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이 다가와 식사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걸어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정리할 틈도 없이 이모의 폰으로 수지가 전화를 해왔다.

 그녀 목소리엔 반가움과 걱정스러움이 물씬 묻어 있었다. 상처는 비교적 작은 것이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언제 뉴욕으로 돌아올 거냐는 물음엔 3, 4일 뒤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어서 빨리 보고싶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충전기에 물려둔 내 폰을 거두었다. 전원을 켜자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무수한 문자메시지가 뜨기 시작했다. 대개 친구들이 보낸 것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수지의 것이 단연 많았다. 담담했던 목소리의 아까 통화와는 달리 내용은 매우 구구절절했다.
 식탁엔 닭고기 수프와 소시지계란볶음,그리고 야채샐러드와 라이스가 놓여 있었다. 구수한 된장찌개도 있었다. 맛있게 먹는 나를 보고 친이 마음에 든 듯 간간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간은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렌이 그 팬션을 이미 떠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이모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통화하는 대상은 그 글로리아팬션 주인 로잘린이었다. 전화를 끊은 이모가 말했다.
 "엘렌. 얘는 천하태평인 성격인 것 같다. 아직 자고 있대. 그래서 그냥 놔두라고 했지. 어찌되든지 간에 내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알려주어야 할까요?"
 "신경 꺼라. 네가 말려드는 걸 원치 않는다. 느낌이 어쩐지 좋지 않아."
 이모가 냉정하게 잘라말했다. 나는 말없이 남은 접시를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개운치 않아 정원을 서성이고 있을 때 이모가 나와 자기가 아는 병원의 약도와 의사 이름,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를 건네주었다.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 있는 병원이었다.
 "전화 해 놨으니까 서둘러서 가보도록 해라. 대중교통이 없으니 내 차를 이용하렴."
 이모가 건네준 차 키를 받아들었다. 욕실로 가 세수를 한 다음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모의 차는 새것이었다. 닛산 알티마 2013년 형. 화살촉 모양의 헤드램프가 인상적이었는데 적극적인 이모의 개성에 딱 들어맞아 보였다.
 태양은 뜨거웠고 바다는 회색이었다. 차를 몰고 소살리토 간선도로로 나왔다. 거리는 벌써 관광객들의 들뜬 움직임으로 술렁이고 있었고 교통은 혼잡했다. 거길 빠져나오는 데에 10분 넘게 걸렸다.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접어드는 길목을 벗어나 국도로 빠져나왔다. 그 팬션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오후 1시의 팬션 주변은 조용했다. 차를 세우자 일하는 이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로잘린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그는 대꾸도 없이 관리동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로잘린이 나왔다. 나를 알아본 그녀가 용건도 묻지 않고 그저 따라오라고만 했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관리동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아담한 1층 목조주택이었다. 현관 문은 열려 있었고 어딘가에서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은 더웠고 젖은 나무 냄새가 풍겨나고 있었는데 마루바닥엔 나방이며, 메뚜기며, 이름 모를 별레며, 그런것들이 여러 마리 죽어 있었다.
 "이제 일어난 모양이군. 들어가 봐."
 로잘린은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드라이어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거실 한켠의 작은 방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한 여자가 경대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팬티만 입은 차림새였다. 드라이어 소음에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엘렌은 머리 치장에 열중했다. 손가락으로 방문을 똑똑 두드려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문설주에 기대 서서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계면쩍어져서 거실로 되돌아 나오려고 할 때 그녀가 말했다.
 "왔어?"
 난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헤어드라이어를 끈 그녀가 내 앞으로 서슴 없이 걸어왔다. 예상대로 그녀의 젖가슴은 건장한 몸매에 비해 작은 편이었고 곤두서 있는 유두가 젖가슴 끝에 앙증맞게 매달려 있었다. 날씬한 허리에 육감적인 엉덩이 곡선은 볼 만 했고, 팬티로 가린 삼각주는 꽤 깊어보였다. 다행인 것은 어제처럼 내 바지 앞섶이 부불어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옷이나 입어."
 "왜, 벗은 여자 처음 봐?"
 "실제로는 처음."
 내 말에 그녀가 깔깔대고 웃었다. 난 그녀가 옷차림을 갖출 때까지 거실로 나와 기다렸다.
 "왜 왔어?"
 이윽고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그녀가 물었다. 회색 반팔 스웨터에 연두색 면바지 차림이었는데 왠지 더워보이는 느낌이었다.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알려줄 게 있어서."
 "뭐지?"
 난 이모가 얘기한 내용을 정리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야길 듣는 동안 엘렌은 손으로 턱을 괴고 시종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끔 미간을 찡그리기도 했다. 이야길 마치자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떡갈나무 아래에 나무벤치가 있었다. 우린 그리로 가 나란히 앉았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는데 그제야 내 얼굴이 땀으로 범벅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소매로 땀을 훔치며 엘렌을 바라보았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어제보다 청초해 보였다. 루즈를 바르지 않은 입술이 창백해 보이는 걸 빼면 남자를 매혹하기에 괜찮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제부터의 매너를 보건대 그녀의 실제 나이는 내게 얘기한 것보다 서너 살은 더 될듯했다. 우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내가 깼다.
 "위조여권인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동생 것."
 "사촌동생이 스물 여덟?"
 "응."
 어쩐지. 그렇다면 이 여자 나이는 서른이 넘었을 것이다.
 "당신은 참 알수없는 여자네.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이진 않고."
 "사람은 겉만 봐선 몰라."
 "그럴지도."
 난 구체적인 건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왜 내게 알려주러 왔어? 너완 상관이 없는 일인데."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부담되면 이제 갈게."
 난 자리에서 일어나 팬션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안 가서 엘렌이 나를 멈추게 했다.
 "댄, 부탁이 하나 있어."

 20분 뒤, 난 엘렌을 태우고 고속도로로 다시 접어들었다. 그녀를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까지 태워주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거기까지만 가면 이제 자기 갈 길을 가겠다고 했다.
 "장례식엔 안 가?"
 내가 물었다.
 "이미 동선이 드러났는데 가기가 좀 그렇군. 그들이 찾아올 정도면 저들은 이미 한국에서의 내 통화내용까지 다 알아냈을 거야."
 "그들은 알겠는데 '저들'은 또 누구야?"
 "더 맨(The Man)."
 "'더 맨'이라니?"
 "몰라? 뒤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이지."
 "무슨 초현실주의 소설 얘기를......"
 엘렌의 격과 맞지 않는 듯해서 난 피식 웃었다.
 "그래. 더 이상 알 것 없고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같을 뿐이지."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같을 뿐이라고? 그 말엔 수긍이 갔다. 엘렌을 쳐다보자 내 전화기를 빌려달라고 했다. 자기 것은 한국에 두고 왔다면서. 난 그렇게 했다. 엘렌은 가방에서 꺼낸 메모지를 손에 들고 여러 군데에 통화를 했다. 국제전화는 아니고 주로 미국에 있는 지인들과 연락을 하는 것 같았다. 대화 내용은 평범했다. 잠깐 미국에 들렀는데 만날 수 있느냐는 얘기, 어느 교수 장례식 얘기,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는 얘기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상대는 줄리앙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는데 교수 장례식이 잘 끝났다는 얘길 전해주며 그녀에게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고 한 듯했다. 엘렌은 잠시 대답을 미루다가 나를 힐긋 쳐다보더니 그러겠다고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이어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내 메시지함을 여는 게 보였다. 난 그녀에게서 전화기를 낚아챘다.
 "왜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그래?"
 "미안. 수지 콴이라는 애가 문자를 많이도 보냈구만. 여자친구야?"
 "아니. 밴드 동료야."
 "밴드? 너 딴따라하니?"
 난 더이상 얘길하고 싶지 않아 대답없이 운전만 했다. 드디어 샌프란시스코로 접어들고 있었다. 몇 번 드나들었기에 나름대로 익숙한 도시다. 대도시치곤 아름다운 편이었지만 도시는 도시였다. 공기도 안좋고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곳곳에서 교통정체가 벌어지고 있었다. 번듯한 외관의 고층빌딩 뒷골목에선 살인, 강도, 강간, 마약거래, 매매춘이 횡행하고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표정을 살핀 엘렌이 다시 말을 붙였다.
 "딴따라라고 해서 미안해. 무슨 밴드인데? 넌 거기서 무얼 맡고 있고?"
 "언더그라운드 락밴드야. 난 드러머고."
 그러자 그녀가 손으로 내 어깨를 탁, 쳤다.
 "드러머? 야, 너 보기보다 멋진 구석이 있구나? 나도 옛날에 드럼을 쳐볼까 했던 시절이 있었지. 밴드 이름은?"
 "나우온더런(Now, On the Run). 공중파를 안타서 엘렌은 잘 모를 거야."
 "지금 질주 중. 그거 괜찮은 이름이네. 그런데 어딜 질주하는데? 엄마 치마폭? 아니면......수지 사타구니?"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내가 호탕하게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러더니 손뼉을 쳤다.

 "아, 그 노래가 생각난다. Fox on the run. 너도 알지?"

 그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Fox on the run~
 And hide away~

 그 떄 스포츠카를 타고 지나치던 흑인 두 명 가운데 하나가 우릴 보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보였다. 엘렌이 똑같이 맞상대를 하자 그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쌩하고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엘렌이야말로 '관심을 받자 어디론가 몸을 숨겨버리는 여우'같았다. 난 그 소절을 같이 따라불러주다가 밴드 이름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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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아침에 알몸여자 시체 하나가 숲에 처박힌 채 발견됐다는 기사와 마주하고 싶지 않아. 다 큰 동양 여자가 오밤중에 여기서 어딜 간다고 그래? 여긴 미국이야."
 이모가 냉정하게 말했다. 정말 이 숲의 깊은 어둠은 남자인 나로서도 위험해 보였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드미트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모의 설명에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모를 차 밖으로 불러냈다. 그들은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엘렌은 잠자코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기도 했다. 잠시 뒤 이모가 차로 돌아왔다가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들고 다시 드미트리 쪽으로 갔다. 그러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1분, 2분......통화는 길어지고 있었다. 울창한 침엽수림에서 산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차 가까이에 도로표지판이 하나 보였는데 콘젤먼(Conselman) 로드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여긴 금문교국립휴양지로 가는 길목일 것이다.
 침묵하던 엘렌이 내게 이모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스포츠클럽 소유자이자 언론 자유기고가라고 대답해주었다. 엘렌은 실은, 학창생활을 할 때 이모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영화배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할 때였는데 당시 주정부의 문화정책관이었던 이모가 학교에 와 몇 차례 강연을 했다고 한다. 난 놀라면서 이모에게 그런 경력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모 집 거실에는 당신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포즈를 취한 사진틀 하나가 있다. 그렇다면 아마 그 당시 찍은 것일 게다.
 "그 때 학생들 사이에선 네 이모가 마피아 며느리라는 소문이 돌았지. 저 남자에게서도 그런 느낌이 풍겨. 남편은 아니지?"
 "응. 이모부는 3년 전에 차 사고로 돌아가셨어. 이모 시아버지가 주류도매상을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마피아라는 건 뜻밖인데? 진짜야?"
 아버지는 이모의 결혼을 말렸다. 이모 결혼상대가 미군이라서라기보다도 그의 아버지가 탈세로 감옥에 있다는 게 가장 큰 반대이유였다고 어머니한테서 들었다.
 "미확인 소문이지. 그러면 저 남자는 이모의 애인?"
 "글쎄. 잘 모르겠어. 그들 사생활이니까 알고 싶지도 않고."
 "하긴."
 엘렌이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이모가 차로 돌아왔다.
 "지금 소살리토로 들어가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작은 마을이라 남의 눈에 띄기 쉬운 데다가 고급주택이 많아 경찰 감시가 심하거든. 그래서 내가 아는 사람의 팬션을 하나 소개해 줄 테니까 오늘은 거기서 지내도록 해. 휴가시즌이라 빈 방이 없지만 다행히도 그 분 손녀가 쓰던 방이 하나 있대. 2, 3일 정도 묵는 건 괜찮다고 하더라. 엘렌 사정을 생각해 더 배려해주고 싶지만 복잡한 일에 말려들기기 좀 그렇구나. 이해하겠지?"
 "그럼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게 해주시는 것만도 제게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엘렌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차로 돌아온 드미트리가 숲 사이로 난 길로 차를 몰았다. 10분 정도 가자 큰 네거리가 나왔고 거기서 죄회전을 했다. 길은 비포장이었다. 차가 시종 덜컹이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엘렌의 몸이 내 쪽으로 엎어졌다. 젖가슴의 뭉클한 감촉에 난 소스라쳤다. 다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얼굴을 붉히고 말았는데 부끄럽게도 내 몸의 일부가 갑자기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 턱 없는 엘렌은 차 손잡이를 잡은 채 어두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차가 멈췄다. 아담한 팬션 몇 채가 보였고 잔디밭에선 숙박객들이 바베큐파티를 열고 있었다. 팬션 표지판엔 '글로리아캡'이라고 쓰여 있었다. 곧 나이가 칠순은 되어 보이는 뚱뚱한 중년여인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이모와 드미트리가 그녀와 반갑게 포옹했다. 대화를 듣고 그 여인의 이름이 로잘린이란 걸 알았다. 우리도 차에서 내렸다. 로잘린이 엘렌의 가방 하나를 들어주었다. 
 "그럼. 기회가 닿으면 다시 뵙겠습니다." 엘렌이 말했다.
 "그래, 몸 조심해"
 이모가 그녀를 포옹했다. 엘렌은 드미트리와 악수를 나눈 뒤 내게 한 손을 들어 까닥해 보이곤 그 여인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난 밍크고래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다친 손가락 끝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발기는 어느덧 끝나 있었고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이없는 놈. 어디선가 산비둘기가 꾸룩꾸룩 울었다.
 드미트리가 오던 길을 거슬러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다시 탔을 때 이모가 말했다.
 "영화 가운데 소살리토라고 있지. 장만옥 주연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영화 속 그녀 이름이 엘렌이야. 우연한 일치군."
 "이모는 한 때 주정부에도 계셨어요?"
 "그랬지. 어떻게 알았어?"
 "엘렌이 그러더군요. 버클리 다닐 때 이모 강연 들은 적이 있다고."
 "그래? 아깐 왜 그 얘길 안 했지? 아무튼 말야, 언제 뉴욕으로 갈 예정이니?"
 "원래는 내일 저녁 비행기를 타려고 했는데 병원 검진 때문에 며칠 더 묵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직 개강하려면 한참 남았으니 실컷 놀다 가려므나. 정원 잔디도 좀 깎아주고, 참, 3학년 등록 안한다고 했지? 지난 번에 얘기한 그대로 할 거니?"
 아버지는 이모에게 내 학비와 생활비를 부치고 있다. 내가 달리 전용을 하지 못하게. 이제 나는 그걸 역이용해 이모한테서 그 돈을 몫돈으로 받아내려고 하고 있다. 이모는 처음에 반대를 표시했다. 하지만 나의 구체적인 설명과 간곡한 부탁에 종내 손을 들고 말았다.

 우리 밴드의 목표는 플로리다의 한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젝트에 입상해 6개 도시 순회 콘서트에 참가하는 것이다. 상금도 상금이지만 우리 밴드의 존재를 만방에 알릴 수 있기에 이 기회를 놓친다면 크게 후회를 할 것 같다.
 "네. 이모가 꼭 도와주셔야 해요."
 "휴우......나도 모르겠다. 나중에 언니하고 형부한테 죽일년이란 소릴 듣겠지. 쩝."
 이모가 못미더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탈이 생기기 않게 잘 할게요."

 "그래, 그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 운동은 올해도 할 거니?"

 우리 밴드는 작년 9월 월 스트리트 점거 1주년 기념행사에서 연주를 했다. 다가오는 2주년 행사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물론이죠."

 "당국에 찍힌 너희들이 그 오디션 프로젝트에서 입상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본다."

 "지난 달 브라질 코파카바나에서 열린  카톨릭 세계청년대회에서 교황님은 이런 이야길 해주셨죠. 불평등한 사회에 맞서 거리로 나가 싸우라고요." 

 카톨릭 신자인 이모는 내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곤 드미트리와 이런저런 잡담을 했다.
 소살리토로 들어섰다. 밤거리에 사람들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비로소 휴가철이란 게 실감이 났다. 예상 밖으로 더운 바닷바람에 사람들 옷차림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잠시 뒤 차는 고급주택가로 들어서는 언덕 앞에 도착했다. 입구의 초소에서 경비원이 드미트리와 이모를 보곤 미소를 지으며 통과하라고 했다. 언덕의 경사는 꽤 높은 편이어서 자칫하면 차가 뒤로 구를 듯 했다.

 이모 집앞에 도착했다. 널찍한 잔디밭에 비해 집은 작았다. 이모가 디자인한 집으로, 너무 덩치가 크면 관리가 어렵거니와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그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드미트리는 이모와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다시 차를 몰고 사라졌다.
 나는 너무 피곤해 씻는둥 마는둥하고 침실로 돌아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깨와 손가락의 욱신거림을 느끼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친이 주스잔을 내밀었다. 친은 40대에 접어든 베트남 출신 미국인으로, 하루 두, 세시간 씩 이모 집 일을 돌봐주고 있다. 나는 고맙다며 잔을 받아들었다. 그걸 마시면서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11시다. 거실로 나왔다. 이모 방의 열린 틈으로 아직 잠을 자고 있는 그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 아래로는 회색바다와 푸른 하늘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점심 때 기재식을 먹은 뒤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 때 소파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났다. 이모의 폰이었다. 그걸 집어 이모에게 갔다. 이모는 약간 짜증을 내며 누운 채로 전화기를 받았다. 건 사람은 드미트리였다.

 그녀가 통화를 하는 동안 밖으로 나와 잔디밭을 걸었다. 수북이 자란 잡초와 잔디 속에서 무수한 풀벌레가 튀어올랐다. 의자에 앉아 샌프란시스코만의 페리를 감상하고 있을 때 이모가 나오더니 내 옆 비취 의자에 앉았다.
 "댄. 어제 그 여자애 말야, 엘렌. 좀 이상하다?"
 "뭐가요?"
 "아침에 드미트리 집에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찾아와 어제 차에 탔던 여자의 소재를 물었다는구나. 빨리 찾지 못하면 그 애 신상에 피해가 갈 지도 모른다면서."
 "그런데 엘렌이 드미트리 차에 탄 건 어떻게 알았대요? 그 놈들이 미행했대요?"
 "아니, 미행한 적은 없대. 캘리포니아 경찰국의 협조를 받아 공항 주차장 CCTV를 보고 수소문해 찾아왔다고 하더래."
 "경찰국요? 엘렌이 무슨 죄인가를 지었다나요?"
 "그냥 여권관리법 위반이라고만 하더래, 자세한 건 알려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런데 그 대사관 직원 급이 높더래. 부영사하고 정보담당 사무관. 우리도 평소에 잘 못 만나는 자들이지. 그들이 왔다면 아무래도 작은 일은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그 팬션에 있다고 알려줬대요?"
 "아니.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 둘러댔대. 소살리토로 오는 중간 교차로에 여자를 내려줬더니 택시를 타고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그런데 대체 무슨 광고기획사 일개사원한테 이런 일이 생긴다니? 좀 웃기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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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포니아 버클리'라는 대목에서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드미트리가 고개를 돌려 엘렌을 힐긋 쳐다본다. 그리곤 시선을 다시 앞으로 가져갔다. 그는 평소와 달리 백미러를 자주 확인하면서 차를 몰고 있었다.
 난 이쯤에서 미령 이모의 호기심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미국 출입국관리소 직원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백인에겐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기타 인종에게는 안하무인으로 구는 그들은 총을 맞아도 싸다. 하지만 엘렌의 말투나 표정엔 불쾌한 기색이 없다. 그저 상관 없다는 식이다. 평소 성격인지 아니면 특정한 직업에서 단련된 건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이모는 숨김 없이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성격이라 주위에서 인기가 좋지만 프리랜서 기자 특유의 질문공세와 직설화법 때문에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기우였다. 이모가 반색을 한 것이다.

 "그래? 내가 신혼 초에 버클리대 부근에서 살았어."

 이윽고 두 여자의 수다가 시작됐다. 무슨무슨 동네가 어떻고, 맛집이나 미용실이 어떻고, 봄가을 캠퍼스가 어떻고, 학생들의 성향은 어떻고, 해 가며 약 10분 동안 그들은 조잘거렸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이모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엘렌이 하는 일은?"

 "광고회사에서 홍보 일을 맡고 있어요."

 응? 공무원이 아니고? 내 예상은 빗나갔다. 엘렌이 대답을 마치자마자 이모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이모가 "어, 여기 있어. 기다려 봐." 하며 내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어머니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콴이었다. 그녀는 뉴스를 들었다며 정말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난 행운이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언제 뉴욕에 올 거냐고 묻길래 병원 정밀진단 때문에 예정보다 며칠 늦어질 거라고 했다. 콴은 아쉬워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모는 콴의 전화가 오늘 벌써 다섯 번째라며 대체 무슨 사이냐고 물었다. 난 그냥 밴드 동료일 뿐이라고 대답했는데 이모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지은과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아무튼 묻는 데는 귀신이었다.

 "헤어졌어요."

 "잘 했다, 내 조카. 걔는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부동산 졸부 외동딸이라서 그런지 가정교육도 형편 없이 받았더구나. 난 사람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아인 정말 예의가 없더라."

 이모가 그렇게 얘기하는 데엔 사연이 있다. 이모는 밤 늦도록 글을 쓰고 아침 11시 쯤 일어난다. 언제가 같이 이모집에 놀러갔던 지은이 그걸 보고 "자기가 무슨 공주라고 아직도 자고 있어?"라고 내게 속삭인 적이 있는데 잠결에 그 이야길 들은 모양이다. 그날 점심을 먹고 우린 이모 집에서 쫓겨났다. 
 이번엔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콴처럼 안부를 묻고 곧 아버지를 바꿔주었다. 아버지는 내일 당장 당신이 일하는 회사의 샌프란시스코 지사에 연락을 하라고 했다. 치료와 배상 문제에 대해 회사 고문 변호사의 자문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긴 얘길 하고 싶지 않아 그저 알겠다고만 했다. 아버지가 이모를 바꾸라고 해 그렇게 했다. 이모에게 호통을 치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언제부턴가 형부와 처제 사이는 좋지 않았다. 회고하건대 이모가 주한 미군 대위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무렵부터일 것이다.

 - 걔가 왜 뉴욕이 아니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거야? 처제가 부른 거야?
 이모도 지지 않고 큰 소리로 받아쳤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조카가 오고 싶어 온 거지, 걔가 어린 애예요?"

 - 아무튼 걔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을 물을 거야!

 "흥. 좋으실 대로. 오랜만에 통화하면서 처제에게 꼭 그런 식으로 얘기해야 돼요? 속물 같으니."

 둘은 격하게 충돌했고 이모가 마지못해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버지는 평소 나를 옆길로 새게 만든 주범이라며 이모에게 비난을 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을 하게 된 게 순전히 이모의 격려 덕택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 왔던 이모와 대화를 하던 중에 학교 성적경쟁이 싫어 락음악을 해보겠다고 하자 이모는 뛸 듯이 기뻐했다.

 - 그래. 젊음이란 게 뭐니, 꿈을 가져야지, 꿈을. 드디어 이 가문에 정신줄 제대로 박힌 애가 하나 나왔구나.  
  이모는 기타교습을 먼저 받으라며 내 손에 두둑한 현금뭉치를 쥐어주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 나는 기타교습을 받고 학교 밴드에 가입했다. 그리곤 드럼에 매력을 느껴 곧 그리로 전향했다. 학교 담임선생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격노했다. 아버지의 강력한 추궁에 난 사실을 고백했다. 둘은 그 때도 지금처럼 전화통화를 하며 대판 싸웠다. 모두 지나간 일이다.
 이런저런 추억을 되살리고 있을 때 숨을 고른 이모가 다시 엘렌에게 관심을 보였다.

 "엘렌?"

 "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나?"

 "제가 그렇게 보이세요?" 엘렌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왠지 어색했다. 그러자 이모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까닥였다.

 "응. 그게 아니라면 미행 같은 것도 없겠지. 드미트리, 백미러 좀 봐. 우리 차 속도에 맞춰 차 한 대가 계속 따라오고 있어."

 "나도 주욱 보고 있었어. 어떡할까?"  드미트리가 반문했다.

 둘의 대화를 듣고 나와 엘렌이 동시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과연 차량 한 대의 헤드라이트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따라붙고 있었다.

 "일단 따돌려." 이모가 말했다.

 드미트리가 차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뒤의 차도 그렇게 했다. 앞 차를 피해가며 차선을 계속 바꿔서 운전하는 드미트리. 뒷차가 계속 추격해 오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 순간 그가 핸들을 급히 꺾었다. 그리곤 간선도로를 빠져나갔다. 뒷차는 그대로 지나쳐 갔다. 어두워서 차에 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곧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떡갈나무가 울창한 숲 옆이었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후덥지근했다. 드미트리가 전조등을 끈 뒤 에어컨을 틀었다. 숲에선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자꾸 물어서 미안한데,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래?" 이모가 물었다.

 "따지고 보면 죄 없는 사람이 있을라구요. 저는 그냥 미친 나라를 탈출했을 뿐이에요."

 "한국이 미친 나라라는 건 인정해. 그러지 않고서야 전과 14범이나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겠어? 뭐, 이놈의 미국이란 나라가 더 미쳤긴 하지만. " 이모가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헌데 광고회사 홍보직원이 그저 '그냥' 탈출했을 뿐인데 무슨 미행이 붙고 그래?"

 "저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그렇게 빠져나가려는 엘렌. 언젠가 디즈니랜드에서 만져보았던 밍크고래의 미끈한 감촉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모가 정곡을 찌르고 나섰다.

 "거 참 이상하네. 카드가 안 된다고 하고, 모텔을 조카 이름으로 체크인 해달라고 하고 말야. 정상적인 여행자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여. 엘렌은 지금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드디어 코너에 몰린 엘렌이 차 문 고리를 잡았다. 예상된 파국이었다.

 "폐가 됐습니다. 저는 여기서 내리겠어요. 고마웠습니다."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지만 토라진 건 분명했다.

 밍크고래가 내게서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는 엘렌을 이모가 두 손으로 제지하고 나섰다. 역시 이모다웠다. 평소 이모의 지론은 '날개 잃은 새를 돌봐주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생긴다'라는 것이다. 이모는 언젠가 공원에서 다친 새를 보고 그대로 지나쳤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발목을 크게 다친 뒤부터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내가 '미신'이라고 하자 이모는 '터부'라고 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그런 게 있다며. 하긴, 나도 밤에 손발톱을 깎지 않는다. 들은 얘기지만 심리적으로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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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나는 황당하고도 불순한 상상을 했다. 여자 경험이 없는 내게 엘렌이 아마 첫 상대가 될 지도 모른다는. 손수건에서 나오는 그녀의 체취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기내에서 맡은 그녀의 페로몬 때문일까. 이모는 자주 이런 말을 하곤 했다.

 - 사랑이란 호르몬의 장난일 뿐이야.

 고등학교 시절, 한 선생님은 이런 말도 했다.

 - 여자는 매우 이기적인 동물이지. 판타지를 품는 순간, 너희들은 여자의 노예가 된다. 

 아무튼 짧은 만남, 긴 여운. 다시 만날 기약도 없는 여자에 대해 일종의 판타지 같은 게 마음 속에 일고 있었지만, 그건 이 무료한 시간을 견딜 힘을 내게 부여해 주었다.
 대기하고 있는 곳엔 티브이고 뭐고 방송시설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다만 일부 승객이 스마트폰으로 보는 뉴스를 어깨 너머로 훔쳐볼 수는 있었다. 이번 사고에 대해선 아주 짧막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뉴스라도 이모에겐 충격일 것이다.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이모를 생각하니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이런저런 서류에 서명을 하고 지정병원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받아들고서야 입국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심사대 직원은 내가 사고기 부상자란 걸 알고 친절하고도 빠르게 수속을 끝내주었다. 착륙한 지 세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심사대를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이모가 달려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내 볼 여기저기에 입맞춤을 하고는 붕대가 동여진 내 손가락을 가져다 자기 가슴에 가져갔다. 중년여인 가슴의 뭉클한 감촉, 이모지만 그녀는 여자였다. 기분이 묘했다. 내 상태를 묻길래 괜찮다고 했다. 이모가 갑자기 내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평소 익숙한 행동이지만 여긴 공개 장소다. 난 엉덩이를 뺐다.

 "저기, 이모. 남들이 봐."

 "지금 남들 눈이 문제냐, 어이구 내 새끼. 죽은 줄 알았다. 이 놈아. 나도 네 소식을 들으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꼴이 말이 아니다. 많이 다치진 않았다고 해 마음은 놓았다만. 그런데 왜 전화 안했니?"

 이모에게 휴대폰 문제를 얘기해주었다.  그러자 이모는 "칠칠맞은 놈", 하며 내 엉덩이를 또 살짝 꼬집었다. 난 아픈 척하며 엄살을 떨었다. 그제야 이모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작은 키에 날씬한 몸매, 그리고 선글라스. 40대 나이에 가까웠지만 관리를 잘 한 탓에 30대 초반처럼 보였다.

 그 때 드미트리가 다가왔다. 불가리아계 미국인 '드미트리'. 그게 성인지 이름인지 나는 모른다. 마피아 전력이 있는 남자답게 풍채가 좋고 한량 같으면서도 어딘가 위압적인 구석이 있다. 

 그는 이모 소유 스포츠센터의 총지배인이자 이모의 보디가드이기도 했다. 그는 이모의 죽은 전 남편 데이빗 로세티의 친구다. 한때 마피아에 연루되어 감옥에 다녀온 그는,  친구 데이빗의 주선으로 그의 아버지 안토니오 로세티의 사설 경호원 일을 했다. 데이빗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뒤 데이빗의 아버지는 며느리가 걱정되어 그를 이모 지근거리에 배치해 주었다. 그러다가 프리랜서 기자 일을 하고 싶어하던 이모를 대신해 스포츠센터 경영을 맡게 된 것이다. 그가 이모의 섹스파트너인지 아닌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둘은 매우 친근하게 지내고 있다. 내가 작년에 방학을 맞아 밴드 친구들과 롱비치를 갔을 때는 친절하게도 모든 일정을 안내해 주기도 했다.

 "드미트리, 어쩐 일?"

 내가 묻자 그는 흰 치아를 드러내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 걱정에 왔다. 올 라잇?"

 "그럼. 걱정 끼쳐 미안해. 사업은 어때?"

 "베리 나이스."
 그가 배고프냐고 묻길래 식욕이 없어 집에 가서 먹겠다고 했다. 덩치가 큰 드미트리와 이모가 팔짱을 끼고 주차장으로 앞장을 섰다. 이모가 고목의 매미처럼 보였다. 드디어 공항청사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초저녁 공기가 나를 맞았는데 지난 몇시간이 마치 감옥에서 지낸 10년처럼 느껴졌다. 어느 모퉁이에서였다.

 "하이, 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여자 목소리다. 부디 엘렌이길. 난 속으로 부르짖었다. 숏커트에 미니스커트.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정말 엘렌이었다. 가발과 안경을 벗어버린 모양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 아, 아직 안 갔구나?"

 반가움에 난 말을 더듬었다. 다시 만나다니,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직녀를 기다리는 견우의 심정을 알만 했다.

 "응. 긴히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들어줄래?"

 발길을 멈춘 드미트리와 이모가 대화를 나누는 우리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이란 말에 주저하고 있을 때 이모가 물었다.

 "이 아가씬 누구?"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엘렌이 대신 대답했다.

 "아, 저 아까 비행기 같이 타고 왔어요. 댄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잠깐 실례해도 되죠?"

 "와이 낫?"
 이모가 어깨를 으쓱, 했다. 엘렌은 나를 일행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으로 데려갔다.

 "미안하게 됐지만 급해서 그래. 여기서 부탁할 이는 너 밖에 없어서."

 "혹시 그것 때문에 여태까지 안 가고 나를 기다린 거야?"

 "응. 아무튼 더 이상 묻지 말고, 이 카드로 1,000달러만 찾아 줄래?"

 그러면서 엘렌이 신용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표면에 포스트잇이 있었는데 길다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엘렌은 그게 비밀번호라고 했다,

 "왜 직접 안 찾고?"

 "사정이 있어. 나쁜 일이 아니니 더 이상 묻지 말고."

 난 드미트리와 이모한테 가서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둘은 동시에 미간을 지푸리며 엘렌 쪽을 바라보았다. 엘렌은 고개를 정중히 숙여보였다. 이모의 동의를 얻은 나는,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두 사람과 떨어져 엘렌과 같이 청사 옆의 현금지급기 부스로 갔다. 카드엔 '화영 킴'이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카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부스에서 나와 말찌감치서 기다리고 있던 엘렌에게 갔다. 내 설명을 듣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자식들, 혹시나 했건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물음에 그녀가 도리질을 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오해하진 마. 내게 캐쉬가 좀 있으니 돈 걱정은 없으니까. 넌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소살리토라고, 알아?"

 "알고 말고. 일단 거기서 하루 묵을까 하는데 네 이름으로 방 하나 구할 수 있을까?"

 그 말을 듣고 그녀가 범죄에 연루된 게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왠지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를 만한 여자로 보이진 않았다. 무슨 피치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난 동의했다. 우린 이모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갔다. 드미트리의 벤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서로에게 소개를 시키곤 이모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처음엔 미심쩍은 눈치를 보였지만 여자들끼리의 유대감때문이었을까, 이모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지?"

 "그럼,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엘렌과 나는 벤츠 뒷좌석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드미트리가 호기심 있는 눈길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가씬 무슨 일로 샌프란시스코에?" 이모가 물었다.

 "회사에서 휴가를 받아 잠깐 여행 삼아 나왔습니다.  아는 분 장례식도 있고 해서요."

 헐......장례식?

 "가는 곳은?"

 "산 호세요.."

 "엘렌이라고 했지? 이곳 지리는 잘 알아?"

 "네. 여기 캘리포니아 버클리대를 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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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카페 여주인. 독신주의자라나 봐."

 그건 사실이었다. 친구 민규의 여자 얘기다. 민규. 멍청하면서도 여자 잘 다루는, 미스테리한 놈. 

 "하긴 요새 능력 있는 여자가 어디 결혼을 하겠니? 천지에 다 빌빌거리는 녀석들 뿐이라. 쓸만하다 싶으면 짐승이고. 돈 있으면 걍 적당히 연애하다가 적당히 가는 게 여자에게 정답."

 엘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투엔 다소 허무함도 배어 있다. 연애 경험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도 슬픈 연애.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동정이 갔다. 잘 모르지만 공감을 해주기로 했다.

 "나도 남자지만 그 대목에서 찬성." 

 "헛. 쬐그만 게."

 그러면서 그녀는 책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심심하던 차에 더 말장난을 하고 싶었지만 독서를 방해하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돌아오니 그녀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안경을 벗고. 안경 벗은 얼굴을 보니 제법 매력이 있는 얼굴이다 싶었다. 대체 무얼하는 여자일까? 나눈 대화로 미루어 보면 학생은 아닌 듯했다. 유흥가 여성은 더욱 아닌 것같다. 그녀가 아마 직장인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공무원.

 지은이는 행정고시 준비를 할 거라고 했다. 그녀가 고시를 패쓰해 공무원 사회에 들어가면 이 여자처럼 당당해질까? 그러나 그 전에 내가 아는 지은인 결코 행정고시에 합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왕자 밖에 모르는 멍청한 신데렐라가 머리마저 좋다면, 그건 신이 불공평하다는 증거 아닌가? 지은이를 보면 신은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난 어느새 옆자리의 잠든 여자를 공무원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수지 콴. 그애 생각이 났다.
 그래, 그 애도 공무원, 특히 연방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했지.
 수지는 밴드의 리드싱어, 보컬이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유명 피겨스케이터 미셸 콴의 먼 조카다. 신은 그 가문에 큰 재능을 부여했다. 미셸에겐 스케이트를, 조카 수지에겐 더 없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수지가 언제 돌아오느냐고 여러 번 전화를 걸어 왔다. 작곡 부분의 진척상황에 대한 재촉이었지만 난 그녀 마음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키보드를 맡고 있는 스테판이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좌석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어느 무렵이었다.
 옆좌석에서 약하고도 지속적인 진동이 이는 걸 몸에 느꼈다. 눈을 뜨고 엘렌을 보니 한 손을 머리에 짚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다. 다른 한 손은 가슴께에 가 있었는데 호흡이 정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러자 엘렌이 빈 물병을 내민다.

 "물, 물 좀......"

 마침 좌석을 지나치는 여승무원이 있어 도움을 청했다. 물이 오기까지 그녀는 자주색 배낭에서 이런저런 약들을 꺼냈다. 종류가 제법 많아보였다, 승무원이 물을 가지고 오자 그녀는 차분하게 몇 알 씩 나누어 약을 삼켰다. 다 삼킨 뒤에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가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는 나와 몇 몇 승무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승객 몇 명도 무슨 일인지 일어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진정이 됐는지 그녀는 그제야 승무원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중세를 계속 물어보는 승무원들을 설득해 돌려보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

 "천만에. 시체 치우는 줄 알았어." 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가 정상으로 돌아와 다행이었다. 이어 물었다. "무슨 약을 한웅큼이나 먹어?"

 아까의 알약 수는 족히 열 개는 넘어 보였다.

 "신경안정제야."

 "그게 전부는 아니지. '신지로이드'라고 쓰인 약봉지를 봤어. 그거 갑상선호르몬저하증 치료제지?"

 엘렌이 눈을 크게 떴다.

 "관찰력 진짜 좋네. 그래, 그것도 있었어. 그 약을 어떻게 알아?"

 "어머니가 한때 복용했던 약이지. 왜, 그 쪽이 안 좋아?"

 "여성에게 흔한 증상이야. 너무 신경쓰지 마. 난 좀 더 자두어야겠어. 미안."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다시 담요를 깊이 덮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를 더 귀찮게하지 않기로 했다. 가방에서 휴대폰과 이어폰을 꺼냈다. 미리 저장해 둔 음악을 찾아 들으며 나도 어느 틈에 잠이 들었다.

 곧 착륙할 테니 안전벨트를 매달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에 잠을 깼다.
 창 밖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은 맑았고 대지엔 태양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바다엔 유람선들이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었다. 엘렌은 벌써 짐을 챙기고 있었다. 저만치에 샌프란시코 중심가가 보인다. 꽤 큰 도시다. 서울은 무척 더웠는데 이곳은 어떨까 궁금했다. 서울의 무더위 같은 건 다시 겪고 싶지도 않다. 엘렌이 나를 보고 빙긋 웃길래 어깨를 으쓱, 해주었다.

 귀에서 이어폰을 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쾅, 소리가 났고 자세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중심을 잡으려고 앞죄석을 잡았지만 헛수고였다. 모서리를 놓친 손가락 끝에 통증이 왔다. 배행기의 요동은 금세 멈췄지만 이미 기내는 이리저리 쏟아진 여행객들의 소지품들로 엉망이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승객은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일부는 정신을 잃고 있었고 머리에 피를 흘리는 남자도 보였다.

 엘렌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좌우로 흔들어보고 있었다. 나도 목이 뻣뻣했다. 그 때 고무 타는 냄새가 심하게 풍겨오기 시작했다. 행여 테러가 아닐까하는 공포가 기내를 엄습했다. 기내방송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승객들이 저마다 짐을 챙겨 일어나 탑승구로 향하는 바람에 기내는 혼돈, 그 자체였다. 짐을 챙기고 있을 때 방송이 나왔다. 기체에 경미한 결함이 있었을 뿐 테러나 화재 위험이 없으니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승무원들도 승객들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제야 내 청바지와 티셔츠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른 손 중지의 손톱 아래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엘렌이 그걸 보곤 얼른 손수건을 꺼내 감싸주었다.

 "이런, 괜찮니?"

 "응. 이 정도야 뭘. 엘렌은?"

 "무릎이 아프지만 괜찮은 듯 해. 일단 나가자."

 우린 거의 마지막으로 랑공기를 탈출했다.  밖은 땡볕이었지만 서울만큼 무덥진 않았다. 산들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엘렌이 다리를 조금 절룩였다.

 "저런. 많이 아파?"

 "아니, 조금."

 엘렌은 개의치 않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먼저 내린 승객들이 여기저기에 모여 웅성거리거나 주저앉아 있었다. 앞바퀴 하나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거기와 동체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승무원들이 구급차가 올 때까지 일단 기체에서 멀리 벗어나 풀밭으로 가기를 권했다. 우린 거기에 따랐다. 곧 경적소리가 났다. 저만치서 소방차와 경찰차, 그리고 구급차가 엄청나게 몰려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전원은 꺼져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된 것이다. 서둘러 집을 나오느라 보조배터리도 충전하지 못했다. 이모가 나를 맞으러 공항에 나오기로 했던 터라 전화를 해야만 했다. 엘렌에게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그녀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모 전화번호를 기억할 수가 없다. 다른 그 어느 친구도. 그냥 저장해서만 쓰고 기억을 안 해둔 탓이리라. 폰맹. 이런 낭패가 따로 없었다. 

 그로부터 약 두 시간 뒤. 난 아직 입국수속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부상자로 분류되어 공항 내 교육장 같은 곳에서 의료진의 검진을 받고 항공사 직원들로부터 이런저런 질문에 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250여 명의 승객 가운데 나 같은 이가 50명 정도 됐다. 중상자는 없는 듯했다.

 엘렌은 다친 데가 없다고 하며 다른 승객들과 함께 먼저 빠져나갔다.  

 손수건만 남기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마음이 텅 빈 걸 느꼈다. 사람은 가도 손수건은 남는가. 난 픽, 하고 혼자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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