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네 개의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째 서양 미술에서 고전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 미술의 이면을 드러낸다. 둘째 미술 속에 담긴 표정을 통해 문명을 읽어낸다. 셋째 박물관의 탄생과 중요성에 담긴 뒷 이야기를 들여다 본다. 넷째 팬데믹의 역사에서 미술을 본다.

고전이란 영어로 classic이다. 라틴어 classicus는 최상의 클래스(계급)이란 의미이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널리 읽고, 모범으로 여기는 문학과 예술이다. 그럼 서양 미술에서 고전이란? 그리스ㆍ로마 시기의 작품을 뜻한다.

밀로의 비너스나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같은 작품들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원본이 아니다. 그리스ㆍ로마 때 작품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 복제본으로 20세기에 들어 밝혀진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리스ㆍ로마 때로 돌아가자고 했던 르네상스 시기에도 사람들은 복제본을 원본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흔히 알고 있는 뽀얀 대리석으로 완성된 그리스 조각이 원래는 채색되어 있었던 것도 밝혀지게 된다 .

18세기에 서양 사람들은 고전미술에 대한 예찬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에 일조한 사람은 「그리스미술 모방론」을 쓴 빙켈만이다. 어떤 질병도 그리스인의 아름답고 고상한 신체를 훼손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그리스 예찬은 "우리의 뿌리는 이렇게 훌륭해!"라고 말하기 위한 근거였다. 그리스인은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따라만 하면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 빙켈만이 대리석 조각에 보내는 찬사였다. 17-19세기 유럽 상류층은 '그랜드 투어'를 통해 그리스ㆍ로마를 배우려 했다. 고전에 대한 존중을 넘어선 추종이었다. 그리고 근대미술과 비서구권도 서양 미술에서 고전이 차지하는 위치를 빗겨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 조각이 복제품이라는 사실과 순백의 대리석이 아닌 채색된 작품이었다는 점이 밝혀지고 1972년 시칠리아 앞바다에서 발견된 '리아체 전사' 청동상을 통해 고전 미술의 실체가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막연히 우리가 품고 있던 이미지에 고정관념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을 바라볼 때 완벽한 예술 작품으로 여기기보다 열린 시각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두번째 주제는 미술의 표정으로 문명을 읽는 것이었다.

                                

                             

아파이아 신전의 페디먼트 전사상과 페플로스 코레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미소이다. 고졸기 미소라 불리는 '아르카익 미소'이다. 그런데 그리스 고전기로 접어들면서 이런 미소는 사라지고 무표정한 조각이 자리를 잡는다.

그리스 고전기란 기원전 480년(페르시아전쟁 승리)부터 기원전 323년(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을 가리킨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크리티오스 소년」을 꼽을 수 있다.

 

 눈이 뻥뚫려 있어서인지 무표정에서 공허함이 느껴진다. 이 시기는 개인의 우상화를 우려해 무표정을 가장 이상적인 표현으로 여겼고, 엄숙함과 진지함을 강조한 플라톤의 철학과 스토아 철학의 금욕주의로 무표정으로 조각을 표현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이 웃을 수 있다'는 다른 주장을 했다. 헬레니즘 시기 정치적 목적으로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살아나기도 했다.

 

 

라오콘 군상 - 기원전 2세기 제작된 원본의 로마 시대 복제본 기원전 40~35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작인 라오콘 군상은 트로이의 사제인 라오콘이 트로이 목마의 비밀을 누설하여 아들들과 함께 뱀에 물려 죽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겠지만, 나는 라오콘의 표정에서 고통스러움이 보이고,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한 포도밭에서 발굴된 라오콘 군상을 보고 빙켈만은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위대한' 작품으로 칭송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고전을 통해 모든 것을 초월한 인간의 고귀한 정신성을 강조하려고 했던 의도가 담겨있다고 추정된다. 고전의 아름다움은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절제와 엄격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중세 시대 문명의 표정은 어떨까? 종교의 언어로 세계를 바라보고, 일상 생활까지 종교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서양의 중세. 아마도 엄숙하고, 경건한 표정이 대세를 이루지 않았을까 미리 짐작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님, 죽음에 대한 불안감, 내 영혼의 운명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미술 작품에도 반영되지 않았을까? 일부 나의 상상은 맞았지만 의외의 작품을 접했다.

                                                             

성모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알리는 기쁨의 순간과 11세기 지방 영주인 헤르만 1세의 부인 레글린디스의 미소를 표현하는 작품이다. 한 시대를 하나의 표정으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서양 중세에는 크리스트교라는 절대적인 신앙이 존재했지만 일부에서는 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자연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각을 기반으로 발전한 철하기 스콜라 철학이고, 이후 다가오는 르네상스의 기반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표정은 어떨까? 바로 떠오른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이다. 인간에 대한 높아진 관심과 탐구는 작품 속 인물의 표정도 밝게 표현했을 것 같은데, 르네상스 시기라고 해서 미소가 많아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책의 표지이기도 한 작품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오스발트 크렐의 초상>

강렬한 붉은 색과 신경질적인 표정이 인상적이다. 왜 굳이 이런 표정으로 초상화를 남긴 것일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강한 사람으로 여기게 하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한다. 당시 부를 축적해서 명성을 쌓아가던 상인들, 종교 개혁의 폭풍 속에 있었던 인물들 모두 각자의 인생이 있다. 개인의 스토리가 담긴 초상화의 표정이 모두 같을리 없을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으로 종교적 목적의 예배 그림을 억제하면서 풍속화가 발달하게 된다. 또 국제무역이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튤립 버블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의 어두운 면이 등장하고, 영국과이 전쟁에서 두 차례 패배하면서 경제가 쇠퇴하여 시대가 화가의 삶과 그림에 반영되기도 했다.(렘브란트의 생활고)

예술 작품에 담긴 표정은 다양하다. 그래서 표정으로 그 시대를 하나로 정의내리기는 무리가 있지만, 화가나 작품 속 주인공의 성향과 인생을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세번째 주제는 박물관의 반전의 역사이다. 박물관을 제국주의 산물이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문화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문화 유산이 전달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역사에 대해 다소 관대한 편이다.

박물관의 가치와 중요성을 본격적으로 확산시킨 사람은 나폴레옹이다. 누가 유럽의 정통성을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는 유럽의 뿌리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달린 문제로 연결될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점령한 국가의 미술품과 문화 유산을 갈취해 갔다. 혁명에 성공한 프랑스는 미술 작품과 문화 유산을 통해 그 위대함을 선전해야 했다. 혁명의 이념이 약탈의 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역사에서 루브르 박물관이 탄생했다.

재미난 일화를 하나 접했는데, 이탈리아를 정복한 나폴레옹이 안토니오 카노바(신고전주의 조각가)에게 "이탈리아인은 모두 도둑놈이다."라고 하자, 카노바가 "다는 아니고, 대부분(buona parte)이 그렇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원래 코르시카 섬 출신의 이탈리아계 혼혈인데 보나파르트(bonaparte)라는 프랑스식 성이 이탈리아식으로는 부오나파르테(buonaparte)라는 것이다. 면전에서 나폴레옹을 조롱한 것이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일화라고 한다.

수집과 전시를 목적으로 하는 박물관은 이미 있던 것이지만, 공공 박물관으로서 인정받은 것은 루브르 박물관이다. 어떤 차이와 변화가 있는 것일까? 구체제의 궁궐이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귀족들의 소유물에 시민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선전의 목적이 강했겠지만 점령한 국가에 박물관을 짓게 했다.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경쟁적으로 박물관을 짓도록 자극제 역할이 되기도 했다. 물론 약탈당한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그리 반길만한 일은 아니다. 약탈당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영국 박물관은 인류 보편의 박물관을 지향하며 입장료를 받지 않지만(지금은 모르겠다. 내가 갔을 때는 무료였다.) 이 부분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약탈로 전시한 박물관의 권위는 어디까지 인정하고 어느 부분에서 비판해야 할까? 미술관과 박물관을 좋아하는 나는 9:1 정도다. 약탈한 문화재를 돌려줘봤자 보존할 능력이 없으니까 우리가 계속 보관할게. 라는 그들의 태도까지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마어마하고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나를 매료시키는 공간을 마냥 비판하는 것은 어렵다. 어쨌든 미술은 문명화된 삶의 본질이니까.

그리고 박물관의 유행은 비서구권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여 아프리카에 매료된 마티스나 피카소의 작품도 접할 수 있게 된다. 우월감과 지배의 정당성, 민족학과 인류학의 관점에서 비서구권의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외부의 새로운 문화 충격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 만든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원시미술에서 추상미술이 탄생하는 과정은 파격적인 도발이었기에 낯선 아프리카 미술의 만남이 없었다면 파격의 에너지를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 과거와 현재는 대등하게 마주하고 있기에 모든 역사는 현대사가 될 수 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저 옛날 이야기 정도로 여겼던 서양 역사의 흑사병이 새롭게 재조명된다. 지금도 방역 현장에서 방역복을 입고 일하는 의료진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바이러스와 접촉하지 않기 위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꽁꽁 봉인한 모습. 지팡이로 진료하는 17세기의 모습에서 내원했을 때 멀찌감치 있던 의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역사 속 전염병에서 미술과 어떤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는 14세기 흑사병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도시이다. 무역업과 금융업,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도시에서도 흑사병이 만연했다니. 전염병이 창궐한 가운데서도 화려한 역사를 이어나갔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2주 간 자가격리를 한 10명이 풀어놓은 100개의 이야기다. 인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로 가득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자극적이고 황당하고 잔인한 이야기가 많아 교황청의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대에도 베스트셀러가 되어 흑사병으로 지친 사람들의 호응을 이끈 책이다. 흑사병이 지나간 후 사람들의 삶은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현실을 잊고 방탕한 삶에 빠지기도 하고, 종교에 깊이 귀의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하고,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등장하기도 했을 것이다.

3세기 로마 황제의 근위병이었던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크리스트교인을 돕다 화살형에 처했는데, 흑사병을 분노한 신이 퍼붓는 화살로 여겼던 당시 사람들은 화살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구원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의 스트로치 가문 예배당의 제대화는 중세 초기의 화풍으로 돌아간 것을 보여준다. 신이 내린 처벌을 흑사병이라 여겼기 때문에 다시 신을 두려워하게 된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 양식의 후퇴라기 보다 많은 화가들이 사망했는데 미술에 대한 수요가 높아져 빨리 그리기 위해 획일적인 양식이 나타났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그림에 후원자의 얼굴을 그리고 "이분이 이 그림을 만들었습니다."란 문구가 새겨지는 것이 유행하기도 하는데, 이는 미술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고 했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건축을 후원하는 것보다 그림을 후원하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흑사병 이후 발견된 유서의 양도 늘어났고, 유서의 내용도 확실한 구원을 받으려 하는 거액 소건 기부(몰빵 기부)의 행태와 연미사(죽은 자를 위한 미사)에 대한 요구를 드러내기도 한다.

피렌체에 위치한 오르산미켈레 성당은 원래 곡물 시장이 있던 자리였다. 그런데 이 곳에 자리잡은 성모상이 종교적 경배의 장소로 알려지고, 거액의 기부금이 모여 결국 1380년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그리고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건물 외벽에 성상 조각을 설치한 것이다.

1918년 프랑스에 주둔한 미군들이 앓은 스페인 독감은 미국에서 처음 발생해서 병력 이동을 통해 유럽에 확산되었다고 한다. 스페인은 1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고 스페인에서 유행한 것도 아니지만 스페인에서 대대적인 보도가 이루어져 1918년 인플루엔자가 스페인 독감이 되었다.(전염병이 휩쓴 세계사 - 김서형)

이 질병으로 죽은 작가는 에곤 쉴레이고, 뭉크도 걸렸지만 극복해서 81세까지 장수했다. 뭉크는 살아생전 종합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결핵, 기관지염, 조울증, 알코올중독, 류머티즘관절염, 신경쇠약 등 온갖 질병을 앓았지만,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했는지 작품을 통해 그의 예술혼을 엿볼 수 있다.

20세기 전반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세계로 이어지는 듯 하지만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흑사병과 르네상스, 스페인독감과 제1차 세계대전. 전염병의 역사와 함께 역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코로나19라는 역사의 기로가 어떻게 이 시간을 극복했는지, 후대에 무엇을 남겼는지 기록될 역사가 궁금해진다.

서양의 고전미술에서 최근의 팬데믹까지. 미술 작품과 함께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현재를 짚어볼 수 있는 의미있는 책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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