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왜?"
정화의 물음에 규영은 대답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한참 동안 그 자세로 있었다. 정화는 그의 얼굴 옆모습에서 낮에 최 과장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우울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 뒤 그가 얼굴을 다시 정화에게 돌렸다.
"그런 얘기 재미없죠? 그만둘래요."
"싱겁긴. 다음 달이 아이 돌이라며? 대체 무슨 일인데?"
정화가 그의 빈 잔에 와인을 채우며 재차 물었다.
"제 아이가 아니에요."
그의 대답에 그녀는 하마터면 병을 엎지를 뻔했다. 그는 아내가 임신 6개월 되던 때에 결혼을 했다.
"알고 있었어?"
그가 얘길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는 몰랐죠. 낳고서 알았죠, 아이 혈액형이 이상하더군요. 저는 A형, 아내는 O형인데 아이는 AB형이니. 저도 그렇지만 아내도 당황했어요. 내 추궁에 그 진실을 얘기해 주더군요. 저와 잠자리를 하던 그 시기에 운전교습을 받았는데 운전학원 강사와 하룻밤 지낸 적이 있다고요. 산후조리를 마치곤 집을 나가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임신중독으로 상당 기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죠. 그런 처지인데 아내더러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지난 1년이 지옥 같았습니다. 아내가 안정된 거처를 마련하기까지 1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거절했죠. 안됐지만 저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서요."
정화는 갑자기 피곤해져서 그 얘길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거 참, 사람들 사는 모양새들이 왜 이래? 그래서 내가 결혼하기 싫은 거야."
"죄송합니다. 한심한 얘길 해서."
침묵 속에 둘은 말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게 나와 상의하고 싶은 것이었어?" 정화가 물었다.
"아니요, 본론이 남아 있습니다."
"뭐지?"
"경찰을 떠나려고요."
"그건 또 왜?"
"어쩌다보니 박 란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습니다."
그의 말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둘 사이엔 전혀 그런 조짐이 없어 보였다. 아니, 정화가 부하 직원에게 세세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정화는 속으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도 별 수 없구나.
"그렇군. 그런데 그게 왜 사직하는 이유가 되는 거지?"
"경찰직은 남자에게 장래성이 없잖아요. 여자에겐 괜찮은 직업이지만요. 친구와 조그만 사업을 하나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 좋은 데로 옮긴다면야 내가 말릴 이유가 하나도 없지. 결심을 굳힌 건가?"
"네." 그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기 전에 팀장님께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상의가 아니고 통보로구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해.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내일 사직서를 받아주시는 것과 제가 떠나더라도 박 란을 잘 챙겨주십사, 하는 겁니다."
하마터면 정화 입에서 '박 란이는 너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인내심이 그녀를 꾹 참게 했다. 대신 와인 잔을 잡은 손이 조금 떨렸다.
"그러지."
정화가 짧게 대답하고 이번엔 그녀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왜 괜찮은 남자들은 다들 한심한 여자와 사랑에 빠질까, 정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를 탐하려던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미련이 남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 미련은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가 얼마 있으면 더 이상 자기 부하직원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와인 탓에 하체에 은근히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그 불꽃에 규영이 기름을 부었다.
"팀장님을 속으로 참 좋아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싱거운 이야기가 계속될 것 같아 정화가 미끼를 던졌다.
"지금은 안 좋아하고?"
그러자 규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지금은 안 좋아하냐고?"
강렬한 정화의 눈빛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와 박 란과의 애정전선에 영향을 끼치고 싶은 욕망이 강렬하게 그녀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손을 뻗어 그의 뺨에 갖다 댔다.
"오늘 나하고 자 볼래?"
그러자 규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아닙니다." 그러더니 홀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집으로 간 듯했다. 정화는 쓴웃음을 짓고는 병 바닥에 남은 와인을 남김없이 마시고는 레스토랑을 나왔다. 길 건너편에서 규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삼성동에서도 가장 후미진 골목에 있는 모텔로 들어갔다.
규영은 거칠었다. 방에 들어서자마 그녀를 침대에 내던지듯 눕히고는 그녀에게 입술을 포갰다. 둘의 옷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정화는 눈을 감고 야수처럼 덤벼드는 규영에게 몸을 온전히 내맡겼다. 그의 입술과 손이 그녀의 목과 가슴, 배와 하복부를 지나 속살을 공략할 즈음엔 그녀의 몸은 이미 활쩍 열려 있었다. 애무의 농도가 진해지자 정화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규영은 입술을 그녀의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삽입을 해오기도 전에 그녀의 몸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곧 잠시 내던져둔 이성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지, 속으로 되뇌며 그녀가 몸을 뒤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 단계까지 와서 젊디젊은 남자에게 있어 정화는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더욱 거칠어지는 규영의 애무에 정화는 에라 모르겠다, 저항을 포기하고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철저히 즐기기로 했다. 규영의 힘과 정화의 기교에 모텔방은 곧 둘의 신음과 교성으로 가득해졌다.
몇 차례의 격한 정사가 지나간 뒤 정화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큰 대자로 누운 채 정화의 허리를 감고 있는 규영의 손을 잡으며 그녀가 말했다.
"사직서 내는 것, 잠시 보류해."
규영이 뭐라고 대답했지만 그녀에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잠에 빠져들었기 떄문이었다.
다음 날 정화는 여느 때처럼 출근했다. 새벽 7시경 잠을 자고 있는 규영을 홀로 남겨두고 모텔을 나온 뒤 집에 들러 단장을 하고 탓에 그녀를 이상하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류를 훑어보고 있을 때 규영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 팀장님, 오늘도 화이팅.
정화가 답신을 보냈다.
- 사직서 보류?
곧 메시지가 왔다.
-넵.
정화도 다시 보냈다.
- 짜식. 수고해.
정화는 미소를 짓고 잠시 간밤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오랜만에 맛본 돌발 섹스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는 것 말곤 구체적인 과정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편 섹스 이후의 허탈감이나 마음의 부담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다만 그와 함께 일하고 있을 박 란에게 은근히 질투심이 이는 건 사실이었다. 정화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서류철을 들추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결제서류를 들고 최 과장 방을 찾았으나 그는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부속실 직원 얘기론 오늘 결근을 할 것 같다고 했다. 정화는 어제 그와 나눈 김창호 건에 대해 자료를 부탁하려던 참이었는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 감식반의 마홍수를 몰래 휴게실 한구석으로 불러 일산 별장에서 가져온 체모와 캔과 스프레이 등을 건네주며 지문 감식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경찰 내규 상, 사적인 청탁을 해선 안 되었지만 마홍수는 흔쾌히 해보겠다고 했다. 정화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머지않아 그를 크게 쓸 날이 있을 것 같았다.
오후에 서울청 감찰팀에서 연락이 왔다. 감찰실로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지난 번 이근우의 인질극 과정과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 진술을 들어볼 게 있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정화는 바쁜 업무를 핑계로 다음 주에 출두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감찰실 직원이 퉁명하게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박두호 서울청장의 심복인 감찰실의 양하섭 경감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그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으니 한두 시간이면 끝날 거라고 하며 잠깐 다녀가기를 권유했다. 이번에도 정화는 오늘은 시간이 없다며 출두요구를 거절했다. 양하섭이 전화를 끝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장만영 서장이 자기 방으로 오라는 연락을 보내왔다.
서장 방엔 서진욱 수사과장도 와 있었다.
"고생 많지?"
서진욱이 정화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고생은요." 정화가 활짝 웃었다. "과장님이야말로 고생이 남다를 걸요?"
그는 세간에 큰 이쓔가 되고 있는 안철수 대선 예비후보의 강남 룸살롱 출입에 대해 은밀히 내사를 벌였다가 언론의 추적보도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안철수 씨가 소위 부유층 패거리들과 함께 관내 룸살롱을 드나들었다는 건 일선 의경도 다 아는 일이었는데 문제는 안 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과 경찰이 비밀내사를 한 데서 비롯되었다.
위험한 동창생들 - 6. 낯선 재회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