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1. 전학생 소녀 ③
"그럼 뭐야?" 설희가 몸을 웅크리며 물었다.
"네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 호석이 혀로 자기 입술을 축였다.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거야."
"천만에. 내가 따먹은 애들도 다 나를 좋아해."
"그게 누군데?"
"미란이, 지혜. 그리고 중학생들 몇 명 또 있어."
그 가운데 미란은 친구였다. 그러나 한 번도 설희에게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헐. 미친 놈. 거짓말 하지 마."
"내가 거짓말한다구? 본때를 보여주지." 호석이 설희를 일으켜세웠다. 그리곤 멱살을 잡았다.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뭔가 작정한 눈빛이었다. 목을 조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희는 호석이 자기를 죽일까봐 겁이 났다. 문득 그를 자극하지 않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러지 마. 난 죄 없어."
"알아,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하는대로 가만히 따라줘야겠어.그러면 영원히 입 다물게."
그러면서 한 손으로 설희의 가냘픈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설희는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걸 당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손으로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자 호석이 설희의 뺨을 갈겼다. 이어 다른 뺨도 갈겼다. 설희는 아픔 속에서 이 녀석을 가만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희는 머리를 쥐어 짜냈다.
"알았다, 알았어. 때리진 마. 시키는 대로 할게."
"처음부터 순순히 나오지 그랬어? 일어나 서 봐. 차려." 놈이 명령했고 설희는 주춤주춤 그렇게 했다.
"내 말 잘 들을 수 있지? 그럼 너네 집은 안전해질 거야." 설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석은 이제 됐다는 듯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바지 무릎까지 내려."
"뭐, 뭐라고?" 설희는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귀머거리야? 썅. 바지 내리라고." 다시 호석의 주먹이 날아와 설희의 머리를 쳤다. 그리고 말했다. "딴 년들은 알아서 설설 기던데 넌 왜 그 모양이냐?" 이번엔 주먹이 뺨으로 날아왔다.
그걸 피한 설희는 공포에 빠졌다. 그제야 이 녀석이 여학생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내가 확 벗겨버린다?" 호석이 설희의 티셔츠를 답아당겼다. 그리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했다. 그러면서도 달랬다. "지금 밤이야.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 너하고 나만 아는 일이니까 꽨찮아. 빨리 벗어. 손 안 대고 그냥 보기만 할게."
설희는 알았다며 시키는 대로 했다. 호석은 설희의 팬티만 남기고 다 벗게 했다. 굴욕이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호석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설희에게 뒤로 돌라고 시키고선 팬티 안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와 속살을 만지기 시작했다. 처음 당해보는 일에 정신이 다 얼얼했다. 호석의 손가락이 여린 살 안으로 파고들더니 팬티를 아래로 확 벗겨내렸다. 창피한 생각에 아픈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만약 부모님이 하늘나라에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면 수치스럽고 끔찍한 일이었다. 몸부림을 쳤으나 호석은 설희의 샅으로 집어넣은 손에 힘을 가했다. 그리고 자기 바지 혁대를 끄르기 시작했다. 그 때 설희가 호석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거긴 더러운 곳이야. 휴지 좀 꺼낼게."
호석이 손을 거두더니 자기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냄새 좋은데 뭘."
"아니야. 생리할 것 같아."
"네 나이에 벌써?"
호석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설희는 가방으로 손을 뻗어 휴지를 찾는 체 했다. 그리곤 숨겨둔 가위를 꺼냈다. 그걸 호석에게 겨누자 그가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 틈에 설희는 팬티와 바지를 챙겨 입었다. 호석은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헛, 하며 너털웃음을 짓더니 설희에게 바싹 다가왔다.
"그걸로 날 찌르겠다고?" 그러면서 주먹을 높이 쳐들었다. "해 봐, 이 썅......"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설희의 가위가 그의 목덜미에 깊숙히 꽂혔다. 빨간 액체가 설희 얼굴에 튀었고 호석은 그 자리에 푹 쓰러져 목을 잡고 버둥거렸다. 설희는 파리마냥 파르르 떨고 있는 호석의 목을 다시 겨냥해 가위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엔 날이 그의 손목에 막히더니 땅에 꽃혔다. 설희는 화가 났다. 설희도 제정신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죽어! 이 새끼!"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지르며 호석의 얼굴과 몸, 목덜미를 찍어댔다. 소리를 지르니 두려움도 사라졌다.
그 때였다. 누군가 달려와 억센 힘으로 설희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곤 가위를 빼앗아 저만치 던져버렸다. 창호였다.
"설희야. 뭐, 뭐니, 이건? 어? 이 새낀......"
창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쓰러진 호석의 몸엔 움직임이 없었다. 창호가 몸을 숙여 호석의 숨과 맥박을 한참 점검했다. 그동안 설희의 정신이 돌아왔다. 잠시 뒤 창호는 설희를 보고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설희는 자신이 뭔가 큰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숨죽여 울었다. 귀엔 가끔 교각 위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소리와 벌레 울음뿐이었다. 가끔 모기가 날아와 팔과 얼굴을 깨물었지만 그대로 놔두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설희가 고개를 들었다.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창호는 주저앉은 채 호석의 몸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창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 한 사람이 더 보였다.
"어떡하지? 무서워."
여학생 목소리였다. 설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미란인 걸 알았다.
"죽었어? 어떡해, 어떡해."
미란이 울먹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호석이 담배를 내뱉곤 발로 비벼껐다. 얼굴엔 비장한 빛이 보였다. 그리곤 미란에게 말했다.
"넌 못 본 거야. 아니, 우리 모두 못 본 거야. 이 일은 일어나지 알았어. 미란이 너는 빨리 집에 가. 내가 전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약속하지?"
그러면서 미란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미란이 엉겹결에 거기에 자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곤 재뻘리 다리 위로 달아났다. 어둠 속에서 창호가 설희 옆에 주저앉았다. 둘은 오랫동안 말 없이 앉아있었다. 이윽고 창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설희가 차분하게 과정을 설명했다. 창호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호석에게 습격을 당한 일, 얻어맞으며 창피한 일을 당한 일,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녔던 가위를 휘두른 일 등. 창호는 나뭇가지로 땅에 낙서를 하며 묵묵히 듣기만 했다. 호석의 행실을 아는지라 설희의 말에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설희의 흐트러진 옷차림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책임져야지 뭐." 설희가 말했다. 반항심도 작용했다. "오빠는 책임 없어. 상관하지 마."
그 말에 창호가 발끈, 했다.
"넌 친구이자 내 동생 같은 애야. 어떻게 상관 안 할 수 있겠니?"
"그럼 어떻게 하려고. 얘를 살릴 수 있어? 죽었다며?"
"물에 버리자. 너와 나 말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 미란인 내가 알아서 할게."
설희는 말문이 막혔다. 자기가 잡히면 고모는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동네는 얼마나 뒤집어질지, 자기 인생은 어떻게 될지 초등학생 머리론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난 어리니까 잡혀가도 처벌이 가볍지 않을까?"
"난 경찰에 잡혀가는 너를 상상할 수가 없어. 안 돼."
창호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물소리가 더 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호는 호석을 안아들고 교각 아래로 갔다. 호석의 몸이 건장한 창호에겐 가뿐해 보였다. 창호가 물 속으로 시신을 던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곤 설희를 물가로 불러 옷과 손, 얼굴을 물에 깨끗히 씻으라고 했다. 설희가 미적지근하게 행동하자 창호는 답답하다는 듯 설희의 손을 이끌어 손발이며 얼굴, 피로 물든 옷깃을 물에 박박 씻뎠다. 설희 눈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창호의 강한 손길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고마워서였다.
"집에 가서 목욕하고 피 묻은 옷은 태워버려. 만약 너네 고모가 집에 있으면 우리집으로 와. 알았지?"
설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챙겼다. 창호가 가위를 주워 강물 쪽으로 멀리 던지는 게 보였다. 다리 위로 올라와 집까지 가는 길에 창호는 앞장서서 망을 보았다. 차 불빛과 사람을 피하는 데에 둘은 땀을 흠뻑 흘렸다. 설희는 창호가 보는 앞에서 집으로 뛰어들었다. 고모는 집에 없었다.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피묻은 옷과 가방을 빨았다. 얼룩은 쉽게 지워졌지만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가위로 조각을 냈다. 그걸 다른 쓰레기와 섞어 쓰레기 봉투에 담았다. 그리곤 문을 나섰다. 창호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 끝 쓰레기장으로 가는 길에 몇 사람과 마주쳤지만 눈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 쓰레기장에 내던지면서 제발 들키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설희는 버스를 타고 면사무소로 가 야근을 하고 있는 고모를 만났다.
"무슨 바람이냐? 네가?"
"심심해서 나왔어요."
"저녁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가는 길에 치킨이나 먹고 갈까?"
설희는 그러자고 했다. 안 그래도 배가 무척 고팠다. 치킨집에서 고모는 생맥주를 시켰다. 음주운전은 안 된다고 말렸지만 고모는 듣지 않았다.
"사고만 안 나면 돼. 이래뵈도 고모가 빽이 많다."
그러면서 미소를 지었는데 참 젊고 예뻐보였다. 고모의 어디에 그런 잔인한 구석이 있는지 신기했다. 설희는 고모부가 물에 빠지던 날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날이라 치킨집엔 사람이 많았다. 아는 이가 지나갈 때마다 설희는 명랑하게 인사를 했고 친구가 앉아있는 자리로 가 수다를 떨고 오기도 했다. 고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늘따라 네가 왠 일이라니? 그동안 시무룩해 있어 걱정했는데."
설희는 고모 옆자리로가 목을 껴안곤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고모는 간지럽다며 깔깔거렸다.
"나도 널 사랑한단다, 얘야."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며 둘을 쳐다보았다. 설희가 손에 피를 묻히고 왔다는 걸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설희와 창호는 매일 만나 그날그날의 상황을 체크했다. 호석이 실종됐다는 건 이제 학생들과 인근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소문도 무성했다. 가출을 한 녀석이 D시에 나타났다느니, 인신매매단에 잡혀갔다느니, 밤에 돌아다니길 좋아하던 놈이라 어디선가 자동차에 치어죽은 게 틀림없다는 것 등이었다. 그에게 희롱당했다는 여학생 이름도 심심찮게 나왔지만 미란을 비롯한 해당 여자애들은 펄쩍 뛰었다. 경찰이 강과 야산을 수색했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경찰이 탐문수사를 한답시고 학교와 집을 찾아오기도 했지만 설희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대했다. 경찰은 헛수고를 하고 있었다. 시체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기에 창호와 설희는 안심했다.
그러나 약 한 달 뒤였다. 한강 하구에서 물에 퉁퉁 분 채 심히 부패된 소년 시체가 하나 떠올랐다. 신원파악을 한 결과 실종된 최호석이라는 게 드러났고 소식을 들은 호석의 부모는 망연자실했다. 설희와 창호도 그러긴 마찬가지였다. 미란은 안절부절했고 그럴 때마다 창호가 안심시켰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나날이었다. 차라리 고모한테 사실을 털어놓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그러나 그 뒤로 벌어질 일이 두려웠다. 설희는 창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창호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하지만 힘 없는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