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는 인물이지?" 최 과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정화는 정색을 했다.
 "왜 제가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죠?"
 "자네가 미국에 있을 때 놈을 처음 만난 걸로 알고 있어."
 "과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죠?"
 "우린 무서운 조직이야."
 정화는 입을 다물었다. 과장급 이상이면 부학 직원의 인사파일을 언제든 열어볼 수 있다. 정화 자신도 아직 모르는 내용. 아마 거기서 알아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소소한 사실까지 적시해 있나? 정화는 문득 '인권'에 대해 생각했다. 침묵에 싸인 찻집엔 노래만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 지난 밤에 내 님은 무슨 꿈을 꾸셨나 바람에 실려와 내 곁에 찾아...
 정화의 표정에 흐르는 어두운 기색을 최 과장은 놓치지 않았다.
 "자네 인사파일엔 없는 내용일세."
 "그렇다면?" 정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옛날 자네에게 놈의 미국행적을 추적해달라고 했던 게 바로 나일세. 기억 나나? 한동안 내가 놈 사찰담당이었지."
 "아아. 그랬군요.......아, 참. 그런데 그는 지금 교도소에 있지 않나요?"
 정화는 실은, 설희의 미국에서의 마지막 연락처를 김창호를 통해 알았다. 주변에 눈이 있어 직접 만난 건 아니고 후배 직원을 통해서였다. 그 몇 년 뒤 그는 살인미수와 불법 인신매매 건으로 구속되었다. 형기를 다 채우려면 아마 내년 말까지는 복역해야 할 것이다.
 "무슨, 특사로 풀려난 지 벌써 2년이 되어가는구먼."
 정화는 손으로 머리를 탁, 쳤다.
 "그랬군요."
 최 과장은 그녀에게 김창호가 관련된 신흥 폭력조직에 대해 대해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반은 아는 얘기고 반은 모르는 얘기였다.
 "놈들을 속칭 '태천파'라고 하지. 그들이 스스로 이름을 지은 건 아니고 조직 리더인 조태천이 이름을 따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거야. 조직의 발단은 옛날 동두천일대의 골목 양아치에서였다고나 할까? 아까 얘기한 김창호 등을 끌어들여 곧 그 일대를 평정했고 이후 안양으로 와 평촌에서 룸살롱 몇 개를 운영하며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지. 그런데 안양은 이미 OB파가 꽉 잡고 있는 지역이라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었지. 그러자 몇 년 전부터 강남으로 파고들기 시작해. 강남 일대 세력들이 하길 꺼리는 사업에 끼어든 거지. 그게 바로, 마약 공급과 청부폭력이야. 이 과정에서 행동대장인 김창호가 구속되지. 놈이 없는 동안 조태천은 김창호를 외면하고 자신의 측근 박시백이란 놈을 행동대장으로 임명했는데 썩 능력이 있는 놈은 아니었어. 그 세가 위축되면서 태천파는 결국 강남 최대세력인 창촌파의 밑으로 기어들어가 속칭 '시다바리' 역할을 맡게 되지. 다시 세를 불린 건 김창호가 촐소하고나서부터야. 교도소에서 절치부심으로 기획을 했던 겐가,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세를 불렸어. 6개월 전엔 조태천이를 형식적인 보스 위치로 밀어냈지. 행동대장 노릇을 하던 박시백이는 지금 행방불명된 상태고. 한편 창촌파 두목이 자살하고 행동대장이 실종된 틈을 타 기존 창촌파의 조직원들을 대거 흡수했어. 지금은 기업형 성매매오피스텔 두 개를 중심으로 과거 이현광 영역의 약 30%를 할당받아 차지하고 있지."
 "그렇게 성장한 비결이 뭘까요? 불법적인 것 아니면 그렇게 빨리 크질 못했을 텐데."
 "내가 생각하기엔......." 여기까지 말하고 최 과장은 물을 한 잔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새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저만치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살인과 살인청부업이야."
 "증거는요?"
 "불행히도, 없어."
 "없는 건가요, 아니면 묵인한 건가요. 예컨대 우리 안의 고위 내통자가 있다든지." 
 "내통자에 대해선 모르겠고......혐의는 있지만 아무튼 깊은 수사가 불가능해. 나 역시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주위의 충고를 자주 받았거든."
 "그 '주위'가 대체 누군가요?"
 어느덧 정화의 말투는 피의자를 심문하는 뉴앙스로 가고 있었다.
 "내가 무슨 용의자가 된 기분이군, 헛허. 다양해. 내 입으론 말할 수 없어. 자네가 맡게되면 스스로 알아내야 할 사항이지."
 그가 더이상 자세한 얘길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역시 깊숙히 들어가 있으므로. 정화는 입이 탔다. 물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최 과장에게 양해를 구해 맥주를 한 병 주문했다. 주인이 가져온 병맥주를 따 한 잔 들이킨 후 물었다.
 "강지수 계장 실종과 공무원 남녀의 피살을 김창호 쪽에서 저지른 거라고 보시는 군요?"
 "그냥 느낌이야."
 그는 베테랑이다. 그 '느낌'이라고 말한 걸 과소평가할 수는 없었다.
 "창촌파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그 행동대장들을 처리한 게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추측 뿐이야. 그런데 경고하겠네. 너무 깊은 걸 물으면 곤란해." 최 과장이 미간을 지푸렸다.
 정화는 마지막으로 정곡을 찔러보기로 했다. 그가 인정하면 좋고, 인정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밑지야 본전이란 셈치고 질문을 던졌다.
 "과장님은.....소문대로 창촌파와 가까우셨나요?"
 "응."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정화도 그렇게 했다.
 정화는 그의 괴로운 기색을 눈치채고 더이상 민감한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그를 코너로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후배 직원에게 구태여 흉금을 터놓는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건 예의가 없는 짓이었다. 또한 경찰 생활을 하며 얻은 처세술이지만 많이 알수록 좋을 것도 없었다.
 한 시간 뒤 그들은 찻집에서 나왔다. 그동안 그들은 사소한 일상이야기만 나누었다. 최 과장은 마치 먼 나라로 떠날 듯한 사람처럼 회의에 찬 기색을 여러 번 비추었다. 정화가 위로했지만 그다지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가 길어져 저녁 여섯 시인데도 날이 환했다. 최 과장은 그녀를 서 근처에 내려주고 그대로 퇴근을 해야겠다며 자기 집이 있는 송파 쪽으로 사라졌다. 


 사무실로 가는 복도에서 감식반의 마홍수와 마주쳤다. 그는 "오 경위님 화이팅!"하며 주먹을 들어보이곤 곁을 지나쳐갔다. 
 규영은 자리에 있었다. 어디에 다녀오느냐고 묻길래 정화는 최 과장과 데이트를 하고 왔다고 농담을 건넸다. 이번엔 규영이 자신도 정화와 데이트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요즘 남자들이 왜 이래. 나하고 데이트 못해 환장을 했나?"
 "고민이 있어서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규영의 표정은 심각했다.
 둘은 택시를 타고 삼성역 부근의 한 카페로 들어갔다. 한때 코스닥 주가조작사범을 잡으러 잠복근무를 했던 곳이었는데 분위기가 괜찮았다. 종업원들은 둘이 경찰이란 걸 예나 지금이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여 주문했다. 주문한 걸 기다리면서 정화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규영의 모습을 살폈다. 수려한 얼굴에 오똑한 콧날, 지적으로 보이는 분위기. 남자로서 일의 능력도 있다. 그런 그가 왜 경찰노릇을 하고 있는지 갑자기 새삼스러워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은 여러 잡담을 나누었다. 와인이 몇 잔 들어가고 분위기가 좋아질 즈음, 정화에게 오늘 밤 그와 몸을 섞어볼까 하는 충동이 밀려왔다. 그건 동료 경찰과는 잠자리를 같지 않는다는 그녀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었지만 오랫동안 섹스에 굶주려 있었던 탓에 이성이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민이 뭔데?" 정화가 선배로서의 위엄에다가 살짝 애교를 곁들여 물었다. 그의 고민 속에 정화에 대한 흠모 같은 게 있었으면 하는, 어이가 없는 기대도 있었던 것이다.
 "이혼하려고요."

 

위험한 동창생들 - 6. 낯선 재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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