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험] 박맹호 민음사 대표
영원한 출판인 꿈꾸는 ‘한국 지성의 묘판’
문학에의 꿈을 접고 민음사를 설립하며 출판업에 몸담은 지 38년.
박맹호 사장이 걸어온 길은 한국 출판문화사이기도 하다. 民音社를 문학의 본령을 지키는 단행본 전문 출판사로 성장시킨 그는 1990년대 들어 자회사를 잇따라 설립하면서 사업영역을 확대하는 경영 수완도 과시했다.
“다시 태어나도 출판인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박맹호의 출판인생 이야기.


지난 3월 중순 ‘대박이 불가능해진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황의 골이 깊어진 출판가에 의미 있는 기록이 수립됐다. 지난 1998년 8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로 출발한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 ‘춘향전’ 출간으로 100권째를 돌파한 것이다(6월 중순 현재 다자이 오사무(太宰治·1909∼48)의 ‘인간 실격’까지 모두 103권이 나와 있다). 이 기록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IMF 사태로 출판시장이 잔뜩 얼어붙어 있을 때 시작해 5년7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거쳐, 그것도 낱권 발행으로 100권을 채운 것부터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민음사는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기치 아래 해당 언어 전공자들을 동원해 100권이 넘는 작품을 일일이 현대감각에 맞게 새로 번역했다. 국내 전집류 출판 사상 처음으로 원작자와 직접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당연히 적잖은 투자가 뒤따랐다. 시장 상황이 워낙 안 좋을 때여서 출판계 내부에서도 “민음사가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독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이 전집은 100권째 출간 직전 누적 발행부수 100만 권을 돌파했다. 권당 1만 권씩 찍어낸 셈이다. 이 같은 성적표는 민음사의 저력과 함께 71세의 현역 출판인 박맹호(朴孟浩) 사장의 건재함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민음사는 지난 1966년 5월 출범한 국내의 대표적 단행본 출판사다. ‘출판 외길’을 걸어온 회사와 박맹호 사장에 대한 평가는 출판인들 사이에서도 후한 편이다. 지난해 초 ‘동아일보’가 국내 출판사 편집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민음사는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출판사’로, 박사장은 ‘광복 후 국내 출판문화에 가장 공적이 큰 출판인’으로 각각 선정됐다.

박맹호 사장은 1934년 충북 보은의 부유한 집안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선친 박기종 씨는 정미소와 운수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지방 유지’로, 서울에서의 건설회사 경영을 거쳐 5대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청주사범학교 재학중이던 소년 박맹호는 1947년 부친을 따라 상경하면서 서울 경복중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경복중 5학년(오늘의 경복고 2학년) 때 6·25전쟁으로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고교 과정은 청주고등학교에서 마친 것으로 이력서에 나와 있다.

‘현실문제’에 관심 많았던 문학청년

박사장은 학창 시절부터 글재주가 남달랐다. 여느 문학소년이 그러하듯 문예반 활동을 하며 글쓰기 대회에서 상도 많이 탔다. 1952년 서울대 불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에 들어간 그는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자유 풍속’으로 응모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름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낙선 처리되고 만다. 그는 “최종심까지 올라갔지만 자유당 정권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독설을 담고 있는 데 부담을 느낀 심사위원들이 낙선 처리했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고 말한다.

박사장이 신춘문예에 응모했을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이었던 작가 한운사 씨는 지난 4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문학지망생 시절의 박맹호에 대한 기억의 일단을 남겼다. 한씨는 대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알아보는 좌담회를 구상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내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문리대 불문과의 박맹호 후배였다. 나는 그의 이름을 ‘맹호’(猛虎)라고 착각했다. 신춘문예에 응모한 소설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맹렬한 독설이 끼어 있었다. 거기에 유머를 섞는 재간이 보통이 아니었다….’

문학의 꿈을 키우던 시절, 청년 박맹호와 가까이 지낸 인사들 가운데는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도 들어있다. 학과는 달랐지만(이고문은 국문과 출신이다) 두 사람은 고희(古稀)를 넘긴 지금도 친구지간으로 지낸다. 대학 시절 박사장의 집은 서울 용산의 삼각지 부근에 있었다. 이고문은 “당시 박맹호는 제법 큰 집에 살았는데, 궁하고 급할 때 박사장의 집을 찾아가 먹고 자면서 신세진 친구들이 나를 포함해 참 많았다”고 회고했다. 이고문이 기억하는 젊은 시절 박맹호 사장의 모습도 한운사 씨의 회고와 맥을 같이한다.

부친의 家業승계 권유 뿌리치고 출판업 시작

“문학을 주로 얘기하며 자주 어울리던 동기들 대부분은 릴케나 보들레르에 심취해 감상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하지만 박맹호는 부친이 국회의원이어서 그런지 정치와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현실 비판적이면서도 풍자적 글도 곧잘 쓰는 등 다른 동기들에 비하면 특이한 데가 있었다. 문학의 길을 접고 출판인의 삶을 살았지만, 문학을 계속했더라면 폭넓은 창작활동을 하는 훌륭한 저자가 됐을 것이다.”

신춘문예에서 고배를 마신 뒤에도 한동안 ‘미련과 관심을 갖고’ 습작에 매달렸던 박사장은 결국 문학의 꿈을 접기로 결심한다. “글 쓰는 게 힘들게 느껴지면서부터 ‘나는 문학에 재주가 없거니와, 문학은 애초부터 내 천직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그가 문학의 길을 접은 현실적 이유가 또 있었다. 바로 선친의 ‘압력’이었다. 어느 날 대학을 졸업하고도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며 ‘룸펜 생활’을 하던 장남을 불러 앉힌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니 직장은 안 갖더라도 결혼은 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그는 결국 서울대 약학과를 졸업한 두 살 아래의 위은숙 씨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은 박사장을 출판인으로 만든 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가정을 가진 뒤로는 ‘직장을 갖든지, 사업을 하든지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들더라는 것. 입때까지만 해도 박사장의 선친은 장남이 사업을 물려받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사업이 싫으면 탄탄한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치라도 하라며 장남을 압박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문학 취향인 사람은 혼자 공상하고 혼자 사색하는 게 천성이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만나 늘 무언가를 사정해야 하는 사업이나 정치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박사장은 말한다. 결국 그는 ‘도망치듯’ 아버지에게서 탈출했다.

아버지는 ‘네가 언젠가는 두 손 들고 나를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아들이 출판사를 경영하며 재정적 어려움에 고통받을 때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러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이 가업을 승계하지 않은 데 대한 서운함을 풀지 않았다고 한다.

가업 승계 대신 박사장은 출판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출판사 생활은 몇 달 가지 못했다. 출판사 일을 살펴보니 ‘이 정도면 내가 직접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 친구가 하던 출판사에도 잠시 드나들었지만 ‘이것 역시 시간낭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박사장이 그 무렵의 출판사 사정을 들여다보고 ‘이 정도면 내가 직접 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출판문화라는 게 열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책 편집이나 표지부터 엉성한 구석이 한 둘이 아니었죠. 전문 디자이너가 아예 없던 시절이어서 당연한 일이기도 했죠. 그것을 지켜보면서 ‘내가 해도 이보다 잘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책 광고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무리 못해도 이보다 좀더 매력적으로 독자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어떤 게 작품이 되는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 문학 하는 친구들이 많으니 필자 확보에도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현실적 기대도 물론 했지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바로 민음사였다. 박사장은 민음사를 경영하면서 전문 디자이너를 편집장으로 영입해 책의 편집과 디자인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책 광고에도 유난히 신경을 쓰는 출판인이다. 전문가가 알아서 잘 만들어내지만, 지금도 최종적으로는 자기 손을 거쳐야만 광고를 내보낸다. “독자는 책보다 광고를 먼저 만나는데, 이 만남에서 이미지가 깨져버리면 아무리 좋은 책도 실패하고 만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민음사는 1966년 5월 서울 노량진 산비탈에 있던 박사장의 안방을 사무실로 삼아 출범했다. 출판업을 시작한 후 그가 처음 펴낸 책은 ‘요가’였다. 당시 일본에서 요가가 크게 유행하는 데 착안해 만든 번역서였다. 요가라는 생소한 분야를 다룬 책으로 화제를 모으면서 판매에도 불이 붙었다. 초판 2,000권만 제대로 팔아도 화제가 되던 시절, 무려 1만5,000권을 판 것이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박사장은 바로 이어 펴낸 두번째 작품에서 참패를 기록하고 만다. 유주현 씨의 신문 연재소설 ‘장미부인’을 출판하고 신문광고를 대대적으로 내보내는 등 승부수를 던졌지만 엄청난 빚을 떠안고 만 것이다. 부인이 약국을 경영하면서 벌어들이는 돈은 고스란히 빚 갚는 데 써야 했다.

출판이 쉽게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쉽게 망할 수도 있는 사업임을 깨달은 그는 이때부터는 ‘편한 마음으로’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 박사장은 ‘인문학 도서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자부심으로 총서(叢書) 출간에 심혈을 기울였다. 1972년 ‘세계시인선’으로 막을 올린 민음사의 총서 출간은 1974년의 ‘오늘의 시인 총서’와 ‘오늘의 작가 총서’로 이어졌다. 그뒤로도 민음사가 내놓은 총서는 ‘이데아 총서’ ‘뉴미디어 총서’ ‘정신분석학 총서’ ‘인문사회과학총서’ 등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1983년부터 99년까지 16년 동안 424권을 낸 ‘대우학술총서’는 한국 출판사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인문학 총서 제작에 전력투구하면서 박사장은 작품성이 담보되면서도 ‘팔리는’ 문학 작품 만들기에 고심했다. 그 답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1977년 계간 ‘세계의 문학’ 창간과 함께 제정한 ‘오늘의 작가상’이었다. 프랑스의 콩쿠르상이나 일본의 아쿠다카와(芥川)상과 견줄 수 있는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정착시키겠다는 각오로 그가 출범시킨 ‘오늘의 작가상’은 출판계의 관행을 깨는 파격 그 자체였다.

당시만 해도 정비석·유주현·김래성 등 ‘판매 부수’가 검증된 몇몇 대중작가를 제외하고는 작가가 단행본을 출판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출판사나 출판시장 모두 열악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신인이 작품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는 창구는 신문사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현상공모’가 전부다시피 했다. 따라서 ‘오늘의 작가상’이 신예작가에게 단행본 출간의 기회를 약속한 것부터 화제를 모았다. 소정의 상금과 별도로 책 판매량에 따른 추가 인세(印稅)를 지급하기로 한 것도 파격이었다. 상금만 받으면 그것으로 끝인 현상공모와 개념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오늘의 작가상’은 곧바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77년 제1회 수상작인 한수산의 ‘부초’를 시작으로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등 잇따라 히트작을 탄생시킨 것이다. ‘오늘의 작가상’은 그뒤로도 조성기의 ‘라하트 하헤렙’(1985), 강석경의 ‘숲속의 방’(1986) 등을 수상작으로 내놓으며 역량 있는 작가와 베스트셀러의 산실로 자리잡아갔다.

90년대 중반 들어 시작한 ‘사업 다각화’

1990년대 들어 민음사는 ‘비룡소’ 등 자회사를 잇따라 출범시키면서 다시 한번 주목받기에 이른다. 인문학 중심의 단행본 전문 출판사를 지향하다 ‘사업다각화’를 추진한 배경을 박사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의 작가상’을 통해 베스트셀러가 연속 탄생했지만 경영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더군요. 이것 저것 해보고 싶은 것은 많은데, 출판업 20년이 넘어도 그럴 여건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좋은 책을 내기 위해 좋은 인재를 데려오려면 우선 좋은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그럴 환경이 되지 않는 것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 등장하는 장르를 끌어들일 수 있는 별도 체제도 필요했고요.”

박사장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아동도서시장이었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 아동도서 출판은 열악했다. 저작권을 피해가면서 외국의 것을 요령껏 베끼거나 흉내낸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박사장은 이러한 환경을 바닥부터 바꾸고 ‘자라는 손자들한테 내가 만든 책을 읽히겠다’는 생각도 했다는 것이다. 1994년 그는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딴 ‘비룡소’라는 아동도서 전문 출판사를 세웠다. 장녀 상희 씨가 대표를 맡은 비룡소는 한 해 매출이 모회사인 민음사의 두 배가 넘는 100억 원대를 기록할 정도로 자리잡았다.

박사장은 1996년에는 판타지와 추리소설류를 주로 취급하는 ‘황금가지’를 설립하고 장남 근섭 씨에게 경영을 맡겼다. 출판을 시작할 때부터 ‘형편이 좋아지면 꼭 해보고 싶었던 분야’였던 과학 출판을 위해 1997년 ‘사이언스북스’도 출범시켰다. 차남 상준 씨가 운영중인 이 회사는 “매출이 신통찮은 게 초창기 민음사와 비슷하다”고 박사장은 귀띔했다.

민음사의 자회사 체제로의 전환은 출판계에서도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출판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선택이었고, 비룡소나 황금가지를 통해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으니 그 또한 좋은 일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섰다”거나 “실질적인 2세 승계 아니냐”는 부정적 시각도 없지 않았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음사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책은 2만 종류가 넘는다. 세 곳의 자회사까지 포함하면 늘 100 종류 정도의 책이 기획중인 가운데 하루 한 권씩 새책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서 있어 ‘출판의 장인’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박사장이 경험에서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출판은 벽돌 쌓기”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오늘의 민음사가 가능했던 배경이 무엇인가”라는 상투적 질문이 나올 때 주로 하는 박사장의 답변이다. 대박을 꿈꾸며 쉽게 출판에 뛰어들어 서둘러 승부를 보려는 사람들에게 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박사장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는 “독자는 철저히 이기적이다”라는 것도 있다. 무슨 뜻인지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1만 원짜리 설렁탕 한 그릇을 먹을 때는 별로 까다롭게 따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가격의 책을 살 때는 그렇게 까다로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게 무슨 도움을 주고, 어떤 감동을 줘서 나의 성숙에 어떤 계기를 만들 것인지’ 일일이 따져보고 나서야 지갑을 열거든요. 책을 만들 때는 이처럼 자기한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돈을 쓰지 않는 이기적인 독자를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대충 만든 책으로는 결코 독자의 선택을 받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기적 讀者’와 ‘책 만드는 재미’

그렇다면 어떤 책이 ‘팔리는 책’인가. 이러한 질문이 나오면 박사장은 ‘유도탄 궤도 진입론’을 자주 꺼낸다. 유도탄은 수많은 부품을 제대로 조립해 정확한 프로그램에 따라 발사해야 궤도에 진입할 수 있는 것처럼, 출판도 성공작이 나오려면 여러 요인이 충족돼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와 출판사의 역량, 사회적 분위기, 독자의 반응 등이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얘기하는 ‘대박’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본 조건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추가돼야 한다는 것이 박사장의 지론이다. 그가 말하는 흥행 대박의 첫째 조건은 ‘역량 있는 대형 스타 작가’의 등장이다. 문제는 출판시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 있는 작가의 출연에도 ‘터울’이 있다는 것이다. ‘장마다 꼴뚜기’가 아니라는 얘기다.

진정한 대박의 두번째 조건은 ‘동반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발군의 스타 한 사람만으로는 시장의 흐름을 바꾸기 힘들기 때문에 엇비슷한 기량의 작가 몇 명이 동시에 등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동반 작가’의 필요성은 그가 남달리 관심을 기울이는 책 광고와도 연관돼 있다. 쉽게 말하면 1만 원짜리 책 한 권만 갖고는 대규모 광고전략을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함께 광고할 책 여러 권이 동시에 준비돼야만 대대적 홍보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쏘아올린 숱한 ‘유도탄’ 중 가장 완벽하게 궤도에 진입시킨 예로 ‘사람의 아들’과 ‘부초’를 손꼽는 박사장은, 요즈음도 새책이 나올 때면 제대로 궤도에 올릴 수 있을지 설렌다고 한다. 목표에 명중시키는 기쁨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지만,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오더라도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재미’도 있다는 것이 박사장의 말이다.

박사장이 말하는 ‘책 만드는 재미’는 또 있다. 출판을 하면서 저자로 만나는 숱한 사람들의 성장과 성숙을 지켜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생성과 소멸이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거치는 과정인데, 출판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성과 소멸을 보게 됩니다. 신인 작가가 대가로 크기도 하고, 조교로 처음 만난 필자가 총장 자리까지 오르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거든요. 그들이 시인으로, 소설가로, 학자로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보통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얻는 기쁨도 큰 기쁨이지요.”

박사장이 말하는 ‘뒷바라지의 즐거움’은 이어령의 박맹호에 대한 인물평에도 등장한다.

“젊은 시절 박맹호는 친구들을 먹이고 재우며 뒷바라지하는 일이 잦았다. 그는 휑한 표정에 어딘가 허점이 있어 보이지만, 캐들어갈수록 속내가 깊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세속과 다투지 않으면서도 세속과의 게임에서 이긴 사람이다.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세력화를 도모하거나 파당을 만들지 않아 문단과 예술계와 학계의 수많은 사람의 의지처가 됐다. 그의 도움으로 책을 내고 필명을 알리고도 다른 출판사로 옮겨가 안착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는 서운해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박맹호는 씨앗을 싹 틔우고 이앙 전까지 길러내는 묘판(苗板)과 같은 삶을 살아왔다.”

신뢰로 이어온 이문열과의 ‘25년 거래’

‘묘판’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박사장은 나름의 원칙은 지켰다. 민음사의 연혁을 자세히 살피면 숱한 필자가 등장하지만, 박사장 동년배들의 책은 거의 내지 않았다는 것이 눈에 띈다. ‘정실이 앞서면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박사장이 의식적으로 동년배 작가들을 멀리한 결과다. 그와 50년 넘도록 교우해온 이어령 고문도 민음사에서 낸 책이라고는 논문집 한 권이 고작이다. 박사장도 “매정했기 때문에 동세대한테는 인기가 없었다”고 말할 정도다. 민음사에서 책을 낸 인사들 가운데 박사장과 연배가 비슷한 경우는 시인 고은 (71)과 소설가 최인훈(68) 정도에 불과하다. 소설가 이청준(65)과 김승옥(63)도 있지만, 박사장보다 연배가 훨씬 아래다.

의식적으로 동년배와 거리를 뒀지만, 박사장은 좋은 작품이 있고 자신의 원칙에 부합하는 인재가 있으면 삼고초려해서라도 책 만들기에 동참시켰다. 그는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로 문학평론가인 유종호 연세대 교수와 김우창 고려대 교수를 손꼽는다. 박사장보다 한두 살씩 아래인 두 사람은 100권 돌파로 주목받은 세계문학전집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20년 넘게 박사장과 일하고 있다. 박사장은 두 사람을 “작품에 대한 판단이나 편집에 임하는 자세가 그렇게 진지하고 엄격할 수 없다”고 평하면서 “두 분을 만난 것은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박사장과 인연이 오랜 인물을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소설가 이문열이다. 이문열은 1979년 ‘사람의 아들’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박사장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그 해 겨울’ ‘젊은 날의 초상’ ‘영웅시대’ ‘오디세이아 서울’ 등 당대의 베스트셀러 대부분을 민음사에서 냈다. 1987년 그가 평역해 민음사를 통해 출간한 ‘삼국지’는 지금도 ‘베스트 스테디셀러’에 올라 있다.

이문열에게 민음사는 오늘의 문학적 입지를 다지는 출발점이자 기둥 역할을 했다. 민음사는 이문열이라는 작가를 발굴해냄으로써 회사의 성가를 높이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부와 명예를 함께 얻고 나누며 25년을 ‘거래’해온 사이지만, 두 사람은 책 출판과 관련해 단 한 번도 계약서를 써본 적이 없다. 날짜나 돈 문제로 단 한 번의 갈등도 없었을 만큼 두 사람의 신뢰가 깊었던 것이다. 사족 하나. 두 사람이 출판계약서를 작성한 경우가 딱 한 번 있기는 했다. 5년 전 ‘삼국지’ 해적판을 만든 업자를 고발하는 과정에서 ‘저자와 출판사의 법적 권리를 입증할 서류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부랴부랴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었다. 일종의 ‘소급 계약서’였던 셈이다.

“그래도 출판의 미래는 밝다”

지난 6월 중순 ‘사람의 아들’ 첫 출간 25주년을 기념해 개정판을 민음사를 통해 낸 이문열은 박맹호 사장을 “가장 출판인다운 출판인”으로 평한다.

“출판사 사장들은 지나치게 상업적이거나 문화인연 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상업주의는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지사(志士)연 하며 출판을 운동의 도구로 삼는 것도 문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박사장은 내가 아는 가장 출판인다운 출판인이다. 냉정하면서도 합리적인 성격으로, 양 극단을 무난하게 피해가며 출판의 본령을 지켜온 사람이 바로 박사장이다.”

많은 사람이 ‘출판의 위기’를 말한다. 그러나 박사장의 생각은 다르다.

“예전 같으면 많이 나갔을 책이 생각보다 적게 팔리는 경향은 분명 있습니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의 판매 추이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초’ ‘사람의 아들’ ‘머나먼 쏭바강’ ‘숲속의 방’ 등은 수십만 권은 기본이었고, 광고로 밀어붙이면 100만 권도 불가능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근래의 당선작 가운데서는 판매 성공작이 별로 없습니다. ‘이 정도면 팔릴 것 같다’고 믿었던 책도 5만∼6만 권에서 멈추고 말거든요. 조금 과장해 말하면 한창 시절보다 10분 1로 줄어든 것 같아요. 그러나 출판시장 전체를 보면 달리 볼 측면이 있거든요. 출판계를 통틀어 보면 판매되는 양도 많아졌고 신간도 늘고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의 상황이 위기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지금도 팔리는 책은 팔립니다. 좋은 작품을 골라 제대로 만들면 100만 권인들 왜 못 팔겠습니까.”

젊은 세대의 관심이 영화를 비롯한 ‘책 이외의 것들’로 급속히 옮겨가면서 적잖은 사람들은 출판의 미래마저 비관적으로 본다. 박사장은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한다. 우리 출판의 앞날을 그만큼 긍정적으로 본다는 얘기다. 그가 출판의 미래를 밝게 보는 데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박사장이 가장 먼저 손꼽는 것은 ‘출판인들의 열정’이다. 그는 이를 “우리 출판의 가장 큰 잠재력”이라고 내세운다. 두번째, 그는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국내 출판 인프라를 든다. ‘출판의 천국’으로 일컬어지는 일본과 겨루어도 손색없는 책을 만들어낼 정도로 출판인들의 편집 노하우도 축적돼 있다는 것이다. 맛깔스러운 책을 찍어내는 인쇄 기술도 그가 빼놓지 않는 대목이다. 세계적 규모의 대형 서점이 몇 개나 되고, 인터넷을 통한 책 판매가 우리만큼 활성화한 나라도 없다는 것이 또 추가된다.

그러나 박사장이 출판의 미래를 믿는 가장 큰 근거는 인쇄매체 고유의 역할에 대한 확신이다.

“사람이 성숙해 가려면 인쇄매체를 통해 지식을 얻어야 합니다. 인쇄매체를 통하지 않은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보면서 얻는 지식’은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책으로 읽는 지식은 우리의 정신에 일일이 각인됩니다. 그렇게 축적된 지식은 성숙한 인간의 판단 기준이 되고 행동의 지침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성된 인간’은 책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출판 종사자들이나 신문·잡지 등 인쇄매체들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사명감을 갖고 국민에게 접근해야 옳습니다. ‘박맹호 그 사람은 맨날 그런 소리나 한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중요한 말이고, 우리 모두 한번쯤 생각해볼 주제라고 봅니다.”

박사장은 “내 나이가 있고 소화해낼 인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전통 사상 등을 현대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꼭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민음사가 지난해부터 1억 원의 상금을 내걸고 실시중인 ‘올해의 논픽션상’도 박사장의 이러한 구상과 관련이 깊다.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급속히 바뀌어가면서 직업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고, 개인의 체험도 엄청나게 다양해졌다고 그는 분석한다. 여기에서 축적된 유익한 경험과 지식을 발굴해 사회 전체적인 지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 논픽션상의 취지다.

작가나 출판업자의 지식과 경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은 일반인들이 참여할 공간이 클 것으로 박사장은 기대하고 있다. 지난해 1회 공모 결과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의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김염의 인생 역정을 다룬 ‘상하이 올드 데이스’를 발굴해내는 수확이 있었다.

기자는 지난 2000년 3월, 소설 ‘아가’를 출판한 이문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박맹호 사장을 처음 만났다. 그로부터 4년여가 흐른 지난 6월 초순 취재차 박사장을 두 차례 만났다. 인터뷰를 위해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이야깃거리가 된다고 그러느냐”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거듭 전화를 걸어 기사의 취지를 설명하자 “취재가 아니라 그냥 차 한 잔 마시려면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마주앉은 자리에서 이런저런 질문이 오가면서 ‘사실상의 취재’가 시작됐고, 박사장은 인터뷰 날짜를 잡아주는 쪽으로 양보했다. “월간중앙에도 도움이 되는 기획이라야 하고, 독자들한테도 유익한 기사거리가 돼야 한다”는 조건부 승낙이었다.

6월7일 오후 사진 기자와 함께 서울 강남구 신사동 출판사 사무실로 다시 찾아갔을 때, 박사장은 청색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맨 모습이었다. 이왕 취재에 응하기로 한 이상 갖출 예의는 갖춰야 한다는 자세를 금세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시종 진지한 자세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낮고 느린 목소리였지만, 40년 가까이 한 길을 고집해온 출판 전문가의 관록과 자부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장남이 가업을 물려받기를 원했던 선친의 뜻을 거스르고 출판을 고집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그의 답변은 예상보다 솔직하고 명쾌했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자식이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어요. 사업도 물론 매력이 있지요. 정치도 그 나름의 호연지기랄까 하는 것이 있어서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원칙을 지키면서 스스로 성숙해갈 수 있는 출판의 재미나 보람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나는 출판을 선택한 것이야말로 내 생애를 두고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믿습니다. 지금 같은 조건의 출판이 가능하다면, 이 다음 세상에서도 똑같은 일을 할 겁니다. 출판, 이것이 보통 매력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 朴孟浩 -

1934년 충복 보은 출생
청주고·서울대 불문과 졸업
1966년 민음사 설립
1976년 계간 ‘세계의 문학’ 창간
1977년 ‘오늘의 작가상’ 제정
1981년 ‘김수영문학상’ 제정
1983년 ‘대우학술총서’ 발간 시작
1985년 ‘이데아 총서’ 발간 시작
1986년 ‘민음의 시’ 발간 시작
1988년 ‘이문열 삼국지’ 출간
1994년 ‘뉴미디어총서’ 발간 시작
1994년 자회사 ‘비룡소’ 창립
1996년 자회사 ‘황금가지’ 창립
1997년 학술 계간 ‘현대사상’ 창간
자회사 ‘사이언스북스’ 창립
1998년 ‘세계문학전집’ 발간 시작
1999년 ‘대우학술총서’ 424권으로 간행 종료
2000년 ‘현대사상의 모험’ 총서 발간 시작
박종주 월간중앙 차장 (jj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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