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나는 황당하고도 불순한 상상을 했다. 여자 경험이 없는 내게 엘렌이 아마 첫 상대가 될 지도 모른다는. 손수건에서 나오는 그녀의 체취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기내에서 맡은 그녀의 페로몬 때문일까. 이모는 자주 이런 말을 하곤 했다.
- 사랑이란 호르몬의 장난일 뿐이야.
고등학교 시절, 한 선생님은 이런 말도 했다.
- 여자는 매우 이기적인 동물이지. 판타지를 품는 순간, 너희들은 여자의 노예가 된다.
아무튼 짧은 만남, 긴 여운. 다시 만날 기약도 없는 여자에 대해 일종의 판타지 같은 게 마음 속에 일고 있었지만, 그건 이 무료한 시간을 견딜 힘을 내게 부여해 주었다.
대기하고 있는 곳엔 티브이고 뭐고 방송시설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다만 일부 승객이 스마트폰으로 보는 뉴스를 어깨 너머로 훔쳐볼 수는 있었다. 이번 사고에 대해선 아주 짧막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뉴스라도 이모에겐 충격일 것이다.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이모를 생각하니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이런저런 서류에 서명을 하고 지정병원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받아들고서야 입국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심사대 직원은 내가 사고기 부상자란 걸 알고 친절하고도 빠르게 수속을 끝내주었다. 착륙한 지 세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심사대를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이모가 달려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내 볼 여기저기에 입맞춤을 하고는 붕대가 동여진 내 손가락을 가져다 자기 가슴에 가져갔다. 중년여인 가슴의 뭉클한 감촉, 이모지만 그녀는 여자였다. 기분이 묘했다. 내 상태를 묻길래 괜찮다고 했다. 이모가 갑자기 내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평소 익숙한 행동이지만 여긴 공개 장소다. 난 엉덩이를 뺐다.
"저기, 이모. 남들이 봐."
"지금 남들 눈이 문제냐, 어이구 내 새끼. 죽은 줄 알았다. 이 놈아. 나도 네 소식을 들으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꼴이 말이 아니다. 많이 다치진 않았다고 해 마음은 놓았다만. 그런데 왜 전화 안했니?"
이모에게 휴대폰 문제를 얘기해주었다. 그러자 이모는 "칠칠맞은 놈", 하며 내 엉덩이를 또 살짝 꼬집었다. 난 아픈 척하며 엄살을 떨었다. 그제야 이모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작은 키에 날씬한 몸매, 그리고 선글라스. 40대 나이에 가까웠지만 관리를 잘 한 탓에 30대 초반처럼 보였다.
그 때 드미트리가 다가왔다. 불가리아계 미국인 '드미트리'. 그게 성인지 이름인지 나는 모른다. 마피아 전력이 있는 남자답게 풍채가 좋고 한량 같으면서도 어딘가 위압적인 구석이 있다.
그는 이모 소유 스포츠센터의 총지배인이자 이모의 보디가드이기도 했다. 그는 이모의 죽은 전 남편 데이빗 로세티의 친구다. 한때 마피아에 연루되어 감옥에 다녀온 그는, 친구 데이빗의 주선으로 그의 아버지 안토니오 로세티의 사설 경호원 일을 했다. 데이빗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뒤 데이빗의 아버지는 며느리가 걱정되어 그를 이모 지근거리에 배치해 주었다. 그러다가 프리랜서 기자 일을 하고 싶어하던 이모를 대신해 스포츠센터 경영을 맡게 된 것이다. 그가 이모의 섹스파트너인지 아닌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둘은 매우 친근하게 지내고 있다. 내가 작년에 방학을 맞아 밴드 친구들과 롱비치를 갔을 때는 친절하게도 모든 일정을 안내해 주기도 했다.
"드미트리, 어쩐 일?"
내가 묻자 그는 흰 치아를 드러내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 걱정에 왔다. 올 라잇?"
"그럼. 걱정 끼쳐 미안해. 사업은 어때?"
"베리 나이스."
그가 배고프냐고 묻길래 식욕이 없어 집에 가서 먹겠다고 했다. 덩치가 큰 드미트리와 이모가 팔짱을 끼고 주차장으로 앞장을 섰다. 이모가 고목의 매미처럼 보였다. 드디어 공항청사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초저녁 공기가 나를 맞았는데 지난 몇시간이 마치 감옥에서 지낸 10년처럼 느껴졌다. 어느 모퉁이에서였다.
"하이, 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여자 목소리다. 부디 엘렌이길. 난 속으로 부르짖었다. 숏커트에 미니스커트.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정말 엘렌이었다. 가발과 안경을 벗어버린 모양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 아, 아직 안 갔구나?"
반가움에 난 말을 더듬었다. 다시 만나다니,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직녀를 기다리는 견우의 심정을 알만 했다.
"응. 긴히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들어줄래?"
발길을 멈춘 드미트리와 이모가 대화를 나누는 우리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이란 말에 주저하고 있을 때 이모가 물었다.
"이 아가씬 누구?"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엘렌이 대신 대답했다.
"아, 저 아까 비행기 같이 타고 왔어요. 댄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잠깐 실례해도 되죠?"
"와이 낫?"
이모가 어깨를 으쓱, 했다. 엘렌은 나를 일행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으로 데려갔다.
"미안하게 됐지만 급해서 그래. 여기서 부탁할 이는 너 밖에 없어서."
"혹시 그것 때문에 여태까지 안 가고 나를 기다린 거야?"
"응. 아무튼 더 이상 묻지 말고, 이 카드로 1,000달러만 찾아 줄래?"
그러면서 엘렌이 신용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표면에 포스트잇이 있었는데 길다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엘렌은 그게 비밀번호라고 했다,
"왜 직접 안 찾고?"
"사정이 있어. 나쁜 일이 아니니 더 이상 묻지 말고."
난 드미트리와 이모한테 가서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둘은 동시에 미간을 지푸리며 엘렌 쪽을 바라보았다. 엘렌은 고개를 정중히 숙여보였다. 이모의 동의를 얻은 나는,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두 사람과 떨어져 엘렌과 같이 청사 옆의 현금지급기 부스로 갔다. 카드엔 '화영 킴'이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카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부스에서 나와 말찌감치서 기다리고 있던 엘렌에게 갔다. 내 설명을 듣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자식들, 혹시나 했건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물음에 그녀가 도리질을 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오해하진 마. 내게 캐쉬가 좀 있으니 돈 걱정은 없으니까. 넌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소살리토라고, 알아?"
"알고 말고. 일단 거기서 하루 묵을까 하는데 네 이름으로 방 하나 구할 수 있을까?"
그 말을 듣고 그녀가 범죄에 연루된 게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왠지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를 만한 여자로 보이진 않았다. 무슨 피치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난 동의했다. 우린 이모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갔다. 드미트리의 벤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서로에게 소개를 시키곤 이모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처음엔 미심쩍은 눈치를 보였지만 여자들끼리의 유대감때문이었을까, 이모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지?"
"그럼,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엘렌과 나는 벤츠 뒷좌석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드미트리가 호기심 있는 눈길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가씬 무슨 일로 샌프란시스코에?" 이모가 물었다.
"회사에서 휴가를 받아 잠깐 여행 삼아 나왔습니다. 아는 분 장례식도 있고 해서요."
헐......장례식?
"가는 곳은?"
"산 호세요.."
"엘렌이라고 했지? 이곳 지리는 잘 알아?"
"네. 여기 캘리포니아 버클리대를 다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