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권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권력을 의식해야하는 이는 권력의 피지배자들이다. 권력이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력이 행사되는 곳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힘이다.
가부장이라는 권력이 절대적인 사회에서 앎은 온전히 젠더화되어있다. ‘나’가 생전 처음 치르는 시댁 제사 자리에 가서 식사 한 끼만해도 삼대손 집안의 알력 관계를 능히 꿰뚫어볼 수 있을 때, 평생을 나고 자란 집에서 일어나는 가내 정치에 대해 까맣게 모를 수 있는 남편의 그 산뜻하고 안온한 무지가 바로 권력이다.

칠 년을 연애하고 석 달을 함께 사는 동안 나는 남편에게 가족에 관한 "온갖 이야기를 다 했"(17쪽)던 반면 남편은 나에게 객관적인 정보 외에는 아무런 가족사도 전해주지 않았는데, 이는 가족내에서 딸이자 며느리인 ‘나’의 경우 아주 사소한 정보마저도 짯짯이 공유하여 재빠르게 자신의 지위를 파악한 후 그에 맞는 전략을 세워야 하는 삶에 익숙하지만, 아들이자 사위인 남편은 그저 밥 잘먹고 인사를 잘하는 것만으로도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