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1. 전학생 소녀 ②
5학년이 되자 설희의 몸과 마음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사춘기는 어쩔 수 없었다. 김창호라는 이웃집 중학생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가 설희를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친오빠처럼 늘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창호는 아버지가 미군인 혼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4살 된 창호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D시에서 복무를 마친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갔다. 지금은 미국에 있다고 하는데 할머니에게 1년만 맡아달라고 떠난 어머니는 10년이 되도록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연락이 끊어진 지도 5년이 넘었다. 창호는 피부색이 약간 검은 편이고 덩치가 크다는 걸 제외하면 희한하게도 한국 사람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은 작았으며 코는 납작했고 입술도 얇았다. 고모는 창호 할머니를 교회에 나오게 하려고 애썼고 결국 고모가 이겼다. 그 뒤로 두 집 여자는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냈다. 설희도 방학이면 창호네 집에 가서 마루에 엎드려 공부를 같이 하곤 했다.
운동을 잘 하는 창호는 중학교에 들어가 길거리 농구 학교 대표로 뽑혀 학교가 도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잘 생긴 데다가 공부도 제법 했으니 자연히 또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중학교 언니들이 설희에게 접근해 과자를 사주면서 창호에게 줄 편지와 선물을 건네는 건 다반사였다. 일부는 건넸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설희가 챙겼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좋아한다는 편지는 찢어버렸다. 중학생이 된 창호는 설희와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틈만 나면 농구를 하고, 저녁 늦도록 친구들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하는 통에 설희가 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옆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창호가 바빠지자 설희는 그제야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남학생을 좋아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설희는 잘 몰랐다. 그저 창호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만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창호는 설희를 의식하고 있었다. 창호는 자길 바라보는 설희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창호 친구들도 알고 있었다. 창호는 설희로 하여 자기가 선후배들 사이에 놀림감이 되고 여학생을 사귀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될수있으면 설희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일부러 설희 집앞을 피해가기도 했다. 설희가 여학생들의 선물을 가져오면 받기만 하고 쌀쌀맞게 "앞으로 이런 거 가져오지 마."하며 돌려보냈다. 설희는 창호의 눈치를 알고 가슴이 아팠지만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설희는 나름 어른스러웠다. 이런 아픔은 세상에 혼자 남은 설희에게 있어 시련의 일부며 늘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걱정했던 일이 터졌다. 그 여름이었다.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그날 밤도 고모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 외박이 잦았던 터라 고모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였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고모부의 시신이 그곳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강 하류 철교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경찰이 전해왔다. 경찰은 술에 취해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그가 학다리에서 발을 헛딛여 강물에 빠진 걸로 결론지었다. 고모는 슬퍼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뒤, 고모는 시댁 식구들의 눈총에도 아랑곳 않고 곧 평상으로 돌아왔다. 겉으로 볼 때 고모부가 남긴 것은 보잘 것 없었다. 운영하던 자재상은 빚을 제외하면 남은 게 없었고 저축해 둔 것도 없었다. 오히려 증권사에 큰 빚을 지고 있었는데 용케도 고모가 다 갚았다. 집은 어차피 고모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지만 고모부의 죽음이 고모에겐 인생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고모는 보험설계사 일을 하던 교회 한 여신도의 강권으로 고모부 앞으로 적지 않은 보상액수의 종합보험을 들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으로는 그 액수가 수억 원대라고 했다. 고모부의 사망과 큰 보험보상액 때문에 한동안 경찰관과 보험사 직원들이 집과 고모가 일하는 면사무소를 들락거렸지만 공무원사회와 교회에 인맥을 가지고 있던 고모는 별 문제 없이 부유한 미망인이 되었다. 고모는 Y군을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시로 나가 무슨 일을 해야할지 몰라 아직 주저하고 있었다. 가끔 젊은 경찰관 하나가 집에 들러 고모에게 별 일 없냐고 물어보곤 물이나 음료수를 얻어 마신 뒤에 돌아가곤 했다. 소문에 그 경찰관과 고모가 사귄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설희가 보기에 그건 소문에 지나지 않았다. 고모는 남자를 만나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고모는 그 경찰관이 들르고 갈 때마다 혼잣말로 욕을 했다.
"싱거운 새끼. 남들 눈이 있지, 왜 뻔질나게 우리 집을 드나든다니?"
이듬해 들어 설희는 남모르게 또래 한 남학생의 손찌검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호석이라는 남학생으로 설희보다 나이가 두 살 많지만 학교에선 동급생이었다. 언제부턴가 호석은 학교나 집에서 자주 설희를 불러냈다. 그리곤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장난으로 머리를 쥐어박거나 학용품을 빼앗곤 했다. 한번 시작한 장난은 더욱 발전하여 돈을 뜯어가기도 했다. 거절하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발로 차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는 근처 야산으로 데려가 씨름을 하자며 설희의 몸을 더듬곤했다. 그러나 왠지 설희는 저항을 하지 않았다. 창호는 어느 날 친구로부터 이 소문을 듣고 분개했다. 호석을 불러내 사실을 확인한 뒤 흠씬 패주었다. 그리곤 설희를 찾아갔다.
"왜 당하고 있었니?"
설희는 눈물만 흘렸다. 말 할 수 없는 처지가 괴로웠다. 창호는 답답해했다.
"앞으로 또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알았지?"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자기를 지켜줄 사람은 오직 창호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게 그 때였다. 그러면서도 호석이 '그것'을 경찰에 발설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경찰차 소리나 집앞을 지나가는 경찰관을 보면 가슴이 덜컥, 했다. 하지만 경찰이 찾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호석에겐 발설해서 얻을 이익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걸로 하여 감당해야 할 창호의 주먹세례가 더 무서웠던 것이다. 창호는 언제부턴가 인근 주목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 뒤로 호석은 설희 주위를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다. 여름방학 무렵에 호석의 가학이 다시 시작됐다. 친구들 사이에 돌던 성인잡지를 접하게 된 호석은 성적 욕구의 발산 대상으로 설희를 찍었다. 사춘기에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호르몬은 창호의 경고를 쉽게 잊게 해주었다. 호석은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설희의 뒤를 밟았다. 임진교를 지날 즈음 설희를 불러세웠다. 호석을 본 설희의 눈에 공포의 빛이 서렸다.
"잠깐 따라와. 그러지 않으면 다 불어버릴 거야."
설희는 주저하며 학다리 하류 쪽으로 내려가는 호석을 따라갔다. 누군가 자기를 구해줄 사람이 있는가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호석이 둑 아래로 내려가 갈대 숲 앞에 서더니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설희는 무서워서 도망쳤다. 뒤에서 호석이 외쳤다.
"너 정말 그러면 재미 없어!!"
집으로 돌아온 설희는 방문을 잠그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오랫동안 콩닥콩닥 뛰었다. 호석이 장차 설희에게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적했고 호석 말고도 설희의 몸을 훑어보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인근 D시에선 여중생 강간살인 사건도 일어났다. 마음 속의 백기사 창호는 자기 놀이를 즐기느라 바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대한 미움 같은 것도 생겼던 터라 호석의 일을 얘기하기는 것도 어쩐지 싫었다. 설희는 호신용으로 뭔가를 지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커터칼은 너무 작아 몸을 지키는 데에 별 쓸모가 없을 것같았다. 설희는 주방을 뒤졌다. 식칼은 너무 커서 보기에도 끔찍했다. 과도는 하나 밖에 없었다. 없어진 걸 알면 고모한테서 추궁을 당할 게 뻔했다. 서랍을 열어보았다. 마침 요리용 가위가 있었는데 두 개였다. 그 가운데 하나를 집었다. 날은 뾰족했고 무척 가벼웠다. 지니고 다니다가 들켜도 문구용 가위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건 설희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운명의 그 날은 며칠 째 내린 비에 강물이 엄청 불어나 있었다. 설희는 수업이 끝난 뒤 친구 여학생들과 창호 학교로 갔다. 그 날은 창호가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연습을 하는 날이었다. 그들은 매주 목요일마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빗속에서 뛰고 있는 창호의 모습은 늠름했고 중2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다. 창호가 골을 성공시킬 때마다 여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을 본 창호가 희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엇다. 사춘기 여학생들한테 보인 그 모습은 정말 멋있기 짝이 없었다. 연습이 끝났다. 그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간 뒤 여학생들도 각자 갈 길을 갔다. 설희는 혹시 창호가 일찍 나오지 않을까 하여 잠시 교문 근처에서 기다렸다. 한 시간을 기다렸으나 창호 일행은 나오지 않았다. 안에서 웃음과 노래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마 파티 같은 것을 하는 모양이었다. 해가 길 무렵이었지만 흐린 날이라 일찍 어둑해졌다. 설희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학다리를 거의 지나왔을 때였다. 다리 아래에서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호석이었다. 설희의 팔목을 움켜잡는 호석의 힘은 억세기만 했다.
"소리치면 죽여버린다."
호석이 다른 팔로 설희의 목을 잡았다. 예상 못한 기습에 설희는 소리를 지르기는 커녕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설희는 다리 아래로 질질 끌려갔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트럭 한 대가 다가왔지만 그대로 지나쳤다. 비에 불어난 물은 갈대숲 중간까지 차올라 있었고 흐르는 물소리가 굉장했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못 들을 것 같았다. 호석은 교각 축대에 설희를 밀어붙이고는 잡았던 손을 거뒀다. 설희는 주저않아 목을 잡고 켁켁거렸다.
"내가 경찰에 못 불 줄 알지? 천만에. 넌 그러길 바래?" 호석의 목소리는 흥분에 차 있었다.
"아니." 설희가 도리질을 했다.
"내가 그러면 너넨 끝장이야. 네 고모는 빵을 가고 넌......."
"끔찍한 얘기 하지 마. 원하는 게 뭐야? "
호석은 대답 없이 발을 들어 설희의 등을 찍었다. 설희는 바닥에 뒹굴었다.
"대체 왜 이래? 너한테 지금까지 돈도 주고 맞을 만큼 맞았어."
"그래? 네가 얼마나 줬다고. 그리고 내가 창호 그 새끼한테 맞은 걸 생각하면 너희 둘 다 죽이고 싶다." 호석이 설희의 머리채를 잡았다. "재미있네, 오늘."
"난 재미 하나도 없어." 설희가 말했다. "오늘 왜 이래? 돈이 필요해? 얼마야?"
"아니. 돈은 필요 없어. 내가 거지냐? 건방진 년."
호석이 화난 얼굴로 때릴 듯 손을 치켜들었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느 덧 창호 만큼이나 덩치가 커진 녀석의 몸이 설희 앞을 바싹 가로막고 있어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