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신데렐라는 공주 아닌 CEO
박은주 김영사 사장, ‘자기개발 우화’ 직접 번역
한겨레 이유진 기자
출판사 처음 입사 때 그의 이름은 ‘미스 박’이었다. 3년 뒤 출판편집자로 실력을 인정받아 중견 출판사로 스카우트됐다. 7년이 더 지난 32살에는 그 출판사 사장이 됐다. 김영사 박은주(49) 사장. 직원 48명의 김영사 연매출은 320억원, 박 사장 연봉은 4500만원에서 3억대로 뛰었다.

가장 주목받는 여성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한 사람인 그가 직접 번역한 책이 나왔다. 〈신데렐라 성공법칙〉. 책은 직장 여성을 위한 자기개발 우화다. 미국의 홍보전문가 캐리 브루서드가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 동화 10여편을 상식을 뛰어넘어 재해석했다. 부제도 도발적이다. ‘21세기 신데렐라는 공주가 아닌 CEO를 꿈꾼다!’

무대는 현대 직장, 주인공은 일하는 여성이다.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못된 여왕은 악독한 상사로 뒤바뀌고, 일곱 난쟁이는 든든한 동료가 된다. ‘재투성이 신데렐라’는 공주 대신 시이오를 꿈꾸며 자신을 갈고 닦는다. 토너 자국에 찌든 말단 여직원은 간난신고 끝에 시이오가 된다.

박 사장의 삶 역시 ‘현대판 신데렐라’와 빼닮았다. 멘토 격인 김영사 창업자(김정섭 사장)를 만나 82년 말단직원으로 김영사에 입사한지 7년 만에 사장에 지명된다. 그리곤 업계 최고 출판사를 일궜다. 첫 작품은 김우중 대우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한국 최초로 6개월 만에 100만부를 팔아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이어 에릭 시걸의 〈닥터스〉, 스티븐 코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가 밀리언셀러 대열에 합류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한파로 출판계가 위축됐을 때도 100권 분량 어린이학습서 ‘앗! 시리즈’를 발간해 350만부를 판매했다. 직원들 반대를 무릅쓴 채 10년을 투자해 만든 웰빙문고 〈잘 먹고 잘 사는 법〉 시리즈도 50만부 이상 팔았다.

박 사장은 “비정상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일은 비즈니스 세계가 그만큼 전쟁터 같다는 걸 방증하지만 성실성, 도전정신, 열정으로 성공한 이 책 사례야말로 전하고 싶은 성공담”이라며 “나는 단 한번도 내 잠재력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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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정의인터뷰무제한] ‘적(的)’자와 싸우고 ‘적자’와 또 싸우고
옷장사·음식점 외도하던 철학도 다시 철학으로
‘쉬운 철학’ 목표로 번역투 정리중
나라가 할 일인데…미친 짓이죠
헤겔책 나흘만에 두권이나 팔렸대요, 하하
쉿 기밀! 5년뒤 아주 놀랍고 중요한 책 나올거에요
한겨레 이정아 기자
[관련기사]

권은정의 인터뷰 무제한/철학책 대중화 나선 전응주 이제이북스 사장

문패도 간판도 없이 그저 철문이 하나 있을 뿐이다. 벽 속에 묻힌 듯한 문을 마주보고 서 있노라니 <나니아 연대기>의 주인공 수잔이 벽장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같은 기분이 든다. 동그란 구식 초인종을 무작정 눌러보았더니 놀랍게도 사람이 나오고 책 쌓인 풍경이 뒤로 들어온다. 가정집 반지하층을 빌어 사무실로 쓰는 실내는 매우 검박한 분위기다(철학적으로 말하건대). 이제이 북스(EjB), 평등과 정의의 영어단어 앞자리를 따온 이 출판사는 철학책을 전문으로 펴내는 북하우스다.

인문학 고전을 제대로 번역해내자는 움직임이 힘을 얻고 있다. 그동안 생고생을 해온 독자들에게는 참으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이제이 북스는 철학 관련 책들에 한껏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제일 작은 골방에서 전응주(48)사장이 출력해낸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날로그식 원문대조 작업이다.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가칭)> 원고를 잡고 있다.

“지금도 적(的)자와의 싸움이지요. 철학번역에 특히 이 표현이 많아요. 요즘 철학문장 번역 방법을 정립하는 중입니다.”

우리가 흔히 꼽는 서양철학 고전이나, 철학자들의 주요 저작만큼은 충실하게, 가급적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작은 체구 전 사장의 큰 목표이다. 그간 철학책 어려워 못 읽겠다는 말이 많았는데, 이제 그 여지를 대폭 줄이겠다는 결심도 굳다. 설익고 애매모호한 번역이 철학서를 틀어잡은 탓에 독자들이 철학과 멀어졌다고 그는 지적했다. 난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다. 어쩌면 나 같은 평범 주부도 철학책을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겠군!

“그럼요. 다 사람이 쓴 글인데…. 유명한 말이 있는데, 말을 하는 것이 과연 사유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앵무새도 사유를 하는 것이 아니냐, 철학하는 이들이 말이나 글을 하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유가 달리는 이가 많지요. 철학책은 읽다보면 여러가지 재미가 있어요. 논쟁 붙은 거 보면 그들의 속마음도 읽어낼 수 있고….”


사무실 구석구석 책이 쌓여 있다. 비트켄슈타인, 니체, 헤겔, 스피노자, 서양철학사…. 음, 한결같이 쉬워 보이지 않은 책들이구만. 난 겉장을 뒤적이며 “편집이 참 예쁘게 되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제이 북스는 출발한 지 5년 되었다. 그동안 내놓은 책은 모두 78종.

“그 중에 24종은 문고판인데 별로 안 팔렸어요. 가볍게 읽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 단행본 중에는 2쇄 찍는 것도 몇 권 있습니다.”

재벌 꿈 접고 인생 직시

전 사장은 상장 받은 초등생의 표정을 짓는다. 돈 안 되는 이쪽 사정을 모를 리 없이 출발한 그는 예상이 빗나가지 않게 철학 전공자이다. 박사학위는 우여곡절 끝에 받지 않았다고. 한 성깔해 보이는 그가 ‘지조’를 지킨 탓일 게다. 대학시절 운동권과 음악판에 ‘기웃’거렸다는 그가 자신의 철학을 헐값에 내놓지 않았다는 심증이 갔다. 그는 ‘보따리장사’ 좀 하다가 무미건조한 학생들 얼굴에 일찍 접고 돈벌이를 시작했다. 옷장사와 음식점. 젊은이들 취향에 맞는 옷가지를 좀 팔았는데 옷 파는 게 철학보다는 확실히 쉬웠다나. 그리고 스파게티를 주로 하는 식당도 했다. 둘 다 괜찮았는데 자기는 원래 꿈이 재벌이었단다. 그렇다면 몇 년 돈 벌다가 다시 철학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인간의 삶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돈 버는 일 말고 내 인생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지요.”

그는 중간 중간 자기 이야기는 지금보다는 십년 뒤에나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학전문 출판사로 지금까지는 준비단계일 뿐이며 그때쯤이면 이 정도 했구나, 싶은 그런 마음이 들게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때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올해 말 정도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완역해서 낼 작정입니다. 1천쪽이 넘을 겁니다.”

그 책은 자기도 보다가 집어던진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전 사장이 일정표 한 장을 가져다 보여준다. 플라톤 전집 출판계획표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이 빼곡히 적혀있다. 정암학당이라는 고대철학 연구자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다.

“이 중에 초벌번역이 끝난 것도 있고요.”

플라톤의 대화편 전집이 43편. 뤼시스, 크리티아스, 고르기아스, 메논, 라케스…. 대화편의 제목이 곧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난 처음 알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제자들이 ‘소크라테스께서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며 지은 글이라는 사실도 난 처음 알았다.

“대화편은 당시 아카데미아의 학생들이 서로 배역을 맡아 토론하는 것을 배우는 그런 용도의 책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전 사장은 부산 억양의 빠른 말로 플라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순간 난 철학이야말로 가장 낭만적인 학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천년 전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둘러서서 서로에게 열띤 시선을 보내며 자신의 이상을 설파했을 것이다. 그때 에게해에서 불어온 바람이 히마티온 옷자락을 휘날렸으리라. 아득한 시간을 딛고 오늘 여전히 그 말은 살아 숨쉬고 있고 또 앞으로 몇천년 세월을 살아갈 것이다. 무한한 진리탐구의 선상에 우리는 한점으로 서있을 뿐이구나.

학진 특정출판사만 지원 불합리

전 사장은 열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앞으로 펴낼 중요한 책들에 대해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5년 뒤에는 아주 놀랍고 중요한 책이 나올 것이라는 기밀을 살짝 노출하기도 한다. 철학책을 펴내는 일을 신념으로 삼고 있는, 확신이 서있는 사람같다.

“우리 국내 철학계에서도 좋은 작품이 나와 외국에 판권을 파는 날이 언젠가는 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요.”

그는 또 다른 ‘적자’와의 싸움, 즉 어려운 형편, 열악한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의연하게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든든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고 이 일을 알고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단다.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네.”

솔직히 말하자면 철학책을 전문적으로 내는 출판인으로서 나라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현재 학술진흥재단에서 연구비를 지원해 나오는 번역물을 출판할 수 있는 여건에 대해서다. 지금은 서양철학 책을 특정 출판사 한곳에서만 낼 수 있게 묶어두는 바람에 다른 출판사들은 접근이 어려운 실정이다. 관리 운운하며 만든 규정이라는데 모르는 이가 들어도 공평하지 않은 처사인 듯싶다. 중요한 것은 학문발전을 위한 책 만들기가 아닌가. 자유롭게 조건이 풀어진다면 전 사장은 자신이 갈고닦은 책 솜씨를 한껏 부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과하지 않은 욕심 같다.

그에게 철학책이 무시로 읽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지 물어보았다.

“좋은 사회이지요. 건전한 비판이 나오고,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사회. 철학책이 구매력이 있고, 또 교육에서 강조하는 그 사회라면 정말 좋은 나라이지요. 우리도 곧 그런 나라 될 겁니다.”

편집담당 직원이 두 명 있지만 한 달에 한 권 만들기가 힘들다. 사장인 그도 책을 한 권 잡으면 빠르면 석 달, 더 오래 걸리면 여섯 달씩 꼼짝 않고 일해야 한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일하느라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몫이 많으면 많을수록 책에 투자를 더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얻는 것이다.

“힘들지요. 이런 책 만들고 나면 나도 지쳐요. 내가 미쳤다고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지요.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해야지요.”

우리철학 외국에 파는 날까지

▲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퇴근시간 즈음에 영업을 뛰던 직원이 들어와서 낭보를 전한다. “두 권 나갔다”고 보고한다. <헤겔예나시기정신철학>이 가장 최근에 서점에 깔렸는데(정확히 말하면 그냥 ‘꽂아두었다’가 맞는 말이다. 책이 제 넓이 그대로 ‘깔리는’ 것은 그래도 어지간해야 한다) “어, 만 나흘인데 두 권이면 괜찮은 성적이네. 하하하.”

전 사장이 소리 내어 웃는데 진짜 웃는 소리다. 나는 이 책 제목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하나 고민 중인데 그는 다시 골방으로 들어가 원고를 다듬는다. 어쩐지 스피노자가 유리를 가는 모습이 저러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철학을 하는 일은 신념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이었다.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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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前대통령 장남 전재국 1박2일 밤샘 와이드 인터뷰

“아버지의 업보 피할 생각 없지만 내가 하는 일로 비판·평가받고 싶다”

사진:권태균

연천땅 투기 의혹설 전두환 前대통령 장남
전재국이 털어놓는 소문의 진상 그리고 일과 가족 이야기


드라마 <제5공화국>이 화제가 되면서 드라마의 한가운데 선 전직 대통령 전두환 씨를 둘러싼 논쟁도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마침 얼마 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장남 연천 땅 1만6,000평 매입’ 기사가 언론에 보도돼 일부에서는 전두환 씨의 은닉재산에 대한 의혹이 다시 한번 제기되기도 했다.
세간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당사자 전재국 씨가 본지 기자를 만나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오랫동안 겪어왔던 심경을 털어놨다. 그가 기자와 밤을 새우며 7시간이나 만나 말을 푼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연천은 아버지가 1사단장 하시던 곳, ‘제2의 고향’삼을 것
● 은퇴 전 ‘시공사 차이나’ 세우겠다
● MBC 드라마 <제5공화국>은 아예 안 봐
● 아버지는 <논어> 배우며 영어공부도 열중


시공사 전재국(全宰國·46) 사장은 확실히 결단이 빠르고 행동이 기민했다. 인터뷰하고 싶다는 메일을 전달한 지 채 한 시간도 안 돼 답변이 돌아왔다.“저녁에 연천에 가니 그곳에서 술 한잔 하며 인터뷰를 하자.” 기자는 인터뷰를 요청하는 메일에 “연천의 땅 구입과 관련한 사업과 인생의 계획이 있다면 그것을 듣고 싶다”고 썼다. 그는 흔쾌히 응했다. 필요하면 하룻밤 연천에서 머무르며 1박2일 인터뷰를 해도 좋다는 전갈이 왔다. 이 인터뷰는 그래서 6월13일 저녁부터 14일 새벽까지, 그리고 잠시 눈을 붙인 다음 그날 오전까지 이어졌다.

그는 시공사 사장 전재국이 아닌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 씨로 불리던 그 오랜 세월에 대한 착잡함을 토로했다. 현생에서 부자의 연을 맺고 쌓은 업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으나 연매출 500억 원을 올리는 출판사 경영인 전재국을 이제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그늘에 안주하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조각을 전공한 오랜 지인과 함께 이곳 연천의 허브 농원을 스스로 설계하고 공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1주일에 3∼4일을 이곳에 머무르는 까닭에 얼굴과 팔이 새카맣게 그을렸다. ‘현장확인주의자’ 전씨는 늘 이런 모습이다. 그는 출판사 창업 초기 대부분의 출판 기획에 깊숙이 관여했고,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구하기 위해 외국의 뒷골목 책방을 샅샅이 뒤지는 열그는 사업가로서의 성과가 ‘부친의 음덕’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부친이 불법으로 모금한 정치자금이 사업자금으로 흘러들었다는 세간의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의혹은 지금도 강력히 유포되고 있고, 앞으로도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어쨌거나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삶을 구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느리게 사는 삶의 시작’으로, 회사 차원에서는 ‘독자와 출판사가 어우러지는 소통의 장’을 이곳 연천에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세간의 불신이 있다고 해도 개의치 않으며 향후 연천에 구현될 구체적 실천만이 ‘그 불신을 불식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임진강변의 한 민물매운탕집에서 마신 연천의 특산주 ‘겨우살이술’은 독했다. 기자는 취재원보다 더 빠르게 취했지만 다행히 그가 쏟아낸 말들은 수첩과 녹음기에 고스란히 보존됐다.

“미디어 빅뱅 시대, 시공사의 미래를 고민 중”

― 출판사를 하게 된 계기와 동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아버님이 백담사로 가시게 됐죠. 처음에는 누이동생 부부가 부모님 수발을 들었는데 저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들 셋을 두신 아버님의 장남으로서 미국에서 편하게 공부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도교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1989년 초여름, 그렇게 저는 백담사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냈어요.

그때 아버님은 굉장한 마음의 부담을 느끼셨습니다. 장남인 저를 무척 사랑해 주셨고, 그만큼 기대도 컸는데 당신 때문에 아들의 장래를 망치는 게 아니냐는 자괴감을 느끼셨던 것 같아요.

1989년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술을 한잔 하고 백담사 근처 계곡물에 몸을 담근 채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어요. ‘산에서 내려가 뭔가 일을 하자. 책을 한번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 아무 경험도 없었을 텐데, 겁은 나지 않았나요?

“그때는 순진했죠. 책 만드는 일은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죠. 사무실에 책상을 놓고 전화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참 많이 물었어요. 왜 출판사를 할 생각을 했느냐고…. 저는 학창시절 꿈이 아버님 뒤를 이어 군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시력이 나빠 육사 입학시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줄곧 책을 보고 공부하는 일 외에는 제가 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출판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집안에서 사업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외삼촌(이창석 씨)밖에 없어요. 나이도 아홉 살 차이밖에 안 나고 해서 제가 형님처럼 가깝게 지냈는데, 출판사 처음 차릴 때도 외삼촌과 많이 상의했지요.

출판사를 한 지 16년이 흘렀지만 저는 제 일에만 몰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닥친 우환과 풍파가 너무 많았어요. 김영삼 정부 시절 아버님이 2년 넘게 옥살이를 하셨고, 동생(재용 씨)도 구속된 적이 있지요. 저는 뒤돌아보지 않고 일에 몰두하고 싶었지만, 주변 상황이 저를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 말씀처럼 시공사를 창업한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그간의 성과를 스스로 어떻게 평가합니까?

“저는 지금 고민이 많습니다. 회사는 물론 많이 성장했죠. 직원 200명에 연매출이 500억 원이 넘는 빅 사이즈의 출판사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에서의 출판업의 미래에 대해 저는 아주 절박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과연 10년 뒤에도 설 자리가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우리 출판사는 잡지도 많이 내고 있지만, 광고시장에서 잡지 매체가 따오는 광고 매출이 매년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극단적인 가정입니다만 종이책이 사라지고 ‘e― book’이 독서시장을 지배할 날이 올지도 모르죠. 전면적인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고 소위 ‘디지털 컨버전스’를 통한 미디어의 빅뱅 현상이 다가오는 겁니다. 그런 환경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과연 뭐냐…?

시공사는 연간 600만 권이 넘는 책을 팔아요. 저는 우리 출판사와 수많은 독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해법 중 하나는 소위 ‘디지털의 파고’를 완벽하게 수용하는 일입니다.

시공사는 국내 어떠한 출판사보다 온라인 사업을 활발하게 합니다. 저자에게 원고료나 인세를 주고 책을 내서 그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커뮤니티를 형성해 수익원을 찾아내는 거죠. 지금 잘되는 것도 있고 아직 준비가 덜 된 분야도 있습니다만, 출판사 매출의 상당부분이 온라인 사업을 통해 발생합니다.”

― 연천 땅을 구입한 것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땅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 생각입니까?

“제가 회사의 미래와 관련해 구상하는 것 중 하나는 시공사의 독자들을 어떻게 묶어내고, 책에서만 보여줬던 것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카사 리빙>이나 <비스트로>라는 잡지를 통해 보여줬던 것은 ‘슬로 라이프(slow life)’ 또는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비전입니다. 요즘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만 그게 정확한 개념 같지는 않고, 어쨌든 제가 잡지나 단행본을 통해 구현해 보고 싶은 세계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창조적인 삶’의 추구였습니다.

제가 지금 이곳 연천에 만들고 있는 허브 농원은 출판사와 독자를 잇는 하나의 광장, 소통의 현장 ‘즐기면서 배우는’ 희망의 공간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허브는 ‘그린’이죠. 희망과 평화의 색깔입니다.

허브는 네 가지가 있죠. 먹기도 하고 약으로도 쓰며 향기를 맡고 관상용으로도 키웁니다. 허브라는 것을 통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면 우리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현실 속에서’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허브는 제가 구상하는 ‘소통의 광장’에서 하나의 상징 또는 도입부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플러스 알파’가 있는 거죠. 출판사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 광장 속에 녹여낼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 어떤 모델을 통해 이런 사업을 구상하게 되었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모델 중 일본 미야자키(宮崎) 현의 ‘그림책마을’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죠. 규모도 7,500평 정도로 그리 크지 않습니다만 그림책 도서관, 원화 전시장, 각종 이벤트 공간, 공방과 판매장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즐기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죠.

“2009년 창업 20돌에 완공 목표”

우리의 허브 농원 구상은 일단 내년 8월 문을 여는 것을 목표로 땅을 다듬고 있는 단계입니다만, 전체가 완성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완성의 시점을 2009년 창업 20돌에 맞추고 있습니다. 허브와 ‘그림책마을’이 중심이 되죠. 외국의 사례들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허브가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면서 그때그때 기획된 미술 전시회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독서캠프도 열 생각입니다.

야외 공연장을 겸한 자그마한 결혼식장도 만들어 시공사의 독자와 이웃들에게 개방하겠습니다. 큰딸아이 결혼식도 이곳에서 할 생각입니다. 공방을 만들어 공예품 만들기 실습도 할 수 있고, 자그마한 황토방도 몇 개 지으면 하루를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겠지요. 즐기고 쉬면서 인간끼리 소통할 수 있는 광장이 될 겁니다. 그때 와서 보면 ‘아, 이 사람들이 이것을 보여주려고 일을 시작했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될 거예요.

저는 허브 중에서도 라벤더를 좋아해요. 그런데 국내에 100평 이상의 라벤더 밭이 없어요. 2,000평에 달하는 라벤더 언덕의 조성은 그래서 국내 최초의 실험입니다. 심은 라벤더가 과연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도 없어요. 라벤더는 지중해성 기후에서 잘 자라는 식물인데, 연천의 기후는 한겨울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거든요.

배수가 잘돼야 하기 때문에 경사면에 심고 있어요. 전문가들도 잘 몰라요. 그래서 제가 외국에서 책을 20권 정도 구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는 그림이 나와줄지 모르겠어요. 다만 그냥 작은 산으로 방치됐던 땅에 뭔가 의미가 담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 왜 하필 이곳 연천을 선택했습니까?

연천을 택한 것은 이곳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조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사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지역입니다. 500m만 가면 민통선이 나오잖아요? 아버님이 1사단장을 하셨기 때문에 이 동네는 많이 와 봤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분위기가 험악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흐르는 임진강은 참 아름답습니다. 이곳 최전방 태풍전망대에서 남과 북을 관통하며 흐르는 임진강을 바라보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굉장한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됩니다. 임진강이 아름답기 때문이지요. 남과 북의 인간들이 그어 놓은 경계선과 철책은 흉물스럽지만 임진강은 조용히 아름답게 흘러갑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미국 몬태나의 강물 못지않은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 성스러운 곳을 어떻게 투기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은 시공사의 상징이고 사업의 연장이면서 독자와 회사가 만나는 소통의 장입니다.”

“출판사는 아이디어맨의 놀이터”

― 허브 농장을 만드는 일이 출판사의 비즈니스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이 됩니까?

“출판사는 기본적으로 아이디어의 ‘풀’입니다. 아이디어를 중개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죠. 굉장한 자본이나 첨단 기술이 필요한 사업은 벌이지 못해요. ‘고감도 하이 터치’를 활용하는 사업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사람들의 ‘행복한 삶에의 희망’에 호소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랄까요? 뭐, 그런 것을 추구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 구상의 결과물이 바로 이 허브 농원입니다. 자연친화적인 그 무엇 말이죠….

전통적인 농업에는 큰 부가가치를 기대하기 어려워요. 제 생각은 농업과 문화를 결합하는 모델을 현실화해 보자는 것입니다. ‘진화한 농업’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접근 방법은 다양합니다. 저의 구상이 유력한 솔루션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출판사의 사업 범위 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는 것이지요. 앞으로 어떤 콘텐츠를 채워야 할까…, 아이디어 풍부한 사람들과 토론해 가면서 고민할 생각입니다.

저는 이 사업에 굉장한 희망을 걸고 있어요. 5년, 10년 후 시공사라는 출판사가 어떤 위치에 있든, 제가 혹시 그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더라도 이 사업은 시공사에 다양한 사업 기회를 제공하면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어요.”

― 출판업계의 전반적 불황이 장기화하고 있습니다. 불황 타개를 위해 어떤 수단을 강구하고 있습니까?

“외부에서는 잘 모르지만 우리 출판사는 아이들 기저귀를 연간 100억 원어치 정도 팔아요. 게임카드 매출도 70억 원 정도 되죠. 잡지 광고주들과 접촉하면서 고안한 사업 모델입니다. 광고만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라인 영업망을 이용해 그들이 생산한 물건을 팔아 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죠. 저는 기본적으로 출판사가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의 놀이터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의 아이덴티티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창출합니다.

<해리포터>의 저자 J. K. 롤링은 거대한 출판사 10개의 몫을 하죠. 온라인을 통해 저자와 독자가 직거래하는 겁니다. 출판사가 설 자리가 없는 상황이 오는 거죠. 음반시장이 그렇습니다. 음반 기획자들이 예전과 같은 힘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가수들이 곡을 만들어 SKT나 KTF와 직접 계약합니다. 우리는 광고주였던 유한킴벌리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생산물인 기저귀를 온라인을 통해 배급하는 일을 새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었습니다. 게임잡지 광고주인 게임 개발사들에 결제 수단의 아이디어를 내 현재 이 분야 1위를 달리고 있어요.

저는 출판사가 어떤 콘텐츠를 종이 위에 찍어 파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창조적 발상을 하는 저자가 있고,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가 있다면 출판사라는 광장에 모여 즐기라는 겁니다. 기업고객과 독자와 창조적 마인드를 가진 저자들이 출판사에 와서 갖가지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그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구체화하는 일을 출판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연함과 창조적 마인드로 새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지요.”

― 불교 관계 서적을 꾸준히 내더군요? 상당히 전문적이면서 심오한 책들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불교서적 출간이 종교생활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제가 동국대 부속고등학교를 나왔어요. 불교재단의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우선 불교와의 작은 인연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집안 어르신 중에도 불교를 믿는 분들이 계시고, 특히 부모님은 백담사에 계실 때 절의 신세를 참 많이 지셨지요.

일본 사람들은 ‘남전 대장경’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의 불교서적은 전통적으로 ‘북전’ 계열이 많지요. 일본인들은 남전 장경의 번역을 이미 소화(昭和)시대 때 이미 완성했어요. 우리는 팔리어를 잘 아는 학자들이 드물어 어려움이 있지요. 어렵지만 몇 권 번역해 책을 냈지요.

저는 백담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있을 때 그런 것을 많이 느꼈어요. 독송할 때 왜 그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해야 할까…. 루터의 종교개혁도 라틴어 성서의 번역에서 출발했잖아요? 그때의 경험을 반추해 보면서 아름다운 한글로 어려운 불교 경전을 쉽게 풀어쓰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법화경>을 다 번역했어요. 지금 10권짜리 <화엄경>을 번역하고 있는데 2∼3년 후면 완성될 겁니다. 그것을 완성하면 제가 부모님과 함께 2년 반 정도 절밥을 먹은 것에 대한 ‘은혜 갚음’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돈이 되는 사업은 아니에요. 그런데 한 권 한 권 책을 낼 때마다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우리 가족이 풍파 속에서도 혈육의 정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낸 <고려불화>는 손해보지 않았어요. 많은 분이 관심을 갖고 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불교서적의 수지 관계는 계산해 보지 않았습니다. 돈을 꼭 써야 할 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제가 미국에서 MBA 공부를 했잖아요? 그래서 돈 계산은 남부럽지 않게 잘합니다.(웃음) 그런데 불교서적은 계산 안 합니다. 그런 일을 해야 제가 출판업에 뛰어든 의미를 살릴 수 있는 것이지요.

― 시공사 출판물은 대중적인 장르문학에서부터 매우 고급스러운 인문학, 예술관계 서적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광범위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업상 특별한 원칙이 관철되고 있는 건가요?

게임과 만화 결합한 사업모델

“저는 그게 별로 혼란스럽지 않아요. 직원들 중에는 혼란을 느끼는 사람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원칙이 있어요. 제 취미생활을 출판에 반영하지 않는다는 원칙 말이죠. 장르문학은 우리나라에서 잘 안 돼요. 물론 ‘추리문학’에 속하는 존 그리샴의 소설은 우리가 많이 번역해 권당 30만 부 이상 팔았죠. 존 그리샴의 소설도 출판할 때 추리소설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보면 추리나 스릴러류가 압도적으로 많죠.

소위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multi use)’라는 개념이 우리 시대를 풍미하잖아요? 그런데 제 지론은 ‘원 소스 멀티 유스’적인 콘텐츠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대중적인 책을 많이 팔자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그렇게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출판사의 아이덴티티를 좌우한다고 봅니다.

장르문학도 해 보고 만화도 열심히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어요. 돈을 많이 벌려고 시작한 책들이 잘 안 팔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이 잘 팔리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것이 세상 일의 묘한 이치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저는 미국에서 만화책을 찍어요. 미국은 시리즈물보다 낱권 만화가 주류입니다. 우리처럼 대여시장 중심이 아니라 직접구매, 소장문화가 발달해 있지요. 우리나라 만화가 중에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출판만 하면 죽을 쒀요. 그림은 좋은데 스토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만화산업은 직접매출 비중이 30∼40%밖에 안 됩니다. 캐릭터 사업과 영화 판권 같은 것으로 돈을 벌죠. 우리 만화도 해외 판로를 모색해야 하는데, 우리 정서가 외국에 먹히지 않아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미국의 스토리와 우리의 그림을 결합해 보자는 시도였습니다.

게임과 만화를 결합하는 사업 모델도 실행하고 있어요. 어떤 게임이 한국에서 출시되면 그 게임의 소재를 만화로 만들어 미국시장에 뿌리는 겁니다. 만화는 게임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영화 판권 같은 것을 팔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는 겁니다. 10~20개의 만화를 뿌려 1건 정도의 부대수익을 창출해도 그것은 해볼 만한 사업이 됩니다.

“은퇴 전 ‘시공사 차이나’ 세우겠다”

재기 넘치는 한국만화를 세계에 소개해야 하는데, 아직은 절반 정도의 성공에 그치고 있습니다. 작품당 1만권에서 1만5,000권 정도는 팔고,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도 1∼2건 정도 있었습니다. 계속 주시하는 사업분야입니다. 우리가 이문열이나 황석영의 작품으로 미국시장에 진출하기는 힘듭니다. 아시아적 감수성으로 세계시장을 두드릴 수 있는 장르는 뭐냐? 저는 그 해답이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나 만화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한때 중국 진출을 위한 물밑작업을 하고 있다는 풍문이 있었습니다. 어떤 진전이 있었습니까?

“별로 진척된 것은 없어요. 그런데 제가 상하이(上海)에 갔을 때 놀란 적이 있어요. 거리는 가까운데 공항에 내릴 때부터 말이 안 통해요. 저는 일본말은 좀 해서 일본에 갔을 때는 별 불편이 없어요. 그런데 중국은 말도 그렇지만 문자도 제가 배운 한자와는 전혀 다르더라고요. 영국 출판계가 강력한 이유는 미국·호주 등 영어권 나라가 모두 시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4,500만 명의 좁은 시장을 벗어날 수 없어요. 통일이 된다고 해도 8,000만 명에 불과하죠.

중국은 엄청난 시장입니다. <벼농사의 기본> 같은 책이 500만 권이 팔리는 곳이 중국 출판시장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좀 변해야 해요. 두세 달에 한 번씩 상하이에 가서 친구도 사귀고, 그들과 술도 한잔 마시고, 서점가나 뒷골목도 가보는 거죠. 우리 세대에 13억 명의 중국시장에 다리를 걸쳐 놓지 않으면 후배들이 고생하게 돼 있어요.

상하이 뒷골목에서 <드래곤볼> 해적판이 나도는 것을 보면서 가능성을 확인했어요. 굉장히 반갑더라고요. 중국에서 열리는 도서전시회에 직원들도 보내고 저도 몇 년간 중국을 드나들었느데, 제가 이곳 연천에 ‘필이 꽂힌’ 다음부터는 중국행이 뜸해졌어요. 중국어도 1년 정도 개인 레슨을 받았어요. 연천 허브 농원 일이 가닥이 잡히면 다시 중국시장을 모색할 겁니다. 제가 회사 일을 그만두기 전에 ‘시공사 차이나’를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 연천에 땅을 산 것이 투기의 일환이라는 세간의 의혹이 여전히 강력합니다.

“며칠 전 부산에 일이 있어 KTX를 타고 갔어요. 객차에 설치된 TV를 보고 있는데 국내 뉴스가 나와요. 그런데 첫번째 뉴스로 ‘전두환 전 대통령 장남 연천 땅 1만6,000평 매입’이 딱 뜨는 거예요. 그 다음 뉴스가 노무현 대통령 방미였어요. 그 뉴스를 보는 순간 저는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저는 직원 200명을 거느린 출판사 사장이고, 계산해 보니 최근 5년간 제가 낸 종합소득세가 14억 원이에요. 그렇다면 저도 세금 낼 만큼 내고 세상을 안 속이면서 사업을 한 겁니다. 사업하면서 직원들 월급도 밀린 적이 없어요.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사업하며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한 파렴치한이 도망다니다 경기도 연천에서 체포됐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세금을 내고 열심히 사업하는 대한민국 국민인데 제게는 보호받을 수 있는 사생활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한국사회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하는 일로 비판·평가받고 싶다”

아버님이 지금 추징금을 못 내고 계시죠.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 제가 어떤 식으로 책임져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연좌제를 적용해야 하나요? 제가 만일 연천 땅을 팔면 ‘전재국 씨 연천 땅 매각! 차액 20억 원으로 추정’이라는 기사가 나올지 모르죠. 이런 문제들이 저를 굉장히 힘들게 해요.

제가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아버님의 그늘이 너무 깊어, 감내하지 않으면 안될 짐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딱히 드릴 말씀도 없죠. 그런데 아이들이 크니 아이들한테 정말 미안해요. 제가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비치니까요. 제가 그 땅을 남의 이름으로 몰래 산 것도 아니고, 나쁜 일을 하려고 산 땅도 아니에요.

주소도 이곳으로 옮겼고, 실제로 1주일에 3∼4일은 이곳에서 보내요. 다 노출돼 있는 거죠. 저는 16년간 사업해 온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투자도 하고 사업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고, 제가 공인이 아닌 만큼 기본적 사생활은 지켜줬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 출판인 전재국에 대한 평가, 시공사의 성과에 대한 평가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저는 장남으로서 어릴 때부터 아버님에게 참 많이 혼나면서 자랐습니다. 제가 고집이 세서 부모님 말씀도 제일 안 들었어요. 고분고분하게 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저를 항상 사랑으로 감싸주셨죠. 부모님은 그냥 사랑하는 부모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저는 아버님의 정치적 동지도 아니고, 그분의 공적 생활을 잘 알지도 못합니다. 당신의 장남으로 여생을 편안히 모시겠다는 생각 말고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나이 50이 다 되도록 사업을 하는 동안 저에게 시공사의 미래나 출판업에 대한 구상을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상당히 덩치가 커진 출판사를 운영할 때도 제가 하는 일로 저를 평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밖의 문제에만 관심을 보이죠. 그게 참 섭섭했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 비판도 받고 평가도 받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좀 ‘페어하게’ 평가받고 싶어요.

물론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업보가 참으로 깊고 무거운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업을 피해 도망치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죠. ‘인정’이란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뭐, 저 사람도 자기가 할 몫이 있어’라는 평가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향후 시공사가 가장 역점을 두고자 하는 사업상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디지털 컨버전스가 이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초보단계이지요. 인터넷·지상파TV·케이블TV·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등 온갖 미디어가 경쟁하면서 결국 통합의 길을 걷겠지요. 미디어가 통합되면 오리지널 콘텐츠를 가진 사람들이 채널을 골라 쓰는 시대가 올 겁니다. 케이블TV 경우만 봐도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죠. 채널만 있을 뿐 콘텐츠는 다 구매합니다.

예컨대 지금 인터넷 방송은 지상파 방송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지요. 그런데 기술적인 부분이 완벽하게 해결된다면 과연 어떤 세상이 올까요? 앞으로 10년 후 미디어 경쟁에서 살아남을 승자는 누구일까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동통신사들이 콘텐츠 회사들을 마구 사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시공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저는 이런 문제를 굉장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해법 중 하나는 디지털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아날로그적인 것, 하이 터치적인 것으로 간다는 겁니다. 허브 농원과 그림책마을이 그런 겁니다. 허브의 향기를 맡고 비스듬히 경사진 꽃동산을 걸어가는 실제 체험을 디지털이 어떻게 구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돈을 들여도 그것은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날로그로, 역으로 승부를 겨루는 전략이지요.

제가 원하는 것은 엄청난 규모의 매출이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흑자 정도면 충분합니다. 머리만 잘 쓰면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후원도 하고, 직원들 대우도 좀 높여주면서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다고 봐요.”

―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불리한 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다 백담사로 갈 때 아버님은 ‘너도 들어오면 잡혀가니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 서울 집에 잠깐 들렀다 백담사로 가는데, 아시겠지만 그 길이 구곡양장이잖아요? 그 길을 가면서 제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아버님이 제 앞에서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보이시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당당하지 못한 아버님의 모습을 본 적이 없거든요. 적어도 자식들 앞에서는 좌절하거나 낙담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백담사에서 아버님께 인사드리고 수척해진 모습을 뵐 때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을 느꼈습니다.

1993년 아버님이 구속되기 직전 합천 종갓집에 내려갈 때 제가 동행했죠. 새벽에 체포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아버님이 밤새 제게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줬죠. 내가 감옥에 가더라도 네가 용기를 잃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수사관에게 연행되는 순간을 목격했는데, 그 장면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아버님 옷가지랑 양말 등을 어머니에게 전해드리고 저는 회사일을 계속해야 했지요. 1주일간을 결재도 못하고 낙담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사람 마음이 잿빛이 되어 살아야 한다는 의욕을 추스르기가 그렇게 힘들더라고요. 첫 면회 때도 그랬지요.

죄수복을 입은 아버님 모습을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제게는 그냥 사랑하는 아버님이니까요. 동생 구속됐을 때, 수의를 입고 있는 모습을 면회 가서 봤는데 정말 열흘 동안 제가 밥을 못 먹었습니다. 참으로 모진 업을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승에서 우리 부모님을 만난 것도 업이고, 그런 업을 선택한 것도 제 업이겠지요.

7년 동안 청와대에서 살 때도 저는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 들어갈 때 청와대가 너무 가깝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경호실 사람들이 와서 들어가자고 해요. 청와대는 어디 산 꼭대기쯤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문 몇 개 지나니 바로 제가 7년간 살 집이 나오더군요. 그때 청와대 문을 열고 들어간 업보가 이렇게 가혹할 줄은 정말 몰랐지요.”

― 어떻게 마음을 추슬렀습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제가 혼자 똑바로 서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가족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맙고 좋았습니다. 풍파가 휘몰아치면 저는 새로운 일을 만들어 거기에 죽도록 매달렸습니다. 그것이 저를 구원하는 길이었죠. ‘미래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자’는 생각이 구세주 역할을 하죠.

동생이 구속되면서 땅도 다 팔았습니다. 그 돈으로 연천 땅도 샀지요. 1만6,000평을 평균 잡아 평당 10만 원 정도 주고 샀습니다. 나이 60 이후의 인생을 준비하자는 생각을 품게 된 계기가 동생 구속사건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쓰고 있는 건물을 제외하고는 다 팔았어요.

연천은 제가 주민등록을 옮겼으니 주민세도 이곳에 냅니다. 연천은 저의 제2의 고향입니다. 이곳을 잘 가꾸고, 이 동네를 위해 할 일을 다 하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연천은 제 마지막 사업 영역이 될 것이고, 제 인생의 마감도 이곳에서 이뤄질 것이라는 말이지요.

아버님이 1사단장 하실 때 저는 주말마다 사단장 관사로 가서 이틀을 보냈습니다. 그때 이곳 분위기는 굉장히 살벌했어요. 저는 이곳이 참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이곳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이러니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조용하게, 성실하게 살고 싶다”

제가 80까지 살 수 있다고 가정하면, 그 전에 통일은 반드시 이뤄지겠지요. 그때 비무장지대 바로 아래인 연천은 통일된 대한민국의 중간 지점이 될 겁니다. 그곳에 꽃밭을 이루고 사람들을 모아 행복한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은 제게는 굉장히 중요한 소명입니다.”

― 연천 땅의 일부를 왜 따님 명의로 했습니까?

“서울에 있는 땅 100평을 팔아 이곳의 땅을 사줬습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그 땅과 그 땅 위에 심은 생명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가꾸라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정신이 스며 있다고 말해 줬습니다. 저는 이 땅을 결코 팔지 않습니다. 땅은 되팔아야 투기가 되는 것 아닙니까?
땅값이 오르든 내리든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땅값의 등락이 아니라 지금 심고 있는 라벤더가 과연 올 겨울 혹독한 연천의 추위를 극복할 수 있느냐입니다. 잘 가꿔 유익한 공간, 살아 숨쉬는 공간, 희망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습니다.”

― 얼마 전, 전 전 대통령이 재산을 29만 원으로 발표한 것에 대해 대다수의 국민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노의 여론이 아직도 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 발표의 진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론적으로 보면 아버님의 재산은 지금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몇 억 원이라도 남아 있다면 사정기관의 조사가 미흡해 제대로 추징하지 못한 결과가 되지요. 이 문제는 아버님께 조언하거나 답변서를 준비한 변호사들이 잘못한 겁니다. 즉, 아버님 명의의 통장에 남아 있는 잔액을 있는 그대로 밝힌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굉장히 이상한 답변이 돼서 국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겁니다.

지금 아버님의 생활은 거의 전적으로 어머니의 재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부친으로부터 상속세를 내고 상속받은 재산이 있습니다. 재산이 한 푼도 없다면서 무슨 돈으로 골프를 치고 사람들과 교유하는지에 대한 의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별산제라고는 하지만 어머니가 아버님 생활을 어떻게 나 몰라라 하겠습니까. 어머니의 재산으로 꾸려가야 하는 생활의 단면이 분명 존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는 재산이 29만 원인데 아들은 어떻게 땅을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 일가족 전부가 단 한 푼의 재산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모두 추징해야 하는 재산이 되는 것이죠. ‘실정법 위에 정서법이 있다’고들 하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 어렵고 곤혹스럽습니다. 나름대로 조용히, 성실하게 살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은 저를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한 심정입니다.”

― 시공사를 상장할 계획은 없나요?

“글쎄요, 상장해서 돈이 왕창 들어온다고 해서, 그 돈으로 무얼 합니까? 갑자기 책을 더 많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처럼 꾸준히 나갈 겁니다. 돈을 버는 일과, 돈을 쓰는 일을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면서 말이지요. 한 해 팔리는 650만 권의 책은 대단한 덩치입니다. 그 모든 책에는 발행인 이름으로 제 이름이 박혀 나갑니다. 제가 느껴야 할 책임감의 무게는 정말이지 막중하죠.

가끔 다니다 보면 우리가 만든 책을 어린이들이 읽는 경우를 봐요. 그 책에 오자는 없는지, 장정은 제대로 됐는지, 그림은 제대로 그려졌는지 걱정이 돼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내가 그 아이들에게 보여줄 책을 만들 거라고 결심했는데, 이제는 앞으로 태어날 손자들이 유익하게 읽을 책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정신으로 책을 만들려고 합니다.”

― 1차 개관은 언제 이뤄집니까?

“내년 8월께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주로 공원 하단부에 마련되고 있는 허브 농원을 중심으로 순차적으로 개관하려고 합니다. 내년 9월께는 이곳 임진강변에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대회를 유치해 보려고 해요. 저는 이 운동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데, 오세훈 전 의원 같은 분은 참 열심히 하시더군요. 제가 잘 아는 협회의 임원이 사전답사를 끝내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멋진 축제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 전 전 대통령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십니다. 서예를 좀 하시고, 한문 선생님에게 <논어>를 배우고 계세요. 요즘에는 영어공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안양교도소에 계실 때 제가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영어학습문고를 넣어드린 적이 있어요. 아버님은 육사 재학 중에는 <3위일체>를 가지고 공부하셨다는데, 최근에도 영어책을 꽤 여러 권 암기하고 계십니다. 회화가 상당히 늘었어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가 집을 방문했을 때는 통역 없이 일어로 대화를 나누시더라고요.

논어 강독하고, 영어공부 중인 전 前대통령

일요일에는 가족들이 모여 배드민턴을 치죠. 아주 오래된 가족의 관행이죠. 제가 토요일에 찾아뵈면 반드시 하루를 모시면서 자고 옵니다. 예전에는 손자들이 자주 가고 해서 적적함을 덜어드렸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크니 그걸 못해요. 저라도 자주 가려고 노력합니다. 이제는 모든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난 분이니, 오시는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옛 동창생들을 챙기는 일 정도가 소일거리죠.

건강은 좋은 편이지만 행동반경이 좁고 활동이 적어지니 조금만 잘못 관리해도 금방 나빠질 것 같아 걱정입니다. 다행히 두 분이 일정을 스스로 만들어 주로 무엇인가를 배우는 쪽에 하루의 시간을 쓰고 계십니다.”

― 동생 재용·재만 씨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앞으로 미국에서 활동할 것에 대비해 몇 개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재판은 지금 진행 중이어서 그 전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참 아티스틱하고 자유분방하고 감각이 있는 동생입니다. 저보다 상당히 자유분방해요. 어릴 때 저한테 혼난 적도 많고, 저와는 많이 다르지만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동생이에요. 여러 가지 일로 참 괴로웠을 겁니다. 동생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얼마 전에 서울에 왔다 이제 곧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막내 재만이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MBA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짬짬이 중국계 회사에서 일을 하고 보수를 받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한국과 중국시장을 개척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형제들끼리는 잘 지내는데, 이제는 머리들이 커서 일정한 선이 생겼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잘 모르는 것도 있어요. 그런 게 세월의 흐름이지요.”

―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습니까?

“헤르만 헤세가 쓴 <정원 일의 즐거움>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곳 연천에서 하는 일과 딱 맞아떨어지는 책이죠. 이레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사진도 좋고 장정도 훌륭합니다. 헤세가 그린 수채화도 들어 있고, 아름다운 시와 함께 자신이 즐거움을 느꼈던 정원 일에 대한 여러 가지 단상을 적은 책이지요. 제가 여러 권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도 했습니다. 헤세가 정원 가꾸기에 관심이 많았는지는 처음 알았어요. 그 책을 읽고 새삼 관심이 생겨 <데미안>도 다시 읽었죠.”

― 16년간 사업하면서 사람을 보는 안목도 늘었겠지요? 용인술이랄까, 사람을 잘 쓰는 법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철학과 소신이 궁금합니다.

“용인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고요. 시공사는 4개 사업부서가 있어요. 단행본·어린이·잡지·인터넷 사업부가 시공사의 중심입니다. 사람을 쓰는 일과 관련해서 제가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것은 일을 할 만한 사람에게 최대한의 권한을 주는 거예요. 저는 전체적인 조화를 맞추는 일에 주력하고, 각 사업부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그만 하려고 해요.

사업 환경이 너무 급박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제가 4개 사업본부장들과 개인휴대단말기(PDA)를 같이 사서 쓰고 있습니다. PDA폰에 들어갈 콘텐츠도 우리 사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이 PDA폰을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그 기능의 일부만 사용할 뿐이죠. PDA폰 기능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갈 콘텐츠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저는 출판이 아닌 인접 분야, 예컨대 금융 분야의 유능한 인재들을 데려오려고 해요. 지금 우리 단행본사업본부장은 펀드 매니저 출신입니다. 이제는 출판을 콘텐츠 중심으로만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애플리케이션(application: 적용, 활용) 중심으로 사고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조직관리 능력이 있고 합리적인 사람이면 된다고 생각해요.

용인술이라면 너무 거창한 표현이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조차 잘 몰라요. 저도 저의 능력을 아직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테스트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죠.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시련 속에 집어넣는 일입니다. 그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죠. 이종문화의 시대, 변화의 시대에는 한 분야의 능력가가 다른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다만 그런 변화를 껴안을 용기가 있느냐, 또 그런 변화의 장을 마련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그런 화학작용들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제5공화국>은 현 정권의 정치지형 작용”

―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전 전 대통령 역을 맡은 이덕화 씨의 열연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한 번도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없어요. 일부러 안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한 공화국에서 일어난 일을 드라마로 만들 수 있다는 발상 자체에 반대합니다. 관련 인물들이 다 살아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 드라마가 현 정권의 정치적 지형과 무관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죠. 원한이 있든 은혜가 있든, 현 정권이 그 맥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드라마는 진실을 왜곡할 수밖에 없지요.

클린턴과 르윈스키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그것을 소재로 드라마를 찍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나중에 좀 더 투명한 눈과 차가운 가슴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대가 왔을 때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불과 20년 전의 사건들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사회가 정상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그리고 당사자들의 반대 의견이나 심리적 저항감은 전혀 반영할 수 없는 구조이고요.

저도 그 드라마에 나왔다고 하더군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보지는 않았고, 그에 대해 항의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연천에 땅을 산 것이 뉴스가 되는 판에 드라마에 대해 ‘앙탈’을 부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어쨌거나 저는 5공화국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 한때 국회의원 출마설이 나돈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라도 정계에 입문할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솔직히 국회의원은 너무 월급이 박해서 못하겠어요.(웃음) 제가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정말 많아요.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하기 싫은 일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요.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한 후에 그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기회가 온다고 해도 정치를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새벽이 가까워져 오자 임진강의 침묵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임진강을 좋아하는 이유로 ‘적당한 규모와 깊이, 그리고 그 고요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달무리가 지면서 3분의 2쯤 이지러진 임진강의 달은 어두운 주홍색으로 변했다. 그가 말없이 내게 마지막 술잔을 따라주었다.
한기홍_월간중앙 객원기자 (glutton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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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前대통령 장남 전재국 1박2일 밤샘 와이드 인터뷰

“아버지의 업보 피할 생각 없지만 내가 하는 일로 비판·평가받고 싶다”

사진:권태균

연천땅 투기 의혹설 전두환 前대통령 장남
전재국이 털어놓는 소문의 진상 그리고 일과 가족 이야기


드라마 <제5공화국>이 화제가 되면서 드라마의 한가운데 선 전직 대통령 전두환 씨를 둘러싼 논쟁도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마침 얼마 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장남 연천 땅 1만6,000평 매입’ 기사가 언론에 보도돼 일부에서는 전두환 씨의 은닉재산에 대한 의혹이 다시 한번 제기되기도 했다.
세간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당사자 전재국 씨가 본지 기자를 만나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오랫동안 겪어왔던 심경을 털어놨다. 그가 기자와 밤을 새우며 7시간이나 만나 말을 푼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연천은 아버지가 1사단장 하시던 곳, ‘제2의 고향’삼을 것
● 은퇴 전 ‘시공사 차이나’ 세우겠다
● MBC 드라마 <제5공화국>은 아예 안 봐
● 아버지는 <논어> 배우며 영어공부도 열중


시공사 전재국(全宰國·46) 사장은 확실히 결단이 빠르고 행동이 기민했다. 인터뷰하고 싶다는 메일을 전달한 지 채 한 시간도 안 돼 답변이 돌아왔다.“저녁에 연천에 가니 그곳에서 술 한잔 하며 인터뷰를 하자.” 기자는 인터뷰를 요청하는 메일에 “연천의 땅 구입과 관련한 사업과 인생의 계획이 있다면 그것을 듣고 싶다”고 썼다. 그는 흔쾌히 응했다. 필요하면 하룻밤 연천에서 머무르며 1박2일 인터뷰를 해도 좋다는 전갈이 왔다. 이 인터뷰는 그래서 6월13일 저녁부터 14일 새벽까지, 그리고 잠시 눈을 붙인 다음 그날 오전까지 이어졌다.

그는 시공사 사장 전재국이 아닌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 씨로 불리던 그 오랜 세월에 대한 착잡함을 토로했다. 현생에서 부자의 연을 맺고 쌓은 업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으나 연매출 500억 원을 올리는 출판사 경영인 전재국을 이제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그늘에 안주하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조각을 전공한 오랜 지인과 함께 이곳 연천의 허브 농원을 스스로 설계하고 공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1주일에 3∼4일을 이곳에 머무르는 까닭에 얼굴과 팔이 새카맣게 그을렸다. ‘현장확인주의자’ 전씨는 늘 이런 모습이다. 그는 출판사 창업 초기 대부분의 출판 기획에 깊숙이 관여했고,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구하기 위해 외국의 뒷골목 책방을 샅샅이 뒤지는 열그는 사업가로서의 성과가 ‘부친의 음덕’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부친이 불법으로 모금한 정치자금이 사업자금으로 흘러들었다는 세간의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의혹은 지금도 강력히 유포되고 있고, 앞으로도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어쨌거나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삶을 구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느리게 사는 삶의 시작’으로, 회사 차원에서는 ‘독자와 출판사가 어우러지는 소통의 장’을 이곳 연천에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세간의 불신이 있다고 해도 개의치 않으며 향후 연천에 구현될 구체적 실천만이 ‘그 불신을 불식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임진강변의 한 민물매운탕집에서 마신 연천의 특산주 ‘겨우살이술’은 독했다. 기자는 취재원보다 더 빠르게 취했지만 다행히 그가 쏟아낸 말들은 수첩과 녹음기에 고스란히 보존됐다.

“미디어 빅뱅 시대, 시공사의 미래를 고민 중”

― 출판사를 하게 된 계기와 동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아버님이 백담사로 가시게 됐죠. 처음에는 누이동생 부부가 부모님 수발을 들었는데 저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들 셋을 두신 아버님의 장남으로서 미국에서 편하게 공부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도교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1989년 초여름, 그렇게 저는 백담사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냈어요.

그때 아버님은 굉장한 마음의 부담을 느끼셨습니다. 장남인 저를 무척 사랑해 주셨고, 그만큼 기대도 컸는데 당신 때문에 아들의 장래를 망치는 게 아니냐는 자괴감을 느끼셨던 것 같아요.

1989년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술을 한잔 하고 백담사 근처 계곡물에 몸을 담근 채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어요. ‘산에서 내려가 뭔가 일을 하자. 책을 한번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 아무 경험도 없었을 텐데, 겁은 나지 않았나요?

“그때는 순진했죠. 책 만드는 일은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죠. 사무실에 책상을 놓고 전화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참 많이 물었어요. 왜 출판사를 할 생각을 했느냐고…. 저는 학창시절 꿈이 아버님 뒤를 이어 군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시력이 나빠 육사 입학시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줄곧 책을 보고 공부하는 일 외에는 제가 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출판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집안에서 사업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외삼촌(이창석 씨)밖에 없어요. 나이도 아홉 살 차이밖에 안 나고 해서 제가 형님처럼 가깝게 지냈는데, 출판사 처음 차릴 때도 외삼촌과 많이 상의했지요.

출판사를 한 지 16년이 흘렀지만 저는 제 일에만 몰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닥친 우환과 풍파가 너무 많았어요. 김영삼 정부 시절 아버님이 2년 넘게 옥살이를 하셨고, 동생(재용 씨)도 구속된 적이 있지요. 저는 뒤돌아보지 않고 일에 몰두하고 싶었지만, 주변 상황이 저를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 말씀처럼 시공사를 창업한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그간의 성과를 스스로 어떻게 평가합니까?

“저는 지금 고민이 많습니다. 회사는 물론 많이 성장했죠. 직원 200명에 연매출이 500억 원이 넘는 빅 사이즈의 출판사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에서의 출판업의 미래에 대해 저는 아주 절박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과연 10년 뒤에도 설 자리가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우리 출판사는 잡지도 많이 내고 있지만, 광고시장에서 잡지 매체가 따오는 광고 매출이 매년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극단적인 가정입니다만 종이책이 사라지고 ‘e― book’이 독서시장을 지배할 날이 올지도 모르죠. 전면적인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고 소위 ‘디지털 컨버전스’를 통한 미디어의 빅뱅 현상이 다가오는 겁니다. 그런 환경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과연 뭐냐…?

시공사는 연간 600만 권이 넘는 책을 팔아요. 저는 우리 출판사와 수많은 독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해법 중 하나는 소위 ‘디지털의 파고’를 완벽하게 수용하는 일입니다.

시공사는 국내 어떠한 출판사보다 온라인 사업을 활발하게 합니다. 저자에게 원고료나 인세를 주고 책을 내서 그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커뮤니티를 형성해 수익원을 찾아내는 거죠. 지금 잘되는 것도 있고 아직 준비가 덜 된 분야도 있습니다만, 출판사 매출의 상당부분이 온라인 사업을 통해 발생합니다.”

― 연천 땅을 구입한 것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땅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 생각입니까?

“제가 회사의 미래와 관련해 구상하는 것 중 하나는 시공사의 독자들을 어떻게 묶어내고, 책에서만 보여줬던 것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카사 리빙>이나 <비스트로>라는 잡지를 통해 보여줬던 것은 ‘슬로 라이프(slow life)’ 또는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비전입니다. 요즘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만 그게 정확한 개념 같지는 않고, 어쨌든 제가 잡지나 단행본을 통해 구현해 보고 싶은 세계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창조적인 삶’의 추구였습니다.

제가 지금 이곳 연천에 만들고 있는 허브 농원은 출판사와 독자를 잇는 하나의 광장, 소통의 현장 ‘즐기면서 배우는’ 희망의 공간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허브는 ‘그린’이죠. 희망과 평화의 색깔입니다.

허브는 네 가지가 있죠. 먹기도 하고 약으로도 쓰며 향기를 맡고 관상용으로도 키웁니다. 허브라는 것을 통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면 우리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현실 속에서’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허브는 제가 구상하는 ‘소통의 광장’에서 하나의 상징 또는 도입부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플러스 알파’가 있는 거죠. 출판사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 광장 속에 녹여낼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 어떤 모델을 통해 이런 사업을 구상하게 되었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모델 중 일본 미야자키(宮崎) 현의 ‘그림책마을’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죠. 규모도 7,500평 정도로 그리 크지 않습니다만 그림책 도서관, 원화 전시장, 각종 이벤트 공간, 공방과 판매장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즐기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죠.

“2009년 창업 20돌에 완공 목표”

우리의 허브 농원 구상은 일단 내년 8월 문을 여는 것을 목표로 땅을 다듬고 있는 단계입니다만, 전체가 완성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완성의 시점을 2009년 창업 20돌에 맞추고 있습니다. 허브와 ‘그림책마을’이 중심이 되죠. 외국의 사례들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허브가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면서 그때그때 기획된 미술 전시회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독서캠프도 열 생각입니다.

야외 공연장을 겸한 자그마한 결혼식장도 만들어 시공사의 독자와 이웃들에게 개방하겠습니다. 큰딸아이 결혼식도 이곳에서 할 생각입니다. 공방을 만들어 공예품 만들기 실습도 할 수 있고, 자그마한 황토방도 몇 개 지으면 하루를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겠지요. 즐기고 쉬면서 인간끼리 소통할 수 있는 광장이 될 겁니다. 그때 와서 보면 ‘아, 이 사람들이 이것을 보여주려고 일을 시작했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될 거예요.

저는 허브 중에서도 라벤더를 좋아해요. 그런데 국내에 100평 이상의 라벤더 밭이 없어요. 2,000평에 달하는 라벤더 언덕의 조성은 그래서 국내 최초의 실험입니다. 심은 라벤더가 과연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도 없어요. 라벤더는 지중해성 기후에서 잘 자라는 식물인데, 연천의 기후는 한겨울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거든요.

배수가 잘돼야 하기 때문에 경사면에 심고 있어요. 전문가들도 잘 몰라요. 그래서 제가 외국에서 책을 20권 정도 구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는 그림이 나와줄지 모르겠어요. 다만 그냥 작은 산으로 방치됐던 땅에 뭔가 의미가 담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 왜 하필 이곳 연천을 선택했습니까?

연천을 택한 것은 이곳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조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사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지역입니다. 500m만 가면 민통선이 나오잖아요? 아버님이 1사단장을 하셨기 때문에 이 동네는 많이 와 봤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분위기가 험악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흐르는 임진강은 참 아름답습니다. 이곳 최전방 태풍전망대에서 남과 북을 관통하며 흐르는 임진강을 바라보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굉장한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됩니다. 임진강이 아름답기 때문이지요. 남과 북의 인간들이 그어 놓은 경계선과 철책은 흉물스럽지만 임진강은 조용히 아름답게 흘러갑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미국 몬태나의 강물 못지않은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 성스러운 곳을 어떻게 투기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은 시공사의 상징이고 사업의 연장이면서 독자와 회사가 만나는 소통의 장입니다.”

“출판사는 아이디어맨의 놀이터”

― 허브 농장을 만드는 일이 출판사의 비즈니스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이 됩니까?

“출판사는 기본적으로 아이디어의 ‘풀’입니다. 아이디어를 중개하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죠. 굉장한 자본이나 첨단 기술이 필요한 사업은 벌이지 못해요. ‘고감도 하이 터치’를 활용하는 사업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사람들의 ‘행복한 삶에의 희망’에 호소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랄까요? 뭐, 그런 것을 추구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 구상의 결과물이 바로 이 허브 농원입니다. 자연친화적인 그 무엇 말이죠….

전통적인 농업에는 큰 부가가치를 기대하기 어려워요. 제 생각은 농업과 문화를 결합하는 모델을 현실화해 보자는 것입니다. ‘진화한 농업’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접근 방법은 다양합니다. 저의 구상이 유력한 솔루션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출판사의 사업 범위 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는 것이지요. 앞으로 어떤 콘텐츠를 채워야 할까…, 아이디어 풍부한 사람들과 토론해 가면서 고민할 생각입니다.

저는 이 사업에 굉장한 희망을 걸고 있어요. 5년, 10년 후 시공사라는 출판사가 어떤 위치에 있든, 제가 혹시 그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더라도 이 사업은 시공사에 다양한 사업 기회를 제공하면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어요.”

― 출판업계의 전반적 불황이 장기화하고 있습니다. 불황 타개를 위해 어떤 수단을 강구하고 있습니까?

“외부에서는 잘 모르지만 우리 출판사는 아이들 기저귀를 연간 100억 원어치 정도 팔아요. 게임카드 매출도 70억 원 정도 되죠. 잡지 광고주들과 접촉하면서 고안한 사업 모델입니다. 광고만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라인 영업망을 이용해 그들이 생산한 물건을 팔아 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죠. 저는 기본적으로 출판사가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의 놀이터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의 아이덴티티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창출합니다.

<해리포터>의 저자 J. K. 롤링은 거대한 출판사 10개의 몫을 하죠. 온라인을 통해 저자와 독자가 직거래하는 겁니다. 출판사가 설 자리가 없는 상황이 오는 거죠. 음반시장이 그렇습니다. 음반 기획자들이 예전과 같은 힘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가수들이 곡을 만들어 SKT나 KTF와 직접 계약합니다. 우리는 광고주였던 유한킴벌리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생산물인 기저귀를 온라인을 통해 배급하는 일을 새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었습니다. 게임잡지 광고주인 게임 개발사들에 결제 수단의 아이디어를 내 현재 이 분야 1위를 달리고 있어요.

저는 출판사가 어떤 콘텐츠를 종이 위에 찍어 파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창조적 발상을 하는 저자가 있고,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가 있다면 출판사라는 광장에 모여 즐기라는 겁니다. 기업고객과 독자와 창조적 마인드를 가진 저자들이 출판사에 와서 갖가지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그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구체화하는 일을 출판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연함과 창조적 마인드로 새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지요.”

― 불교 관계 서적을 꾸준히 내더군요? 상당히 전문적이면서 심오한 책들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불교서적 출간이 종교생활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제가 동국대 부속고등학교를 나왔어요. 불교재단의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우선 불교와의 작은 인연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집안 어르신 중에도 불교를 믿는 분들이 계시고, 특히 부모님은 백담사에 계실 때 절의 신세를 참 많이 지셨지요.

일본 사람들은 ‘남전 대장경’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의 불교서적은 전통적으로 ‘북전’ 계열이 많지요. 일본인들은 남전 장경의 번역을 이미 소화(昭和)시대 때 이미 완성했어요. 우리는 팔리어를 잘 아는 학자들이 드물어 어려움이 있지요. 어렵지만 몇 권 번역해 책을 냈지요.

저는 백담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있을 때 그런 것을 많이 느꼈어요. 독송할 때 왜 그렇게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해야 할까…. 루터의 종교개혁도 라틴어 성서의 번역에서 출발했잖아요? 그때의 경험을 반추해 보면서 아름다운 한글로 어려운 불교 경전을 쉽게 풀어쓰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법화경>을 다 번역했어요. 지금 10권짜리 <화엄경>을 번역하고 있는데 2∼3년 후면 완성될 겁니다. 그것을 완성하면 제가 부모님과 함께 2년 반 정도 절밥을 먹은 것에 대한 ‘은혜 갚음’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돈이 되는 사업은 아니에요. 그런데 한 권 한 권 책을 낼 때마다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우리 가족이 풍파 속에서도 혈육의 정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낸 <고려불화>는 손해보지 않았어요. 많은 분이 관심을 갖고 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불교서적의 수지 관계는 계산해 보지 않았습니다. 돈을 꼭 써야 할 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제가 미국에서 MBA 공부를 했잖아요? 그래서 돈 계산은 남부럽지 않게 잘합니다.(웃음) 그런데 불교서적은 계산 안 합니다. 그런 일을 해야 제가 출판업에 뛰어든 의미를 살릴 수 있는 것이지요.

― 시공사 출판물은 대중적인 장르문학에서부터 매우 고급스러운 인문학, 예술관계 서적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광범위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업상 특별한 원칙이 관철되고 있는 건가요?

게임과 만화 결합한 사업모델

“저는 그게 별로 혼란스럽지 않아요. 직원들 중에는 혼란을 느끼는 사람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원칙이 있어요. 제 취미생활을 출판에 반영하지 않는다는 원칙 말이죠. 장르문학은 우리나라에서 잘 안 돼요. 물론 ‘추리문학’에 속하는 존 그리샴의 소설은 우리가 많이 번역해 권당 30만 부 이상 팔았죠. 존 그리샴의 소설도 출판할 때 추리소설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보면 추리나 스릴러류가 압도적으로 많죠.

소위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multi use)’라는 개념이 우리 시대를 풍미하잖아요? 그런데 제 지론은 ‘원 소스 멀티 유스’적인 콘텐츠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대중적인 책을 많이 팔자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그렇게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출판사의 아이덴티티를 좌우한다고 봅니다.

장르문학도 해 보고 만화도 열심히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어요. 돈을 많이 벌려고 시작한 책들이 잘 안 팔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이 잘 팔리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것이 세상 일의 묘한 이치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저는 미국에서 만화책을 찍어요. 미국은 시리즈물보다 낱권 만화가 주류입니다. 우리처럼 대여시장 중심이 아니라 직접구매, 소장문화가 발달해 있지요. 우리나라 만화가 중에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출판만 하면 죽을 쒀요. 그림은 좋은데 스토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만화산업은 직접매출 비중이 30∼40%밖에 안 됩니다. 캐릭터 사업과 영화 판권 같은 것으로 돈을 벌죠. 우리 만화도 해외 판로를 모색해야 하는데, 우리 정서가 외국에 먹히지 않아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미국의 스토리와 우리의 그림을 결합해 보자는 시도였습니다.

게임과 만화를 결합하는 사업 모델도 실행하고 있어요. 어떤 게임이 한국에서 출시되면 그 게임의 소재를 만화로 만들어 미국시장에 뿌리는 겁니다. 만화는 게임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영화 판권 같은 것을 팔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는 겁니다. 10~20개의 만화를 뿌려 1건 정도의 부대수익을 창출해도 그것은 해볼 만한 사업이 됩니다.

“은퇴 전 ‘시공사 차이나’ 세우겠다”

재기 넘치는 한국만화를 세계에 소개해야 하는데, 아직은 절반 정도의 성공에 그치고 있습니다. 작품당 1만권에서 1만5,000권 정도는 팔고,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도 1∼2건 정도 있었습니다. 계속 주시하는 사업분야입니다. 우리가 이문열이나 황석영의 작품으로 미국시장에 진출하기는 힘듭니다. 아시아적 감수성으로 세계시장을 두드릴 수 있는 장르는 뭐냐? 저는 그 해답이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나 만화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한때 중국 진출을 위한 물밑작업을 하고 있다는 풍문이 있었습니다. 어떤 진전이 있었습니까?

“별로 진척된 것은 없어요. 그런데 제가 상하이(上海)에 갔을 때 놀란 적이 있어요. 거리는 가까운데 공항에 내릴 때부터 말이 안 통해요. 저는 일본말은 좀 해서 일본에 갔을 때는 별 불편이 없어요. 그런데 중국은 말도 그렇지만 문자도 제가 배운 한자와는 전혀 다르더라고요. 영국 출판계가 강력한 이유는 미국·호주 등 영어권 나라가 모두 시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4,500만 명의 좁은 시장을 벗어날 수 없어요. 통일이 된다고 해도 8,000만 명에 불과하죠.

중국은 엄청난 시장입니다. <벼농사의 기본> 같은 책이 500만 권이 팔리는 곳이 중국 출판시장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좀 변해야 해요. 두세 달에 한 번씩 상하이에 가서 친구도 사귀고, 그들과 술도 한잔 마시고, 서점가나 뒷골목도 가보는 거죠. 우리 세대에 13억 명의 중국시장에 다리를 걸쳐 놓지 않으면 후배들이 고생하게 돼 있어요.

상하이 뒷골목에서 <드래곤볼> 해적판이 나도는 것을 보면서 가능성을 확인했어요. 굉장히 반갑더라고요. 중국에서 열리는 도서전시회에 직원들도 보내고 저도 몇 년간 중국을 드나들었느데, 제가 이곳 연천에 ‘필이 꽂힌’ 다음부터는 중국행이 뜸해졌어요. 중국어도 1년 정도 개인 레슨을 받았어요. 연천 허브 농원 일이 가닥이 잡히면 다시 중국시장을 모색할 겁니다. 제가 회사 일을 그만두기 전에 ‘시공사 차이나’를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 연천에 땅을 산 것이 투기의 일환이라는 세간의 의혹이 여전히 강력합니다.

“며칠 전 부산에 일이 있어 KTX를 타고 갔어요. 객차에 설치된 TV를 보고 있는데 국내 뉴스가 나와요. 그런데 첫번째 뉴스로 ‘전두환 전 대통령 장남 연천 땅 1만6,000평 매입’이 딱 뜨는 거예요. 그 다음 뉴스가 노무현 대통령 방미였어요. 그 뉴스를 보는 순간 저는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저는 직원 200명을 거느린 출판사 사장이고, 계산해 보니 최근 5년간 제가 낸 종합소득세가 14억 원이에요. 그렇다면 저도 세금 낼 만큼 내고 세상을 안 속이면서 사업을 한 겁니다. 사업하면서 직원들 월급도 밀린 적이 없어요.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사업하며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한 파렴치한이 도망다니다 경기도 연천에서 체포됐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세금을 내고 열심히 사업하는 대한민국 국민인데 제게는 보호받을 수 있는 사생활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한국사회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하는 일로 비판·평가받고 싶다”

아버님이 지금 추징금을 못 내고 계시죠.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 제가 어떤 식으로 책임져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연좌제를 적용해야 하나요? 제가 만일 연천 땅을 팔면 ‘전재국 씨 연천 땅 매각! 차액 20억 원으로 추정’이라는 기사가 나올지 모르죠. 이런 문제들이 저를 굉장히 힘들게 해요.

제가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아버님의 그늘이 너무 깊어, 감내하지 않으면 안될 짐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딱히 드릴 말씀도 없죠. 그런데 아이들이 크니 아이들한테 정말 미안해요. 제가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비치니까요. 제가 그 땅을 남의 이름으로 몰래 산 것도 아니고, 나쁜 일을 하려고 산 땅도 아니에요.

주소도 이곳으로 옮겼고, 실제로 1주일에 3∼4일은 이곳에서 보내요. 다 노출돼 있는 거죠. 저는 16년간 사업해 온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투자도 하고 사업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고, 제가 공인이 아닌 만큼 기본적 사생활은 지켜줬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 출판인 전재국에 대한 평가, 시공사의 성과에 대한 평가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저는 장남으로서 어릴 때부터 아버님에게 참 많이 혼나면서 자랐습니다. 제가 고집이 세서 부모님 말씀도 제일 안 들었어요. 고분고분하게 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저를 항상 사랑으로 감싸주셨죠. 부모님은 그냥 사랑하는 부모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저는 아버님의 정치적 동지도 아니고, 그분의 공적 생활을 잘 알지도 못합니다. 당신의 장남으로 여생을 편안히 모시겠다는 생각 말고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나이 50이 다 되도록 사업을 하는 동안 저에게 시공사의 미래나 출판업에 대한 구상을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상당히 덩치가 커진 출판사를 운영할 때도 제가 하는 일로 저를 평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밖의 문제에만 관심을 보이죠. 그게 참 섭섭했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 비판도 받고 평가도 받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좀 ‘페어하게’ 평가받고 싶어요.

물론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업보가 참으로 깊고 무거운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업을 피해 도망치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죠. ‘인정’이란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뭐, 저 사람도 자기가 할 몫이 있어’라는 평가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향후 시공사가 가장 역점을 두고자 하는 사업상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디지털 컨버전스가 이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초보단계이지요. 인터넷·지상파TV·케이블TV·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등 온갖 미디어가 경쟁하면서 결국 통합의 길을 걷겠지요. 미디어가 통합되면 오리지널 콘텐츠를 가진 사람들이 채널을 골라 쓰는 시대가 올 겁니다. 케이블TV 경우만 봐도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죠. 채널만 있을 뿐 콘텐츠는 다 구매합니다.

예컨대 지금 인터넷 방송은 지상파 방송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지요. 그런데 기술적인 부분이 완벽하게 해결된다면 과연 어떤 세상이 올까요? 앞으로 10년 후 미디어 경쟁에서 살아남을 승자는 누구일까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동통신사들이 콘텐츠 회사들을 마구 사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시공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저는 이런 문제를 굉장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해법 중 하나는 디지털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아날로그적인 것, 하이 터치적인 것으로 간다는 겁니다. 허브 농원과 그림책마을이 그런 겁니다. 허브의 향기를 맡고 비스듬히 경사진 꽃동산을 걸어가는 실제 체험을 디지털이 어떻게 구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돈을 들여도 그것은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날로그로, 역으로 승부를 겨루는 전략이지요.

제가 원하는 것은 엄청난 규모의 매출이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흑자 정도면 충분합니다. 머리만 잘 쓰면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후원도 하고, 직원들 대우도 좀 높여주면서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다고 봐요.”

―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불리한 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다 백담사로 갈 때 아버님은 ‘너도 들어오면 잡혀가니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 서울 집에 잠깐 들렀다 백담사로 가는데, 아시겠지만 그 길이 구곡양장이잖아요? 그 길을 가면서 제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아버님이 제 앞에서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보이시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당당하지 못한 아버님의 모습을 본 적이 없거든요. 적어도 자식들 앞에서는 좌절하거나 낙담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백담사에서 아버님께 인사드리고 수척해진 모습을 뵐 때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을 느꼈습니다.

1993년 아버님이 구속되기 직전 합천 종갓집에 내려갈 때 제가 동행했죠. 새벽에 체포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아버님이 밤새 제게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줬죠. 내가 감옥에 가더라도 네가 용기를 잃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수사관에게 연행되는 순간을 목격했는데, 그 장면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아버님 옷가지랑 양말 등을 어머니에게 전해드리고 저는 회사일을 계속해야 했지요. 1주일간을 결재도 못하고 낙담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사람 마음이 잿빛이 되어 살아야 한다는 의욕을 추스르기가 그렇게 힘들더라고요. 첫 면회 때도 그랬지요.

죄수복을 입은 아버님 모습을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제게는 그냥 사랑하는 아버님이니까요. 동생 구속됐을 때, 수의를 입고 있는 모습을 면회 가서 봤는데 정말 열흘 동안 제가 밥을 못 먹었습니다. 참으로 모진 업을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승에서 우리 부모님을 만난 것도 업이고, 그런 업을 선택한 것도 제 업이겠지요.

7년 동안 청와대에서 살 때도 저는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 들어갈 때 청와대가 너무 가깝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경호실 사람들이 와서 들어가자고 해요. 청와대는 어디 산 꼭대기쯤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문 몇 개 지나니 바로 제가 7년간 살 집이 나오더군요. 그때 청와대 문을 열고 들어간 업보가 이렇게 가혹할 줄은 정말 몰랐지요.”

― 어떻게 마음을 추슬렀습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제가 혼자 똑바로 서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가족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맙고 좋았습니다. 풍파가 휘몰아치면 저는 새로운 일을 만들어 거기에 죽도록 매달렸습니다. 그것이 저를 구원하는 길이었죠. ‘미래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자’는 생각이 구세주 역할을 하죠.

동생이 구속되면서 땅도 다 팔았습니다. 그 돈으로 연천 땅도 샀지요. 1만6,000평을 평균 잡아 평당 10만 원 정도 주고 샀습니다. 나이 60 이후의 인생을 준비하자는 생각을 품게 된 계기가 동생 구속사건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쓰고 있는 건물을 제외하고는 다 팔았어요.

연천은 제가 주민등록을 옮겼으니 주민세도 이곳에 냅니다. 연천은 저의 제2의 고향입니다. 이곳을 잘 가꾸고, 이 동네를 위해 할 일을 다 하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연천은 제 마지막 사업 영역이 될 것이고, 제 인생의 마감도 이곳에서 이뤄질 것이라는 말이지요.

아버님이 1사단장 하실 때 저는 주말마다 사단장 관사로 가서 이틀을 보냈습니다. 그때 이곳 분위기는 굉장히 살벌했어요. 저는 이곳이 참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이곳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이러니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조용하게, 성실하게 살고 싶다”

제가 80까지 살 수 있다고 가정하면, 그 전에 통일은 반드시 이뤄지겠지요. 그때 비무장지대 바로 아래인 연천은 통일된 대한민국의 중간 지점이 될 겁니다. 그곳에 꽃밭을 이루고 사람들을 모아 행복한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은 제게는 굉장히 중요한 소명입니다.”

― 연천 땅의 일부를 왜 따님 명의로 했습니까?

“서울에 있는 땅 100평을 팔아 이곳의 땅을 사줬습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그 땅과 그 땅 위에 심은 생명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가꾸라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정신이 스며 있다고 말해 줬습니다. 저는 이 땅을 결코 팔지 않습니다. 땅은 되팔아야 투기가 되는 것 아닙니까?
땅값이 오르든 내리든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땅값의 등락이 아니라 지금 심고 있는 라벤더가 과연 올 겨울 혹독한 연천의 추위를 극복할 수 있느냐입니다. 잘 가꿔 유익한 공간, 살아 숨쉬는 공간, 희망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습니다.”

― 얼마 전, 전 전 대통령이 재산을 29만 원으로 발표한 것에 대해 대다수의 국민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노의 여론이 아직도 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 발표의 진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론적으로 보면 아버님의 재산은 지금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몇 억 원이라도 남아 있다면 사정기관의 조사가 미흡해 제대로 추징하지 못한 결과가 되지요. 이 문제는 아버님께 조언하거나 답변서를 준비한 변호사들이 잘못한 겁니다. 즉, 아버님 명의의 통장에 남아 있는 잔액을 있는 그대로 밝힌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굉장히 이상한 답변이 돼서 국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겁니다.

지금 아버님의 생활은 거의 전적으로 어머니의 재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부친으로부터 상속세를 내고 상속받은 재산이 있습니다. 재산이 한 푼도 없다면서 무슨 돈으로 골프를 치고 사람들과 교유하는지에 대한 의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별산제라고는 하지만 어머니가 아버님 생활을 어떻게 나 몰라라 하겠습니까. 어머니의 재산으로 꾸려가야 하는 생활의 단면이 분명 존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는 재산이 29만 원인데 아들은 어떻게 땅을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 일가족 전부가 단 한 푼의 재산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모두 추징해야 하는 재산이 되는 것이죠. ‘실정법 위에 정서법이 있다’고들 하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 어렵고 곤혹스럽습니다. 나름대로 조용히, 성실하게 살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은 저를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한 심정입니다.”

― 시공사를 상장할 계획은 없나요?

“글쎄요, 상장해서 돈이 왕창 들어온다고 해서, 그 돈으로 무얼 합니까? 갑자기 책을 더 많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처럼 꾸준히 나갈 겁니다. 돈을 버는 일과, 돈을 쓰는 일을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면서 말이지요. 한 해 팔리는 650만 권의 책은 대단한 덩치입니다. 그 모든 책에는 발행인 이름으로 제 이름이 박혀 나갑니다. 제가 느껴야 할 책임감의 무게는 정말이지 막중하죠.

가끔 다니다 보면 우리가 만든 책을 어린이들이 읽는 경우를 봐요. 그 책에 오자는 없는지, 장정은 제대로 됐는지, 그림은 제대로 그려졌는지 걱정이 돼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내가 그 아이들에게 보여줄 책을 만들 거라고 결심했는데, 이제는 앞으로 태어날 손자들이 유익하게 읽을 책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정신으로 책을 만들려고 합니다.”

― 1차 개관은 언제 이뤄집니까?

“내년 8월께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주로 공원 하단부에 마련되고 있는 허브 농원을 중심으로 순차적으로 개관하려고 합니다. 내년 9월께는 이곳 임진강변에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대회를 유치해 보려고 해요. 저는 이 운동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데, 오세훈 전 의원 같은 분은 참 열심히 하시더군요. 제가 잘 아는 협회의 임원이 사전답사를 끝내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멋진 축제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 전 전 대통령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십니다. 서예를 좀 하시고, 한문 선생님에게 <논어>를 배우고 계세요. 요즘에는 영어공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안양교도소에 계실 때 제가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영어학습문고를 넣어드린 적이 있어요. 아버님은 육사 재학 중에는 <3위일체>를 가지고 공부하셨다는데, 최근에도 영어책을 꽤 여러 권 암기하고 계십니다. 회화가 상당히 늘었어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가 집을 방문했을 때는 통역 없이 일어로 대화를 나누시더라고요.

논어 강독하고, 영어공부 중인 전 前대통령

일요일에는 가족들이 모여 배드민턴을 치죠. 아주 오래된 가족의 관행이죠. 제가 토요일에 찾아뵈면 반드시 하루를 모시면서 자고 옵니다. 예전에는 손자들이 자주 가고 해서 적적함을 덜어드렸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크니 그걸 못해요. 저라도 자주 가려고 노력합니다. 이제는 모든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난 분이니, 오시는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옛 동창생들을 챙기는 일 정도가 소일거리죠.

건강은 좋은 편이지만 행동반경이 좁고 활동이 적어지니 조금만 잘못 관리해도 금방 나빠질 것 같아 걱정입니다. 다행히 두 분이 일정을 스스로 만들어 주로 무엇인가를 배우는 쪽에 하루의 시간을 쓰고 계십니다.”

― 동생 재용·재만 씨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앞으로 미국에서 활동할 것에 대비해 몇 개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재판은 지금 진행 중이어서 그 전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참 아티스틱하고 자유분방하고 감각이 있는 동생입니다. 저보다 상당히 자유분방해요. 어릴 때 저한테 혼난 적도 많고, 저와는 많이 다르지만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동생이에요. 여러 가지 일로 참 괴로웠을 겁니다. 동생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얼마 전에 서울에 왔다 이제 곧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막내 재만이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MBA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짬짬이 중국계 회사에서 일을 하고 보수를 받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한국과 중국시장을 개척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형제들끼리는 잘 지내는데, 이제는 머리들이 커서 일정한 선이 생겼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잘 모르는 것도 있어요. 그런 게 세월의 흐름이지요.”

―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습니까?

“헤르만 헤세가 쓴 <정원 일의 즐거움>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곳 연천에서 하는 일과 딱 맞아떨어지는 책이죠. 이레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사진도 좋고 장정도 훌륭합니다. 헤세가 그린 수채화도 들어 있고, 아름다운 시와 함께 자신이 즐거움을 느꼈던 정원 일에 대한 여러 가지 단상을 적은 책이지요. 제가 여러 권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도 했습니다. 헤세가 정원 가꾸기에 관심이 많았는지는 처음 알았어요. 그 책을 읽고 새삼 관심이 생겨 <데미안>도 다시 읽었죠.”

― 16년간 사업하면서 사람을 보는 안목도 늘었겠지요? 용인술이랄까, 사람을 잘 쓰는 법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철학과 소신이 궁금합니다.

“용인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고요. 시공사는 4개 사업부서가 있어요. 단행본·어린이·잡지·인터넷 사업부가 시공사의 중심입니다. 사람을 쓰는 일과 관련해서 제가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것은 일을 할 만한 사람에게 최대한의 권한을 주는 거예요. 저는 전체적인 조화를 맞추는 일에 주력하고, 각 사업부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그만 하려고 해요.

사업 환경이 너무 급박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제가 4개 사업본부장들과 개인휴대단말기(PDA)를 같이 사서 쓰고 있습니다. PDA폰에 들어갈 콘텐츠도 우리 사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이 PDA폰을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그 기능의 일부만 사용할 뿐이죠. PDA폰 기능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갈 콘텐츠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저는 출판이 아닌 인접 분야, 예컨대 금융 분야의 유능한 인재들을 데려오려고 해요. 지금 우리 단행본사업본부장은 펀드 매니저 출신입니다. 이제는 출판을 콘텐츠 중심으로만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애플리케이션(application: 적용, 활용) 중심으로 사고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조직관리 능력이 있고 합리적인 사람이면 된다고 생각해요.

용인술이라면 너무 거창한 표현이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조차 잘 몰라요. 저도 저의 능력을 아직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테스트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죠.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시련 속에 집어넣는 일입니다. 그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죠. 이종문화의 시대, 변화의 시대에는 한 분야의 능력가가 다른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다만 그런 변화를 껴안을 용기가 있느냐, 또 그런 변화의 장을 마련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그런 화학작용들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제5공화국>은 현 정권의 정치지형 작용”

―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전 전 대통령 역을 맡은 이덕화 씨의 열연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한 번도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없어요. 일부러 안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한 공화국에서 일어난 일을 드라마로 만들 수 있다는 발상 자체에 반대합니다. 관련 인물들이 다 살아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 드라마가 현 정권의 정치적 지형과 무관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죠. 원한이 있든 은혜가 있든, 현 정권이 그 맥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드라마는 진실을 왜곡할 수밖에 없지요.

클린턴과 르윈스키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그것을 소재로 드라마를 찍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나중에 좀 더 투명한 눈과 차가운 가슴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대가 왔을 때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불과 20년 전의 사건들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사회가 정상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그리고 당사자들의 반대 의견이나 심리적 저항감은 전혀 반영할 수 없는 구조이고요.

저도 그 드라마에 나왔다고 하더군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보지는 않았고, 그에 대해 항의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연천에 땅을 산 것이 뉴스가 되는 판에 드라마에 대해 ‘앙탈’을 부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어쨌거나 저는 5공화국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 한때 국회의원 출마설이 나돈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라도 정계에 입문할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솔직히 국회의원은 너무 월급이 박해서 못하겠어요.(웃음) 제가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정말 많아요.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하기 싫은 일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요.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한 후에 그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기회가 온다고 해도 정치를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새벽이 가까워져 오자 임진강의 침묵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임진강을 좋아하는 이유로 ‘적당한 규모와 깊이, 그리고 그 고요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달무리가 지면서 3분의 2쯤 이지러진 임진강의 달은 어두운 주홍색으로 변했다. 그가 말없이 내게 마지막 술잔을 따라주었다.
한기홍_월간중앙 객원기자 (glutton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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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험] 박맹호 민음사 대표
영원한 출판인 꿈꾸는 ‘한국 지성의 묘판’
문학에의 꿈을 접고 민음사를 설립하며 출판업에 몸담은 지 38년.
박맹호 사장이 걸어온 길은 한국 출판문화사이기도 하다. 民音社를 문학의 본령을 지키는 단행본 전문 출판사로 성장시킨 그는 1990년대 들어 자회사를 잇따라 설립하면서 사업영역을 확대하는 경영 수완도 과시했다.
“다시 태어나도 출판인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박맹호의 출판인생 이야기.


지난 3월 중순 ‘대박이 불가능해진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황의 골이 깊어진 출판가에 의미 있는 기록이 수립됐다. 지난 1998년 8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로 출발한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 ‘춘향전’ 출간으로 100권째를 돌파한 것이다(6월 중순 현재 다자이 오사무(太宰治·1909∼48)의 ‘인간 실격’까지 모두 103권이 나와 있다). 이 기록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IMF 사태로 출판시장이 잔뜩 얼어붙어 있을 때 시작해 5년7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거쳐, 그것도 낱권 발행으로 100권을 채운 것부터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민음사는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기치 아래 해당 언어 전공자들을 동원해 100권이 넘는 작품을 일일이 현대감각에 맞게 새로 번역했다. 국내 전집류 출판 사상 처음으로 원작자와 직접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당연히 적잖은 투자가 뒤따랐다. 시장 상황이 워낙 안 좋을 때여서 출판계 내부에서도 “민음사가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독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이 전집은 100권째 출간 직전 누적 발행부수 100만 권을 돌파했다. 권당 1만 권씩 찍어낸 셈이다. 이 같은 성적표는 민음사의 저력과 함께 71세의 현역 출판인 박맹호(朴孟浩) 사장의 건재함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민음사는 지난 1966년 5월 출범한 국내의 대표적 단행본 출판사다. ‘출판 외길’을 걸어온 회사와 박맹호 사장에 대한 평가는 출판인들 사이에서도 후한 편이다. 지난해 초 ‘동아일보’가 국내 출판사 편집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민음사는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출판사’로, 박사장은 ‘광복 후 국내 출판문화에 가장 공적이 큰 출판인’으로 각각 선정됐다.

박맹호 사장은 1934년 충북 보은의 부유한 집안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선친 박기종 씨는 정미소와 운수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지방 유지’로, 서울에서의 건설회사 경영을 거쳐 5대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청주사범학교 재학중이던 소년 박맹호는 1947년 부친을 따라 상경하면서 서울 경복중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경복중 5학년(오늘의 경복고 2학년) 때 6·25전쟁으로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고교 과정은 청주고등학교에서 마친 것으로 이력서에 나와 있다.

‘현실문제’에 관심 많았던 문학청년

박사장은 학창 시절부터 글재주가 남달랐다. 여느 문학소년이 그러하듯 문예반 활동을 하며 글쓰기 대회에서 상도 많이 탔다. 1952년 서울대 불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에 들어간 그는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자유 풍속’으로 응모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름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낙선 처리되고 만다. 그는 “최종심까지 올라갔지만 자유당 정권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독설을 담고 있는 데 부담을 느낀 심사위원들이 낙선 처리했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고 말한다.

박사장이 신춘문예에 응모했을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이었던 작가 한운사 씨는 지난 4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문학지망생 시절의 박맹호에 대한 기억의 일단을 남겼다. 한씨는 대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알아보는 좌담회를 구상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내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문리대 불문과의 박맹호 후배였다. 나는 그의 이름을 ‘맹호’(猛虎)라고 착각했다. 신춘문예에 응모한 소설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맹렬한 독설이 끼어 있었다. 거기에 유머를 섞는 재간이 보통이 아니었다….’

문학의 꿈을 키우던 시절, 청년 박맹호와 가까이 지낸 인사들 가운데는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도 들어있다. 학과는 달랐지만(이고문은 국문과 출신이다) 두 사람은 고희(古稀)를 넘긴 지금도 친구지간으로 지낸다. 대학 시절 박사장의 집은 서울 용산의 삼각지 부근에 있었다. 이고문은 “당시 박맹호는 제법 큰 집에 살았는데, 궁하고 급할 때 박사장의 집을 찾아가 먹고 자면서 신세진 친구들이 나를 포함해 참 많았다”고 회고했다. 이고문이 기억하는 젊은 시절 박맹호 사장의 모습도 한운사 씨의 회고와 맥을 같이한다.

부친의 家業승계 권유 뿌리치고 출판업 시작

“문학을 주로 얘기하며 자주 어울리던 동기들 대부분은 릴케나 보들레르에 심취해 감상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하지만 박맹호는 부친이 국회의원이어서 그런지 정치와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현실 비판적이면서도 풍자적 글도 곧잘 쓰는 등 다른 동기들에 비하면 특이한 데가 있었다. 문학의 길을 접고 출판인의 삶을 살았지만, 문학을 계속했더라면 폭넓은 창작활동을 하는 훌륭한 저자가 됐을 것이다.”

신춘문예에서 고배를 마신 뒤에도 한동안 ‘미련과 관심을 갖고’ 습작에 매달렸던 박사장은 결국 문학의 꿈을 접기로 결심한다. “글 쓰는 게 힘들게 느껴지면서부터 ‘나는 문학에 재주가 없거니와, 문학은 애초부터 내 천직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그가 문학의 길을 접은 현실적 이유가 또 있었다. 바로 선친의 ‘압력’이었다. 어느 날 대학을 졸업하고도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며 ‘룸펜 생활’을 하던 장남을 불러 앉힌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니 직장은 안 갖더라도 결혼은 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그는 결국 서울대 약학과를 졸업한 두 살 아래의 위은숙 씨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은 박사장을 출판인으로 만든 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가정을 가진 뒤로는 ‘직장을 갖든지, 사업을 하든지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들더라는 것. 입때까지만 해도 박사장의 선친은 장남이 사업을 물려받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사업이 싫으면 탄탄한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치라도 하라며 장남을 압박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문학 취향인 사람은 혼자 공상하고 혼자 사색하는 게 천성이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만나 늘 무언가를 사정해야 하는 사업이나 정치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박사장은 말한다. 결국 그는 ‘도망치듯’ 아버지에게서 탈출했다.

아버지는 ‘네가 언젠가는 두 손 들고 나를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아들이 출판사를 경영하며 재정적 어려움에 고통받을 때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러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이 가업을 승계하지 않은 데 대한 서운함을 풀지 않았다고 한다.

가업 승계 대신 박사장은 출판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출판사 생활은 몇 달 가지 못했다. 출판사 일을 살펴보니 ‘이 정도면 내가 직접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 친구가 하던 출판사에도 잠시 드나들었지만 ‘이것 역시 시간낭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박사장이 그 무렵의 출판사 사정을 들여다보고 ‘이 정도면 내가 직접 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출판문화라는 게 열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책 편집이나 표지부터 엉성한 구석이 한 둘이 아니었죠. 전문 디자이너가 아예 없던 시절이어서 당연한 일이기도 했죠. 그것을 지켜보면서 ‘내가 해도 이보다 잘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책 광고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무리 못해도 이보다 좀더 매력적으로 독자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어떤 게 작품이 되는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 문학 하는 친구들이 많으니 필자 확보에도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현실적 기대도 물론 했지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바로 민음사였다. 박사장은 민음사를 경영하면서 전문 디자이너를 편집장으로 영입해 책의 편집과 디자인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책 광고에도 유난히 신경을 쓰는 출판인이다. 전문가가 알아서 잘 만들어내지만, 지금도 최종적으로는 자기 손을 거쳐야만 광고를 내보낸다. “독자는 책보다 광고를 먼저 만나는데, 이 만남에서 이미지가 깨져버리면 아무리 좋은 책도 실패하고 만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민음사는 1966년 5월 서울 노량진 산비탈에 있던 박사장의 안방을 사무실로 삼아 출범했다. 출판업을 시작한 후 그가 처음 펴낸 책은 ‘요가’였다. 당시 일본에서 요가가 크게 유행하는 데 착안해 만든 번역서였다. 요가라는 생소한 분야를 다룬 책으로 화제를 모으면서 판매에도 불이 붙었다. 초판 2,000권만 제대로 팔아도 화제가 되던 시절, 무려 1만5,000권을 판 것이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박사장은 바로 이어 펴낸 두번째 작품에서 참패를 기록하고 만다. 유주현 씨의 신문 연재소설 ‘장미부인’을 출판하고 신문광고를 대대적으로 내보내는 등 승부수를 던졌지만 엄청난 빚을 떠안고 만 것이다. 부인이 약국을 경영하면서 벌어들이는 돈은 고스란히 빚 갚는 데 써야 했다.

출판이 쉽게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쉽게 망할 수도 있는 사업임을 깨달은 그는 이때부터는 ‘편한 마음으로’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 박사장은 ‘인문학 도서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자부심으로 총서(叢書) 출간에 심혈을 기울였다. 1972년 ‘세계시인선’으로 막을 올린 민음사의 총서 출간은 1974년의 ‘오늘의 시인 총서’와 ‘오늘의 작가 총서’로 이어졌다. 그뒤로도 민음사가 내놓은 총서는 ‘이데아 총서’ ‘뉴미디어 총서’ ‘정신분석학 총서’ ‘인문사회과학총서’ 등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1983년부터 99년까지 16년 동안 424권을 낸 ‘대우학술총서’는 한국 출판사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인문학 총서 제작에 전력투구하면서 박사장은 작품성이 담보되면서도 ‘팔리는’ 문학 작품 만들기에 고심했다. 그 답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1977년 계간 ‘세계의 문학’ 창간과 함께 제정한 ‘오늘의 작가상’이었다. 프랑스의 콩쿠르상이나 일본의 아쿠다카와(芥川)상과 견줄 수 있는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정착시키겠다는 각오로 그가 출범시킨 ‘오늘의 작가상’은 출판계의 관행을 깨는 파격 그 자체였다.

당시만 해도 정비석·유주현·김래성 등 ‘판매 부수’가 검증된 몇몇 대중작가를 제외하고는 작가가 단행본을 출판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출판사나 출판시장 모두 열악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신인이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는 창구는 신문사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현상공모’가 전부다시피 했다. 따라서 ‘오늘의 작가상’이 신예작가에게 단행본 출간의 기회를 약속한 것부터 화제를 모았다. 소정의 상금과 별도로 책 판매량에 따른 추가 인세(印稅)를 지급하기로 한 것도 파격이었다. 상금만 받으면 그것으로 끝인 현상공모와 개념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오늘의 작가상’은 곧바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77년 제1회 수상작인 한수산의 ‘부초’를 시작으로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등 잇따라 히트작을 탄생시킨 것이다. ‘오늘의 작가상’은 그뒤로도 조성기의 ‘라하트 하헤렙’(1985), 강석경의 ‘숲속의 방’(1986) 등을 수상작으로 내놓으며 역량 있는 작가와 베스트셀러의 산실로 자리잡아갔다.

90년대 중반 들어 시작한 ‘사업 다각화’

1990년대 들어 민음사는 ‘비룡소’ 등 자회사를 잇따라 출범시키면서 다시 한번 주목받기에 이른다. 인문학 중심의 단행본 전문 출판사를 지향하다 ‘사업다각화’를 추진한 배경을 박사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의 작가상’을 통해 베스트셀러가 연속 탄생했지만 경영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더군요. 이것 저것 해보고 싶은 것은 많은데, 출판업 20년이 넘어도 그럴 여건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좋은 책을 내기 위해 좋은 인재를 데려오려면 우선 좋은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그럴 환경이 되지 않는 것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 등장하는 장르를 끌어들일 수 있는 별도 체제도 필요했고요.”

박사장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아동도서시장이었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 아동도서 출판은 열악했다. 저작권을 피해가면서 외국의 것을 요령껏 베끼거나 흉내낸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박사장은 이러한 환경을 바닥부터 바꾸고 ‘자라는 손자들한테 내가 만든 책을 읽히겠다’는 생각도 했다는 것이다. 1994년 그는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딴 ‘비룡소’라는 아동도서 전문 출판사를 세웠다. 장녀 상희 씨가 대표를 맡은 비룡소는 한 해 매출이 모회사인 민음사의 두 배가 넘는 100억 원대를 기록할 정도로 자리잡았다.

박사장은 1996년에는 판타지와 추리소설류를 주로 취급하는 ‘황금가지’를 설립하고 장남 근섭 씨에게 경영을 맡겼다. 출판을 시작할 때부터 ‘형편이 좋아지면 꼭 해보고 싶었던 분야’였던 과학 출판을 위해 1997년 ‘사이언스북스’도 출범시켰다. 차남 상준 씨가 운영중인 이 회사는 “매출이 신통찮은 게 초창기 민음사와 비슷하다”고 박사장은 귀띔했다.

민음사의 자회사 체제로의 전환은 출판계에서도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출판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선택이었고, 비룡소나 황금가지를 통해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으니 그 또한 좋은 일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섰다”거나 “실질적인 2세 승계 아니냐”는 부정적 시각도 없지 않았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음사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책은 2만 종류가 넘는다. 세 곳의 자회사까지 포함하면 늘 100 종류 정도의 책이 기획중인 가운데 하루 한 권씩 새책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서 있어 ‘출판의 장인’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박사장이 경험에서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출판은 벽돌 쌓기”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오늘의 민음사가 가능했던 배경이 무엇인가”라는 상투적 질문이 나올 때 주로 하는 박사장의 답변이다. 대박을 꿈꾸며 쉽게 출판에 뛰어들어 서둘러 승부를 보려는 사람들에게 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박사장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는 “독자는 철저히 이기적이다”라는 것도 있다. 무슨 뜻인지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1만 원짜리 설렁탕 한 그릇을 먹을 때는 별로 까다롭게 따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가격의 책을 살 때는 그렇게 까다로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게 무슨 도움을 주고, 어떤 감동을 줘서 나의 성숙에 어떤 계기를 만들 것인지’ 일일이 따져보고 나서야 지갑을 열거든요. 책을 만들 때는 이처럼 자기한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돈을 쓰지 않는 이기적인 독자를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대충 만든 책으로는 결코 독자의 선택을 받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기적 讀者’와 ‘책 만드는 재미’

그렇다면 어떤 책이 ‘팔리는 책’인가. 이러한 질문이 나오면 박사장은 ‘유도탄 궤도 진입론’을 자주 꺼낸다. 유도탄은 수많은 부품을 제대로 조립해 정확한 프로그램에 따라 발사해야 궤도에 진입할 수 있는 것처럼, 출판도 성공작이 나오려면 여러 요인이 충족돼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와 출판사의 역량, 사회적 분위기, 독자의 반응 등이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얘기하는 ‘대박’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본 조건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추가돼야 한다는 것이 박사장의 지론이다. 그가 말하는 흥행 대박의 첫째 조건은 ‘역량 있는 대형 스타 작가’의 등장이다. 문제는 출판시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 있는 작가의 출연에도 ‘터울’이 있다는 것이다. ‘장마다 꼴뚜기’가 아니라는 얘기다.

진정한 대박의 두번째 조건은 ‘동반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발군의 스타 한 사람만으로는 시장의 흐름을 바꾸기 힘들기 때문에 엇비슷한 기량의 작가 몇 명이 동시에 등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동반 작가’의 필요성은 그가 남달리 관심을 기울이는 책 광고와도 연관돼 있다. 쉽게 말하면 1만 원짜리 책 한 권만 갖고는 대규모 광고전략을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함께 광고할 책 여러 권이 동시에 준비돼야만 대대적 홍보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쏘아올린 숱한 ‘유도탄’ 중 가장 완벽하게 궤도에 진입시킨 예로 ‘사람의 아들’과 ‘부초’를 손꼽는 박사장은, 요즈음도 새책이 나올 때면 제대로 궤도에 올릴 수 있을지 설렌다고 한다. 목표에 명중시키는 기쁨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지만,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오더라도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재미’도 있다는 것이 박사장의 말이다.

박사장이 말하는 ‘책 만드는 재미’는 또 있다. 출판을 하면서 저자로 만나는 숱한 사람들의 성장과 성숙을 지켜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생성과 소멸이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거치는 과정인데, 출판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성과 소멸을 보게 됩니다. 신인 작가가 대가로 크기도 하고, 조교로 처음 만난 필자가 총장 자리까지 오르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거든요. 그들이 시인으로, 소설가로, 학자로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보통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얻는 기쁨도 큰 기쁨이지요.”

박사장이 말하는 ‘뒷바라지의 즐거움’은 이어령의 박맹호에 대한 인물평에도 등장한다.

“젊은 시절 박맹호는 친구들을 먹이고 재우며 뒷바라지하는 일이 잦았다. 그는 휑한 표정에 어딘가 허점이 있어 보이지만, 캐들어갈수록 속내가 깊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세속과 다투지 않으면서도 세속과의 게임에서 이긴 사람이다.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세력화를 도모하거나 파당을 만들지 않아 문단과 예술계와 학계의 수많은 사람의 의지처가 됐다. 그의 도움으로 책을 내고 필명을 알리고도 다른 출판사로 옮겨가 안착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는 서운해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박맹호는 씨앗을 싹 틔우고 이앙 전까지 길러내는 묘판(苗板)과 같은 삶을 살아왔다.”

신뢰로 이어온 이문열과의 ‘25년 거래’

‘묘판’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박사장은 나름의 원칙은 지켰다. 민음사의 연혁을 자세히 살피면 숱한 필자가 등장하지만, 박사장 동년배들의 책은 거의 내지 않았다는 것이 눈에 띈다. ‘정실이 앞서면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박사장이 의식적으로 동년배 작가들을 멀리한 결과다. 그와 50년 넘도록 교우해온 이어령 고문도 민음사에서 낸 책이라고는 논문집 한 권이 고작이다. 박사장도 “매정했기 때문에 동세대한테는 인기가 없었다”고 말할 정도다. 민음사에서 책을 낸 인사들 가운데 박사장과 연배가 비슷한 경우는 시인 고은 (71)과 소설가 최인훈(68) 정도에 불과하다. 소설가 이청준(65)과 김승옥(63)도 있지만, 박사장보다 연배가 훨씬 아래다.

의식적으로 동년배와 거리를 뒀지만, 박사장은 좋은 작품이 있고 자신의 원칙에 부합하는 인재가 있으면 삼고초려해서라도 책 만들기에 동참시켰다. 그는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로 문학평론가인 유종호 연세대 교수와 김우창 고려대 교수를 손꼽는다. 박사장보다 한두 살씩 아래인 두 사람은 100권 돌파로 주목받은 세계문학전집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20년 넘게 박사장과 일하고 있다. 박사장은 두 사람을 “작품에 대한 판단이나 편집에 임하는 자세가 그렇게 진지하고 엄격할 수 없다”고 평하면서 “두 분을 만난 것은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박사장과 인연이 오랜 인물을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소설가 이문열이다. 이문열은 1979년 ‘사람의 아들’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박사장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그 해 겨울’ ‘젊은 날의 초상’ ‘영웅시대’ ‘오디세이아 서울’ 등 당대의 베스트셀러 대부분을 민음사에서 냈다. 1987년 그가 평역해 민음사를 통해 출간한 ‘삼국지’는 지금도 ‘베스트 스테디셀러’에 올라 있다.

이문열에게 민음사는 오늘의 문학적 입지를 다지는 출발점이자 기둥 역할을 했다. 민음사는 이문열이라는 작가를 발굴해냄으로써 회사의 성가를 높이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부와 명예를 함께 얻고 나누며 25년을 ‘거래’해온 사이지만, 두 사람은 책 출판과 관련해 단 한 번도 계약서를 써본 적이 없다. 날짜나 돈 문제로 단 한 번의 갈등도 없었을 만큼 두 사람의 신뢰가 깊었던 것이다. 사족 하나. 두 사람이 출판계약서를 작성한 경우가 딱 한 번 있기는 했다. 5년 전 ‘삼국지’ 해적판을 만든 업자를 고발하는 과정에서 ‘저자와 출판사의 법적 권리를 입증할 서류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부랴부랴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었다. 일종의 ‘소급 계약서’였던 셈이다.

“그래도 출판의 미래는 밝다”

지난 6월 중순 ‘사람의 아들’ 첫 출간 25주년을 기념해 개정판을 민음사를 통해 낸 이문열은 박맹호 사장을 “가장 출판인다운 출판인”으로 평한다.

“출판사 사장들은 지나치게 상업적이거나 문화인연 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상업주의는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지사(志士)연 하며 출판을 운동의 도구로 삼는 것도 문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박사장은 내가 아는 가장 출판인다운 출판인이다. 냉정하면서도 합리적인 성격으로, 양 극단을 무난하게 피해가며 출판의 본령을 지켜온 사람이 바로 박사장이다.”

많은 사람이 ‘출판의 위기’를 말한다. 그러나 박사장의 생각은 다르다.

“예전 같으면 많이 나갔을 책이 생각보다 적게 팔리는 경향은 분명 있습니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의 판매 추이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초’ ‘사람의 아들’ ‘머나먼 쏭바강’ ‘숲속의 방’ 등은 수십만 권은 기본이었고, 광고로 밀어붙이면 100만 권도 불가능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근래의 당선작 가운데서는 판매 성공작이 별로 없습니다. ‘이 정도면 팔릴 것 같다’고 믿었던 책도 5만∼6만 권에서 멈추고 말거든요. 조금 과장해 말하면 한창 시절보다 10분 1로 줄어든 것 같아요. 그러나 출판시장 전체를 보면 달리 볼 측면이 있거든요. 출판계를 통틀어 보면 판매되는 양도 많아졌고 신간도 늘고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의 상황이 위기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지금도 팔리는 책은 팔립니다. 좋은 작품을 골라 제대로 만들면 100만 권인들 왜 못 팔겠습니까.”

젊은 세대의 관심이 영화를 비롯한 ‘책 이외의 것들’로 급속히 옮겨가면서 적잖은 사람들은 출판의 미래마저 비관적으로 본다. 박사장은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한다. 우리 출판의 앞날을 그만큼 긍정적으로 본다는 얘기다. 그가 출판의 미래를 밝게 보는 데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박사장이 가장 먼저 손꼽는 것은 ‘출판인들의 열정’이다. 그는 이를 “우리 출판의 가장 큰 잠재력”이라고 내세운다. 두번째, 그는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국내 출판 인프라를 든다. ‘출판의 천국’으로 일컬어지는 일본과 겨루어도 손색없는 책을 만들어낼 정도로 출판인들의 편집 노하우도 축적돼 있다는 것이다. 맛깔스러운 책을 찍어내는 인쇄 기술도 그가 빼놓지 않는 대목이다. 세계적 규모의 대형 서점이 몇 개나 되고, 인터넷을 통한 책 판매가 우리만큼 활성화한 나라도 없다는 것이 또 추가된다.

그러나 박사장이 출판의 미래를 믿는 가장 큰 근거는 인쇄매체 고유의 역할에 대한 확신이다.

“사람이 성숙해 가려면 인쇄매체를 통해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인쇄매체를 통하지 않은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보면서 얻는 지식’은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책으로 읽는 지식은 우리의 정신에 일일이 각인됩니다. 그렇게 축적된 지식은 성숙한 인간의 판단 기준이 되고 행동의 지침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성된 인간’은 책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출판 종사자들이나 신문·잡지 등 인쇄매체들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사명감을 갖고 국민에게 접근해야 옳습니다. ‘박맹호 그 사람은 맨날 그런 소리나 한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중요한 말이고, 우리 모두 한번쯤 생각해볼 주제라고 봅니다.”

박사장은 “내 나이가 있고 소화해낼 인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전통 사상 등을 현대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꼭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민음사가 지난해부터 1억 원의 상금을 내걸고 실시중인 ‘올해의 논픽션상’도 박사장의 이러한 구상과 관련이 깊다.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급속히 바뀌어가면서 직업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고, 개인의 체험도 엄청나게 다양해졌다고 그는 분석한다. 여기에서 축적된 유익한 경험과 지식을 발굴해 사회 전체적인 지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논픽션상의 취지다.

작가나 출판업자의 지식과 경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은 일반인들이 참여할 공간이 클 것으로 박사장은 기대하고 있다. 지난해 1회 공모 결과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의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김염의 인생 역정을 다룬 ‘상하이 올드 데이스’를 발굴해내는 수확이 있었다.

기자는 지난 2000년 3월, 소설 ‘아가’를 출판한 이문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박맹호 사장을 처음 만났다. 그로부터 4년여가 흐른 지난 6월 초순 취재차 박사장을 두 차례 만났다. 인터뷰를 위해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이야깃거리가 된다고 그러느냐”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거듭 전화를 걸어 기사의 취지를 설명하자 “취재가 아니라 그냥 차 한 잔 마시려면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마주앉은 자리에서 이런저런 질문이 오가면서 ‘사실상의 취재’가 시작됐고, 박사장은 인터뷰 날짜를 잡아주는 쪽으로 양보했다. “월간중앙에도 도움이 되는 기획이라야 하고, 독자들한테도 유익한 기사거리가 돼야 한다”는 조건부 승낙이었다.

6월7일 오후 사진 기자와 함께 서울 강남구 신사동 출판사 사무실로 다시 찾아갔을 때, 박사장은 청색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맨 모습이었다. 이왕 취재에 응하기로 한 이상 갖출 예의는 갖춰야 한다는 자세를 금세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시종 진지한 자세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낮고 느린 목소리였지만, 40년 가까이 한 길을 고집해온 출판 전문가의 관록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장남이 가업을 물려받기를 원했던 선친의 뜻을 거스르고 출판을 고집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그의 답변은 예상보다 솔직하고 명쾌했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자식이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어요. 사업도 물론 매력이 있지요. 정치도 그 나름의 호연지기랄까 하는 것이 있어서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원칙을 지키면서 스스로 성숙해갈 수 있는 출판의 재미나 보람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나는 출판을 선택한 것이야말로 내 생애를 두고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믿습니다. 지금 같은 조건의 출판이 가능하다면, 이 다음 세상에서도 똑같은 일을 할 겁니다. 출판, 이것이 보통 매력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 朴孟浩 -

1934년 충복 보은 출생
청주고·서울대 불문과 졸업
1966년 민음사 설립
1976년 계간 ‘세계의 문학’ 창간
1977년 ‘오늘의 작가상’ 제정
1981년 ‘김수영문학상’ 제정
1983년 ‘대우학술총서’ 발간 시작
1985년 ‘이데아 총서’ 발간 시작
1986년 ‘민음의 시’ 발간 시작
1988년 ‘이문열 삼국지’ 출간
1994년 ‘뉴미디어총서’ 발간 시작
1994년 자회사 ‘비룡소’ 창립
1996년 자회사 ‘황금가지’ 창립
1997년 학술 계간 ‘현대사상’ 창간
자회사 ‘사이언스북스’ 창립
1998년 ‘세계문학전집’ 발간 시작
1999년 ‘대우학술총서’ 424권으로 간행 종료
2000년 ‘현대사상의 모험’ 총서 발간 시작
박종주 월간중앙 차장 (jj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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