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87년 이후 지식인상의 변화
입력: 2007년 04월 24일 17:29:28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지식인상은 저항적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가 역설한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는 명제는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은 80년대 대학 신입생의 필독도서였고, 그들을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는 안내서였다.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자각하는 것이 사회와 현실로 나아가는 초대장이었던 셈이다.
1971년 전태일 추모기도회에서 대중을 상대로 구국강연을 펼치고 있는 함석헌 선생.

-탈근대화, 천대받는 ‘진실’-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강연회에서 종종 지식인과 민중의 관계를 칼날과 칼등의 관계로 비유하곤 했는데,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지식인들은 비유 그대로 ‘민중의 칼날’이었다. 당시의 현실에서 지식인은 근대적 합리성과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많이 교육받은 존재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담지자로 기능했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이들에 의해 만질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실재로 감지됐다. 민중의 계몽가이자 선구자로서 지식인은 사회의 각 영역에 큰 자취를 남겼다. 시대의 선생으로 불린 함석헌과 리영희의 저작들, 장준하의 선구적 활동, 백낙청과 김현이 주도한 비평의식의 고도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탈춤과 같은 민중 문화의 재발견 등은 그러한 현상의 몇몇 예에 불과하다. 70, 80년대에 걸쳐 지식인은 민주화 투쟁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린 교사였으며, 특정한 의미에서 ‘민족’과 ‘문화’의 창안자이기도 했다.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75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선생.
하지만 이제 이런 일들은 추억 속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굳이 푸코나 리오타르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이 현저하게 추락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하게 설명돼야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같은 세계사적 전환이 바탕을 이루며 거기에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천이 조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밑바닥에 탈근대적 현실이 있다. 근대 극복을 목표로 출발한 탈근대주의는 근대가 창출한 각종 제도, 가치, 개념, 역사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데 일조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근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전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현실과 진실의 관계가 흔들렸다. 과거에는 현실을 깊게 파고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진실’이라는 단어가 천대받은 적이 있었던가?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현·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탈근대주의가 가르친 진실이다.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이거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인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

여기에 사회주의의 붕괴로 대표되는 이념의 붕괴는 한국 지식인상의 변화에서 기억할만한 사건이다. 박노해나 조정환, 이진경처럼 이 무렵 새로 등장한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채 선배 세대인 4·19세대, 유신세대와 자신들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시작되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러한 구분법의 의미도 모호해졌다. 이념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사상의 해방을 몰고 왔다. 분수처럼 사상이 흩어졌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급진좌파에서 뉴라이트로, 헤겔에서 들뢰즈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오늘날 한국 지식인 사회는 사상의 백가쟁명 시대를 새롭게 관통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상의 대변인으로서, 혹은 안내자로서 지식인의 사회적 입지는 현저하게 약화됐다.

아마도 지식인을 날것의 현실로 끌어내린 직접적인 계기는 외환위기일 것이다. 자살이 속출하고 노숙자로 넘쳐나는 거리가 매일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신지식인’이다. 현재까지 3316명이 선정된 것으로 알려진 신지식인은 외환위기 속에서 경제적 가치창출이라는 일반적 목표에 국민을 동원하려는 상징조작이었다. 신지식인은 한편으로는 기존 지식인의 권위에 기대면서도 수량화, 물질화, 공유화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지식인의 ‘유용성’에 강력한 의문부호를 새겨놓았다.

-IMF뒤 평등에서 양극화로-

외환위기의 극복이 신자유주의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귀결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었다. 신지식인은 이제 하나의 해프닝이 되고 말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필연이었다. 자본의 거칠 것 없는 자유와 제국으로의 수렴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담론의 중추를 민주주의로부터 돈으로, 평등과 인권으로부터 양극화와 개방으로 옮겨놓았다. 황우석이 찬양되던 시절, 각종 뉴스는 앞으로 벌어들일 로열티를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지식인, 아니 환산되어서는 안 되는 지식인이 설 자리는 없다. 또한 황우석 사태는 지식인의 보루였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마지막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연이어 고위공직자나 총장 등의 표절사건이 불거지면서 ‘지식인의 종언’은 엉뚱한 방식으로 현실화됐다. 이것을 ‘관행’이라 하던데, 그렇다면 그러한 관행으로 지탱돼 온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을 누가 존경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썩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란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실 민주화라는 지상과제와 총체성을 강조하는 거대담론의 존재는 사상과 이론의 성찰을 억압해왔다. 이로부터 해방된 지식인들은 낡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근본을 파고들었다. 근대성, 젠더, 민족주의, 기억, 일상권력 등이 비판목록에 오르면서 전선(戰線)은 갈라졌고 심화됐다. 문제는 ‘부분’에 대한 비판이 ‘전체’로서 존재하는 권력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하는가이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지식인의 기능화 양상은 지식인 자신이 부분성에 매달려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최근에 지식인과 관계된 논의가 여전히 하나로 존재하는 ‘국가’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가 애국주의의 광풍을 등에 업고 등장·확산됐던 상황, 현재 진보진영이나 보수진영 모두 ‘선진(화)’ 담론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국가정책 마련에 부심하는 경향, ‘인문학의 위기’론이 국가의 지원 요구로 귀결되는 풍경, 학술진흥재단이라는 국가기관이 학문의 기반을 좌우하는 현실 등은 지식인의 국가종속성 내지는 국가지향성을 강하게 예시한다.

이런 상황은 지식인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권력의 민주성 문제만이 초점일 수 없다. 많은 논의들이 국가로 수렴될 때 그로 인해 가려지는 부분들이 상당하며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지식인의 질문과 대답을 기다리는 곳일 수 있다. 따라서 질문은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의 국가에 대해 얼마나 지혜롭게 대응하고 있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권력은 민주화되었을지언정 지식인의 국가론이 지혜로워졌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 국가와 지식인의 관계 설정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그간 일어난 지식인상의 변화 중 ‘독립적 지식인’의 확산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강준만, 박노자, 고미숙, 이정우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탈근대적 사유에 기반을 두면서 탈권위주의, 다원화 그리고 ‘대중’과의 직접소통을 지향한다. 여러 방면에서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과 다른 차원을 선보이는 이들의 활동은 향후 지식인상의 갱신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과 다른 궤도에 속하지만 공병호나 이덕일처럼 직접 대중을 상대로 한 자유저술가의 확산도 현 단계 지식인상의 또 다른 변모 양상을 보여준다.

-새로 떠오르는 ‘대중지성’-

최근에 ‘대중지성’ 개념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도 지식인의 몰락과 대중의 등장이라는 현상과 연관이 깊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자율주의에 기반한 ‘다중네트워크’가 주도적으로 제창하고 있는 이 개념은 지식인의 위계적, 엘리트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대중을 근원에 두는 새로운 지식 창출·향유 방식을 겨냥한다. ‘대중지성’은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역할이 한계에 봉착하고,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이자 창조자로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과 변별되는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사회의 물질적, 구조적 변화를 빠트리고 지식인상의 변화를 말할 수 없다. 서울대 입학생 중 상류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가는 현실을 덮어둔 채, 소득격차가 학력격차로 이어지고 학력격차가 신분고착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말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박사가 최고고 학연과 인맥이 우선시되는 문제를 괄호치고 지식인상을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지식인’은 되새겨져야 할 화두이다. 과거에도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

〈박헌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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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1. 2007년 한국 지식인의 풍경
입력: 2007년 04월 22일 17:26:35
 
“지식인의 몰락 또는 위기 담론에 동의하는가.” 특별취재팀이 지식인들에게 던진 물음이다. 한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건 그 이전 지식인이 큰 힘을 쓰던 시절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건데, 과연 그랬던 적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김진애(도시건축가)는 “‘합리적 대안 생산자’ ‘대승적 소통자’로서의 지식인 역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진애는 “‘지식인의 ‘위기’니 ‘몰락’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고 말했다.
2002년 12월22일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지식인 격려 다과회’에서 우수 신지식인들을 표창하고 있다. 국민의정부가 제2의건국 캠페인의 일환으로 신지식인 찾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관주도의 지식 사회 개편과 교체를 예고한 서막으로 해석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을 맞아 등장하고 있는 지식인의 죽음 논쟁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관 주도로 전 국민을 직업과 지위에 관계없이 신지식인으로 만들겠다는 김대중 정부의 발상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개편과 교체를 예고한 서막이었다”고 말한다. 98년 12월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12차 경제대책조정회의. 김태동 정책기획수석이 학력 위주의 지식인 개념을 독창성·능동성 위주로 확장시킨 ‘신지식인상’을 보고했다. 이듬해 초 신지식인 찾기 운동이 ‘제2의 건국’ 캠페인과 맞물려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용가리’로 272만달러 수출 계약을 성사시킨 심형래씨가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었다. 그는 신지식인 광고에 나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당신도 신지식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부가가치 창출의 다른 말이었다. 졸지에 ‘구지식인’으로 몰린 지식인들이 반발했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지식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엄격한 비판정신과 사회적 책임감에 있을 것이다. 신지식인은 이러한 지식인의 근본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한다(경향신문 99년 4월29일자 칼럼)”고 했다.

지식인은 이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가 되었다.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고 있다. 권력에 위험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키워지고 있다. 교육부 정식 명칭은 교육‘인적자원부’이다. 사람을 어떻게 효율적인 생산 수단으로 만드는가를 고민한다는 뜻이다. 교육부가 2005년 대통령 보고에서 “다양화·특성화된 ‘시장반응형’ 인력을 양성”하고 “지식기반 경제의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산학연 협력 활성화’를 통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시장반응형 인적 자원? 이들이 바로 새 세대의 지식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우리 사회가 쉽게 이런 새 세대 지식인들에게 압도당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의심스러워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학자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한 교수가 말한다. “대학 교수에게 중요한 게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연구 업적이고 또 하나는 연구비를 따오는 거예요.” 그는 자기 학교에서 우수 교수 평가 기준은 ‘연구비 수령 건수와 액수’라고 전했다. 이런 현상은 학계의 ‘빅브라더’ 한국학술진흥재단과 관련이 있다. 이른바 ‘학진’이란 약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연구 지원 기관은 학계의 거대한 지배자다. 학진의 힘은 연간 1조원 가량을 쓴다는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관의 연구비 지원을 받으려 경쟁하는 체제, 이것이 한국 학술의 레짐(regime·체제)이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온 김모씨. “전 에세이식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학진 체제 아래서는 빛을 볼 수 없어요. 학진은 정형화된 논문식 글쓰기밖에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어진 김씨의 말. “이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 마감 맞추는 걸 가리키는 말이에요. 좋은 평가로 연구비 지원을 받아 먹고 사는 ‘논문 작성 노동자’만 수없이 양상되는 거죠.” 그는 “학진 체제 아래 지식인들이 신음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계간지 편집장은 “학술지 또는 계간지에서 그야말로 ‘재미있는’ 글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담론 논쟁을 주도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졌다. 모두 학진 등재지에 딱딱하고 재미없는, 심지어는 같은 전공자들도 안 읽어줄 글을 쓰느라 밤 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틀에 박힌 지식을 재생산하는 데는 학진 체제가 유용할지 몰라도, 한 시대를 뛰어 넘는 창의적인 저술, 그 저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라는 지식사회의 풍경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느 대학 교수는 “예전에는 권력이 정부에 반대되는 글쓰기를 통제하는 정도였다면 지금 학진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식인들의 글쓰기를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문 성과? 최근 한 문화재단에서는 학술상 심사를 벌였다. 심사위원 5명 중 2명이 추천대상을 내놓지 않았다. ‘사회개혁·발전과 학문업적을 연결시키는 저작’이 수상 요건이었지만 적격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다수 학술상 주최측이 수상 요건 미흡 때문에 수상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논문의 양은 갈수록 늘지만 ‘성과’라 할만한 결과물은 갈수록 줄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교수들은 이런 체제에서 행복할까?

요즘 교수들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사귀는 데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어느 방송 진행자는 “최근 모 대선 주자 캠프 소속의 지식인이 참여한 정치 관련 토론을 진행하다, 그 지식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걸 봤다”고 말했다. 이런 살기어린 토론은 교수와 정치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잘 나가는 대선 주자 캠프에 지식인 수백명이 줄서 있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니다. 어느 대학 교수는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3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①정·관계에 진출하려면 대학에 사표를 내야 한다. ②대학에 있으면서 특정 정치 집단의 브레인이 되면 그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 ③각종 위원회에 참여한 경우 그 활동을 통해 얻은 금전적 수입과 활동내역을 대학에 보고해야 한다.

부수입 올리고 영향력 행사하며 재미는 다 보고, 학생 가르치기는 소홀히 하는데도 ‘업적평가’ 점수를 덤으로 받는 이들이 오늘날 대표적인 지식인의 한 모습이다. 이렇게 정치권력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양 극단 사이에 방황해 온 것이 한국 지식인 사회이다.

기성 지식인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 메카니즘이 고장난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더 이상 지식인은 막걸리 집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강의실에서의 논쟁을 통해, 감옥의 사색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지식인은 미국이라는 거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은 지난달 말 미국을 제외하고 올해 가장 많은 학부 합격생을 배출한 국가는 한국이라고 밝혔다. 35명이다. 불과 두자릿수라서 적다고 여겨진다면, 미국 이민세관국(ICE)의 최근 발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ICE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국 내 외국인 학생 중 한국 출신이 9만3728명으로 전체(63만998명)의 14.9%를 차지, 국가별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미국 고등교육전문 주간신문 ‘고등교육 연감(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에 따르면 99년에서 2003년 사이 미국 박사 학위 취득자의 학부를 조사한 결과, 서울대가 1655명으로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의 주권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지식인은 ‘경제권력’과도 잘 어울린다.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지 못해 안달이고, 산학협동은 ‘산학일체’로 진화중이며 대기업 연구 용역비를 받는 상당수 교수들은 재벌개혁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

〈특별취재팀=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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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풍경]지방 출판사, 파이팅!

부산의 산지니출판사 강수걸(40) 대표는 2005년 5월 일본 고단샤(講談社)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고향에 출판사를 차린 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서울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출판사가 어떻게 우리 고단샤의 책을 번역 출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번역 출판 건은 끝내 무산됐다.

사실 강 대표도 서울에 출판사를 차릴까 생각했었다. 그래도 고향의 출판문화를 위해 부산에 터를 잡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었는데,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 것이었다.

2년이 흘렀다. 산지니는 단행본 25권을 출간했고 문예잡지도 내면서 건실한 지방 출판사로 자리 잡았다. 최근엔 지역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필자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생태 전문 출판사인 그물코는 충남 홍성군의 한적한 시골에 있다. 직원은 장은성(37) 대표 한 명뿐이다.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주말이면 가족이 있는 서울로 올라온다.

그가 서울에서 홍성으로 출판사를 옮긴 것은 2004년 8월. 출판사를 차린 지 2년 만이었다. 원래부터 흙냄새가 그리웠던 데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비용 절감 차원에서 친한 후배가 있는 홍성을 택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다행히 부인은 반대하지 않았다. 산지니의 강 대표보다 더 어려운 결단이었을 것이다. 장 대표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사람들이 이해할지 모르지만 흙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고, 농사짓는 사람들과 같이 지내서 좋습니다. 출판사 운영비용도 줄일 수 있고. 도시의 어느 조그만 건물에 박혀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 출판사를 알아주기나 하겠습니까. 홍성으로 내려오면서 오히려 더 유명해진 것 같습니다.”

홍성의 자연 속에서 1년 푹 쉬고 2005년부터 책을 내기 시작했다. 홍성에서 10여 권 생태 관련 책을 냈고 대부분 스테디셀러여서 여건이 많이 좋아졌다.

그물코의 장 대표는 ‘잘나가는’ 대형 출판사인 민음사 장은수 대표의 동생이다. 동생을 출판계에 입문시킨 형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서울에선 상업 출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고 싶은 길을 가라고 했죠. 서울로 돌아오고픈 유혹도 있을 텐데. 은성이가 홍성 가서 똑똑해졌더군요. 출판사의 성격과 규모에 맞게 장점들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요즘엔 서울에서도 좋은 필자들이 동생 회사에서 책을 내고 싶다고 하니 제가 더 기분이 좋습니다.”

문화로서의 책보다는 상품으로서의 책이 더 강조되는 이 시대. 지방에서 혹은 혼자서 출판사를 운영한다는 건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없으면 우리의 책세상은 풍요로워질 수 없다.

“서울과 지방이 차이가 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말아 주세요.”

산지니 강 대표와 그물코 장 대표의 이구동성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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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매일 어부를 부른다
동해로 떠나자
한겨레 정상영 기자
» 죽변항은 이른 새벽이면 바다와 틈끼고 떠오르는 해돋이가 장관으로, 새해 첫날이면 일출과 대게를 즐기려고 많은 인파가 몰린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동해 바다는 더욱 넓고 짙푸르다. 7번 국도를 따라 동해 바다로 떠난다. 오른쪽으로 망망한 쪽빛 바다를 바라보고 왼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끼고 달리다보면 어느새 눈과 마음이 풍성해진다. 한적한 포구마다 명태와 오징어 말리기가 한창이고 은빛 해변에는 갈매기떼들 노니는 동해안을 톺아가는 여행은 아무 목적지 없이 헤매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 7번국도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신경림 시인의 ‘동해바다-후포에서’)

여행전문가이자 국내 최고의 음식칼럼니스트 김순경씨와 강원도청 문화관광과, 경북도청 문화관광과의 추전을 받아 동해안 별미여행을 떠난다.

고성군 건봉사와 거진항 도치탕

청정도량 건봉사서 차 한잔
거진항 도치탕에 소주 한잔

» 건봉사
부산 영도대교에서 시작돼 함경도 온성까지 이어지는 동해안 7번 국도가 끊겨버린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의 금강산 초입에서 천년사찰을 만난다. 신라 법흥왕 때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의 승병 봉기처였던 이 절은 설악산 신흥사, 백담사 등 9개 말사를 거느렸던 한국 4대 사찰 중 한 곳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거의 소실돼 최근에 복원되었다. 특히 건봉사는 신라 자장율사가 당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와 무지개 모양의 능파교, 바라밀 문양의 돌기둥, 불이문 등이 유명한 청정도량이다.

예부터 명태잡이로 이름난 거진항을 가면 곳곳에서 명태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올해도 2월에 명태 축제를 열었으나 몇년새 앞 바다에서 명태가 거의 나지 않고 일본 근해까지 가서 명태잡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민들의 표정이 어둡다. 이곳 사람들은 요즘철에 명태보다는 오히려 겨울철 별미로 1~2월에 알이 꽉 찬 도치탕을 별미로 친다. 도치는 생김새가 복어와 비슷한데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얇은 겉껍질을 벗겨내 속껍질째 썰어서 초고추장에 찍어 회로 먹거나 묵은 김치를 넣어서 알과 함께 탕으로 끓여 먹는다. 또 도치알에 간수(소금물)를 넣어 이틀 정도 굳게 한 뒤 쪄서 알찜으로 먹기도 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별미다. 거진항 주변에는 24년째 생태찌게와 도루매기탕을 전문으로 하는 함흥식당(033-682-1180) 등 횟집들이 많은데 도치회와 도치탕은 미리 주문해야 맛볼 수 있다.




속초 대조영 촬영지와 아바이순대

대조영 촬영지에 눈 즐겁고
순대 한접시에 입도 빙그레

» 오징어 순대
설악산의 사철 풍광과 동해의 푸른 바다가 잘 어우러진 동해안 최고의 관광도시 속초에 지난해 11월 대하드라마 <대조영>을 찍고있는 촬영장이 들어서 새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울산바위 아래 한화콘도의 2만7천여평 부지에 세워진 고구려성과 대조영 가옥, 연개소문 성채, 당나라 황궁, 측천무후의 후원 등 고구려 양식 52동과 당나라 양식 64동을 돌아보며 잃어버린 우리의 옛땅과 역사의 숨결을 만나볼 수 있다.

속초항(동명항)을 끼고 있는 속초시청쪽 바닷가에서 드라마 ‘가을동화’로 유명한 청호동 ‘아바이마을’을 만난다. 청초호와 바다로 둘러싸인 ‘아바이마을’은 한국전쟁 후 실향민들이 바닷가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속초시청 건너 동명항에 가면 갯배를 타고 줄을 당겨 움직여서 ‘아바이마을’로 들어가는 색다른 운치와 낭만을 즐길 수 있다. 함경도 피난민들의 마을답게 아바이마을과 동명항 일대에는 알싸한 함경도 회냉면과 가자미식해, 오징어순대 등 함경도 전통음식이 발달돼 있다. 아바이마을 입구의 진양횟집(033-635-9999)은 함경도 출신 이정해(76)·이영숙(53)씨 모녀가 2대에 걸쳐 고집스럽게 고향의 맛을 지키고 있는 이름난 맛집이다.

강릉시 선교장과 주문진항 생선구이

가는 곳곳 예향의 멋과 전통
연탄불에 갓 구운 오징어 별미

» 선교장
해마다 음력 5월이면 단오제로 유명한 강릉시는 고도의 멋과 전통이 살아있는 예향의 도시답게 오죽헌과 선교장, 객사문, 허난설헌 생가터 등 문화유적이 많다. 또한 경포8경으로 널리 알려진 경포대와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와 뮤직박스 등을 비롯해 라디오, 텔레비전, 자동차 등 소리와 관련된 5천여점의 소장품을 소장한 세계 최대의 사립오디오박물관인 참소리박물관 등 볼거리도 쏠쏠하다. 특히 선교장은 조선말기의 전형적인 사대부의 저택이다. 드라마 <황진이> 촬영장소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조선 말기의 전형적인 사대부의 저택으로 안채, 사랑채(열화당), 별당(동별당,서별당), 정각(활래정), 행랑채 등을 돌아다보면 조선 후기사대부의 삶이 저절로 떠오른다.

오징어잡이로 유명한 주문진항에는 올 겨울 때아닌 오징어 풍년이 들어 오징어를 값싸게 사려는 외지인들로 1월까지 북새통을 이뤘다. 지금은 물량이 눈에 띄게 줄었으나 아직도 오징어와 명태, 문어, 복어, 도루묵, 물곰 등 겨울철 해산물이 심심찮게 난다. 주문진항에 가면 애기오징어(오징어새끼)와 양미리, 도루묵 등을 연탄불에 구워서 파는 생선모듬구이 전문 충주네좌판 등 좌판 10여곳이 있다. 인근에 활어횟집들을 비롯해 장치찜 전문 월성식당과 물곰(곰치)탕 전문 파도식당(033-662-4140), 도루묵찌개와 도루묵구이 전문 마차식당 등에서 싱싱한 겨울 별미를 즐길 수 있다.

선교장 (033)648-5303.

울진군 죽변항과 울진대게

기암괴석 배경 해돋이 장관
담백한 대게, 뱃속이 아우성

» 대게찜
7번 국도를 따라 드라마 <모래시계>로 유명해진 정동진과 안인진을 거쳐 해돋이와 기암괴석이 절경인 추암해변 등을 뒤로 한채 남으로 내려오다 죽변면에서 죽변항을 만난다. 울진대게의 집산지와 드라마 ‘폭풍속으로’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죽변항은 이른 새벽이면 바다와 등대를 끼고 떠오르는 해돋이가 장관이다. 해마다 새해 첫날에는 해돋이를 맞이하면서 울진 대게를 즐기려는 이들로 붐빈다.

울진대게는 속살이 쫄깃쫄깃하고 담백해서 이웃 영덕대게와 함께 일찍이 궁중에 진상되어온 특산물이다. 죽변항 주변과 드라마 촬영이 이뤄진 방파제 안쪽 회센터에는 1번상가 강원도집(054-782-0842)를 비롯해 죽변 앞바다에서 잡은 신선한 생선회와 대게찜 및 대게탕 전문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이밖에 7번도로를 타고 영덕군 영해면과 강구항을 잇는 918번 지방도 등 간혹 마주치는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다시 7번 국도와 만나 포항시까지 내려가면 더 멋스런 동해안의 해안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이 길에서 구룡포의 일출은 빼놓을 수 없는 동해 여행길의 주요코스이다.

고성·속초·강릉·울진·포항/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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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랑 입이랑 ‘호젓한 행복’
서해로 떠나자
한겨레 정상영 기자
» 눈 내린 내소사의 풍경. 겨울 서해안 여행지로 손꼽을 수 있는 부안에서는 내소사 전나무 길의 운치를 즐긴 뒤 요즘 제철인 겨울 숭어를 맛볼 수 있다.

겨울색이 짙은 서해바다는 호젓한 멋이 있다. 해안선이 완만한 바다에는 아름다운 섬들이 떠있고 한겨울을 나는 철새 무리가 날마다 금빛 노을을 가르며 군무를 펼친다. 한국여행작가협회 유연태 회장과 충남도청 문화관광과, 전북도청 문화관광과의 추천을 받아 운치 있는 겨울바다를 밟으며 제철에 나는 별미를 찾아 서해안 여행을 떠난다.

서산 간월암과 새조개 샤브샤브
하루 두번씩 섬이 되는 간월암…새조개·어리굴밥 입에 ‘사르르’

» 서산 간월암

서산간척지로 이름난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는 하루 두번씩 밀물 때마다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인 간월암이 있다. 조선왕조 도읍을 서울로 정한 무학대사가 고려 말에 처음 터를 잡은 간월암은 일출과 일몰을 다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수많은 가창오리떼의 군무 속에 안면도쪽으로 지는 일몰은 그림 같다.

요즘 간월도 포구에는 태조 이성계에게 진상하였다는 어리굴로 지은 굴밥과 한창 서해 앞바다에서 잡히는 새조개를 맛보러 미식가들이 붐빈다. 특히 속살이 새의 부리를 닮아 이름이 붙여진 새조개는 살집이 크면서도 부드러워 통째로 물에 데쳐 먹거나 구워 먹는다. 포구 주변 포장집에 주로 끓는 물에 살짝 데치는 ‘새조개 샤브샤브’를 많이 내는데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입안 가득 연하게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조개를 데쳐 먹은 야채국물에는 칼국수나 라면 사리를 넣어 끓여 먹어야 제대로 새조개 맛을 본다고 할 수 있다. 또 작고 물날개가 많은 간월도 특산 굴과 대추, 호두 등 여러가지 곡물로 밥을 지은 영양굴밥도 간월도에서 맛보는 별미음식이다.

포구에는 전망좋은 횟집(041-662-4464)을 비롯해 새조개 샤브샤브와 영양굴밥을 내놓는 전문식당들이 즐비하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홍성 나들목에서 빠져 나가 서산 방조제쪽으로 15분 정도를 달리면 간월도에 닿는다. 문의 서산시 문화관광과 (041)660-2499.




» 새조개 샤브샤브

» 영양굴밥

태안 천리포수목원과 간재미회
남매화·벚꽃 봄맞이 한창…뼈째먹는 간재미 ‘오도독’

» 천리포수목원

» 만리포해수욕장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한 천리포해수욕장 뒷편에는 2000년 아시아 최초로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정받은 천리포수목원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 귀화 미국인 고 민병갈(칼 페리스 밀러) 전 이사장이 1962년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천리포해변에 3천평을 사들여 수목원 조성을 시작했다. 현재는 18만평 부지에 60여개국으로부터 수집된 목련류 410종, 동백나무 320종, 단풍나무 200종 등 총 1만300종이 넘는 수목을 보유한 수목원으로 가꿔졌다.

주말마다 일반인들에게 개방돼 탐방로를 따라 남매화, 벚꽃, 마호니아 등 겨울에 피는 20여가지 식물을 감상하며 여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또 천리포수목원 부근에는 해질녘마다 태안 8경 중의 하나인 만리포해수욕장과 천리포해수욕장에서 은빛 모래밭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의 황홀경과 만날 수 있다.

천리포해변에는 맛볼 수 있는 서해안의 겨울 별미로는 일명 ‘갱개미’로도 불리는 간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간재미는 생김새가 가오리와 비슷한데 껍질을 벗긴 뒤 뼈째로 썰어 초고추장을 찍어 먹는데 오들오들하고 담백한 맛이 겨울철 진미로 칠 만큼 일품이다. 또 고추장에 미나리, 오이 등을 썰어넣고 초고추장으로 발갛게 버무린 간재미무침과 양념을 한 간재미 한 마리를 통째로 쪄내는 간재미찜도 겨울철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천리포해수욕장에는 간재미무침과 간재미찜, 간재미회 등 간재미 전문식당 천리포휴게소횟집(041-672-9170)이 입소문난 별미집이다.

서해안고속도로로 서산 나들목을 빠져나와 태안(만리포 방면)으로 가서 석장골 삼거리를 거쳐 의항리를 지나면 천리포수목원과 천리포해수욕장이 나온다. 문의 태안군 문화관광과 (041)670-2544. 천리포수목원 (041)672-9310.

» 간재미회

부안군 내소사와 격포항 동숭어
눈 덮인 전나무 숲길 운치…묵은지 싼 설숭어 감칠맛

» 내소사 전나무 깊
‘서해바다/ 내소사 푸른 앞바다에/ 꽃산 하나 나타났네/ 달려가도 달려가도/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또 산을 넘어/ 아무리 달려가도/ 저 꽃산 눈 감고/ 둥둥 떠가다/ 그 꽃산 가라앉더니/ 꽃잎 하나 떴네/ 꽃산 잃고/ 꿈 깨었네’(김용택 ‘내소사 가는 길’)

근대의 선지식인 해안대종사가 출가하고 설법한 도량인 부안군 내소사는 대웅전의 소박한 꽃살무늬 문짝과 절 입구의 울창한 전나무 숲길로 더 알려져 있다. 특히 눈이 내리는 겨울철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향기가 가득한 숲길을 걸어 눈에 폭 파묻힌 내소사 천왕문으로 접어드는 겨울 숲길은 어느 때보다 운치있다.

부안에서는 서해 청정해역의 감칠 맛나는 수산물을 즐길 수 있는데 요즘같이 겨울철에는 숭어가 제철이다. 특히 예부터 격포항은 추운 겨울철에 바다 밑 뻘밭에서 먹이를 찾아 먹고 사는 씨알 좋은 숭어가 많이 잡히는 곳이다. 첫 눈이 내린 뒤 잡은 참숭어 또는 설숭어가 제 맛을 낸다고 한다. 격포항의 해변촌(063-581-5740)은 설숭어 전문요리집으로 설숭어를 회로 떠서 부안의 명물인 김에 갖은 양념과 버무려 묵은지로 돌돌 말아 내놓는 설숭어와 김치말이가 겨울철 별미 음식이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줄포 나들목을 나와 보안사거리(영전검문소)에서 좌회전한 뒤 곰소 방향으로 가면 내소사 이정표가 나온다. 문의 부안군 문화관광과 (063)580-4737~9.

» 설숭어

김제시 심포항과 백합
망망대해 바라보는 망해사…임금님 진상품 백합에 군침

» 백합

김제시 진봉면에는 부안의 계화도와 더불어 국내 최대 백합산지로 꼽히는 심포개펄과 아담한 심포항이 자리잡고 있다. 전북 사람들 사이에서 일몰과 바다낚시의 명소로 입소문난 심포항에는 몇해 전 횟집단지가 들어서면서 주말마다 물좋은 생선회를 즐기려는 이들로 북적인다. 특히 심포개펄에는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되었다는 자연산 백합과 대나무처럼 생긴 죽합이 많이 나서 식도락가들이 즐겨 찾는다.

심포항 근처에는 서해의 고군산 열도를 바라보며 깎아지른 절벽 위에 위태롭게 자리잡고 있는 망해사가 있다. 백제 의자왕 때인 642년에 부설거사가 지은 고찰답지 않게 규모가 초라한 편이지만 절 이름 그대로 서해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맞이하는 일몰이 빼어나다. 망해사 뒷편 진봉산 전망대에 오르면 드넓은 만경평야와 서해바다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심포항 주변에는 서해 앞바다에서 갓 잡아올린 생선횟감과 백합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포구를 따라 이어져 있는데 연서활어횟집(063-543-1900)이 백합회와 백합탕, 죽합구이 전문으로 소문났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가다 서김제 나들목으로 빠져나와 우회전해서 29번 국도를 따라 만경여고 사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702번 지방도로로 진봉면으로 가면 심포항과 망해사가 나온다. 문의 김제시 문화관광과 (063)540-7286.

서산 태안(충남)·부안 김제(전북)/글·사진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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