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붉은 색과 신경질적인 표정이 인상적이다. 왜 굳이 이런 표정으로 초상화를 남긴 것일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강한 사람으로 여기게 하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한다. 당시 부를 축적해서 명성을 쌓아가던 상인들, 종교 개혁의 폭풍 속에 있었던 인물들 모두 각자의 인생이 있다. 개인의 스토리가 담긴 초상화의 표정이 모두 같을리 없을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으로 종교적 목적의 예배 그림을 억제하면서 풍속화가 발달하게 된다. 또 국제무역이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튤립 버블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의 어두운 면이 등장하고, 영국과이 전쟁에서 두 차례 패배하면서 경제가 쇠퇴하여 시대가 화가의 삶과 그림에 반영되기도 했다.(렘브란트의 생활고)
예술 작품에 담긴 표정은 다양하다. 그래서 표정으로 그 시대를 하나로 정의내리기는 무리가 있지만, 화가나 작품 속 주인공의 성향과 인생을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세번째 주제는 박물관의 반전의 역사이다. 박물관을 제국주의 산물이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문화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문화 유산이 전달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역사에 대해 다소 관대한 편이다.
박물관의 가치와 중요성을 본격적으로 확산시킨 사람은 나폴레옹이다. 누가 유럽의 정통성을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는 유럽의 뿌리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달린 문제로 연결될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점령한 국가의 미술품과 문화 유산을 갈취해 갔다. 혁명에 성공한 프랑스는 미술 작품과 문화 유산을 통해 그 위대함을 선전해야 했다. 혁명의 이념이 약탈의 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역사에서 루브르 박물관이 탄생했다.
재미난 일화를 하나 접했는데, 이탈리아를 정복한 나폴레옹이 안토니오 카노바(신고전주의 조각가)에게 "이탈리아인은 모두 도둑놈이다."라고 하자, 카노바가 "다는 아니고, 대부분(buona parte)이 그렇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원래 코르시카 섬 출신의 이탈리아계 혼혈인데 보나파르트(bonaparte)라는 프랑스식 성이 이탈리아식으로는 부오나파르테(buonaparte)라는 것이다. 면전에서 나폴레옹을 조롱한 것이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일화라고 한다.
수집과 전시를 목적으로 하는 박물관은 이미 있던 것이지만, 공공 박물관으로서 인정받은 것은 루브르 박물관이다. 어떤 차이와 변화가 있는 것일까? 구체제의 궁궐이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귀족들의 소유물에 시민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선전의 목적이 강했겠지만 점령한 국가에 박물관을 짓게 했다.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경쟁적으로 박물관을 짓도록 자극제 역할이 되기도 했다. 물론 약탈당한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그리 반길만한 일은 아니다. 약탈당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영국 박물관은 인류 보편의 박물관을 지향하며 입장료를 받지 않지만(지금은 모르겠다. 내가 갔을 때는 무료였다.) 이 부분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약탈로 전시한 박물관의 권위는 어디까지 인정하고 어느 부분에서 비판해야 할까? 미술관과 박물관을 좋아하는 나는 9:1 정도다. 약탈한 문화재를 돌려줘봤자 보존할 능력이 없으니까 우리가 계속 보관할게. 라는 그들의 태도까지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마어마하고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나를 매료시키는 공간을 마냥 비판하는 것은 어렵다. 어쨌든 미술은 문명화된 삶의 본질이니까.
그리고 박물관의 유행은 비서구권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여 아프리카에 매료된 마티스나 피카소의 작품도 접할 수 있게 된다. 우월감과 지배의 정당성, 민족학과 인류학의 관점에서 비서구권의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외부의 새로운 문화 충격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 만든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원시미술에서 추상미술이 탄생하는 과정은 파격적인 도발이었기에 낯선 아프리카 미술의 만남이 없었다면 파격의 에너지를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 과거와 현재는 대등하게 마주하고 있기에 모든 역사는 현대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