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꺼기
톰 매카시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톰 매카시의 소설을 한 달 반 만에 다시 읽었다. 아무리 내 기억력이 형편없어도 한 달 반 전에 읽은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강 기억하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 아주 강렬한 자극을 남긴 소설이었으니 잊을 수가 없었겠지. 주인공이 어떤 인물이고,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어떻게 끝을 맺는지 빤히 알고 있는 소설이었다. 그럼에도 소설을 다시 읽어야지 마음먹고 책을 집는 순간 설레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떤 알 수 없는 사건에 의해 특정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이름 없는) (서른 살!) 남자 주인공. 그 사건 덕에 주인공은 5,6층짜리 건물을 두 채나 사들이고도 남아돌 만큼의 사례금을 받게 된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에게 그렇게 큰 사례금을 지급한 집단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 할 법도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손쉽게 장르 문법에 복무할 것 같았던 이야기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자신이 보거나 겪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재연하게 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재연 그리고 재연 또 다시 재연, 오로지 재연. 이것이 이 소설의 처음이요, 중심이며, 끝이다.


주인공은 도대체 왜 일반 사람으로선 납득하기 힘든 그런 일들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일까. 환자인가? (그럴지도.) 하지만 주인공은 뜻밖에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데이비드 심슨의 파티 이후 내 모든 행동의 목적은 한결같았다. 진짜가 되는 것.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지는 것, 우리를 사건의 근간으로부터 몰아내고 핵심에 닿지 못하게 방해하는 우회로를 끊어버리는 것. 그 우회로는 우리 모두를 아류와 이류로 만들었다.”(299쪽)


물론 이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진짜에 대한 집착. 아류와 이류를 만드는 우회로의 차단. 그러나 중반부 이후 주인공이 자신도 모르는 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됐을 때 그를 진찰하러 온 의사는 그가 트라우마의 전형적인 증상을 보인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흔히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으로 체내에서 자생적으로 오피오이드가 분비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몸이 자체 진통제를 처방하는 겁니다. 아주 강력한 진통제죠. 문제는 그 쾌감에 있습니다. 그 강한 쾌감 때문에 신체가 그것을 더 갈망하게 되는 것이죠. 트라우마가 강할수록 진통제도 강하기 때문에 재분비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해집니다.”(250쪽)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은 처음 재연을 할 때 받은 느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몇 초 동안 무중력 상태를 느꼈다. 무중력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무게감이 달랐다. 가벼우면서도 진한 느낌. 내 몸이 힘 하나 들지 않고 공기를 가르며 스르륵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우아하게, 천천히, 물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처럼. 그 기분이 무척 좋았다.”(166쪽)


이후에도 이런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걸 보면, 의사의 말처럼 주인공이 재연을 통해 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게 왜 하필 재연이라는 방식이었을까. 쾌감이야 다른 방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건데, 이를테면 1위 팀 SK에게 5대 1로 지고 있다가 8회 말에 다섯 점을 뽑아 6대 5로 역전해버리는 롯데의 야구를 본다든지... (아직 가시지 않은 어젯밤의 쾌감. 혹시나 아직 못 보신 분들을 위해 클릭)


사실 주인공은 사고로 인해 “오른쪽 몸의 운동 기능을 관장하는 두뇌 부분에 손상을”(24쪽) 입었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동작을 실행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동작의 “속도를 올릴 수도 있게 되었다. (...) 하지만 여전히 각각의 동작들을 생각해야 했고 이해해야 했다. 이해 없이는 행동도 없었다. 사고는 영원한 우회로를 내게 유산으로 남겼다.”(28쪽)


그러던 그는 퇴원 후 <비열한 거리Mean Streets>라는 영화를 보게 되고, 거기서 로버트 드 니로가 얼마나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이 행동하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내 말은 그가 느긋하고 유연하다는 거야. 가장 기본적인 행동도 물 흐르듯 움직이잖아. (...) 먼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어. 자기 자신과 그것들이 하나니까 그것들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지. 완벽해. 진짜야. 내 동작은 모두 가짜야. 아류亞流라고.” 그것은 주인공에게 “멋있고 자시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존재에 관한 문제”(30쪽)였다. 가짜나 아류에 대한 거부, 우회로의 차단, 진짜에 대한 집착. 그와 동시에 발생한 재연에 대한 욕구. 그가 재연을 시도하게 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어떤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역추론(?)을 통해 주인공의 사고나 행동을 도대체 얼마만큼 납득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소리. 그렇다고 굳이 그런 이상한 재연을 할 필요까지는 없는 거잖아.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주인공의 생각이나 행동에 공감할 수 있을까. 설마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는 거라곤 그 어떤 합리를 들이대 봤자 인간이란 존재는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존재, 라는 명백한 사실뿐인가. 그런 점에서 책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말”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저런 이론과 학문을 끌고 와서 소설 속의 주인공을 이해하고자 애쓰지만 결국 깨닫게 되는 건 인간이란 이해할 수 없다는 서글픈 사실뿐이니까. (그럼 도대체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직 리뷰는 끝나지 않았다. 소설 제목에 대한 언급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제목이 ‘찌꺼기’다. 원제는 ‘remainder’. 소설의 내용과 결부시킨다면 (찌꺼기보다는) ‘잉여’나 ‘잔여’의 느낌에 더 가깝지만 출판사 입장에선 소설 제목을 ‘잉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이 백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잉여잉여 열매’(참고 자료 링크)를 먹은 것도 아니니...)


소설의 제목은 소설 속에 일관성 있게 굵은 글자로 표시된 ‘물질’이라는 단어와 연관이 깊다. (소설에선 모든 ‘물질’이라는 단어를 진하게 표시했다.) 다음은 ‘물질’과 관련한 주인공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구절들이다.


“나는 오늘까지 그때 중앙홀에 서서 얼룩이 진 소매를, 그 기름때를 바라보는 내 모습을 사진을 보듯 선명하게 기억한다. 제 주제도 모르고 백만장자에게 경의를 표할 줄도 모르는 너저분하고 성가신 물질. 나를 파멸시키는 주범, 물질.”(23쪽)

“물리의 법칙에 위배되는 기적, 흔들리는 그네를 멈추고 냉장고 문이 걸리고 하늘에 떠 있는 큰 물체를 밑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법칙에 반하는 기적. 그런 기적, 물질을 정복하는 승리가 일어난 줄 알았는데, 그게 전혀 아니었다. 완전한 실패.”(200쪽)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일이 어그러졌다는 것이다. 이건 아니었다. 그렇게나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위장을 한다 술책을 부린다 난리를 쳤건만 물질은 한 수 위였다.”(319쪽)

“그도 배워야 했다. 물질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걸. 그것은 조각들의 흐름, 상처가 난 생체 조직, 세상 최초로 일어난 재난의 흔적이자 그것의 종말을 보증하는 약속어음이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타파하려고 노력하라.”(345쪽)


너저분하며 성가시고 나를 파괴시키지만 결국 한 수 위의 물질을 주인공은 정복하지 못한다. 특히 마지막에 발췌한 구절은 인상적이다.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물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타파하려 노력하라는 지독한 역설.


소설 속에 나오는 모든 물질 ㅡ 이를테면 오토바이 엔진 아래의 땅에 묻은 기름 얼룩이라든지, 파란색 와이퍼 액이라든지, 쓸데 없는 짐이나, 쓰레기, 심지어는 돈마저 ㅡ 은 결국 사라진다. 물질은 그 자체는 진짜일 수 없다. 그것은 가짜다. 하지만 그런 물질이라 하더라도 사라짐으로써 진짜가 될 수 있다. 다음의 구절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방금 눈앞에서 기적을 목격한 것 같았다. 이 2리터의 액체라는 물질이 잉여 물질이나 너저분한 쓰레기가 아니라 물질이 아닌 것, 즉 순수하고 형체가 없는 푸르름으로 변한 것이다. 변질.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랗고 끝이 없었다. 다시 소년을 쳐다봤다. 소년이 더러움을 묻혔기 때문에 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성스러운 상처를 입은 채 널부러진 기독교 순교자 같았다. 나는 사기가 올랐다. 사기가 충천한 데다 영감이 떠올랐다.”(197쪽) (이 구절은 주인공의 운명과 소설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복선이 된다. 소설을 다시 보며 놀라웠던 점은, 소설의 시작 부분부터 복선이 깔려 있다는 점이었다. 짤막한 단어, 사소한 문장, 지나가는 에피소드 등이 모두 이후에 나올 다른 사건에 복선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계획적인 이야기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연적으로 발생한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결국 물질에 대한 주인공의 분노/집착/선망은 앞서 언급했던 진짜에 대한 집착과 맞닿게 된다. 물질의 사라짐 ㅡ 찌꺼기(잉여)에서의 탈피 ㅡ 진짜가 됨. 그리고 진짜가 되기 위해 그가 채택한 방식이 재연이라는 행위였던 것이다. 쓰고 보니 참 간단한 이야기라 아니 할 수 아니 할 수 아니할 수 아니할 수... 


진짜가 되고 싶어 하는 주인공. 주인공은 찌꺼기(잉여)에서 벗어나 진짜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끝내 주인공이 진짜가 되는 것을 볼 수 없다. 진짜가 될 수도 있을 법한 상황만을 제시한 채 소설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인셉션>에서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쏭달쏭한 상황에서 끝나는 것처럼.


소설의 결말처럼, 그래서 이 리뷰도 이 정도에서 끝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이 소설이 도대체 뭐가 매력적이란 건데? (그러게.) 왜 이 정도밖에 못 쓰는 건데? 그건 능력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 리뷰의 목표는 마치 이 소설을 다 읽어본 것처럼 개운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이 소설을 안 읽으면 안 되는 것처럼 찝찝하게 만드는 데 있으니까.



다음은 덧붙이는 글/잉여적임/결국엔 찌꺼기/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를

 소설이 근대를 거치는 동안 문학과 결합하면서 (이후 문학의 대표 주자가 되면서) 발생한 특징. 단순히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만을 담아내는 장르에서 벗어났다. 그러면서 차츰 학문의 영역에서 연구되기 시작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사실만을 두고 보면 그렇다. 그러던 소설이 "근대문학의 종언" 운운하는 틈을 타 다시 학문의 영역에서 발을 빼 이야기의 특성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요 근래 벌어진/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대표적인 예가 불과 2,3년 전만 해도 엄청나게 인기를 끌어 모았던, 오쿠다 히데오를 필두로 한 일본 소설. (그 후유증(?)이 현재 한국 소설계에 나타나는 것 같아 개인적으론 좀...)

 톰 매카시의 <찌꺼기>는 소설이 근대문학의 영역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과거로 회기하지 않고(이야기화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21세기에도 자신만의 특성을 잘 나타내며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 한 예를 제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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