의 미국행적을 추적해달라고 했던 게 바로 나일세. 기억 나나? 한동안 내가 놈 사찰담당이었지."
 "아아. 그랬군요.......아, 참. 그런데 그는 지금 교도소에 있지 않나요?"
 정화는 실은, 설희의 미국에서의 마지막 연락처를 김창호를 통해 알았다. 주변에 눈이 있어 직접 만난 건 아니고 후배 직원을 통해서였다. 그 몇 년 뒤 그는 살인미수와 불법 인신매매 건으로 구속되었다. 형기를 다 채우려면 아마 내년 말까지는 복역해야 할 것이다.
 "무슨, 특사로 풀려난 지 벌써 2년이 되어가는구먼."
 정화는 손으로 머리를 탁, 쳤다.
 "그랬군요."
 최 과장은 그녀에게 김창호가 관련된 신흥 폭력조직에 대해 대해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반은 아는 얘기고 반은 모르는 얘기였다.
 "놈들을 속칭 '태천파'라고 하지. 그들이 스스로 이름을 지은 건 아니고 조직 리더인 조태천이 이름을 따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거야. 조직의 발단은 옛날 동두천일대의 골목 양아치에서였다고나 할까? 아까 얘기한 김창호 등을 끌어들여 곧 그 일대를 평정했고 이후 안양으로 와 평촌에서 룸살롱 몇 개를 운영하며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지. 그런데 안양은 이미 OB파가 꽉 잡고 있는 지역이라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었지. 그러자 몇 년 전부터 강남으로 파고들기 시작해. 강남 일대 세력들이 하길 꺼리는 사업에 끼어든 거지. 그게 바로, 마약 공급과 청부폭력이야. 이 과정에서 행동대장인 김창호가 구속되지. 놈이 없는 동안 조태천은 김창호를 외면하고 자신의 측근 박시백이란 놈을 행동대장으로 임명했는데 썩 능력이 있는 놈은 아니었어. 그 세가 위축되면서 태천파는 결국 강남 최대세력인 창촌파의 밑으로 기어들어가 속칭 '시다바리' 역할을 맡게 되지. 다시 세를 불린 건 김창호가 촐소하고나서부터야. 교도소에서 절치부심으로 기획을 했던 겐가,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세를 불렸어. 6개월 전엔 조태천이를 형식적인 보스 위치로 밀어냈지. 행동대장 노릇을 하던 박시백이는 지금 행방불명된 상태고. 한편 창촌파 두목이 자살하고 행동대장이 실종된 틈을 타 기존 창촌파의 조직원들을 대거 흡수했어. 지금은 기업형 성매매오피스텔 두 개를 중심으로 과거 이현광 영역의 약 30%를 할당받아 차지하고 있지."
 "그렇게 성장한 비결이 뭘까요? 불법적인 것 아니면 그렇게 빨리 크질 못했을 텐데."
 "내가 생각하기엔......." 여기까지 말하고 최 과장은 물을 한 잔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새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저만치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살인과 살인청부업이야."
 "증거는요?"
 "불행히도, 없어."
 "없는 건가요, 아니면 묵인한 건가요. 예컨대 우리 안의 고위 내통자가 있다든지." 
 "내통자에 대해선 모르겠고......혐의는 있지만 아무튼 깊은 수사가 불가능해. 나 역시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주위의 충고를 자주 받았거든."
 "그 '주위'가 대체 누군가요?"
 어느덧 정화의 말투는 피의자를 심문하는 뉴앙스로 가고 있었다.
 "내가 무슨 용의자가 된 기분이군, 헛허. 다양해. 내 입으론 말할 수 없어. 자네가 맡게되면 스스로 알아내야 할 사항이지."
 그가 더이상 자세한 얘길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역시 깊숙히 들어가 있으므로. 정화는 입이 탔다. 물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최 과장에게 양해를 구해 맥주를 한 병 주문했다. 주인이 가져온 병맥주를 따 한 잔 들이킨 후 물었다.
 "강지수 계장 실종과 공무원 남녀의 피살을 김창호 쪽에서 저지른 거라고 보시는 군요?"
 "그냥 느낌이야."
 그는 베테랑이다. 그 '느낌'이라고 말한 걸 과소평가할 수는 없었다.
 "창촌파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그 행동대장들을 처리한 게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추측 뿐이야. 그런데 경고하겠네. 너무 깊은 걸 물으면 곤란해." 최 과장이 미간을 지푸렸다.
 정화는 마지막으로 정곡을 찔러보기로 했다. 그가 인정하면 좋고, 인정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밑지야 본전이란 셈치고 질문을 던졌다.
 "과장님은.....소문대로 창촌파와 가까우셨나요?"
 "응."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정화도 그렇게 했다.
 정화는 그의 괴로운 기색을 눈치채고 더이상 민감한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그를 코너로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후배 직원에게 구태여 흉금을 터놓는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건 예의가 없는 짓이었다. 또한 경찰 생활을 하며 얻은 처세술이지만 많이 알수록 좋을 것도 없었다.
 한 시간 뒤 그들은 찻집에서 나왔다. 그동안 그들은 사소한 일상이야기만 나누었다. 최 과장은 마치 먼 나라로 떠날 듯한 사람처럼 회의에 찬 기색을 여러 번 비추었다. 정화가 위로했지만 그다지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가 길어져 저녁 여섯 시인데도 날이 환했다. 최 과장은 그녀를 서 근처에 내려주고 그대로 퇴근을 해야겠다며 자기 집이 있는 송파 쪽으로 사라졌다. 


 사무실로 가는 복도에서 감식반의 마홍수와 마주쳤다. 그는 "오 경위님 화이팅!"하며 주먹을 들어보이곤 곁을 지나쳐갔다. 
 규영은 자리에 있었다. 어디에 다녀오느냐고 묻길래 정화는 최 과장과 데이트를 하고 왔다고 농담을 건넸다. 이번엔 규영이 자신도 정화와 데이트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요즘 남자들이 왜 이래. 나하고 데이트 못해 환장을 했나?"
 "고민이 있어서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규영의 표정은 심각했다.
 둘은 택시를 타고 삼성역 부근의 한 카페로 들어갔다. 한때 코스닥 주가조작사범을 잡으러 잠복근무를 했던 곳이었는데 분위기가 괜찮았다. 종업원들은 둘이 경찰이란 걸 예나 지금이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여 주문했다. 주문한 걸 기다리면서 정화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규영의 모습을 살폈다. 수려한 얼굴에 오똑한 콧날, 지적으로 보이는 분위기. 남자로서 일의 능력도 있다. 그런 그가 왜 경찰노릇을 하고 있는지 갑자기 새삼스러워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은 여러 잡담을 나누었다. 와인이 몇 잔 들어가고 분위기가 좋아질 즈음, 정화에게 오늘 밤 그와 몸을 섞어볼까 하는 충동이 밀려왔다. 그건 동료 경찰과는 잠자리를 같지 않는다는 그녀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었지만 오랫동안 섹스에 굶주려 있었던 탓에 이성이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민이 뭔데?" 정화가 선배로서의 위엄에다가 살짝 애교를 곁들여 물었다. 그의 고민 속에 정화에 대한 흠모 같은 게 있었으면 하는, 어이가 없는 기대도 있었던 것이다.
 "이혼하려고요."

 

위험한 동창생들 - 6. 낯선 재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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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동창생들 - 6. 낯선 재회

 

 

 이근우가 죽었다. 인질극을 벌이다가 정화의 총에 맞아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지 일 주일이 지나서였다. 그 소식을 정화는 외근 중에 알았다. 그 동안 그녀는 그를 두 번 찾아갔다. 그 때마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녀린 숨결만 내쉬면서 정화의 손만 잡으려고 애썼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불가능했다. 설희와의 관계, 유에스비, 그리고 여죄와 범죄의 동기 등. 조연현 경정의 팀도 안타까워하긴 마찬가지였다. 세 건의 살인에 대해 아무런 진술도 받아내지 못했고 새롭게 등장한 관련 인물 두 명의 소재도 오리무중이었다. 그 와중에 그가 죽은 것이다. 그러려면 차라리 현장에서 죽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를 위해서도, 또한 해당 수사팀을 위해서도. 먼지 같은 인생. 정화는 존재의 무상함을 새삼 절감했다.  
 정화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울러 뒤따를 감찰반의 조사를 떠올리곤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인 검거엔 공을 세웠지만 경찰 총기가 아니라 개인 소유 총기를 사용한 점, 그리고 현장 제압 뒤 이틀 동안 보고 없이 무단으로 잠적한 게 상부의 눈에 거슬렸다는 이야길 들었던 터다. 서로 차를 몰았다. 마른 장마가 휩쓸고 있는 거리엔 먼지가 가득 휘날리고 있었다.
 강력팀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특별수사팀에 파견 나가 있던 규영이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늘은 여기에 어쩐 일이야?"
 "형사가 한 가지 사건만 맡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미진한 건이 좀 있어서요." 정화가 자리에 앉자 그도 다시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근우 얘긴 들으셨죠?"
 "응." 정화가 애써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쪽에 진전은 좀 있나?"
 "전혀요."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 경정이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는 눈치예요."
 "어째서?"
 "그 속을 제가 어떻게 압니까? 무리해서 공을 세울려는 분이 아닌지라 마침 이근우도 죽었으니 특별팀을 해체할 빌미가 생긴 거죠. 팀장님도 그 사건에 미련이 없잖아요? 조 경정의 요청을 또 거절한 걸 보면."
 그가 정화의 눈치를 살폈다. 인질극 직후 조 경정은 그녀에게 재차 합류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왠지 께림칙해서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사건과 다시 조우할 것 같은 예감은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녀가 자청해 사건을 맡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규영은 그 이야길 계속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녀는 외면하고 미제사건 파일을 뒤졌다. 그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최재서 과장이었다. 서 안에 있는 그가 인터폰이 아니라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온 건 의외였다.
 "사무실인가?" 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도 서에 있네. 나하고 데이트 좀 할까?"

 

 최 과장은 정화를 태우고 어디론가 차를 몰았다. 잔뜩 굳은 표정이라 그녀는 행선지를 묻지 않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30분 뒤에 도착한 곳은 남한산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한 찻집이었다. 여주인이 아는 체를 하는 걸로 보아 가끔 들르는 곳인 듯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는데 스피커엔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사랑의 빛들은 언제나 내 곁을 조용히 비
추겠지만...
 마주앉은 그의 얼굴은 많이 수척해 보였다. 검찰 조사와 아내의 불륜행각에 이은 중상으로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용기를 내서 물었다.
 "부인께선 어떠세요?"
 윤다정 경사는 모텔 창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친 걸로 알고 있다.
 "아직 병원에 있지. 일 주일 뒤면 퇴원인데 집으로 들여야 할지 고민이군. 그래도 조강지처인데 앞으로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 여자를 냉정하게 내쫓아버릴 수도 없고."
 "배신감 같은 건 안 드세요?"
 "왜 안 들겠어. 하루에도 이혼을 수십 번 생각하지. 그 연놈들을 당장 잡아넣고도 싶고 말야. 그러나 아이를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 없고. 내가 한심해 보이지?"
 "천만에요. 그냥 안쓰러워 보여요. 아무튼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이겨내라.....좋은 말이군. 그러나 운명을 이길 장사가 세상에 어디 있나? 훗." 그가 쓸쓸히 웃었다.
 그는 정화에게 요즘 맡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러나 크게 관심 있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얘기하는 도중 가끔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곤 했는데 무척 지친 표정이었다. 정화를 이곳까지 데려온 용건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가 얘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결혼은 안 할 건가?" 그가 물었다. 사적인 걸 묻는 건 처음이었다.
 "쓸만한 남자가 없네요."
 "그건 그래."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대로 쓸만한 놈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보니 아니더군."
 "딱히 과장님을 두고 한 소린 아니에요. 이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까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 신물이 나는 걸 어떡해요. 하긴 여자도 마찬가지죠. 남자에게 의지하려 들고, 이기적이고, 음험하고, 한심하고......그러고 보면 제가 아직 미혼인 것도 남자들이 저를 쓸만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일 테죠."
 "아니야. 오 경위는 누가 보아도 멋있는 여자야. 허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 남자들이 접근할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요."
 "난 남자잖아. 남자는 남자를 알아."
 "결혼을 꼭 해야 할까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그러나 혼자 늙으면 외롭지 않을까?"
 "혼자거나, 다른 이와 같이 있거나, 인생은 어차피 외로운 거예요. 다른 이와 같이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이 더 치명적이라고 생각해요."
 "허허, 인생을 많이 살아본 사람처럼 얘기하는군. 하긴 인생에 정답은 없지. 적당히 살다 가는 거니까."
 하지만 정화는 적당히 살긴 싫었다. 그 때 냉방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오늘 왜 보자고 한 줄 아나?"
 "저야 모르죠. 오랜만에 젊은 여자 향기를 맡고 싶어서가 아닌가요?" 정화가 반문하며 미소를 지었다.
 "정답일세. 내가 좀 엉뚱하지? 자네에게 그동안 한 번도 친절하게 대해준 적이 없는 데도 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넨 나를 상관으로 깎듯이 대해주었지. 그동안 그게 참 고마웠어."
 그동안? 정화는 갑자기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디 멀리 가는 사람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혹시 사표 내실 생각인가요?"
 "그래."
 "아......" 정화는 머리를 짚었다. "그렇군요. 꼭 그럴 필요까지야. 과장님은 나름대로 이 직업에 사명감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공로도 많고. 그런데도 왜 그런 결심을 하셨어요? 평생 후회하실 걸요?"
 "후회야 되겠지. 그러나 추하게 경찰직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아. 경찰에 누를 끼치고 싶지도 않고. 나 말야, 곧 구속될 것 같아. 검찰이 칼을 갈고 있어."
 "저런......"
 정화는 할 말을 잃었다. 이근우가 준 유에스비 파일엔 그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룸살롱 사건에 크게 연루되어 있는 건 틀림 없었다.
 "하지만 검찰도 비리에서 자유롭진 못하지. 내가 아는 검사장 몇도 관련되어 있어. 그러나 증거가 없는 게 한이야. 내가 그걸 찾아내려고 하니까 그쪽에서 선수를 치려는 것 같아."
 정화는 그 검사장급들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유에스비를 통해서다. 최 과장에게 그 사실을 알려줄까하는 충동이 몰려왔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개인 사정을 생각하는 건 금물이었다. 더군다나 그 유에스비 파일 내용이 사실이라는 확신도 아직 없었다. 그녀는 그 거대한 블랙커넥션의 실체에 대해 큰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고 있다. 해당 사건을 접할 기회가 없어서다. 또한 굳이 그걸 파헤칠 의지나 욕심도 없었다. 새로운 세상이 와도 어차피 세상은 그런 약삭빠른 놈들끼리 손잡고 돌아갈 테니까. 갑자기 세상에 대한 환멸이 몰려왔다.
 "내가 사표를 내기 전에 장만영 서장에게 자네를 추천하려고 하네. 형사1계장으로 발령해 달라고. 보통 계장은 경감들이 맡지만 자네는 선임 경위니까 가능할 거야."
 드디어 그가 하려고 했던 얘기가 나왔다.
 "그건 왜죠?"
 "1팀에서 맡고 있던 수서동 모텔 사건을 처리하는 데엔 자네가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윗선의 눈치를 안 보니까. 강지수 전 형사계장이 필리핀에서 사라졌어. 십중팔구는 죽었을 거야. 그리고 며칠 뒤 수서동에서 살해당한 공무원 여자가 강지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무슨 말씀인지....." 정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건엔 연관성이 있지. 자세한 얘긴 해주기 어려워. 내 치부와도 관련이 있으니까. 이해해 주게나. 마지막 자존심이지. 다만, 이 이야긴 해주지. 강지수는 룸살롱과 우릴 연결해주던 핵심고리였어. 그는 결정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었지. 아마 그걸 그 공무원 여자와 공유했을 테고. 그래서 제거당한 것 같아."
 "그건 지금 1팀에서 조사하고 있는 내용 아닌가요? 과장님이 통제 가능할 텐데....."
 "1팀장 그놈은 불행히도 윗선의 끄나풀이야. 비록 내게 불이익이 돌아와도 강지수는 내 혈육과 같은 녀석이라 반드시 그의 실종사유를 밝혀내라고 닥달을 했지만 수사 일선에서 멀어져 있는 나로선 역부족이었어. 나도 실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아. 내 추천에 장 서장도 동의할 거야. 자네와 가깝기도 하니까. 나를 위해 그 건을 맡아줄 수 있겠나?"

 정화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최 과장이 여주인을 불러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다.  잠시 뒤 맑은 여자 목소리의 노래가 나왔다.

 - 고요한 새벽에 찾아온 너는 내 님을 닮아서 아무 말이 없구나...

 "산이슬이란 듀엣의 '새벽안개'라는 노래야. 오래된 가수라 자네는 잘 모를 걸세."

 그가 말했고 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슬. 아마 7, 80년대 가수인 듯했다.

 - 그리운 내 님의 소식이나 전해다오...

 "흠. 그런데 과장님은 그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한 자들이 누구라고 추정하시는 거죠?" 정화가 물었었다.
 "속단은 어렵지만 강남에 신흥 폭력조직이 뜨고 있어. 이현광 구속 뒤에 그 유산을 하나하나 접수해가고 있지. 아마 그들과 관련이 있을 거야."
 "그 조직의 핵심은 누구죠?"
 "김창호라는 놈이야."
 그 이름을 듣고 정화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근우에게서 설희 얘길 듣고 그를 떠올렸지만 최 과장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올 줄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위험한 동창생들 - 6. 낯선 재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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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동창생들 - 5. 2004년 뉴욕, 뉴욕 ⑧

 

 

 

 

 

 

 라이언 플래처 당시 뉴욕경찰국 범죄연구관은 2005년 12월 FBI에 보낸 비밀보고서에서 KC-7 프로젝트한국경찰관 오정화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 KC-7 프로젝트는 미국 동부지역 청부살인 범죄시스템을 소탕하기 위해 2004년 7월에 만들어졌다. 본부는 내가 속한 뉴욕경찰국 범죄연구관실이며 FBI 요원 두명과 동부지역 경찰국 소속 수사관 일곱 명의 지원을 받았다. 수사 목적 상 한국경찰관 가운데 하나가 필요했다.

 대상을 물색한 결과 한국경찰대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FBI수사기법을 연수한 경력이 있는 오정화 경위가 눈에 띄었다. 영어가 능통하고 총기를 잘 다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마침 타깃 가운데 하나인 주디 림(한국명 림설희)과 친분을 맺고 있었다.
 
 한인유학생 주디 림은 같은 한인유학생 이수진 자살사건(별도파일 참조) 연관자를 포함해 모두 일곱 건의 살인과 관련된 혐의로 추적을 받고 있었다. 이수진 사건 관련 피살자는 최근의 오언 그레이시와 브렛 휴즈를 비롯해 , 알란 킨스버그, 루이스 주키치 등 네 명이다. 오언 그레이시는 뉴욕에서, 브렛 휴즈는 보스톤에서, 알란 킨스버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루이스 주카치는 오스틴에서 각각 총기와 칼로 살해되었다. 당시 팀은 이 가운데 외부청부 징후가 있는 오언 그레이시 살해사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건을 주디 림이 직접 기획하고 실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나중에 주디 림은 이들에 대한 살해 이유를 '이수진 사건에 대한 보복'이라고 진술했다.

 한편 그녀는 러시아 청부살인 조직 '자르딘'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그들과 특정 계약을 맺고 가담한 범행은 3건으로 추정되었다. 이들과의 연관성이 드러난 것은 자르딘의 차명 불법계좌 수색을 통해서이다. 이 계좌를 통해 자르딘의 자금 일부가 주디 림의 차명계좌로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주디 림이 청부살인 조직에 들어간 경위에 대해선 정보가 없다.

  KC-7이 주목한 인물은 주디 림 말고도 자르딘의 이반 루코프스키, 블라디미르 클로이가 있다. 이들의 커넥션을 밝혀야 하는 과정에서 주디 림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수사관을 얻는다는 건 매우 행운이 있는 케이스다. 둘은 막 동성애 관계에 들어가 있었다.

 

 오정화와의 첫 미팅은 2004. 9. 1. 요원 로빈 호건스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프로젝트를 설명하자 예상대로 오정화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오정화는 제의를 받은 지 사흘 뒤에 합류를 수락했다. 우린 합의하에 그 사실을 서울에 알리지 않기로 했다. 한국경찰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미션을 받은 오정화는 2주 간의 언더커버(잠입) 캠프를 이수한 뒤 한동안 주디 림과의 신뢰를 쌓는데 주력했다. 휴가를 이용해 함께 캘리포니아와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년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개월 동안 아무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이 시기에 자르딘과 관련됐다고 의심되는 세 건의 청부살인이 더 일어났다. 조사를 해보니 그 가운데 한 건은 주디 림이, 다른 한 건은 불라디미르 클로이가, 나머지 한 건은 놀랍게도 오정화 본인이 처리한 것으로 의심받는 사정에 이르렀다.
 오정화를 심문한 결과 완전범죄를 노렸으며 주디 림 측의 신뢰를 받기 위해 하는수없이 가담했다고 해명했다. 팀은 더 큰 결과를 얻기 위해 그녀 말을 믿고 용의선상에서 제외시켜주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2005년 1월, 오정화는 자르딘에 포섭되었고 한 건의 청부살인을 더 실행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이반 루코프스키와 블라디미르 클로이, 주디 림을 모두 검거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자르딘 조직원 두 명이 사살됐고 이반 루코프스키가 복부에 관통상을, 주디 림이 팔에 관통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KC-7 요원 로빈 호건스, 제이시 설리반, 알렉스 만도 어깨와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체포된 이들은 조사와 비공개재판에서 오정화의 범죄에 대해서만 진술했고 다른 모든 건에 대해선 침묵과 부인으로 일관했다. 팀은 고심 끝에 증인보호프로램을 가동하기로 했고 마침내 오정화가 주디 림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주디 림의 증언을 통해 이미 체포된 인물들 말고도 자르딘과 관련해 청부살인에 가담한 일곱 명의 러시아계, 아일랜드계, 히스패닉계 용의자들을 더 체포할 수 있었다. 또한 청부를 의뢰한 23명의 인사들을 체포했고 그 가운데 12명을 재판정에 세웠다. 관련 인물(별도 파일 참조)들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이 수사와 재판은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KC-7 프로젝트는 관련인사들의 로비로 그해 9월에 종료되었다

 그 직후 주디 림은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따라 새 신분을 부여받고 아이오와에 정착했다.
 한편 한국경찰은 오정화의 비밀활동을 포착하고 FBI와 뉴욕경찰국에 강하게 항의를 해왔다. 결국 그녀는 2005년 10월에 한국으로 전격 소환되었다.

 우린 오정화가 발휘한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차후 FBI의 다른 미션을 부여해볼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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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동창생들 - 5. 2004년 뉴욕, 뉴욕 ⑦


 

 

 

 

 

 며칠 뒤 뉴욕의 한 타블로이드 신문 1면에는 오언 스페이시 경감이 근무 중 피살된 게 아니라 비번일 때 한인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변을 당했다는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제보자는 조미란 본인이었고 정화가 그를 뒷받침할 만한 증언을 조미란의 상처부위를 찍은 사진 몇 장과 함께 해당 기자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 보도로 경찰의 허위 발표에 대한 여론의 질타가 빗발쳤고 뉴욕경찰국과 109경찰서는 궁지에 몰렸다.

 뉴욕 경찰 당국은 여론을 무마하고자 109경찰서장과 홍보국장을 직위해제하는 한편, 피해자 조미란과 증언에 나선 정화에게 보복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조미란 거처 주위에 경찰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원정매춘과 관련한 여죄를 추궁한답시고 경찰서로 여러 번 부르는 등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정화에 대해선 업무협조를 일체 중단했고 대사관에 압력을 넣어 정화의 근무 입지를 축소시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대사관은 정당한 행위라고 판단, 정호에 대해 별로 손을 쓰지 않았다.
 경찰의 조미란에 대한 부당한 압박 행위는 결국 거액 소송을 불러왔다. 조미란이 변호사를 선임해 109경찰서를 상대로 100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소송이 제기되자 109경찰서 측이 조미란을 회유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면담조차 거부했다. 미국 경찰을 믿을 수 없어 오정화 경위에게 협상을 일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제이시가 정화를 직접 찾아왔다.
 정화는 회의실에서 그녀와 독대를 했다.
 "오해는 말아 줘, 이전에도 얘기했듯이 망자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처음 그렇게 발표한 것이지 은폐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 제이시가 말했다.
 "망지에 대한 예의라고 했지? 이수진 사건을 기억해? 죽은 여자를 유학생 성매매자라고 덮어 씌운 게 누구더라? 근거가 없다고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경철서는 고인과 유족에게 사과 한 번 하지 않았더군. 그게 망자에 대한 예의인가?"
 "그 사건과 이번 건은 별개야."
 "조미란에게 사과하긴 커녕 압박을 가한 건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나를 어떻게 대우했지?" 정화의 언성이 높아졌다. "경찰의 제 식구 감싸기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거 아닌가? 미국이 인권국가라고 하던데 직접 당해보니 영 아니군. 아무리 동료 경찰이라 해도 난 그런 위선이 싫어."
 "화 풀어." 제이시가 옆에 놓인 음료수 캔을 따 한 모금 마시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우리가 한 것들에 대해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난 너의 친구야. 파일도 보내주고 그랬잖아. 나까지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파일 건은 고맙게 생각해. 원하는 게 뭔데?"
 "그 소송을 취하하도록 조미란을 설득해주면 안 될까?".
 "그러게 진즉 사과를 했어야지. 그게 뭐야, 보복이라니. 치졸하게 구니까 그 친구도 화가 난 거야."
 "우리도 서장과 국장을 징계하는 등 성의를 보였어. 그만한 조치를 한 건 이례적인 일이야. 오늘 온 건 서장 부탁으로 왔어. 소송을 취하하면 그 대신에 조미란의 이전 범죄 행의에 대해 검찰이 기소중지를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는군."
 "노력만으론 안 되지. 확실히 서면으로 약속해주어야 해. 그걸 보장할 수 있나?"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제이시가 답답한 듯 담배를 캔 뚜껑에 비벼 껐다. 
 "돌아가서 책임 있는 인물의 확답을 받아 와. 소 취하 조건은 두 가지야. 하나는 뉴욕타임즈에의 공식사과문 게재, 다른 하나는 기소중지 결정. 그럼 내가 조미란을 설득해 볼게."
 그건 조미란과 미리 얘기를 나눈 바였다.
 "정말 너무 하는군, 같은 경찰끼리."
 "제이시 안면을 봐서 내가 도울 걸 찾아보겠다는 거야. 아니면 어림도 없어. 망신 당하고 돈 물어낼 거야, 아니면 이 정도로 끝낼 거야?"
 제이시는 뭐라고 혼자 투덜대며 영사관을 떠났다. 협상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 일 주일 뒤 경찰은 뉴욕타임즈가 아닌 작은 언론사 한 곳에 조미란에 대한 공식사과문을 게재했고 검찰은 기소를 중지하겠다는 결정문을 비공식적으로 건네왔다. 그 즉시 조미란은 소를 취하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정화에 대한 압력도 해제됐다.
 이 사건은 정화가 주디로부터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조미란이 돌아간 뒤 둘은 뉴욕과 시카고를 오가며 자주 만났다. 마침 주디가 방학이기도 해 시간이 많았다. 브로드웨이에서 오페라와 영화를 같이 봤으며 자유의 여신상 일대 선상유람도 했다. 도심 쇼핑과 클럽에서의 유흥을 즐기기도 했다. 
 그 반면에 로빈과의 만남은 그 빈도와 농도가 희박해져 갔다. 한 번 잠자릴 같이 했으나 정화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 로빈은 도중에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로빈은 그게 모두 주디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정화와 주디의 만남에 대해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별다른 간섭은 없었다. 정화와 주디의 관계는 만남을 거듭할수록 자매지간에서 야릇한 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정에서 애정으로 발전했고 급기야 밤을 같이 보내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정화 스스로도 이러한 정(情)의 흐름을 정말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

 

 뉴욕경찰국의 수사관 두 명이 영사관으로 정화를 찾아온 것은 주디와의 그 일이 있은 지 사흘이 지나서였다. 둘 다 40대 중반으로 한 사람은 아놀드 베이커라는 흑인 경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빌 피터슨이란 백인 경사였다. 그들은 며칠 전 보스톤에서 일어난 백인 남성 피살 사건과 관련해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정화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회의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8월 4일 밤 1시부터 다은 날 새벽 2시 사이에 혹시 어디에 있었나?" 피터슨이 물었다. 목소리가 다소 권위적이었다.
 "그건 왜 묻지?" 정화가 팔짱를 끼고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브렛 휴즈란 남자가 그 시간에 보스톤 외곽에서 살해됐어. 용의자들을 수소문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주디 림이야. 그녀를 알고 있지?"
 정화는 약간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물론 알지. 그런데 주디가 관련됐다는 건 믿을 수가 없군. 무슨 증거라도 있나?"
 "현재로선 그걸 찾고 있는 중이지. 주디에 대한 내사를 이미 해보았어. 오전에 만나고 왔지. 주디 말에 따르면 그 시각에 그녀 집에서 당신과 같이 있었다고 하던데 맞나?"
 피커슨의 말투가 마치 범죄자를 상대하는 듯했다. 정화는 화를 참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당일 오후부터 그녀와 있었다고 하던데 그 이야길 시간대별로 해 줘."
 "이 봐. 난 용의자가 아니야. 한국의 경찰공무원이라구.  하지만 정중하게 얘기할 수는 없어? 뒤에 플리즈를 붙이는 태도는 어디다 팔아먹었나? 이런 젠장." 정화가 미간을 지푸리며 말했다. 
 "아, 미안. 이보게 빌." 베이커가 눈치를 주자 피터슨의 태도가 좀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그날 오후 이야길 해주시죠." 
 "그러니까 음......보스톤 다운타운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고 오후엔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지. 그리고 영화를 봤고, 저녁에 클럽에 들렀어. 그녀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쯤 될 거야. 그리고 아침 7시까지 같이 있었으니 만약 아까 말한 그 시간이 밤행 시각이라면 주디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는 게 맞을 걸?"
 "주디 말과 거의 일치하는군. 그런데 같은 침대를 썼나, 아니면?"
 "이런 씨팔." 드디어 정화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내 생리주기도 얘기해 줄까?"
 피터슨도 덩달아 울컥하는 기미를 보이자 베이커가 그를 회의실에서 나가게 했다. 둘만 남자 베이커가 그녀를 달랬다.
 "저 친구가 과로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래. 이해해 줘. 그러니까 그 질문 의도는 잠을 자는 도중에 주디가 어딘가 다녀왔다든지 그런 기색을 없었냐는 거지."
 "내 기억으론 없었어. 난 경찰이야. 신경이 예민해서 누가 바닥의 과자 부스러기만 밞아도 벌떡 일어나곤 하지."
 "클럽 종업원 말에 따르면, 정화가 많이 취해 있었다고 하던데? CCTV에 나온 장면도 그렇고."
 그들은 제법 조사를 철저하게 한 듯했다.
 "내가 술이 센 편은 아니야. 하지만 택시 타고 오는 도중에 다 깼어." 
 그 말에 베이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케이, 오 경위. 얘기해줘서 고마워." 그가 명함을 건넸다. "혹시 주디에게 이상한 기색이 발견되면 언제라도 연락을 해줘."
 정화는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런데 왜 주디가 용의선상에 올라 있는 거지? 죽은 이와 무슨 원한관계라도 있나?"
 "그건 아직 수사 중이라 얘기해주기 곤란해. 아마 주디는 알고 있을 거야. 그녀한테서 듣도록 해."
 "알았어."
 "그런데 주디와는 어떤 사이야?" 회의실을 나가기 전에 베이커가 등을 돌리며 물었다.
 "친구 사이지, 뭐."
 베이커는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피터슨은 보이지 않았다. 정화는 그들을 배웅하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주디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사무실 전화나 휴대폰도 아마 도청당하고 있을지 모르니 괜한 짓을 해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었다. 정화는 주디가 연락을 해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여름햇살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는 창 밖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언뜻 떠오른 기억이 하나 있었다. 일전에 스페이시가 죽었을 때도 제이시가 조미란을 심문하면서 주디를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주디, 오언 스페이시, 브렛 휴즈......정화의 수사 감각은 곧 이들이 이수진 사건파일에 공히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해냈다. 그 재판기록을 다시 검토해 보고 있를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주디라고 예상했지만 로빈이었다. 그는 뜻밖에도 공적인 만남을 주선하고 있었다. 뉴욕경찰국의 범죄연구관 하나가 정화와 긴밀히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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