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풍경'이 담긴 집을 그려보세요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집을 생각한다>를 읽고

정진영 (phixant)


 




 







  
집이 갖추어야 할 열두 가지 풍경을 담은 '집을 생각한다'의 겉그림
ⓒ 다빈치

"집은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

 

브랜드 아파트 광고 문구가 아닙니다. 정말 집은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는 공간입니다. 살고 있는 사람들의 취향과 스타일이 반영된 집은 주인과 집이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네모 반듯한 단지 안에서 층층이 같은 위치에 비슷한 크기의 텔레비전을 들여놓고 사는 우리네 주거문화에서는 그럭저럭 형편따라 평수따라 사는 곳이 정해지기 마련입니다만, <집을 생각한다>를 읽고 약간의 용기를 내어 집에 자기만의 숨을 불어넣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가 쓴 <집을 생각한다>는 주택전문 건축가가 생각하는 '좋은 집은 어떤 집인가'에 대한 답을 차분히 적은 에세이 입니다. 열두 가지 주제어로 집에 대해 생각해보는 이 책은 크기나 두께에 비해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읽게 되는 흡인력 강한 책입니다.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집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건축가는 원룸으로 기억된다'며 작지만 아늑해 '자기만의 방'다운 집들을 소개합니다. 아름답게 어질러진 주방, 아이들의 꿈이 커가는 집 등 우리가 놓치기 쉬운 좋은 집의 조건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 합니다.

 

베르메르의 창이 있는 집

 

채광과 조명에 관심이 많은 제게 12장 '두 가지 의미의 빛'은 짧지만 분명하게 빛에 대한 기준을 한 길 높여줍니다.

 

건축주가 건축가에게 의뢰하면서 아주 조심스러운 어조로 "어딘가 베르메르의 그림과 같은 느낌의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었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했다는 부분에 이르면, 간판 드문 바닷가 마을에 그런 집을 주문하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깁니다.

 

왼쪽에서 떨어지는 햇빛을 은은하게 받아들이는 창 아래, 책 읽기 좋은 의자 하나만 놓아두고 정오부터 해가 질때까지 느긋하게 연필로 밑줄 그으며 책을 읽고 싶습니다.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작품 중에는 책 읽는 작은 방과 등 뒤에 책장을 두고 햇빛 아래서 책을 읽는 툇마루가 있는 집이 있습니다. 집 안에 책을 위한 공간, 주인장의 조용한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숨은 공간이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씨의 집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위에 설치된 가변 복도.
ⓒ 다빈치
건축

 

서둘러 책과 빛에 대한 이야기에 열을 올렸습니다만, 이 책에는 사각형 아파트에 익숙한 '아파트 공화국' 사람들에게는 많이 불편해 보이고, 낭비로 여겨지는 공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정원 끝에 아이들의 놀이만을 위한 나무판자로 만든 집이나, 어지럽게 설계된 주방, 집 안에 그을음이 생길게 뻔한 벽난로 등 우리 시선에 불편해 보이는 시설이 많습니다. 특히 지은이의 원룸 예찬은 넓은 평형 아파트를 갖지 못해 안달이 난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그저 낭만적인 지식인의 배부른 취미 정도로 여겨질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로우의 14제곱미터 짜리 숲 속 작은 집이나, 1949년에 지어진 사방이 유리로 마감돼 화장실을 제외한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필립 존슨의 '글라스 하우스'는 한번쯤 스스로 유배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멋진 집들입니다. 지은이의 원룸 예찬은 이렇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만으로 지은 집이 바로 원룸입니다. 즉 원룸은 '먹고 자는 곳'이라는 주택의 기본 정의에 가장 충실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택 내에 있으면 편리하지만 실제로는 필요 없는 비실용적인 공간을 하나씩 신중히 삭제해나가다 보면, 더 이상 들어낼 수 없는 마지노선에 도달하게 됩니다. 거기에 주택의 원형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31쪽)

 

또 풍경에 대해서는 책의 첫 장을 할애한 만큼 분명하게 좋고 나쁨을 지적합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곳이 도시건 시골이건 상관없이 주변과 유형무형의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건축물 하나 혹은 집 한 채가 원래의 풍경 안에 사람살이의 숨결을 불어넣어 인간적이고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주변을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지은 건물 한 채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너무나도 간단히 망쳐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20쪽)

 







  
긴 나무판을 이용해 각각 개별적인 의자이면서도 붙여두면 하나의 벤치같은 재미를 준 어린이 가구.
ⓒ 다빈치
주택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눈여겨 본 7장, '아이들의 꿈이 커가는 집'에 이르면 당장 마당 있는 땅집으로 이사가고 싶어집니다. 집을 판단하는 기준에 '아이들을 키우기에 좋은 집인가?', '아이의 심성을 풍부하게 해줄 수 있는 집인가?'를 포함시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골목과 동네가 사라지고 사각형 단지만 남겨둘 작정으로 여겨지는 뉴타운이나 재개발정책에 반대하게 됩니다. 먹고 자고 투자하는 곳을 넘어서 우리 아이의 꿈이 자라고, 심성이 키워지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살고 있는 사각형 집이라도 어딘가 다르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합리성이나 기능성, 편리함이나 쾌적함, 경제성 같은 기준으로 선택하는 집과 가족의 개성과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고르는 집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당장 집을 교체하기 어렵다면 지은이의 취향을 흉내내어 작은 가구 하나에 가족의 오늘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차분히 책을 읽기에 좋은 의자, 술 한 잔 즐기기에 좋은 의자, 편지를 쓸 때 좋은 의자, 무릎에 올라앉은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의자 등 단순한 의자 하나가 생활을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구는 단순히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일 뿐 아니라, 삶을 되새겨보게 하는 또 다른 시점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118쪽)

 






  
집안에 따뜻한 불의 공간이 들어간 주택.
ⓒ 다빈치
주택

집은 사람을 담는 그릇이지만, 사람을 닮기도 합니다. 반대로 사람이 집을 닮아가기도 합니다. 사람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시간이 갈수록 정이 드는 공간, 집에 대해 지은이의 눈높이를 따라 잠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서울에 골목길과 동네 이발관, 구멍가게 같은 곳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햇빛 잘 드는 땅집이 아파트 담장과 사이좋은 이웃으로 공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집이 좋은 집일까요? 가족들 얼굴을 차례로 떠올린 후, 그 사람들이 지닌 '마음의 풍경'까지 담아낼 수 있는 집을 그려보세요. 그 집이 당신을 쏙 빼 닮은 그런 평화로운 풍경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친김에 좀 더 욕심을 부려봅니다. 도시 곳곳에 다르면서도 함께 있을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이 나무의자를 닮은 집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서 우리 아이들이 오롯이 자기 개성을 살리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테니까요. 



2008.07.0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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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불도저의 묵시록



지칠 줄 모르는 경제학자 우석훈이 펴낸 두 권의 책 <촌놈들의 제국주의> <직선들의 대한민국>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진중권이 경제학을 전공했다면 우석훈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지금 교양과 재치로 무장하고 엄청나게 많은 글을 쏟아내는 경제학자를 보고 있다. 그의 펜끝은 늘 대중을 향해 있다.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를 보는 건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글 잘 쓰는 경제학자’는 멸종 위기의 희귀종에 가까우니까.



△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대중적 설득력을 갖춘 경제학자를 꼽아본다면(잘 안 꼽아지겠지만), 엄지손가락은 장하준 교수 차지일 것이다. 장하준의 글은 매우 우아하면서도 교양과 풍부한 논거들로 무장돼 있다. 장하준과 우석훈의 차이는 밀도와 면적에 있다. 장하준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성장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경제학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그의 글은 매우 밀도가 높다. 우석훈은 틈만 나면 경제학을 벗어나서 세상만사에 끼어든다. 그의 글은 면적이 넓다.

청계천, 거대한 어항

우석훈, 이 놀라운 에너지를 가진 경제학자가 거의 동시에 두 권의 책을 냈다. 일종의 시평집인 <직선들의 대한민국>(웅진지식하우스 펴냄, 1만2천원)과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인 <촌놈들의 제국주의>(개마고원 펴냄, 1만2천원)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직선’은 불도저로 상징되는 건설공화국이다. 이는 청계천을 거대한 어항으로 만들어놓고 생태 복원이라 부르는 우리 마음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전기로 모터를 돌려 끌어온 물을 다시 한강으로 흘려보내는 청계천은 비만 오면 오염물질이 한꺼번에 청계천으로 흐르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그러면 죽은 물고기들을 걷어내고 또다시 물고기들을 방류한다. 청계천이 제대로 복원될 때까지 끝없이 반복될 숨바꼭질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외형적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직선’의 단면을 더 살펴보자. 집 없는 사람들이 집값이 오르면 환호한다. 뉴타운은 현재까지의 경향으로 보면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의 10% 정도만 다시 입주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도심에서 더 먼 곳이나 주거환경이 더 나쁜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뉴타운 계획이 알려지면 모두들 기뻐 날뛴다. 신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토호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지방을 보면 더 심각하다. 이장한테 도장을 맡겨놓고 사는 순박한 주민들은 토호들의 이익을 위해 토지를 팔아치우는 데 동의한다. 한국의 도시화율은 이미 선진국을 뛰어넘었고,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수도권에 모든 재화를 집중시키고 있다. 이런 ‘직선’적인 힘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발상에서 정점을 이룬다.
왜 이런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이 땅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선택은 경제적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우석훈은 경제학자의 영토를 뛰쳐나간다. 그는 건설공화국이 유지·강화되는 원인을 시대 정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즉, ‘건설 미학’이 한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청계천을 찬양하거나 집 없는 사람들이 뉴타운 건설을 환영하는 이유는 경제적 합리성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미학이 투기와 결합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파천황’이 된다. 그러므로 ‘건설 미학’을 ‘생태 미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안이다. 그는 건설 미학이 한반도 대운하 발상에서 정점에 이르렀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사유를 할 공간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생태도시로의 전환, 생협 네트워크 등은 진행 중인 움직임이다. 그는 “주제넘은 이야기를 하는 김에” 건축·문학·음악·영화의 ‘생태 미학’까지 참견한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수출 지향, 에너지 소비 지향, 건설 지향의 한국 경제가 내적 불균형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국익’을 앞세운 이라크 파병에서 보듯, 이제 한국 경제는 해외 영토를 갈망하고 있다. 즉, 제국주의의 길로 나서고 있다. 이게 ‘촌놈들의 제국주의’인 이유는 식민지도 없고 식민지를 거느릴 능력도 없으면서 끊임없는 정복욕과 증오를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징후들의 집합이다. 우석훈은 우리 사회·경제 내부에서 제국주의의 징후들을 계속 끄집어낸다. 제국주의의 문화적 형태는 ‘수출주의’인데 한류 열풍을 지나 황우석 사건에서 절정을 맞는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미 제국주의의 등에 올라타 영토를 확장하려는 사람들의 욕망도 읽는다. 또 촌스런 제국주의는 북한을 내부 식민화하려 한다. 한국 자본주의는 북한을 값싼 노동력의 공급처나 부동산 개발의 요람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경제 통합 과정에서 북방 진출을 향한 야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중·일의 증오는 더 커져가고 있다. 이들 국가의 소득 분포도는 중산층이 두터운 마름모꼴에서 중산층이 붕괴되는 8자형으로 바뀌고 있다. 에너지와 자원을 둘러싼 각축은 계속 치열해진다. 3국의 산업구조는 전쟁에서 이득을 볼 에너지산업과 건설산업의 비중이 크다. “결론적으로 한·중·일 세 나라가 30년이라는 시간 지평에서 전쟁을 피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우석훈은 이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 평화라는 ‘공공재’의 가치를 되새기고 한·중·일 경제 통합의 밑그림을 그려본다. 무엇보다, 미래의 전쟁을 막는 일은 10대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들의 감성을 죽이는 ‘교육 파시즘’을 반드시 철폐해야 한다.

동아시아 3국의 전쟁이라고?

한국의 제국주의에서 시작해 3국의 전쟁 가능성까지 짚어보는 작업은 좀더 섬세하게 토론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매우 대담한 가설이다. 기본적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성장 동력을 잃고 있으며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국주의로의 전화에 대해 논의하려면 현재의 제국주의 개념에 대한 규정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19세기 제국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또 제국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설명돼야 한다. 어쨌든 우석훈의 목표는 세밀한 개념 규정이 아니라 레모니 스니켓의 ‘불행 시리즈’ 같은 묵시록을 던져놓고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로 미래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는 또 경제학자의 영토를 벗어난다.
두 권의 책은 계속 어떤 이름 하나를 호출하고 있다. 이미 용서받은, 잊혀진, 심지어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이름, 노무현이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김대중 시대를 완화된 신자유주의로, 노무현 시대를 강화된 신자유주의로 규정한다. 두 시대를 거쳐오면서 건설 미학이 강화됐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노무현과 이명박 정권은 정책적으로 거의 비슷하다. 진보세력으로 분류됐던 강금실은 서울시장 선거 때 한강 하구 개발을 얘기했고, 정동영은 새만금 개발을 떠들었으며, 손학규는 경기도의 전면적 개발 붐을 주도했다. 우석훈은 노무현 지지세력 중 최악의 인물로 미학적 고민을 해야 할 임무를 방기해버린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들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아예 한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노무현을 꼽고, 노무현 정권의 기반이 극우민족주의와 맞닿아 있었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정치·경제의 새로운 국면들을 이명박 대통령의 개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이명박 정권에 대한 과소평가다. 우석훈의 두 책은 한국의 불도저 정신과 제국주의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우리 사회를 묵시록으로 이끄는 힘의 봉인을 푸는 과정이었다. 이 힘의 해체를 위해선 이명박 개인의 독특한 인성만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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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쇠고기 재협상, 해법을 찾자 / 우석훈
야!한국사회
 
 
한겨레  
 








 

» 우석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세네갈 대통령 셍고르라는 이름을 내가 기억하는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공항로 옆에서 이름 없이 깃발을 흔들도록 동원된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6년 동안 수없이 공항로에서 깃발을 흔들었고, 그렇게 전두환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전두환은 학살 위에 세운 내치의 불안을 외치로 없애려 꽤나 노력했고, 결국 88 올림픽으로 국민의 눈을 돌리는 데 성공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내치를 하기도 전에 외치에서 실패하고, 100일도 지나기 전에 실패한 외치로 내치가 통치 불능 상태로 내몰려서, 협약·조약, 그런 급도 아닌 작은 ‘양해각서’ 하나의 실패로 중·고등학생들로 하여금 “이명박,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팻말을 들게 만드는 상황에 이르렀다. 외치 실패로 내치가 어려워진 대표적인 사례다.

기술적으로만 검토해 보자. 고시 시행 이전 정부에는 선택사항, 즉 외교적 옵션이 많았는데, 이제 고시 시행으로 그 선택권이 엄청나게 좁아졌다. 고시 시행 전에는 기다리면 미국이 급한 경우였는데, 이제 고시가 시행돼 미국은 급할 게 없고, 정부만 급하게 됐다. 물론 급하다는 것도 못 느끼는 것 같다. ‘외교치’라는 일본 외교가의 소문대로, 외치로 풀어야 할 문제를 내치로 풀려고 하니, 전국의 쇠고기 쓰는 식당과 급식들을 단속해야 하고, 행정비용이 추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게 되었다. 불가능할 것이다. 환경 용어로 표현하면, ‘청정 생산’으로 가능할 것을 ‘종말처리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행정비용이 엄청나게 늘어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오염 배출원을 못 잡으면 나중에 단속지역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대기오염·수질오염의 경우와 똑같다.

자, 이 문제를 순리대로 풀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냉정하지만 미국은 우리에게 참고사항이 아니다. 타이슨 푸드를 비롯해 미국 축산업을 좌우하는 다국적 기업과 한국의 축산업은 어차피 규모와 방식이 다르기에, 소규모 축산의 눈으로 봐야만 한다. 흐름상으로는 유럽이나 일본이나 ‘대량 생산’에서 ‘식품 안전’ 그리고 ‘윤리 축산’ 쪽으로 넘어가는 중이고,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들이 이렇게 한다. 당연한 것이, 유럽도 일본도 자국의 축산농이 카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 대통령만 모른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규모화가 아니라 ‘내실화’ 축산을 3단계로 나누면, 한국의 축산 정책은 지금 0단계에 있다. 1단계는 국제수역사무국(OIE) 가입, 2단계는 안전 축산, 3단계는 윤리 축산 단계인데, 스웨덴이 미국 소를 3단계 방식으로 막고 있다. 일본은 2단계 정도가 있다. 민망하게도 우리는 0단계다. 축산 정책이라는 내치에서 지난 10년 동안 사실 우리는 한 게 없다. 유럽이나 일본 방식이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동등성의 원칙’, 곧 국내 축산업계와 수입업계에 같은 기준을 제시하면 된다.

국내 쇠고기 관리를 전수 조사, 안전 축산, 유기 축산, 윤리 축산 등으로 단계를 높여 가면서 국내 업자 보호와 안전한 쇠고기 수입이라는 목표를 충족하면, 세계무역기구에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재협상도 하고 기준도 높일 수 있다. 그 끝까지 가면 한우 수출도 가능하다. 그걸 하란 말이다. 외치로 실패하여 내치에서 식물이 된 정권, 내치에서 정책 전환을 해서 외치도 성공하란 말이다. 아니면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된다.


우석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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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블로거들, 도서 매출 ‘좌지우지’
독자 리뷰, 평단 보다 파급력 커 새 권력 부상
출판사들 판매부수 늘자 ‘마케팅 활용’ 경쟁




20080707002168


  • 전통적으로 소극적인 수용자에 머물렀던 독자들이 문학·출판 시장을 움직이는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터넷 스타 블로거들이 그 중심세력. 이들이 블로그에 올린 리뷰는 그동안 도서 마케팅의 근간이었던 전문가들의 서평과 출판사의 광고에 버금갈 만큼 도서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추세다. 이 같은 흐름을 타고 최근 인터넷서점 알라딘은 블로거들이 뽑는 ‘블로거 문학대상’을 만드는가 하면, 출판사들은 블로거들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문적 지성의 마당인 출판 분야까지도 전문가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는 형국이다.


    ◆스타 블로거들의 파급력=소설가 김연수씨는 스타 블로거들의 지원을 받는 대표적 작가.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을 받은 김씨의 작품은 평단의 극찬에도 잘 팔리지 않았다. 지난해 말 출간한 신작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초판 발행도 5000부에 머물렀다. 하지만 ‘readersu’ ‘진달래’ ‘선인장’ 등 스타 블로거들의 호평을 받은 김씨의 소설은 꾸준히 팔려 현재 5쇄를 찍고 2만3000여부가 판매됐다.

    출간시기와 판매량이 비슷한 김영하의 ‘퀴즈쇼’와 비교하면 블로거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총 2만5000부가량 팔린 ‘퀴즈쇼’가 출간 초반에 집중적으로 판매된 반면, ‘네가 누구든…’은 ‘망’을 타고 점진적으로 저변을 넓혀 2만부를 넘어섰다. 김씨의 전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2001), ‘꾿빠이, 이상’(2001) 등이 더불어 판매가 늘어나는 기현상도 블로거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씨는 29일 마감하는 ‘제1회 블로거 문학대상’ 투표에서도 두각을 보인다. 김씨의 장편 ‘네가 누구든…’은 7일 현재 총 211표를 얻어 1위 ‘하악하악’(214표)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이외수의 ‘하악하악’이 오프라인 종합 베스트셀러(교보문고 6월 넷째주)에서 1위에 오른 반면, ‘네가 누구든…’은 순위권에 없음에도 온라인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평론가가 심사하고 수여하는 문학상은 많지만, 내 마음엔 들지 않는다?”란 슬로건을 내걸고 마련한 제1회 블로거 문학대상은 블로거들이 29일까지 투표해 독자들만의 명작을 뽑는다.

    ◆블로거를 의식한 마케팅=블로거들의 활약은 출판사 마케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출판사들이 책을 출간하기 전에 스타 블로거들에게 미리 보내는 방식은 이제 일반화됐다. 지난 3월 창비가 출간한 청소년 소설 ‘완득이’는 출시 전 미리 블로거들의 리뷰를 받았다. 김려령의 ‘완득이’는 현재 베스트셀러 국내소설 부문 5위에 올라 있고, 블로거 문학대상 ‘우리소설’ 부문에서도 3위(201표)에 올라 있다.

    판매수익의 일부를 블로거에게 떼어주는 마케팅도 있다. 인터넷 서점 예스24는 블로거 리뷰를 통해 책을 구입하면 해당 블로거에게 판매금액의 3%를 적립해준다. ‘완득이’와 ‘통찰의 기술’의 경우 한 블로거의 리뷰를 통해 5일 만에 각 8권과 20권이 팔렸다. 김정희 커뮤니티팀 파트장은 “블로거들의 연결망은 촘촘해서 단발적인 대중매체 광고와 달리 영향력이 지속적”이라면서 “블로거 리뷰를 통해 ‘연애소설 읽는 노인’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붉은 손가락’ 등 출간 당시 조명받지 못했던 문학서들이 재판매되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 대표적인 문학출판사 ‘문학동네’의 강태형 대표는 “스타 블로거가 올린 리뷰에 책 1만∼2만권이 움직이는 시대”라면서 “언론·출판업 종사자가 아닌 평범한 독자가 출판 시장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현상은 각별히 주목할 만한 새로운 흐름”이라고 분석했다.

    심재천 기자 jay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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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외친 시인을 짓밟다니
 
 
 
한겨레 최재봉 기자
 








 

»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전경1이 진압봉으로 그의 팔을 쳐서 쓰러뜨린다. 꿈틀거리며 일어서려는 그를 뒤따라 오던 전경2가 방패로 어깨와 등을 찍어 다시 쓰러뜨린다. 앉은 채로 뒷걸음질쳐 도망가는 그에게 이번에는 전경3이 다가와 수평으로 눕힌 방패로 가슴과 관자놀이를 힘껏 가격한다.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져 신음하는 그에게 전경4와 전경5가 욕을 퍼붓고 손가락질을 하며 지나간다….

인터넷 한겨레(hani.co.kr)의 동영상 뉴스 ‘경찰 ‘무차별 폭력’ <한겨레> 생방송 요약’의 한 장면이다. 6월 29일 시청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권력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야만적인 폭력에 소름이 끼치고 치가 떨린다.

피해자는 당시 과격시위를 벌이던 중이 아니었다.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그는 시민들에게 고립되어 있던 전투경찰 한 명을 구출해 주었다고 했다. 자신이 평화주의자이며 시인이라고 안심시키자 전투경찰은 자기도 대학에 다니다가 입대했노라면서 울먹이더라고 했다. 그가 떠나고 난 뒤 길 한복판에서 열 명 정도의 전경이 진압대원들에게 쫓기던 시민들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비폭력을 외치며 다가서다가 전경이 벗어던진 철모에 얼굴을 맞고 코에서 피를 흘리며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지하철 출구 쪽으로 비틀거리며 도망치던 그가 시위대를 쫓던 전경들의 먹이가 된 것이다.

이 불운한 피해자가 다름 아니라 시인 함민복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퍼뜩 든 생각은 ‘왜 하필이면 함민복인가?’라는 것이었다. 함민복이 누구인가. ‘한국판 <우동 한그릇>’이라고나 할 시 <눈물은 왜 짠가>의 시인이 아니겠는가. 설렁탕 한 그릇을 두고 가난한 모자와 배려심 깊은 식당 주인이 펼치는 감동의 무언극에 코끝이 찡해졌던 이들이 많을 것이다(혹시 그에게 진압봉과 방패를 휘두른 전경들 중에도 있지 않을까). 사십대도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고 강화의 버려진 집에서 시만 쓰고 사는 ‘천상 시인’이 바로 함민복이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긍정적인 밥>)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경계하는 사람,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뻘>)며 “말랑말랑한 힘”을 예찬한 이 평화주의자에게 야수적인 폭력이 웬말이란 말인가.

현재 그는 왼쪽 관자놀이 부분이 심하게 부은데다 정신도 혼미한 상태이고, 오른쪽 어깨가 결리고 허리 통증도 심해 거동이 불편한 처지라고 한다. 그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전경들을 고발하고자 피 묻은 셔츠와 시청 응급진료막사에서 찍은 사진, 인터넷 한겨레 동영상 등을 피해자 진술서와 함께 제출해 놓았다. 시인으로 하여금 시 대신 피해자 진술서를 쓰게 만드는 사회란 도대체 어떤 사회일까.




‘꽃의 시위’(flower movement)란 말이 있다. 무력한 시인을 짐승처럼 짓밟은 저들에게 그가 쓴 시 한 편을 시위 삼아 들려 주고 싶다.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봄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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