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5. 2004년 뉴욕, 뉴욕 ⑦


 

 

 

 

 

 며칠 뒤 뉴욕의 한 타블로이드 신문 1면에는 오언 스페이시 경감이 근무 중 피살된 게 아니라 비번일 때 한인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변을 당했다는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제보자는 조미란 본인이었고 정화가 그를 뒷받침할 만한 증언을 조미란의 상처부위를 찍은 사진 몇 장과 함께 해당 기자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 보도로 경찰의 허위 발표에 대한 여론의 질타가 빗발쳤고 뉴욕경찰국과 109경찰서는 궁지에 몰렸다.

 뉴욕 경찰 당국은 여론을 무마하고자 109경찰서장과 홍보국장을 직위해제하는 한편, 피해자 조미란과 증언에 나선 정화에게 보복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조미란 거처 주위에 경찰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원정매춘과 관련한 여죄를 추궁한답시고 경찰서로 여러 번 부르는 등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정화에 대해선 업무협조를 일체 중단했고 대사관에 압력을 넣어 정화의 근무 입지를 축소시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대사관은 정당한 행위라고 판단, 정호에 대해 별로 손을 쓰지 않았다.
 경찰의 조미란에 대한 부당한 압박 행위는 결국 거액 소송을 불러왔다. 조미란이 변호사를 선임해 109경찰서를 상대로 100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소송이 제기되자 109경찰서 측이 조미란을 회유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면담조차 거부했다. 미국 경찰을 믿을 수 없어 오정화 경위에게 협상을 일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제이시가 정화를 직접 찾아왔다.
 정화는 회의실에서 그녀와 독대를 했다.
 "오해는 말아 줘, 이전에도 얘기했듯이 망자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처음 그렇게 발표한 것이지 은폐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 제이시가 말했다.
 "망지에 대한 예의라고 했지? 이수진 사건을 기억해? 죽은 여자를 유학생 성매매자라고 덮어 씌운 게 누구더라? 근거가 없다고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경철서는 고인과 유족에게 사과 한 번 하지 않았더군. 그게 망자에 대한 예의인가?"
 "그 사건과 이번 건은 별개야."
 "조미란에게 사과하긴 커녕 압박을 가한 건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나를 어떻게 대우했지?" 정화의 언성이 높아졌다. "경찰의 제 식구 감싸기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거 아닌가? 미국이 인권국가라고 하던데 직접 당해보니 영 아니군. 아무리 동료 경찰이라 해도 난 그런 위선이 싫어."
 "화 풀어." 제이시가 옆에 놓인 음료수 캔을 따 한 모금 마시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우리가 한 것들에 대해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난 너의 친구야. 파일도 보내주고 그랬잖아. 나까지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파일 건은 고맙게 생각해. 원하는 게 뭔데?"
 "그 소송을 취하하도록 조미란을 설득해주면 안 될까?".
 "그러게 진즉 사과를 했어야지. 그게 뭐야, 보복이라니. 치졸하게 구니까 그 친구도 화가 난 거야."
 "우리도 서장과 국장을 징계하는 등 성의를 보였어. 그만한 조치를 한 건 이례적인 일이야. 오늘 온 건 서장 부탁으로 왔어. 소송을 취하하면 그 대신에 조미란의 이전 범죄 행의에 대해 검찰이 기소중지를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는군."
 "노력만으론 안 되지. 확실히 서면으로 약속해주어야 해. 그걸 보장할 수 있나?"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제이시가 답답한 듯 담배를 캔 뚜껑에 비벼 껐다. 
 "돌아가서 책임 있는 인물의 확답을 받아 와. 소 취하 조건은 두 가지야. 하나는 뉴욕타임즈에의 공식사과문 게재, 다른 하나는 기소중지 결정. 그럼 내가 조미란을 설득해 볼게."
 그건 조미란과 미리 얘기를 나눈 바였다.
 "정말 너무 하는군, 같은 경찰끼리."
 "제이시 안면을 봐서 내가 도울 걸 찾아보겠다는 거야. 아니면 어림도 없어. 망신 당하고 돈 물어낼 거야, 아니면 이 정도로 끝낼 거야?"
 제이시는 뭐라고 혼자 투덜대며 영사관을 떠났다. 협상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 일 주일 뒤 경찰은 뉴욕타임즈가 아닌 작은 언론사 한 곳에 조미란에 대한 공식사과문을 게재했고 검찰은 기소를 중지하겠다는 결정문을 비공식적으로 건네왔다. 그 즉시 조미란은 소를 취하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정화에 대한 압력도 해제됐다.
 이 사건은 정화가 주디로부터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조미란이 돌아간 뒤 둘은 뉴욕과 시카고를 오가며 자주 만났다. 마침 주디가 방학이기도 해 시간이 많았다. 브로드웨이에서 오페라와 영화를 같이 봤으며 자유의 여신상 일대 선상유람도 했다. 도심 쇼핑과 클럽에서의 유흥을 즐기기도 했다. 
 그 반면에 로빈과의 만남은 그 빈도와 농도가 희박해져 갔다. 한 번 잠자릴 같이 했으나 정화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 로빈은 도중에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로빈은 그게 모두 주디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정화와 주디의 만남에 대해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별다른 간섭은 없었다. 정화와 주디의 관계는 만남을 거듭할수록 자매지간에서 야릇한 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정에서 애정으로 발전했고 급기야 밤을 같이 보내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정화 스스로도 이러한 정(情)의 흐름을 정말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

 

 뉴욕경찰국의 수사관 두 명이 영사관으로 정화를 찾아온 것은 주디와의 그 일이 있은 지 사흘이 지나서였다. 둘 다 40대 중반으로 한 사람은 아놀드 베이커라는 흑인 경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빌 피터슨이란 백인 경사였다. 그들은 며칠 전 보스톤에서 일어난 백인 남성 피살 사건과 관련해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정화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회의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8월 4일 밤 1시부터 다은 날 새벽 2시 사이에 혹시 어디에 있었나?" 피터슨이 물었다. 목소리가 다소 권위적이었다.
 "그건 왜 묻지?" 정화가 팔짱를 끼고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브렛 휴즈란 남자가 그 시간에 보스톤 외곽에서 살해됐어. 용의자들을 수소문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주디 림이야. 그녀를 알고 있지?"
 정화는 약간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물론 알지. 그런데 주디가 관련됐다는 건 믿을 수가 없군. 무슨 증거라도 있나?"
 "현재로선 그걸 찾고 있는 중이지. 주디에 대한 내사를 이미 해보았어. 오전에 만나고 왔지. 주디 말에 따르면 그 시각에 그녀 집에서 당신과 같이 있었다고 하던데 맞나?"
 피커슨의 말투가 마치 범죄자를 상대하는 듯했다. 정화는 화를 참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당일 오후부터 그녀와 있었다고 하던데 그 이야길 시간대별로 해 줘."
 "이 봐. 난 용의자가 아니야. 한국의 경찰공무원이라구.  하지만 정중하게 얘기할 수는 없어? 뒤에 플리즈를 붙이는 태도는 어디다 팔아먹었나? 이런 젠장." 정화가 미간을 지푸리며 말했다. 
 "아, 미안. 이보게 빌." 베이커가 눈치를 주자 피터슨의 태도가 좀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그날 오후 이야길 해주시죠." 
 "그러니까 음......보스톤 다운타운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고 오후엔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지. 그리고 영화를 봤고, 저녁에 클럽에 들렀어. 그녀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쯤 될 거야. 그리고 아침 7시까지 같이 있었으니 만약 아까 말한 그 시간이 밤행 시각이라면 주디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는 게 맞을 걸?"
 "주디 말과 거의 일치하는군. 그런데 같은 침대를 썼나, 아니면?"
 "이런 씨팔." 드디어 정화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내 생리주기도 얘기해 줄까?"
 피터슨도 덩달아 울컥하는 기미를 보이자 베이커가 그를 회의실에서 나가게 했다. 둘만 남자 베이커가 그녀를 달랬다.
 "저 친구가 과로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래. 이해해 줘. 그러니까 그 질문 의도는 잠을 자는 도중에 주디가 어딘가 다녀왔다든지 그런 기색을 없었냐는 거지."
 "내 기억으론 없었어. 난 경찰이야. 신경이 예민해서 누가 바닥의 과자 부스러기만 밞아도 벌떡 일어나곤 하지."
 "클럽 종업원 말에 따르면, 정화가 많이 취해 있었다고 하던데? CCTV에 나온 장면도 그렇고."
 그들은 제법 조사를 철저하게 한 듯했다.
 "내가 술이 센 편은 아니야. 하지만 택시 타고 오는 도중에 다 깼어." 
 그 말에 베이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케이, 오 경위. 얘기해줘서 고마워." 그가 명함을 건넸다. "혹시 주디에게 이상한 기색이 발견되면 언제라도 연락을 해줘."
 정화는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런데 왜 주디가 용의선상에 올라 있는 거지? 죽은 이와 무슨 원한관계라도 있나?"
 "그건 아직 수사 중이라 얘기해주기 곤란해. 아마 주디는 알고 있을 거야. 그녀한테서 듣도록 해."
 "알았어."
 "그런데 주디와는 어떤 사이야?" 회의실을 나가기 전에 베이커가 등을 돌리며 물었다.
 "친구 사이지, 뭐."
 베이커는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피터슨은 보이지 않았다. 정화는 그들을 배웅하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주디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사무실 전화나 휴대폰도 아마 도청당하고 있을지 모르니 괜한 짓을 해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었다. 정화는 주디가 연락을 해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여름햇살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는 창 밖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언뜻 떠오른 기억이 하나 있었다. 일전에 스페이시가 죽었을 때도 제이시가 조미란을 심문하면서 주디를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주디, 오언 스페이시, 브렛 휴즈......정화의 수사 감각은 곧 이들이 이수진 사건파일에 공히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해냈다. 그 재판기록을 다시 검토해 보고 있를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주디라고 예상했지만 로빈이었다. 그는 뜻밖에도 공적인 만남을 주선하고 있었다. 뉴욕경찰국의 범죄연구관 하나가 정화와 긴밀히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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